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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냉산(태조산) 산행. 왕건의 전설이 서린 태조산 산행 개요. 구미냉산


구미의 냉산을 태조산으로 부른다. 도리사 일주문에는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로 되어 있다. 왜 태조산으로 부를까. 태조산의 배경은 후삼국의 대업을 이룩한 태조 왕건이 이산에 어가를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 많은 전투를 치르며 925년 후백제와의 팔공산 전투에서 오른팔인 신숭겸 장군과 일곱 장수를 잃고 후퇴하여 대구 팔공산의 유래가 되었다. 왕건은 냉산 아래에서 숭신 산성을 쌓고 절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가는데 929년과 930년의 잇따른 안동 전투에서 통쾌한 승리를 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냉산이 태조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태조산은 왕건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곳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왕위계승을 장자인 금강에게 물려 주려하지만 그의 둘째인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위폐를 시켜 죽게 하였다. 그 후 신검은 왕건과 이곳 선산과 고아읍 전투에서 왕건에게 체포되어 후삼국이 통일된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는 그만큼 고마운 산이 이곳 태조산이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냉산(태조산) 산행. 왕건의 전설이 서린 태조산 산행 경로. 구미냉산


구미시 해평면의 냉산 산행 경로를 보자. 도리사 제1주차장~도리사 제2 주차장 갈림길~도리사~도리사 뒤 능선 삼거리~주능선 삼거리~냉산(태조산) 정상~(주능선 삼거리)~산악레포츠 공원 갈림길(안부 삼거리)~625봉 삼거리~패러글라이딩 활공장~금수굴 사거리~금수굴~(금수굴 사거리)~임도 끝~태조산정~임도 갈림길~산악레포츠공원~구름다리~MTB 임도~도리사 제1주차장 순으로 GPS 산행거리는 약 11km의 원점회귀 산행이다. 산행시간은 3시간 30분이며 도리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그에 따른 시간을 감안한다면 휴식 및 산행시간은 5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냉산(태조산) 산행. 왕건의 전설이 서린 태조산 산행 도리사 원점 회귀 산행. 구미냉산


해평면을 가르는 국도 25호선에서 안내판을 보고 도리사 방향으로 내려 만나는 갈림길에서 좌회전 한 뒤 곧 우회전하면 도리사 가는 직선 도로다. 이곳에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 적힌 일주문 현판 밑을 지난다. 이곳에서 도리사까지는 4.5km를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산행 출발지인 도리사 제1주차장은 4㎞가량 거리에 있다. 도리사 밑에 있는 주차장으로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30분쯤 오르면 도리사 절집에 닿는다. 마을 지명이 송곡리(松谷里) 답게 도리사까지 초록빛을 띤 소나무가 울울창창하다.























냉산 산행의 실질적인 출발지인 도리사는 7부 능선의 높은 위치에 있어 아래로 내려보는 전망이 너무나 좋은 곳이다.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에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먼저 만나는 건물이 우측의 수선요, 그 뒤를 돌아가면 태조선원과 세존사리탑 그리고 내부에 목각아미타여래불상이 안치된 극락전을 만나게 된다. 극락전과 마주보고 보물 제470호인 도리사화엄석탑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 3.3m 규모의 이 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벽돌을 쌓아 올린 모전석탑에 가깝다.























