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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포항여행)포항 기북면 덕동문화마을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여행.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포항시 북구 기북면 덕동문화마을에서 

가장 큰규모가 사우정고택입니다.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주소: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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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포 정문부의 아버지인 정언각(1498~1556)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마련한 집입니다.



덕동문화마을의 사우정 고택은 청송군과 인접해 있는데 

그의 청지기가 풍수지리에 밝아 그가 일러주는 길지에 마련한 집입니다.




‘ㅁ’자형 건물로 450년된 고택은 조선 중기 

상류층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채 앞으로 넓은 마당을 두었고 

1m 높이에 자연석의 축대를 쌓은 건물입니다.



정면 7칸에 옆면 1칸반의 긴 일자형 건물로 

간결한 수법의 3량가 납도리집입니다.

 


사랑채 왼쪽에 안채로 드나드는 대문를 두었습니다.

 


대문 오른쪽에 4개의 방을 넣었고 

맨 우측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

  


덕동문화마을은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이외에도 

포항 오덕리 애은당고택, 포항 여연당고택, 용계정 등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문부가 전주로 돌아가면서 이곳의 모든 재산을 

그의 손녀사위인 이강에게 물려 주며 여강이씨 집성촌이 되었습니다. 

이강은 대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 이언괄의 4대 손이며 

여강이씨 집성촌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져 있습니다. 




포항 오덕리 사우정 고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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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의 뜻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건물.

 

무첨당의 용도는 친구와 벗하며 손님접대와 독서등의 용도로 만들었다. 현재에도 무첨당에는 이언적의 장손인 여강이씨 이지락선생과 그의 아들이 지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동방5현의 여강이씨 이언적은...

 

이언적은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또는  자계옹이다. 아버지  찬성공 이번(1463~1500)은 여강이씨로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성균관 생원으로 손소의 8남매중 둘때달과 혼인을 하여 처가인 양동마을로 입향하였다, 그의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으로 동방5현의 한분이다. 중종9년인 151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되어 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중종32년인 1537년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복직하며 중종의 신임을 받지만 명종2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모함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고 만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그 구조는.

 

무첨당의 구조를 보면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앞면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3칸을 대청을 넣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르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뒷면은 벽채를 만들어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 자 형으로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구분하였다.(문화재청 참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의 편액 좌해금서는 대원군 필체.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  무첨당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30~35분이 소요된다.

그외 안강행 버스를 이용하면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양동마을까지 걸어가면 된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8분소요.


승용차는 네비에다 양동마을을 치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안채로 이언적의 후손 이지락 선생이 생활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필체 좌해금서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이 있는 양동마을 유래에 대해...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무첨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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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남아 있는 고가촌들은 여럿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 산청의 남사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등 이름만 들어도 아 그곳하며 맞장구를 칠 유명한 곳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는 이곳은 포항의 덕동문화마을로 포항시의 가장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중의 하나인 기북면 오덕리의 덕동문화마을이 있어 소개를 하고자한다. 규모면에서는 여타 민속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꼭 현재 우리들의 고향집인 큰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느 99칸의 고래등 같은 기왓집이 아닌 고향을 찾아가면 갈 수 있는 친척집 같은 그런 곳으로 주변의 산세와 가장 잘 어울리게 지어져 있다.

 






이곳은 여강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그 사연을 보니 충의공 정문부가 임진왜란을 맞아 그의 식솔들을 모두 이곳으로 이주를 시켜 살게 하였는데 전란도 끝나고 하여 정문부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집과 용계정등을 손녀사위인 이 강에게 물려 주었다 한다.
그후 이곳이 여강이씨의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다. 덕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이곳 덕동문화마을의 애은당(愛隱堂) 고택은 경상북도민속자료 제80호 지정되어 있다.



의병장이며 길주 목사를 역임한 농포 정문부(1556~1625)의 가족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처로 이용하였던 곳이다.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애은당은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ㅁ’자형의 건물로 안채 좌측에는 방앗간채와 우측으로 별당을 두어 아녀자들의 생활공간을 둔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애은당을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와 대문이 붙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5칸의 안채와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창고와 방이 같이 붙어 있는 고방채가 있으며 ‘ㅁ’자 형의 안마당을 두었다.




아녀자들이 거주하였던 안채는 정면 중앙에 대청을 두었고 좌측으로는 부엌과 안방,좌측으로는 한칸의 방이 붙어 있다. 우물마루와 그 앞으로 쪽마루를 붙였는데 막돌기단으로 된 맞배지붕으로 안채의 지붕이 높고 좌우로 연결되는 지붕이 낮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애은당의 모습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것 같다. 담장은 허물어 지고 입구 우측의 화장실등 모든 공간이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져가는 지경에 처해 있다.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이 애은당의 본 건물은 독구가 자기의 할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어서 명맥만을 유지하는 것 같다.
















애은당을 돌아가면 만나는 또 하나의 고택이 있다.
이건물은 기존의 건물보다도 위엄이 느껴지는 집이다. 이원돌 가옥으로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문을 했을때 마당 한켠에는 고추를 말리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였다.
이건물은 농포정문부가가 임진왜란 후 손녀사위인 이 강(1621~1688)에게 물려준 집으로 이집은 다시 이강의 차남 덕령에게 물려 주었다.



그 후에 현재에도 그의 후손들이 거주를 하는데 이강의 9대손인 이원돌의 이름을 따 이원돌가옥이라 부른다. 정면4칸 측면6칸의 목조기와 형태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가 ‘ㄷ’자 형태로 대문을 들어서면 부속채와 함께 ‘ㅁ’자의 안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자연석 기단위에 1칸 대청과 왼쪽으로 부엌과 안방, 오른쪽으로 건너방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된 납도리집이다.





이곳 또한 젊은이는 볼 수 없고 나이든 노모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구나. 야은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고의 구절이 덕동문화마을을 보니 내 가슴에 왜이리 와 닿는 것일까. 이곳을 방문할 시에는 모든 고택들이 주민들의 안식처입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 둘러보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찾아가기

부산 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포항행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새벽 5시30분부터 10~15분 간격, 1시간20분 소요. 7700원. 포항시외버스터미널 앞 도로 건너편 버스정류소에서 대각~포항역간 운행하는 녹색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육거리약국에서 내린다. 이곳에서 다시 성법행 녹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오전 6시30분부터 밤 10시30분까지 30분 간격 운행. 1시간20분 소요. 오덕리 덕동마을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경부고속도로 경주요금소를 통과한 후 직진, 오릉네거리에서 좌회전 한다. 강변도로를 따라 경주시외고속버스터미널과, 태종무열왕릉 입구 등을 지나 금장교 앞에서 좌회전 다리를 건너 현곡면 방향으로 간다. 이후 금장교차로에서 68번 지방도로를 타고 포항 안강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17㎞쯤 이동 후 안강IC에서 안강 기계 방면으로 우회전(68번 지방도), 곧이어 다시 교차로에서 기계 방면으로 우회전 한다. 7㎞쯤 가다가 달성네거리에서 청송 기계 방면으로 좌회전, 다시 9㎞쯤 가서 기계삼거리에서 기북방면으로 우회전(921번 지방도) 한다. 이후 10분 정도면 덕동마을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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