728x90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를 걷다. 개요


근대이전에는 부산에서 한양으로 오르내리는 길이 세 갈래가 있었다. 이를 영남대로라 부르며 한양으로 오가는 가장 빠른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중 현재의 경부선 선로와 겹치며 서울까지 올라가는 길이 영남대로에서는 중도 길이다.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영남대로 길 중 삼랑진까지가 가장 험난한 구간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흔히 잔도로 불렀는데 이는 국어사전을 보면 “다니기 힘든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듯이 하여 만든 길”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다니는 입장에서는 어렵고 힘든 구간이다.


 



물금역

 

 

경부선 지하차도 오른쪽 인도교로 간다.

 

 

 

 

낙동강 자전거 길과 합류,

 

 

 

중도의 영남대로에서는 이런 구간이 세 군데 있는데 그 중 두 군데가 이곳 낙동강의 양산 밀양구간에 몰려 있다. 물금에서 원동에 이르는 구간을 낙동강의 옛 이름인 황산강에서 따와 황산잔도로 불렀고 원동에서 삼랑진에 이르는 구간을 작원관에서 따와 작원잔도라 부르고 있다. 작원의 ‘작’자도 까치작(鵲)으로 날짐승도 넘어 다니기 힘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하니 이곳을 다녔을 선비의 과거 길과 보부상의 잰 걸음도 더디게 만들었을 악명 높은 길임을 알 수 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 길을 너무 멀어 천리 길이라 하였다. 그 먼 길도 영남대로를 따라 14일이면 한양에 도착을 하였다하니 빠른 길은 빠른 길이다. 이곳을 가다보면 고을의 원님도 지나다가 빠져죽었다는 곳인 원추암도 보게 된다. 그만큼 길 가던 선비나 보부상들도 발을 헛디뎌 불귀의 객이 되었다.

 

 



 

 

용화사 갈림길

 

 

 

 

용화사 석불좌상

 

 

 

그 험한 길이 일제 강점기 때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영남대로는 거의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물금에서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황산잔도와 작원잔도는 실 핏 줄같이 이어진 오솔길을 철로에 내주고 사라져버려 많은 안타까움이 남았지만 영남대로 길의 재조명 작업을 하면서 옛 ‘작원잔도’에서 바위에 걸린 돌다리를 찾았다. 이구간이 살아남게 된 것은 작원터널이 뚫리게 되면서였다. 바위에 달아 낸 선반식으로 만든 영남대로 길은 4대강 사업의 하나인 낙동강 구간의 자전거 길에서 데크로교량을 만들어 옛 영남대로의 원형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번에 자전거 전용 길인 낙동강 자전거 길을 따라 영남대로의 일부분이었던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구간을 눈으로 확인하며 말없이 흐르는 민족의 대동맥 낙동강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현덕 공덕비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 경로.

 영남대로 길을 걷기위해서는 황산강 하류의 경남 양산시 물금역에서 시작한다. 경부선 물금역~ 물금취수장~용화사 입구~용화사~물문화관~동래부사 정현덕 공덕비~경파대~원동취수장~서룡문화생태공원~원동 갈림길~원동문화생태공원 자전거 쉼터~가야진사~작원잔도 유적~작원진 선착장~작원관(~다시 선착장)~처자교 안내판~삼랑진문화생태공원~삼랑진역. 영남대로의 황산잔도~작원잔도를 따라 물금에서 삼랑진역까지 GPS 전체 거리는 약 21㎞, 휴식을 포함하면 7시간 즘 걸린다. 순수 답사 시간만 5~6시간이며 평지를 걷는 길이라 누구나 답파할 수 있다.