또 석탑 옆문의 ‘아도화상 좌선대’ 방향 소나무 비탈을 내려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한 좌선대와 불망비가 있다. 도리사에는 그 외에도 세존사리탑에서 나온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의 금강계단. 특히 적멸보궁의 꽃문양 창살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도화상의 동상과 범종각등을 둘러본 뒤 도리사 주차장의 안내판을 보고 서대 전망대를 찾아간다. 멀리 금오산과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다. 이를 빼고 간다면 너무 섭섭하며 꼭 보고 산행을 하자. 돌아나와 주차장 뒤의 소나무 쉼터에서 갖는 휴식은 꿀맛 같은 생각이 들지만 산행을 위해 가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냉산 산행은 도리사 옆 주차장에서 콘크리트길을 올라가면 적멸보궁으로 가게 된다. 범종각 뒤를 지날 때 쯤 왼쪽으로 산길이 갈라진다. 소나무 숲 길을 5분쯤 오르면 도리사 뒷 능선 삼거리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능선을 올라간다. 된비알의 능선길을 오르다 산길은 왼쪽 산사면을 돌아간다. 15분이면 갈림길이 나온다 두 갈래길 모두 냉산 주능선에 올라선다. 필자는 오른쪽 산길를 따라 오른다. 5분 뒤에 주능선 삼거리에 오르고 여기서 냉산 정상은 오른쪽 방향이다. 산행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냉산 정상을 갔다가 이곳 삼거리 까지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10여분 평범한 능선을 따라가면 삼각점과 정상을 알리는 나무 푯말이 붙어있다. 정상에서 도리사 방향으로 보면 발아래 깎아지른 산사면이 급하게 쏟아진다. 그 아래 도리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도리사의 서대 전망대에서 본 모습을 이곳에서는 더 크게 볼수 있다. 멀리 유학산, 신숭겸과 왕건의 전설이 있는 대구 팔공산과 가산의 모습도 보게 된다.























하산은 다시 되돌아 삼거리 까지 돌아간다. 직진하여 내려가면 바위전망대와 만난다. 건너편의 청화산과 그 아래 돌을 깨는지 채석장의 모습이 보인다. 세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정상을 내려와 20여분이면 안부 삼거리에 닿는다. 산악레포츠 공원(1.1km) 갈림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도리사 1주차창은 왼쪽 산악레포츠 공원 방향으로 하산을 해도 되지만 금수굴 1.4㎞, 태조산정 1.5㎞의 직진 방향으로 능선을 올라간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조망이 열리며 편안한 능선길이 시작된다. 20여분이면 이정표가 있는 625m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왼쪽으로 태조산정 0.5km 방향으로 내려간다. 곧 하늘이 열리 듯 갑자기 전망이 뻥 뚫린다. 산악레포츠공원의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이번 냉산 산행 최고의 전망대다.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휘돌아 가는 모습이 그야 말로 장관을 연출한다. 왼쪽에서 부터 팔공산 가산 유학산 금오산 덕유산 황악산등 백두대간상의 산들이 모두 일별 된다.























최근에 조성한듯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금수굴과 태조산정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 태조산정 방향으로 간다. 다시 금수굴 사거리. 오른쪽으로 200m 내려가 금수굴을 보고 다시 올라온다. 금수굴은 아도화상이 입적한 바위굴로 매년 재일이 되면 이굴에서 환한 빛이 났다한다. 금수굴 갈림길에서 태조산정 방향으로 가면 임도로 내려서고 나무계단을 오르면 태조산정 정자가 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을 잃고 패한 뒤 이곳에서 승리하여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을 기념하여 2004년 세운 정자다.























태조산정에서 다시 계단을 내려와 임도를 따르면 20여분 후 사거리길과 만난다. 주능선 안부 삼거리에서 산악레포츠 공원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곳으로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산길을 내려간다. 계곡을 건너 낙엽 쌓인 오솔길을 5분 내려오면 교량이 있는 임도와 다시 만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곧 임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걸어 면 계곡에 구름다리가 걸려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 정자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흙길이 시작된다. 도리사 방향의 가파른 내리 막 임도 길을 따라가면 다시 도리사 이정표와 만나고 오른쪽으로 꺾어면 넓은 임도를 만난다. 정면에 인공암장이 보이고 왼쪽으로 꺾어 임도를 따라간다. 임도를 40분 걸어 면 냉산의 출발지인 도리사 제1주차장에 닿는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냉산(태조산) 산행. 왕건의 전설이 서린 태조산 산행 교통편. 구미냉산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네비게이션에 도리사를 검색하면 된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 금호JC에서 안동 방향 중앙고속도로를 탄다. 가산IC에서 내려 요금소를 통과하자마자 우회전, 선산 구미 방향 25번 국도를 이용한다. 23㎞가량 직진하다가 도리사 입구 교차로에서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한다. 1㎞ 후 송곡삼거리에서는 좌회전 하자 마자 도리사 방향으로 우회전해 4㎞쯤 가면 제1주차장에 닿는다. 

