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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최부자 최진립 충의당. 정무공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 찾아가기


경주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입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곳 경주, 남산과 경주를 아우르는 문화재를 모두 만나기 위해서는 몇 달을 둘러보아도 부족합니다. 그 만큼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곳이 천년 고도 경주입니다.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분황사등 경주의 유명관광지라 모두다 한번 씩은 찾아 가본 곳입니다.  또한 초중고 수학여행 단골 코스 이기도합니다.

 

 

. 이외 관광지를 빼면 별로 보고 온 기억이 없습니다. 필자의 고향은 이곳 경주 외곽 남산 밑입니다. 저 또한 너무 알려진 곳만 찾아다녀 경주를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친지방문이나 고향을 찾아갈 때 짬을 내어 잘 찾지 않는 경주의 문화재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구 영남대학교를 설립한 경주최부자의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을 찾았습니다. 경주 근동에서 경주 최부자 하면 모르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충의당을 찾아가면 너무 단촐한 풍경이라 처음에는 고택을 찾지 못하고 차로 이리저리 돌았을 정도입니다. 여느 알려진 고택을 생각하며 눈에 확 들어 날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세도가의 양반가옥 처럼 축대를 높혀 건물의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고 또한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며 반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저 평범한 가옥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수수한 모습으로 과연 이곳이 경주최부자 집으로 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문 앞에는 최진립 장군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곁이 사랑채의 앞 마당이며 차를 마시는 공간인 경모각을 지나면 단아한 모습의 충의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의당으로 들어서는 대문입니다. 기와는 새로 올렸는지 개끗하며 고풍스러움과 옛 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입니다. 


 

충의당을 보면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타인능해로 유명한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곳이 경주 최부자이며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정신이 깃들은 이곳 충의당이 그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 봅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 건물로 충열사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는 정무공 최진립장군에서 시작 됩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주읍성 전투에 참가를 하였고 1597년 다시 왜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권율도원수와 함께 서생포 전투와 도산 전투에 참가하여 선봉에서며  전공을 세워 1600년에 여도만호로 임명되면서 무관의 길로 들어 섭니다.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오르고 경원도호부사, 공조참판을 지내다 청나라의 공격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몸을 피해 있던 인조를 구하기 위해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용인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그를 따르던 두 노비 옥동 기별과 함께 전사합니다. 사후에 인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정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청백리에 올렸습니다.


 

두 건물인 경묘각과 충의당. 


 먼저 경묘각으로 차를 마시는 곳 입니다. 안쪽에서는 유리를 넣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충의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이며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최진립장군이 생활한 곳으로 전해지는 충의당은 흠흠당으로 불렸습니다. 1760년 건물을 중수하면서 후손에 의해 충의당으로 바뀌었고 집의 구조를 보면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집 형태인 ‘ㅁ'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앞쪽 취의당을 중심으로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로 안채가 있으며 충의당은 앞면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돌과 마루를 각각 2칸씩 넣었고 흠흠당인 충의당은 사랑채로 사용하였습니다.


 

 

최진립장군의 모습인가요. 큰 칼을 앞에 세우고 두손을 모은 무인상이 사랑채 앞에 떡 버티고 있습니다.


 

 

 충의당 뒤로 돌아가면 만나는 안채의 모습입니다. 주인이 생활을 하고 있어 들어가기에 조심스러운 공간입니다. 

 방을 2칸 넣은 충의당 모습입니다. 앞쪽으로 툇마루가 달려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충의당과 마주보고 최진립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 최예의 사당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마당에 잔디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아녀자들이 출입하였을 것 같은 쪽문입니다. 이곳으로 나가면 밭뙈기와  마을길로 나가게 됩니다.  


 

 

 최진립장군 유물관입니다. 필자가 방문하였을때는 이곳에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전체적인 충의당의 모습입니다. 일반 살림집 같은 아늑함이 느껴지는 최진립 장군 고택 충의당.  

 

 

 흠흠당은 염근서흠 경절예흠에서 나왔습니다. "청렴하여 삼감을 흠모하고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흠모하다"는 뜻으로 인조임금이 진필를 하사하였는데 충의당을 들어가는 입구에 바위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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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과 함께 전각인 충노각이 있습니다. 충노 옥동과 기별의 불망비로 이는 최진립장군의 후손인 가암 최채량 선생이 비문을 짓고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일화가 전래져 오는데 장군은 두 노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두 종은 돌아갈 것을 마다하고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끝까지 남아 최진립과 함께 죽었다합니다. 이 후 경주최씨 종가에서는 이들의 갸륵한 마음을 기려 장군의 제사를 받들고 난 뒤 두 충노의 제사를 지금까지 올리고 있다합니다. 