경파대

 

 

 

 

 

 

 

 

 

황산잔도와 작원잔도를 걷기 위해서는 경부선 물금역에서 출발한다. 물금역을 빠져나오면 왼쪽으로 꺾어 2차선의 도로를 간다. 200m를 가면 서부아파트 앞 삼거리에 닿고 왼쪽 도로를 가면 경부선 선로 밑으로 지하차도가 연결된다. 인도길 입구에 자전거길 이정표가 붙어있다. 지하인도를 따라 올라가면 낙동강 둑길 위로 난 도로다. 직진한다. 도로를 따라 200m 정도 가면 4대강사업으로 조성한 ‘낙동강 종주 자전거 길’과 만난다. 왼쪽 길은 낙동강 자전거 길의 종착점인 을숙도 방향이고 삼랑진역은 직진이다. 물금취수장 옆을 지나가면 용화사 갈림길이다. 가야할 길은 '베랑길'의 직진길이지만 왼쪽으로 내려가 용화사를 잠시 둘러보고 나온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바로 용화사다.


 

 

 

 

 

 

 

양산화제석교비

 

 

요산 김정한의 중편소설인 ‘수라도’의 무대로 소설 속에는 용화사가 미륵당으로 나온다. 가야부인이 황산장에 시아버지 제사상을 보고 오다가 우연히 지금의 용화사가 있는 곳에서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하게 된다. 가야부인은 이곳에 암자를 세우려고 하지만 그 당시 사대부 집안에는 유교 문화가 뿌리 깊어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그의 사위가 암자를 짓게 된다. 그곳에서 발견된 미륵불이 현재 보물 제491호 석조여래좌상이다. 용화사 마당에는 '수라도' 기념비가 서 있어 소설속의 무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대웅전 옆에는 여러 기의 비석이 있다. 그 중 한기는 1694년(강희33년) 황산잔도를 정비하며 세운 비석인 ‘황산잔로비’다. “갑술년(1694년)에 군수 권성구가 탄해 스님과 별장 김효의를 시켜 깊은 곳은 메우고 험한 곳은 깎아 평탄한 도로를 만든 공을 기려 세운것이다”며 양산읍지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나와 자전거 길로 올라가면 바로 물문화관을 지나간다. 경상도 사투리로 ‘베랑’은 ‘벼랑’이란 뜻이며 지금은 낙동강에 교량을 세워 자전거길을 만들어 놓았다. 옛 영남대로의 황산잔도는 형체도 알 수 없지만 길을 따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험로에다 경부선 선로로 교량을 만든 이유를 알 수 있다. 가야할 길은 아득하지만 정면에 바위가 슝슝 박혀있는 부산 근교의 3대 악산인 토곡산과 그 끝에 용굴산이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곧 교량 옆으로 동래부사 정현덕 공덕비가 물가에 서 있고 잡목과 잡풀에 파 묻혀 있지만 주변으로 옛길의 흔적이 조금은 보인다. 정현덕 공덕비는 조선말기 문신으로 동래부사, 형조참판등을 지낸 인물이며 흥선대원군의 심복이었다. 1871년(고종8년) 그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낙동강 물 위로 난 교량을 따라 걷는다. 다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앉아 시를 읊던 바위 경파대다. 용의 발톱마냥 툭 튀어나온 바위로 조선시대 선비 정임교는 직접 ‘경파대기’를 지어“만년의 낙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며 이곳에서 선비들과 시를 읊고 즐겨 찾았다. 중국 당나라 시인이 쓴 ‘채련곡’에 “거울 같은 물, 바람 없어도 절로 물결인다”의 구절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곳의 운치는 뛰어나다. 경파대를 지나면 콘크리트로 포장된 강변길이다. 자전거 종주 인증센터를 지나고 나면 원동취수장이다. 물금에서 원동구간은 많은 자전거 동호인들이 다녀 항상 도보 꾼은 주의를 기우리며 걸어야 한다.

 



 

 

 

 

 

 

 

취수장를 지나면 삼거리와 만난다. 오른쪽은 ‘수라도’의 무대가 된 화제마을 방향이며 답사 길은 가야진사 방향 직진 길이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길옆에 ‘양산화제석교비’가 있다. 영조15년(1739년)에 세웠던 비로 화제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토교(나무로 지주를 세우고 다리를 만들어 솔가지를 꺾어 다리 위에 차곡차곡 놓고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었다하여 토교로 불림)가 잦은 수해로 떠내려가자 돌을 쌓아 무지개다리를 완공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현재 이곳의 지명이 아직도 토교로 불린다. 넓은 낙동강 둔치 가운데로 자전거 길이 이어진다.



