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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안국사)
안국사 하면 대학시절 산악부 산행 때가 생각난다. 약25년전쯤 일이지 쉽다. 지금은 안국사가 적상호의 수몰 때문에 현 위치로 올라와 새로 복원을 하였지만 그때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안국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무주 지방에 많은 눈으로 적설량이 엄청나다. 그러니까 적상산 산행을 겨울방학때 올랐는데 지금이야 적상호로 오르는 드라이브 코스를 많이 이용하지만 그때 한겨울에는 신도는 물론 절에 거주하는 스님도 보기 힘든 오지중에 오지의 사찰이였다. 그 추운겨울날에 장도바위를 통해 올랐는데 엄청난 적설량으로 텐트 칠 분위기도 아니고 안국사로 찾아 들어 갔다. 안국사에 들어가니 동자승과 스님한분만 기거를 하고 있었다. 산행을 와서 하루 자고 가서면 하고 자초지종 설명을 하니 허락을 해 주었다. 그때는 극락전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묵을 방이 있었는데 아무도 기거하는 분이 없어 냉골이라 동자승이 장작을 가지고 와 군불을 때 주며 나가기에 그때까지도 방이 안 뜨겁고 냉방이라 장작을 가지고 와 더 넣고 뜨끈뜨끈하게 하고 잠을 청했다. 아뿔사, 동자승이 넣어주고 간게 시간이 흘러야 구들장이 달아올라 뜨거운데 그 기에다 장작을 더 넣었서니, 밤에 뜨겁다 못해 살이 탈 지경이였다. 아랫목은 비워두고 모두 사각지대인 구들장이 없는 곳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랫목을 보고 놀래 기절초퐁 할 뻔 하였다. 장판이 타가지고 새까만게 아닌가.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양식과 부식(그때까지만해는 안국사에는 도로가 없어 몇시간을 걸어 다녔고 길이 험해 스님들도 오길 꺼리는 사찰이라 하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야 밑의 마을에서도 사람이 올라 온다하니... 그래서 쌀, 부식도 귀한 시절이었다) 을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미안한 마음에 뒤도 안돌아 보고 하산을 했는데...

 


하산하는 오솔길이 지금은 도로로 변해 그때의 운치는 사라지고 북적이는 관광객으로 그때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적상산성내의 유일한 고찰인 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月印)대화상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 조선초기에 와서 무학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중수를 하였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적상산 사고에 봉안되었다. 적상산 사고를 방비하기 위해 호국사를 짓고 전부터 있던 안국사와 함께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하여 안국사로 불리워 졌다. 현재의 안국사는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적상호로 인해 수몰이 되어 옛 호국사지 자리로 옮겨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안국사란 절이름도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현재 안국사에는 보물제1267호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과 유형문화재 42호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적상산성(사적제146호)과 적상산사고(기념물제88호)가 있다

안국사 극락전

안국사 극락전(유형문화재 제42호):안국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정토와 아미타여래와 관세움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 하였어며 무량수전이라고도 하였다. 다포계의 건물로 맞배지붕으로 조성한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앞면과 옆면에 각 3칸씩으로 구성되었다. 학이 단청을 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보물제1267호):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에 따라 맞는 것을 봉안한다. 이 그림은 영조4년 안국사에서 기우재를 지낼때 조성되었다. 조선영조4년(1728)에 천진스님과 의견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 가로 7.5m 세로10.75m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제보살과 다보여래, 아미타여래등 여섯분을 협시보살로 모신 석가 칠존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보살의 둥그런 얼굴과 밝은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며, 석가모니뒤에 광채를 금색으로 채색하고 여백에 구름무늬를 넣은 점이 이채롭다.

안국사에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여러나라에서 수집한 불상이 전시 되어 있어 들러 볼 것을 권한다.

안국사 063-322-6162







극락전 내부의 모습이 화려하다. 학이 단청을 칠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있다.





지장전의 모습입니다.

항상 안국사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안국사 천불전 내부입니다.

승보 박물관안의 불상입니다.

승보 박물관 내부입니다.


범종의 문양


안국사의 일주문으로 많은 차량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입니다.

