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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는 천년고찰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어떤 곳이냐?.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현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내려와 도반10여명의 도움을 받아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7년 동안 오작갑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오작갑사인 운문사는 대작갑사(현운문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현 대비사.대비갑사라고도 함),  소보갑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현 대작갑사인 운문사를 중앙에 두고 동서 남북으로 사갑사를 배치하였다 한다. 600년인 신라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주지로 와 중창을 하게 된다. 원광국사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서 주석을 하며 가슬갑사에서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전해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큰 역활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증강을 위하여 불교와 손을 잡고 운문사 일원에 화랑도의 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 운문사는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화랑도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였으며 운문면 일대에는 선사시대때 부터 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 되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이 모두 화랑도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운문사의2차 중창은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후 왕건을 도와 이 일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양국사에게 운문선사란 사액을 내리고 전지500결을 하사하였다. 그후 1105년에 원응국사 학일스님이 왕사로 책봉되고 운문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1277년 고려 충렬왕때 일연선사가 주지가 되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운문사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대 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운문사를 자세히 보면 여타 사찰과 다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운문사는  대웅전 비로전 금당등 모든 건물들이 운문산와 마주보고 있다. 즉 남쪽의 산을 향해 건립되었는데 풍수학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와는 정 반대이고 왼쪽은 복호산, 우측은 장군봉인 호거대로 운문사의 가람배치가 배산임수를 그대로 따라 운문산을 등지고  건물이 서 있었다면 현재의 운문사는 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한다. 그 이유는 운문사 옆으로 흐르는 약야계가 절 앞으로 곧장 빠져나가 재산을 모을 수 없고 운문산의 화기가 절을 덮쳐 비보 차원에서 다른 절과 반대방향인 가람배치를 하였다 한다. 

사실 운문사 경내를 들어설때 보통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운문사는 일주문 대신 2층의 법종루 밑으로 통하면 된다.

영남알프스에 걸 터 앉은 절집 현판에는 모두 그 뒤 모산의 산명을 따라 이름을 붙인다. 가지산 아래 가지산석남사가 그러하고 통도사는 영축산통도사, 재약산표충사등 모든 사찰들이 그러하다. 영남알프스 운문사만은 유독 ‘운문산운문사’가 아닌 ‘호거산운문사’로 현판에 적혀 있어 어... 호구산이 어디지, 왜 운문산이 아니고 호거산으로 하였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호거산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어느곳도 정답이 없으며 단지 현재의 우리도 옛 자료를 보며 추측을 할뿐이다. 먼저 운문사는 사찰이름에 나왔듯이 운문사란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운문산이 먼저인지 의문이 간다. 운문사란 937년인 태조20년에 후삼국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왕건이 보답으로 '운문선사'란 사액과 전지500결을 내렸다한다. 그러면 운문산 보다 대작갑사로 불리던 운문사가 먼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전부터 운문산으로 불리었을까하는 의구심도 해 본다..

호거산은 과연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운문사로 들어서는 왼쪽으로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세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통점과 염창등 신원마을에서는 복호산으로 부른다. 그리고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창건 할때에도 신승이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도를 깨닫고 운문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곳을 호거대, 호거산으로 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다른부류는 운문산 일대로 범봉과 억산을 포함한 이곳을 호거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운문사 입구 우측의 툭 튀어오른 암봉이 호거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원리에서는 등선바위, 등심바위, 등신바위등으로 불리는 바위로 운문사에서 이 암봉을 장군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도 향토사학회장 경북향토 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운문사 옆 호거대와 그 인근을 호거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호거산을 ‘호랑이고 걸터 앉아 있는 산’이 아닌 다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소주에도 똑 같은 이름의 호거산이 있는데 원광법사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원광법사는 운문사에 거주를 하면서 바위가 있는 호거대 일원을 호거산으로 지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계곡인 운문사를 가로자르는 큰골도 약야계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호거산은 원광법사가 중국의 소주 호거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어며 위치는 호거대와 부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군평 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인 호산으로 부르고 있다.




운문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처음 반기는 것이 500년 된 반송이다. 가지를 밑으로 축처저 일명 처진소나무로 불린다. 봄에 25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나무로 유명하며 안내판에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하며 높이는 6m,둘레는 3.5m로 나와 있다. 천연기념물제180호.