대중교통의 경우 사실상 불편하다. 그러나 부산동부터미널에서 오전 8시40분 출발하는 상주·충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에서 하차 후 도리사까지는 택시(요금 2만 원)를 이용해야 한다.


◆냉산고도표◆



◆냉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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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임실여행)성수산 상이암. 왕건과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왕의 산 성수산 전설.


임실의 성수산은 장수의 팔공산에서 흘러 내려온 능선으로 이전에는 성수산도 팔공산으로 불리었다한다. 지금의 성수산으로 바뀌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전설로 인해 성수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임실의 주산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성수산의 지세와 산세가 보통이 아니었는 것 같다.고려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을 한 두 스님이 일찍부터 이 산을 천자가 날 산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점 찍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신라말에 도선국사는 왕건에게 성수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 후 그는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를 굴복시켜 고려를 세워 왕이 되었다. 왕건은 관음보살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준 것을 크게 기뻐하며 그곳을 환희대라 명명 하였고 도선국사는 그 자리에 도선암의 암자를 지었다.









고려의 왕권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고 1380년 이성계는 아지발토와 운봉의 황산벌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려 승리하며 이를 황산대첩이라 부른다. 이성계는 전장에서 승리를 하고 부하장졸들은 다시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그의 장수 8명과 함께 남원을 거쳐 개경으로 가기위해 전주로 가던중 일전에 무학대사가 그의 야심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이곳으로 안내하여 백일기도를 드리게 한것이 생각나 이성계는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올 것인가 생각하여 성수산의 상이암으로 발길을 돌려 찾아간다. 그는 그곳에서 하늘의 신에게 마음을 다하여 기도를 올리게 된다.


 



마침내 하늘도 그 정성에 감복을 했는지 하늘의 문이 열리며 어디선가 “성수만세” “성수만세” “성수만세”하며 세 번의 외침으로 화답을 하는데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삼청동’이라하였다. 그때문인지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여 권좌에 오르고 도선암은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하여 상이암이라 고치게하였다. 이성계는 성수만세를 3번 들었다하여 친필로 삼청동을 직접 쓴 바위를 하사하여 어필각을 지어 보존하게 하였다. 지금도 전주이씨종친회에서는 이곳을 전주이씨의 발상지로 여기고 있을 정도라 한다.


 




지금 상이암의 자리는 구룡지지의 명당으로 상이암에 삼청동이 모셔진 어필각 뒤 암봉이 용의 여의주라 한다. 여의주에 올라 기도를 하면 하늘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요즘에도 찾는이가 많다는 이야기다.







성수산 상이암을 오르는 길은 아름다운 숲속길이다.  성수산자연휴양림의 울울창창한 숲이 하늘을 가리고 10월의 성수산은 피빛이 뚝뚝 계곡으로 떨어져 붉은 단풍을 물들게 한다. 이 가을에 이성계의 성수만세 소리야 우리 같은 소시민은 들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세의 기운은 폐부의 찌든 마음을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이암의 약수도 들이켜 보자. 하늘의 소리가 들리까 싶어 두귀도 쫑끗 열어두자. 그것이 아니라도 상이암 자체만으로도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하겠다.





☞(전북여행/임실여행)성수산의 상이암. 도선국사사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 현재는 선운사 말사.  


상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로 선운사의 말사다. 875년인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1394년 인 태조 3년에 각여가 중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타 1909년 대원에 의해 중건되었다. 한일합방으로 이절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이 일어났는데 왜인들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 되었다 1950년 한국동란때 다시 불타는 아픔을 겪는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 상이암재건위원들이 세웠다한다. 경내에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된 부도가 3기 남아 있다.







































이성계의 친필로 쓴 삼청동 각자.