원동역 원리마을 갈림길

 

 

 

 

 

 

 

 

왼쪽으로 낙동강이 흘러가고 강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친다. 토곡산이 더욱 가깝게 보일 때 쯤 쉼터가 있는 서룡문화생태공원이 있다. 낙동강 건너에는 김해 무척산에서 석룡산으로 능선이 흘러 다시 금동산을 솟구치고 그 가느다란 능선이 매리에서 사그라진다. 아직도 4대강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자전거 길 아래로 강둑을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기존의 풀과 나무들이 드리워진 강변을 포크레인으로 싹 밀어버리고 호안공사를 왜 일률적으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부지런히 60분을 걸으면 원동역 인근을 지나고 원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랑진역은 직진이다. 낙동강과 원동천이 만나는 강가엔 갈대가 바람 부는데로 흔들리며 하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가야진사.

 

 


다리를 건너 가야진사가 있는 모래톱을 20여분 가면 원동문화생태공원과 자전거길 삼거리다. 가야진사를 가기위해서는 왼쪽 '원동지구' 방향으로 간다. 바람이 쌩쌩 불 어 추운날씨에도 모 교회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와 있다. 팔각정자가 있는 주차장 끝에서 왼쪽에 보이는 가야진사로 간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원동과 용당마을을 오가는 나룻배가 있던 자리로 이곳에 가야진사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삼한시대부터 국왕의 이름으로 정례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이곳으로 왕래를 하였다하며 매년 봄, 가을에 향촉과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올려 장병의 무운장구를 빌었던 곳이다. 또한 낙동강의 범람을 막고 안전한 뱃길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현재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 가야진사와 작원잔도 유적지를 만나다.


가야진사는 4대강 사업 조성으로 발굴을 거치고 현재는 둔치일대를 깨끗하게 정리를 한 상태다. 용신제 전수관 앞을 지나 둔치 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경부선 철길 밑으로 자전거길이 지나가지만 20분 정도 둔치를 직진해서 가면 다시 자전거 길과 연결된다. 이정표에는 '삼랑진 4.2㎞'로를 알리고 있다. 삼랑진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S"자로 이어져 모래톱이 많이 발달해 있다. 20분 뒤 '밀양 1㎞' 안내판을 지나 곧 작은 다리를 건넌다. 오른쪽으로 툭 볼가진 시루봉 암봉이 눈길을 끈다. 다시 낙동강 위로 놓인 교량를 따라 간다. 양산과 밀양의 경계를 지나면 작원잔도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 영남대로의 옛길인 작원잔도의 모습을 조금은 볼 수 있다. 흘러내린 바위에 사다리꼴로 돌이 걸쳐진 작원잔도의 모습이 신기하다. 현재의 작원잔도 원형이 보존된 것은 경부선 작원관 터널이 뚫여 그래도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시루봉

 

 

 

 

작원잔도 유적지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 작원관의 역사를 배우다.


교량 길을 1㎞ 이상 가면 콘크리트 길과 만나고 곧 작원진 선착장이다. 이곳에서 작원관지를 잠시 둘렀다 오자. 이정표가 없어 유의를 해야한다. 오른쪽 굴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현재 작원관과 위령탑이 복원되어 있다. 영남대로에서는 두 개의 관문이 있다. 작원관과 주흘관으로 관원의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다. 작원관은 임진왜란때 밀양부사 박진장군이 왜적을 맞아 군관민 300명이 결사항전 하였지만 패한 곳으로 1995년 작원관의 성문을 복원하고 위령탑을 세워 기리고 있다.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 처자교의 전설을 만나다.