처진 소나무 옆으로는 만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약150평의 크기이며 목조건물이다. 넓은 우물마루에 천장은 천장은 산자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으로 기와명문에는 강희17년, 상량문에는 순치12년이라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용도는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어 법회나 설법을 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의 내부 모습








대웅보전으로 조선 숙종 44년에 중건되었다.정면3칸 측면3칸으로 다포계 양식이며 마륵전이라고도 부른다. 운문사의 대웅보전 터는 행주행으로 전복되는 배모양이다.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대웅보전 앞에 쌍탑인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보물제835호




삼층석탑 보물제678호



오백전안의 모습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제318호





원응국사비 보물제316호.



이목소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귀국을 할때 서해 용왕의 초청을 받고  용왕을 만나 설법등 해박한 지식으로 용왕을 감동시키니 용왕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인 이목(離目)을 같이 데리고 가 스님을 도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보양국사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귀국울 한다. 이 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운문사 옆 깊은 소에서 지내며 보양국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의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스님이 이목을 찾아와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천제는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양국사에게 보내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고 나서 이목을 내어 달라고 하는 사자에게 법당앞의 배나무를 가르키며 '이목 여기 있소' 하니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두고 이무기 또는 꽝철이라 하는데 이무기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다. 운문사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이목소는 잦은 사태로 인해 메워지고 사찰의 중창으로 메워져 볼품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보양국사가 부임하던 때에는 아마 둘레가 100여m나 되는 깊은 연못이었는 것 같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사 매표소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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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서낭당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삼계리에 가면은 2007년 4월6일 마을 공동으로 세운 서낭당이 있다.

한때 이곳은 오지중의 오지로 주위에 영남알프스 연봉들이 마을을 감싸 않아 천재로 인한 피해와 맹수들의 피해로 부터 마을의 안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서낭당이 세워 져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와 관리를 하지 않아 황폐화 되었다 한다.

 


 

 1970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홍영기씨가 주축이 되어 다시 이곳에 서낭당을 건립하였는데 4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흉물로 되어 버린 것을 마을 주민들이 서낭당 재건위원회를 꾸려 2007년 4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서낭당을 건립하였다 한다. 이곳의 삼계리는 지리적으로 보면 언양에서 청도 땅을 넘어 오는 길중 가장 빠른길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어사 박문수도 언양의 관현에서 청도땅을 밟기 위해 이 운문령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여 있지만 언양 방향에서는 도로가 지그제그로 나 있어 힘들게 오르며 청도땅의 생금비리 계곡은 구절양장의 긴 계곡을 드리워 한낮에도 컴컴하다. 지금도 이러한데 예전에는 맹수와 도적으로 인해 넘어 다니기 힘든 고개 였을 것이다. 또 다른 고개인 배너미재는 어떠한가. 밀양 산내에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아랫재를 넘는 것이다.  심심이골을 내려와 배너미고개를 올라서면 삼계리가 지척이다. 이곳을 지나 수리덤계곡을 걸어 경주 산내면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삼계리재를 넘어야 한다. 심원사 옆 구름재를 다시 올라 건너편 숲고개로 넘어야만 산내면 소재지로 민가다운 곳을 만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만큼 삼계리는 오지중의 오지로 마을의 평안과 맹수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민간신앙이 그만큼 절실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역사적으로는 어떠한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훈련을 한 장소로 영남알프스와 그 인근을 택했다. 지리적으로 경주와 가깝고 전술적으로도 험준한 산세 때문에 고구려, 백제에 전력이 노출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계리는 오작갑사의 하나인 가슬갑사가 있었다 한다. 가슬갑사는 원광국사가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의 기본이념인 세속오계를  전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할때 이곳 지룡산과 복호산 일원에 산성을 쌓아 신라를 멸망케 하였는데 현재도 지룡산성,호거산성 또는 견훤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서로  이념이 다른 무리들의 피난처로 이 깊은 골짜기를 택하여 숨어 들었다. 속칭 '뺄갱이"라 어릴적 부터 들어 왔는 소리로 군경의 소탕작전과  좌익들의 양민 학살로 인해 삼계리와 영남알프스는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생금비리골, 배넘이골, 계살피골이 만나는 삼계리 서낭당은 이러한 앙금을 다 씻어 내며 오늘도 이자리에 서서 마을의 안녕과 지나는 길손의 무사기원을 빌어 주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령 너머 삼계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가지산 온천방향인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운문산 자연 휴양림을 지나면 삼계리가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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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태극종주(4) 문복산-고헌산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치닫다 영남지역에서 치켜세운 1천고지의 9개 봉우리가 있다. 산무리들은 아래서 바라보니 세가 웅장하더니 위에서 내려보니 탁트인 풍광이 천하 일품이다. 언제부터 이곳이 ‘영남알프스’라 불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영남알프스 9개 준봉을 잇는 태극종주 마지막 구간이다.
 영축산에서 시작했던 종주는 이제 단 두개의 고봉만 남겨놓았다. 이번 구간에서는 영남알프스의 최북단, 문복산~고헌산 코스로 간다.
 문복산은 신라의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했던 가슬갑사를 품었던 명산이다. 이 산은 육산의 모습을 보이지만 하산길에는 곳곳에 자리한 멋진 바위봉이 산꾼의 눈을 사로잡는다.
 고헌산은 언양의 진산이다. 언양고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산정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고헌산은 두리뭉실한 산세를 가지면서도 산자락에는 깊은 골을 껴안고 있다.
 