중앙에 삼청동 바위가 보관되어 있는 어필각이며 그 뒤 암봉이 용의 여의주라한다.




도선암이었던 암자를 이성계는 상이암으로 고쳤다.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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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560년경 신라 진흥왕21년에 북대암 금수동에서 수도를 하던 신승에 의해 창건 되었다. 그 후 608년 원광법사가 이절에 머물며 신라가 불교로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 뒤 후삼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작갑사인 운문사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며 보양국사가 중국에서 유학한 후 돌아오는 길에 서해용왕의 부탁으로 설법을 전하니 금색비단으로 된 가사 한 벌과 그의 아들인 이목을 딸려 보내 보양을 보필하게 하였다.

용왕이 이르길 ‘지금 삼국이 어지러워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어니 그대가 작갑에 절을 중창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와 삼국을 통일하게 될것이다“하니 운문사를 중창하게 대는데 보양이 운문사 북쪽 능선마루에 올라가 절터를 찾았는데 광체를 발하는 5층의 누런 전탑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와 찾아 보니 그 전탑을 찾을 길이 없어 다시 북대암에 올라가 보니 까치가 그 자리에서 쪼고 있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 보니 벽돌이 나왔다 한다. 벽돌을 쌓아 올리니 5층의 전탑이 되었는데 보양국사가 능선마루에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을 때 본 그 누런 황탑이었다. 보양국사는까치들의 도움으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았다하여 중창한 사찰을 작갑사라하였다. 그 후 까치들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기리고자 작압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작압사로 불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보양국사가 운문사 인근의 왕건을 반대하는 잔당들을 소탕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전지500필과 운문선사란 사액을 하사한 후로 운문사로 바뀌었다한다. 현재의 작압은 1941년에 일제때 종무소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겨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41년 이전 모습의 작압전은 전탑 형태를 유지하는 1층의 모습이었다 한다. 운문사 개보수를 할 때 나왔던 63cm 크기의 석불좌상과 전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만 할뿐 사용 용도가 불분명한 사천왕상 4기가 작압전에 함께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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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는 천년고찰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어떤 곳이냐?.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현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내려와 도반10여명의 도움을 받아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7년 동안 오작갑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오작갑사인 운문사는 대작갑사(현운문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현 대비사.대비갑사라고도 함),  소보갑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현 대작갑사인 운문사를 중앙에 두고 동서 남북으로 사갑사를 배치하였다 한다. 600년인 신라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주지로 와 중창을 하게 된다. 원광국사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서 주석을 하며 가슬갑사에서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전해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큰 역활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증강을 위하여 불교와 손을 잡고 운문사 일원에 화랑도의 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 운문사는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화랑도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였으며 운문면 일대에는 선사시대때 부터 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 되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이 모두 화랑도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운문사의2차 중창은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후 왕건을 도와 이 일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양국사에게 운문선사란 사액을 내리고 전지500결을 하사하였다. 그후 1105년에 원응국사 학일스님이 왕사로 책봉되고 운문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1277년 고려 충렬왕때 일연선사가 주지가 되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운문사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대 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운문사를 자세히 보면 여타 사찰과 다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운문사는  대웅전 비로전 금당등 모든 건물들이 운문산와 마주보고 있다. 즉 남쪽의 산을 향해 건립되었는데 풍수학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와는 정 반대이고 왼쪽은 복호산, 우측은 장군봉인 호거대로 운문사의 가람배치가 배산임수를 그대로 따라 운문산을 등지고  건물이 서 있었다면 현재의 운문사는 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한다. 그 이유는 운문사 옆으로 흐르는 약야계가 절 앞으로 곧장 빠져나가 재산을 모을 수 없고 운문산의 화기가 절을 덮쳐 비보 차원에서 다른 절과 반대방향인 가람배치를 하였다 한다. 