삼랑진역으로 가기위해서는 선착장까지 되돌아간다. 20분가량 가면 처자와 스님의 이야기가 전하는 처자교 안내판이 있다. 밀양지명고에보면 "작원관 인근의 작은 암자에 스님이 살았는데 인근의 마을에 사는 미모의 처자를 연모하였다. 어느 해 두 남녀는 사랑을 걸고 다리 놓기 시합을 벌렸다. 스님은 행곡천의 다리를 맡고 처자는 우곡천의 다리를 각각 맡아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스님은 여자라고 처자를 앝잡아 보지만 처자는 열심히 다리 공사를 하고 스님보다 먼저 다리를 완공한다. 스님은 자신의 교만함이 일을 그르친 것을 깨닫고 낙동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에 처자도 따라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후 스님이 만든 다리는 승교, 처자가 만든 다리는 처자교로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작원관 유적지

 

 

 

 

 

 

 

 

처자교 발굴사진

 

 

 

마을주민들 사이로 전해오던 처자교 이야기를 4대강 공사때 민원을 제기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처자교 유적 발굴이 사실로 들어났다. 그리고 복원을 하지 않고 확인만 한뒤 보존을 위해 다시 모래로 덮어 둔 상태라 현재 위치를 찾기도 힘들게 잡풀이 웃자라 있다. 10분가량 더 가면 작은 목재 데크 다리 직전에 있는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하여 다리를 건너가면 안동댐으로 이어지고 삼랑진역은 오른쪽으로 자전거 길을 벗어난다. 원형의 쉼터에서 오른쪽 철로가 놓인 둑길로 간다. 삼랑진역 인근으로 철둑 옆 도로를 따라 50m가량 가면 지하통로가 있다. 지하통로로 해서 삼랑진역으로 갈 수도 있지만  삼랑진역의 취수탑을 보며  둑길의 도로를 따라 가도 삼랑진역으로 연결 된다.

 

 

 

 

 

 

 

 

 

삼랑진역 취수탑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 교통편.


이번 물금과 삼랑진코스는 경부선이 지나감으로 기차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출발지인 물금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오전 6시35분(첫차), 7시50분, 8시42분, 9시25분, 10시27분 등이고 부전역에서 물금으로 가는 열차는 오전 6시25분, 8시25분, 10시40분 등 하루 다섯 차례 있다. 삼랑진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는 오후 5시55분, 6시22분, 7시4분, 7시48분 등에 있다. 부전역으로 가는 열차는 오후 3시38분, 8시12분, 9시4분 등에 있다.

 












728x90

728x90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용신설화가 전해오는 가야진사.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1300리를 달려와 부산 을숙도에서 남해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낙동강은 황산강의 옛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아마 그 연유는 윗 지방에 홍수가 나면 이곳 하류에는 항상 누런 황톳물이 흘러내려 황산강으로 불린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낙동강의 하류에는 황산이란 이름이 구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물금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길을 황산잔도라 불려지며 물금장을 황산장으로 불렸던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낙동강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 지역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겼고 황산강의 상류인 원동과 김해시 상동을 잇는 용당에는 용당나루터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때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왕래하던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일명 옥지주로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이어오기까지 낙동강을 건너는 뱃길의 안전과 강물의 범랑을 막기위해 제사를 지내왔던 곳으로 가야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원동의 당곡마을 건너편 모래톱에는 1406년(태종6)에 지어진 가야진사의 사당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한강, 금강, 포항의 곡천강등과 함께 국가의 주요 4대강에 제사를 지냈덩 ‘사독’의 하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합니다. 나라에서는 매년 이곳에 향축과 칙사를 보내어 국가의식으로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합니다. 세월이 흘러 현재에도 그 전통은 이어져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홍수로부터 마을을 지켜줄 것을 기원하며 가뭄이 들 때에는 이곳에서 용신에게 비를 내려줄 것을 염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사당을 보면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입니다. 사당 안에는 제상과 함께 머리 셋 달린 용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용은 상상속의 동물로 물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을 잇는 지점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가야진사가 있다 합니다.

 

 

 

 

 

현재 가야진사가 있는 이곳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를 거쳤습니다. 주위를 모두 정비되고 발굴작업도 거쳐 현재는 공원화되어 자전거 길의 쉼터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조강지처를 버린 용의 전설이 궁금해요.