 


 


 이번 산행코스는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 칠성슈퍼~811곒봉~하늘문~너럭바위~문복산(1014곒)~ 바위전망대~894곒봉~산내 불고기단지~외항재~1020곒봉~고헌산(1033곒)~구암사~울산시 상북면 신기마을’로 이어진다. 산행시간은 7~8시간.
 동곡에서 언양행 버스를 타고 가다 삼계리에서 내린다. 이곳은 태극종주 3차구간의 종착지로 4차구간에서는 기점이다. 칠성슈퍼 앞에서 하차한 뒤 삼계2교를 건넌다. 삼계2교와 민가 사이, 오른쪽으로 골목길이 있다. 담벼락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간다. 두번의 삼거리에서 모두 왼쪽으로 틀면 나대지를 건너 ‘문복산 등산로 안내도’가 서있다. 이곳이 들머리다.
 산길은 솔숲 사이로 고즈넉이 열린다. 깨끗한 흙길을 따라 5분쯤 오르면 왼쪽으로 오르막길이 보인다. 너른 길을 따라 직진하면 가슬갑사지를 거쳐 문복산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은 등산객이 많은데다 밋밋한 맛이 든다.
 왼쪽 비탈로 올라서면 등줄기에 땀이 촉촉이 맺힐 만큼의 경사가 기다리고 있다. 40분 가량 꾸준히 올라야 산등성이에 닿는다. 능선길은 진달래가 폭죽을 터트리는 멋진 산길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헬기장을 지나면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잡풀이 나있는 두번째 헬기장을 지나 25분쯤 가면 기묘한 바위를 만난다. 이 바위 밑으로 한사람이 기어 지나갈 수 있을 듯한 터널이 있다. 터널의 끝은 낭떠러지여서 반대쪽 입구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강렬하다. 이곳을 지난다면 선계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취재팀은 이 바위를 ‘하늘문’이라 부르기로 했다.
 하늘문을 지나면 울창한 산림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삼림욕장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 끝머리에 반석이 자리하고 있다. 300여명은 족히 머무를 수 있을 듯한 너른 바위의 정면에 1천고지의 웅자를 드러낸 문복산이 우뚝 솟아 있다.
 