안국사 부도탑:안국사 역대 스님들의 사리을 봉안한 부도탑으로 적상산 사고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청운당 사리탑과 봉골탑은 숙종43년(1717), 월인대사 영골탑은 영조 26년(1750) 보운당 사정탑은 영조 29년(1753)에 각각 세워진 것이며 석종형으로 조선후기의 부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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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최영장군이 제주도에서 발발한 민란을 평정하고 무주현을 거쳐 서울로 가던중 붉은 단풍이 온산을 뒤 덮고 바위가 병풍를 친 이곳의 산세에 이끌여 적상산을 오르게 되었다.
급한 산세를 올라 보니 7부능선에 큰 암벽이 앞을 막으니 대장부가 정상을 목전에 두고 내려 갈 수가 없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칼을 가지고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쪼개져 길을 내 주어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한다.
그 바위가 장도 바위이며 폭은 사람 한사람이 겨우 다닐정도의 길이 나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적상산성으로 서문이 위치하고 있다.
최영장군이 산 정상에 올라보니 산세가 험하고 하여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보고 산성을 축조할 것을 건의 하였다 한다. 




총길이는 8km가 넘는 산성으로 적상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그리고 서창으로 오르면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일명 용담문이라 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문루가 있었다는데 2층이며 3칸이었다고 “적상산성조진성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산성의 흔적만이 남아 여기가 문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돌을 쌓아 올려 서문 터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성문 밖에는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하며 서창은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다한다.
험한 산세로 인해 성안까지 운반이 힘들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하며 등산로 입구마을이 아직도 서창으로 불려지고 있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를 때 암벽이 앞을 막아 장도를 쳐 산길을 만들었다는 장도 바위로 사람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폭이다.


장도바위와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도 바위를 지나면 만나는 적상산성의 서문으로 일명 용담문이라 불린다.
누각은 사라지고 없지만 산성이라도 제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

사적제146호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에 위치하며 서창마을에서 오르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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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 5대 사고지는 오대산 마니산 적상산 태백산 묘향산이다,
그러나 묘향산에 있던 사고지가 적상산으로 옮겨와 보관을 하였다. 잦은 전란으로 조선왕실실록 사고지는 더욱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 선다.
그리고 관군을 배치하였어며 주변의 수호사찰에서 관리를 하였다.
태백산사고지는 각화사에서, 오대산은 월정사, 적상산은 안국사로 안국사의 사찰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조선실록 4대 보관지가 모두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아마 북방에 있는 오랑케인 후금이 세력이 커짐으로 인해 사고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마니산 사고지에서 보관하였던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 태백산 사고지는 부산의 국가기록원, 오대산사고지의 실록은 일본에 반출되어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 되었고 일부 일본 동경대에 있던것을 소진본 47책을 환수하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을 하고 있으며 적상산사고지에서 보관을 하였던 실록은 6.25전쟁때 사라졌는데 현재 김일성대학에 보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된 적상산 사고지 모습입니다. 아래에는 적상댐 양수 발전소의 상부댐으로 인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와 1997년 부터 복원을 하였다 합니다.

적상산 사고지 우측 건물에  정면에 붙어 있는 사각 현판



적상산 사고지에 대해 살펴보면
전라북도 기념물제88호
위치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로 현재 적상댐 위에 안국사 올라가는 도로 옆에 복원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선왕조 실록과 족보를 보관하던 사고였다. 천혜의 절벽으로 둘러쳐진  적상산성내에 실록을 보관하기위해 광해군6년(1614) 실록각을 짓고 4년 뒤 1618년 선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적상산에 사고가 설치되면서 무주현에서 무주도호부로 승격을 하였어며 무주도호부사는 수성장과 토포사를 겸하였다 한다.
인조 12년(1634)년 평안도 묘양산에 보관하고 있던  있던  조선왕조 실록을 일부 옮겨왔다. 인조19년(1641)에 선원각을 건립하고 선원록을 봉안하였다.
사고내에는 승장청,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등이 있었서며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의궤등을 보관하였다.
1910년 일제에  병탄된후 조선왕조실록등이 서울규장각으로 옮겨지면서 사고는 황폐화 되었다.
1992년 양수발전소 상부댐에 의해 사고지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유구가 옮겨져 1997년 선원각, 1998년 실록각이 복원되었다. 


두동의 건물로 선원각과 실록각을 1997년 98년에 각각 복원을 하였다.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자료들>




4대 실록지의 현재 보관 상황과 사고 변천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산산성과 사고의 위치 안국사등 그때 당시의 모습을 지형물로 복원을 하여 알기 쉽게 해 놓았다.

 사고 건물 밑으로 들어서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내부를 관람하도록 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조선왕조실록등을 보고 있다.


 
무주군청 문화관광 사이트에 더욱 자세하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http://www.mujutour.com/tourplace/index.jsp?page_gubun=page7_view&no=121&page=1&resource_gubun=CP&resource_gubun2=CP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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