사실 운문사 경내를 들어설때 보통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운문사는 일주문 대신 2층의 법종루 밑으로 통하면 된다.

영남알프스에 걸 터 앉은 절집 현판에는 모두 그 뒤 모산의 산명을 따라 이름을 붙인다. 가지산 아래 가지산석남사가 그러하고 통도사는 영축산통도사, 재약산표충사등 모든 사찰들이 그러하다. 영남알프스 운문사만은 유독 ‘운문산운문사’가 아닌 ‘호거산운문사’로 현판에 적혀 있어 어... 호구산이 어디지, 왜 운문산이 아니고 호거산으로 하였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호거산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어느곳도 정답이 없으며 단지 현재의 우리도 옛 자료를 보며 추측을 할뿐이다. 먼저 운문사는 사찰이름에 나왔듯이 운문사란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운문산이 먼저인지 의문이 간다. 운문사란 937년인 태조20년에 후삼국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왕건이 보답으로 '운문선사'란 사액과 전지500결을 내렸다한다. 그러면 운문산 보다 대작갑사로 불리던 운문사가 먼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전부터 운문산으로 불리었을까하는 의구심도 해 본다..

호거산은 과연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운문사로 들어서는 왼쪽으로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세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통점과 염창등 신원마을에서는 복호산으로 부른다. 그리고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창건 할때에도 신승이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도를 깨닫고 운문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곳을 호거대, 호거산으로 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다른부류는 운문산 일대로 범봉과 억산을 포함한 이곳을 호거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운문사 입구 우측의 툭 튀어오른 암봉이 호거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원리에서는 등선바위, 등심바위, 등신바위등으로 불리는 바위로 운문사에서 이 암봉을 장군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도 향토사학회장 경북향토 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운문사 옆 호거대와 그 인근을 호거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호거산을 ‘호랑이고 걸터 앉아 있는 산’이 아닌 다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소주에도 똑 같은 이름의 호거산이 있는데 원광법사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원광법사는 운문사에 거주를 하면서 바위가 있는 호거대 일원을 호거산으로 지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계곡인 운문사를 가로자르는 큰골도 약야계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호거산은 원광법사가 중국의 소주 호거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어며 위치는 호거대와 부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군평 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인 호산으로 부르고 있다.




운문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처음 반기는 것이 500년 된 반송이다. 가지를 밑으로 축처저 일명 처진소나무로 불린다. 봄에 25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나무로 유명하며 안내판에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하며 높이는 6m,둘레는 3.5m로 나와 있다. 천연기념물제180호.




처진 소나무 옆으로는 만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약150평의 크기이며 목조건물이다. 넓은 우물마루에 천장은 천장은 산자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으로 기와명문에는 강희17년, 상량문에는 순치12년이라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용도는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어 법회나 설법을 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의 내부 모습








대웅보전으로 조선 숙종 44년에 중건되었다.정면3칸 측면3칸으로 다포계 양식이며 마륵전이라고도 부른다. 운문사의 대웅보전 터는 행주행으로 전복되는 배모양이다.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대웅보전 앞에 쌍탑인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보물제835호




삼층석탑 보물제678호



오백전안의 모습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제318호





원응국사비 보물제316호.



이목소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귀국을 할때 서해 용왕의 초청을 받고  용왕을 만나 설법등 해박한 지식으로 용왕을 감동시키니 용왕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인 이목(離目)을 같이 데리고 가 스님을 도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보양국사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귀국울 한다. 이 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운문사 옆 깊은 소에서 지내며 보양국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의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스님이 이목을 찾아와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천제는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양국사에게 보내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고 나서 이목을 내어 달라고 하는 사자에게 법당앞의 배나무를 가르키며 '이목 여기 있소' 하니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두고 이무기 또는 꽝철이라 하는데 이무기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다. 운문사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이목소는 잦은 사태로 인해 메워지고 사찰의 중창으로 메워져 볼품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보양국사가 부임하던 때에는 아마 둘레가 100여m나 되는 깊은 연못이었는 것 같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사 매표소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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