 보호수인 회화나무입니다.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 장군 고택과 함께 너무 잘  어울리는 고목입니다.  

 

 


 

잠와 고택은 안채를 말합니다.  일(一)자형 건물로 왼쪽에는 부엌을 넣고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대청을 넣었습니다. 

 

 

 

월래는 초가 지붕이었는데 기와 지붕으로 바뀐 '우산초려'입니다. 안채에서 보면 오른쪽에 위치를 하며 충의당에 비해 소박하며 단독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욕실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안마당에서 바라본 충의당 모습입니다. 사랑채인 충의당은 조선시대 남여의 생활 공간을 완전히 구별하여 충의당에 앉아서는 안채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잠와고택과 현재의 흠흠당

 

 현재의 충의당은 한국관광공사 인증 한옥민박 체험 할 수 있습니다. 400여년 전 경주 고택에서 별헤는 밤을 즐겨보세요. 또한 500m 거리에 최진립장군을 배향하는 용산서원과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2014/09/0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택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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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가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가면 용산 서원이 있습니다. 조선의 무신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을 제향하며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입니다. 경주최씨 최진립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그의 고택은 인근에 경주 최부자 집으로 유명한 충의당입니다. 처음 흡흡당으로 부르던 건물은 1760년경에 와 건물을 수리하면서 충의당으로 현판을 바꾸었습니다.

 

 

경주 최부자하면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으로 유명합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용산서원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이 이어진 경주최부자 이야기는 근대에 와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해주는 대목입니다.

 

 

벼슬은 진사이상을 금하며 재산 또한 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 사는 것을 금하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입니다. 이외에도 경주최부자의 쌀뒤주는 지금도 우리에게 회자하는 바가 큽니다.


 

경주 최부자의 유래는 최진립 장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육의당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갔습니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때도 서생포에서 왜군과 싸워 이겼고 권율장군과 합세하여 도산에서 승전을 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오르며 훈련원정을 제수 받습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조정은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하지만 반대하여 유배길에도 오릅니다.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어 첨절제사에 복지하고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 전라좌수사에 올랐고 경기수사에 제수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합니다.

 

 

1634년에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으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합니다. 적에 의해 남한 산성은 포위되고 최진립은 인조를 구하고자 출전하여 용인 험천 전투에서 전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청군에게 패해 전사를 합니다.




 

 

1937년 병조참판에 추서와 함께 청백리에 이름이 오르며 시호 정무를 하사 받습니다. 한국관광공사 용산서원을 참고하면 용산서원은 1699년(숙종25) 경주부윤 이형상이 최진립 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지역 유림과 함께 건립 하였고 1701년 강당과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 양 협실을 흥인재, 명의재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 북재를 유여재 문을 식강문이라 하였습니다. 1711년에는 '숭령사우'의 묘액이 내려졌고 원호도 용산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숭열사우’의 글씨는 이익의 형 이서의 글씨라 합니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24년 에 다시 세웠습니다.


 

용산서원은 전면에 교육시설인 민고당을 배치하고 그 뒤쪽에 단을 올려 숭렬사를 둔 전학후묘의 구조도 되어 있습니다. 숭렬사는 정면3칸 측면 1칸이며 민고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편에 흥인재와 명인재의 1칸 방을 넣었습니다. 또한 전사창은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로 향사나 제사등 행사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며 고사와 유사실도 두었습니다. 용산 서원입구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1993년 2월에 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로로 지정되었습니다.


◆용산서원 사진으로 둘러보기

 

 

 

 

 

 

 

 

 

 

 

 

 

 

 

 

 

 현재 용산서원 부속건물인 한옥고택에는 민박을 할 수 있습니다. 2인실부터 대형 10~15인실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옥고택 민박체험은 2인 기준 5만원이며 예약 및 문의는 054-748-2507


 

◆용산서원 한옥 고택에서 숙박도 가능합니다. 사진으로 둘러보기


 

 

 

 

 

 

 

 

 

 

 

 

 

 

 

 

 

 

 

 

 

 ◆정무공 최진립 장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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