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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석불좌상. 부여 정림사지에서 거대한 석불좌상을 만나다


여러 곳의 석불을 둘러보면서 이번에는 부여여행에서 규모 면에서 압도하는 석불좌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부여의 정리사지에 있는 정림사지석불좌상이며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정림사지석불좌상은 서로 마주 보게 일직선 상에 배치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58

부여 정림사지 전화:041-832-2721




2017/10/22 - (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는 평제탑 정림사지5층석탑

2017/10/11 - (부여여행)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두 눈으로 확인했던 부여 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2015/08/17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부소산성 여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를 만나다. 사비성

2015/08/07 - (충남여행/부여여행)낙화암과 고란사. 마지막 백제의 흔적 부소산성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를 여행하다. 낙화암과 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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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 (부여맛집/부소산낙화암맛집)굿뜨래음식특화거리 구드래돌쌈밥. 부여 구드래돌쌈밥




정림사지의 창건연대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며 그 후 백제가 멸망하고 고려 시대까지도 정림사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림사지석불좌상이 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웅장한 석불좌상을 보면서 당시 정림사의 사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정림사지석불좌상은 현재 강단지었던 곳에 보호용 전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따로 모셔져 있습니다. 강당은 석탑에서 대략 57m 떨어졌으며 보호각은 앞면 39.1m에 옆면 16.3m인 새장형으로 고려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는 기존 강당지의 초석에서 확인된 앞면 31.8m. 옆면 17.9m의 규모보다 더 크게 지었으며 기단은 기와를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쌓아 만들었습니다.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가 5.62m이며 재질은 화강석입니다. 부처 머리는 후대에 다시 만들어져 올려졌으며 현재 불신은 처참할 정도로 깨어졌는데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마멸되어 그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석불좌상의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 등을 가늠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이곳 정림사지 강당지에서 발굴된 기와의 명문을 통해서 고려시대 때 절을 고치면서 석불좌상이 함께 만들어졌고 이 정도의 규모를 보면 정림사의 본존불이 아니었겠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1942년 강당지를 조사하던 중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명문으로 정림사의 존재와 1028년 헌종 19년에 중건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을 보면 불두에 비해서 몸집이 왜소하며 좁은 어깨는 밋밋하게 내려오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라가면서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 쥔 '지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정림사지석불좌상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보여주며 지권인은 "불법으로 모든 것을 감싼다"는 뜻입니다.





기단인 연꽃 대좌도 깨어지고 했지만, 석불좌상보다는 조금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하대석은 연꽃이 뒤집어져 핀 모습인 복련(覆蓮)에다 팔각형의 간석을 올렸고 각 면마다 안상을 새겼습니다. 또한, 상대석은 연꽃이 하늘을 보고 활짝 핀 모습을 한 앙련(仰蓮)을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많은 연꽃 대좌를 만났지만 거대한 석불좌상을 받치는 좌대답게 엄청나게 큰 규모였습니다. 정림사지석불좌상을 정면으로 만나보면 거대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작아진 나를 압도하였고 자연적으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그 어떤 힘이 느껴졌습니다.





이래서 그저 인간은 하나의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저 우러러만 봐도 마음 한구석에 울림이 날 정도로 대단했던 정림사지석불좌상을 정리사지오층석탑과 함께 만나보세요.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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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는 평제탑 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초창기 석탑의 전형은 목탑이었습니다. 목탑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나무다 보니 화재와 눈·비 등에 노출되어 내구성이 약하며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 이를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돌로 석탑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목탑이 석탑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탑이 미륵사지 석탑(국보제11호)과 정림사지5층석탑(국보제9호)입니다.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5층석탑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2015/07/26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서동 연꽃축제 궁남지. 백제의 도읍지 부여의 많은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축하. 부여 서동 연꽃축제가 궁남지에서 열렸습니다.

2015/07/31 - (충남맛집/부여맛집)부소산성맛집, 낙화암맛집,고란사맛집 부소산 칼국수. 구수한 콩국수로 여름도 이기고 백제의 사직과 함께한 삼천궁녀 낙화암도 구경하는 부소산 칼국수.

2015/08/05 - (충남여행/부여여행)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시대 문화재를 만나다.

2015/08/07 - (충남여행/부여여행)낙화암과 고란사. 마지막 백제의 흔적 부소산성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를 여행하다. 낙화암과 고란사

2015/08/17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부소산성 여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를 만나다. 사비성



이 두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오는 초창기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합니다. 그중에서도 목탑의 전형이 가장 많이 남은 석탑이 미륵사지석탑입니다. 미륵사지석탑은 목재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여러 가지 면에서 정형화되지 못했다면 정림사지5층석탑은 그에 반해 외형상 현재 석탑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붙어 있지 않은 깔끔하고 세련된 양식의 석탑입니다.


 


그럼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에서 목탑의 형식을 보여주는 게 여러 부분 남아 있습니다. 먼저 기단석 부분입니다. 일반 석탑의 기단과는 다르게 좁고 단층이 낮은 기단입니다.



기단 각 면의 모서리에 새긴 기둥을 우주라 하는데 이는 민흘림 기법이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끝은 살짝 들렸고 낙수면의 내림마루를 보면 목탑에 사용된 기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을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 부릅니다.

 



사용된 기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을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 부릅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석탑인데도 목재의 형식을 많이 따랐으나 정림사지5층석탑은 목탑의 모방에서 벗어나 석탑만의 온전한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첫 작품이라 보고 있습니다..그만큼 의의가 있는 석탑이라 국보 제9호로 지정하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의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높이가 8.33m인 거대한 석탑입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도 지대석과 기단부 탑신부와 상륜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단부는 단면이 방형인 다듬은 긴 돌기둥 8개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다 기단은 단층이며 여러 개의 돌로 낮게 만들어졌습니다.






중석의 각 면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이를 우주라 하고 가운데 지탱하는 돌을 하나씩 끼웠는데 이것을 탱주라합니다....그 위에다 갑석을 올려 기단을 마무리했습니다. 갑석 위에는 1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네 귀퉁이에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기둥(우주)을 만들었고 우주 사이에 각각 두 장의 판석을 끼웠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져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몸돌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을 올렸습니다. 지붕돌 아래에는 2단의 지붕 받침인 옥개받침이 있으며 몸돌과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갈수록 옥개받침의 석재 수가 줄어듭니다.






옥개석은 얇고 넓은데 반해 전각에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며 또한, 옥개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가 목탑의 공포 형태를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지붕돌 위에는 몸돌을 받치는 1단의 탑신받침이 각층의 지붕돌 위에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을 두었습니다.


 










현재 정림사지5층석탑은 몸돌보다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성한 게 목탑과 유사한 모습이라 합니다. 그러나 정리사지오층석탑을 보면 우선 안정감 있는 비율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한 마리의 학처럼 우아하고 격조 높은 모습에 백제 장인의 혼이 담긴 매우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정리사지오층석탑에는 특별한 이력의 글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나당 연합국으로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의 1층 탑신 4면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을 기념하는 치적인 “백제를 징벌한 기념탑”을 석탑에 새겼으며 이 때문에 정림사오층석탑을 ‘평제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정림사지5층석탑 탑재의 원재료인 석재는 강경읍에 있는 옥녀봉 일대에서 채취했다고합니다. 이는 이찬희 공주대 문화재과학과 교수의 ‘웅진문화21’에 수록한 논문에서 이곳의 돌이 정림사지5층석탑과 같은 석질로 밝혀졌다 합니다. 아마 다음에 정림사지오층석탑 복원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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