 다시 오르막이다. 산길이 점차 흐려지면서 옛사람들이 다녔음직한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진달래 산수유 군락을 넘어 완경사 구간을 지나간다. 산정까지는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기에 취재팀은 촘촘히 리본을 묶어놓았다. 능선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잡목이 우거지며 시야를 가린다. 개척산행 구간이다. 메마른 가지를 헤치고 20여분이 지나서야 깨끗한 산길을 만난다. 이 길은 삼계리에서 가슬갑사지를 거쳐 올라오는 길이다. 정상까지 10분이면 충분하다.
 문복산 정수리는 시원한 조망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가지산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의 준봉들이 첩첩이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마지막 목적지, 고헌산이 아담하게 자리해 있다.
 정상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남동쪽이 고헌산으로 이어가는 능선길이다. 북동쪽은 살미등으로 내려선다. 헬기장을 지나면 돌무덤이 있는 삼거리다. 이곳에서는 고헌산을 보며 왼쪽으로 꺾어 내려선다. 50여곒 직진하면 멋들어진 바위 전망대와 만날 수 있다.
 하산 능선길에서는 왼쪽에 우뚝 선 하얀 바위봉우리가 단연 시야를 사로잡는다. ‘드린바위’다. 이 바위는 높이 130곒, 너비가 100곒에 이르러 영남지역에서는 수직벽을 가진 최대 암봉으로 손꼽힌다.
 오르내림이 있는 능선마루를 타고 철쭉밭을 지나간다. 정상에서 20여분 더 걸으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에서는 오른쪽으로 튼다. 왼쪽으로 떨어지는 하산길을 무시하고 20분 가량 걸으면 문복산, 고헌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태극종주 4구간을 천천히 음미하기에 좋은 자리다.
 전망대에서 세갈래로 찢어진다. 중요구간이다. 반드시 왼쪽 하산길로 내려서야 한다. 10분 뒤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른다. 울창한 송림 속으로 들어가다 40분뒤 895곒 삼각점이 있는 낙동정맥 봉우리에 올라선다. 세갈래 길인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하산길을 밟는다. 오른쪽으로 가면 운문령으로 빠져나간다.
 너른 능선길이 철쭉과 진달래를 헤치며 뻗어있다. 30여분 뒤 축사가 있는 산내면 불고기단지로 떨어진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도로에 이르면 많은 상점과 식당을 만날 수 있다. 오른쪽 정상휴게소를 지나면 ‘간산사’ ‘속불암’ 표지석 사이로 좁은 도로가 열린다. ‘산내숲속숯불 생고기’ 간판이 서 있는 이 길을 따라 고갯마루까지 이어간다.
 15분 뒤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외항재다. 도로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열린다. ‘고헌산 정상 3㎞’라는 표지판도 눈에 띈다.
 고헌산 정상길은 잘 가꾸어진 숲속 산책로를 연상케 한다. 이 일대는 천연림 육성지역이다. 정상까지 경사가 완만한 너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주작대로’ 같은 길을 따라 30여분 더 오르면 멧부리다. 돌무덤이 살짝 솟아있는 이곳은 고헌산의 제2봉인 1020곒봉이다. 왼쪽 너머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고헌산 주봉이다. 제2봉과 주봉 사이의 간격은 약 100곒. 억새가 간헐적으로 손을 흔드는 1천곒능선을 따라 주봉으로 향한다.
 마침내 태극종주 마지막 목적지인 고헌산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8개 준봉들이 한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해질녘에 산정에 오르면 상운산으로 떨어지는 저녁노을을 만날 수 있다. 영남알프스 일대를 붉게 물들이는 고헌산의 낙조는 사람의 넋을 놓게할 정도로 황홀하다. 멧부리의 삼거리에서 남쪽 고헌사 방면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샘터를 지나 1시간 가량 떨어질 듯 내려닿는 곳이 신기마을이다.
<교통편>
 이번 산행은 가는 차편은 까다로운 대신, 돌아오는 차편은 넉넉하다.
 부산역에서 오전 6시15분 기차를 타고 청도로 간다. 평일 4천7백원. 청도역에서 200곒 떨어진 곳에 공용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동곡행 버스를 탄다. 오전 7시35분, 7시45분, 9시10분, 10시20분 등에 출발한다. 버스요금은 2천1백원.
 동곡에서는 삼계리·언양행 버스를 탄다. 오전 8시40분, 11시 등에 있다. 요금은 1천7백원.
 산을 내려오면 울산시 신기마을이다. 마을입구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317번 515번 370번 등 언양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즐비하다. 언양에서 부산직행은 오후 8시30분이 막차. 완행은 밤10시까지 있다. 직행 2천6백원, 완행 1천원.
/ 글·사진= 박병률기자
 / 산행정보 문의= 다시찾는 근교산취재팀(051- 500- 5150)
이창우 산행대장(011- 563- 0254·www.yahoe.co.kr)

brpark@kookje.co.kr  입력: 2001.04.1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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