 

가야진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옵니다.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양주도독부의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이곳 원동의 주막에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꿈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자신은 요 앞 용소에 살고 있는 용이라 이야기하며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 하고 자신은 멀리하니 그 첩용을 죽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꼭 그 은혜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전령은 용소로 달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용 두 마리가 밀월을 즐기는 것을 보고 첩용과 남편용임을 직감하고 전령은 단숨에 용을 한 마리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령은 실수로 그만 첩룡이 아닌 남편용을 죽이게 된 것을 안 본처용은 죽은 남편용 앞에서 슬피울다가 전령에게 보답을 한다며 그를 태우고 강 속 용궁으로 사라졌다는 용신설화입니다.

 

 

 

 

 

그 이후 주변 마을에는 가뭄과 기근등 재앙이 끊이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짓고 용세마리와 전령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 가을에 돼지를 잡아 통째 용소에 던지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진사에는 그 용신제의 전수를 위한 전수관도 함께 지어져 있습니다.

 

 

 

 

가야 진사 맞은편에 낮이 막한 둥근 산이 용산입니다. 보기에도 용이 강물 안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으로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이곳 용산 목을 가로지르며 부산대구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목이 끊어져 용의 기운이 다 빠졌다하여 마을에서 진정을 하여 끊어진 고속도로 위를 연결하는 공사를 실시하여 겨우 숨만 이어지도록 해놓았습니다. 용산 앞에는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깊이를 모르는 웅덩이가 전설 속에 첩과 함께 밀월을 즐긴 용소입니다.

 

 

 

 

 

 

 

 

 

 

 

 

 

 

가야진사

 

 

사진상의 강이 낙동강입니다. 강건너편에 흰 건물이 있는 앞이 용소이며 오른쪽 작은 산이 용산입니다. 그 뒤로 현재 신대구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굴당시 유적지와 현장


 

 

 





728x90

728x90

 

 

☞(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수라도 무대였던 소설속의 미륵당이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보다.

 

양산시 물금읍의 물금역을 나오면 물금취수장을 따라가는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올라가는 3곳의 영남대로 중 한곳으로 부산을 거쳐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는 중도의 영남대로입니다. 이 초입에 용화사의 작은 절집이 있습니다. 또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에는 위험한 길로 알려진 곳이 세 곳입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그리고 토끼벼루로 세 곳 중 두 곳이 이곳 물금과 원동 그리고 삼랑진을 잇는 낙동강 길에 있습니다.

 


 

 

 

낙동강을 예전에는 황산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따온 황산잔도는 험하기로 익히 알려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황산잔도의 초입에 있는 용화사는 절의 사세에 비해 보물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보면 부산의 문인이었던 요한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라도의 배경은 이곳 화제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수라도의 내용 속에는 미륵당이 등장합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가야부인이 창건한 미륵당이 용화사, 수라도 무대였던  미륵당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합니다. 가야 부인은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교 관습에 의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가야부인의 뜻을 알고 절을 짓는데 그곳이 지금의 용화사로 소설속의 미륵당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 미륵당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감로사지에 있던 불상이라 합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옮겨 오다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낙동강변에 버렸다는 전설입니다. 소설속에는 가야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어 미륵당을 짓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용왕대재의 행사를 봄이면 한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하여 용왕대재를 지낸고 있습니다.

 


 


 

 

 

용화사는 사실 미륵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너무 초라한 절집입니다. 그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문화재 안내문을 보면 보물 제491호이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입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양산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광배는 파손된 상태였고 불상은 낙동강의 뻘밭에서 건져 올렸는지 백색의 호분이 범벅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용화사의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완벽한 모습으로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이는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완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좌도 대좌지만 대좌 뒤의 광배가 화려하며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하다합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상과 구름을 세겨 본존상이 구름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도 나타난다합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공양천인상이 세겨진 것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뿐이라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뚝뚝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용화사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 옆이면서도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가보면 용화사 앞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 선로가 놓여져 있어 항상 덜커덕 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낙동강을 볼 수 있는 굴다리가 뚫여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수탈의 목적으로 놓여진 경부선은 처음에는 단선으로 놓였습니다. 단선일때 붉은 벽돌을 돌려 놓은 동굴의 내부에 사각의 돌을 깍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굴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선이 되어 확장을 했던 굴다리의 모습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어 시원하게 황산잔도를 볼 수 있어 여행삼아 가면 너무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