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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겨울에 찾아 떠나는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개요.


경주는 신라 천년의 살아 있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시내를 벗어나도 만나는 것이 문화재요 많은 문화재가 산을 이룬다. 부산에서 조금은 먼 것 같지만 그래도 부산과 이웃한 근교산으로 경주시를 많이 추천한다. 특히 경주 안강읍의 북쪽을 감싸는 도덕산~자옥산~봉좌산~어래산 코스는 도,좌,봉,어 4대 산을 많은 산꾼이 원점회귀 종주산행을 하는 곳이다. 옥산리를 한 바퀴 도는 산행코스로 보통의 걸음으로는 무리가 따른다. 그 중 짧은 코스를 선택하여 산행을 하였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옥산으로 내려와 은둔하며 살 요량으로 지은 집이 있다. 자개천 골짜기에 그림 같은 모습으로 자리한 계정과 또한 독락당이 그것으로 사랑채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며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은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독락당 또한 보기 드물게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독락당 뒤편에도 보기 드문 문화재가 있다. 도덕산 아래 정혜사지 터에 국보 40호인 정혜사지13층 석탑이 이곳 경주를 기단삼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다. 산행 후에는 회재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과 그가 마음을 닦았다는 세심정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오면 좋을 것 같다.



 















독락당의 계정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겨울에 찾아 떠나는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경로.


경주 안강읍 옥산리 도덕산~자옥산 산행경로는 옥산리 독락당 주차장~독락당~정혜사지 13층 석탑~도화동~장산서원~관음사 삼거리~도덕암 입구 안내판 갈림길(등산로 입구)~ 도덕암 갈림길 이정표~정혜사지 갈림길 이정표~밀양 박씨 묘~도덕암, 자옥산 갈림길 이정표~도덕암~정상 밑 삼거리~도덕산 정상~(정상 밑삼거리)~전망대~정혜사지 갈림길 삼거리~정혜사지 13층 석탑 이정표 안부 사거리~정혜사지 13층 석탑 갈림길~자옥산 정상~전망대~산장식당~옥산리 독락당 입구 도로~독락당으로 원점회귀 산행 코스다. GPS 산행 거리는 약 8.8㎞에 산행시간은 3시간~3시간30분 안팎이며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더 잡아야 한다.













정혜사지13층석탑.




장산서원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독락당과 옥산서원 정혜사지 13층 석탑 뮨화재 즐비,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산행 시작은 경주 터미널에서 타고 온 203번 버스 종점으로 독락당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왼쪽 편에 높게 펼쳐진 산이 오늘 산행 할 자옥산과 도덕산이다. 산행 전에 먼저 보물인 독락당을 둘러보자. 보물 제 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이 낙향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1516년 지은 사랑채다. 현재 복원 공사가 되어 건물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오른쪽 옥산천(자계천)에서 바라보는 ‘계정’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회재선생의 성품을 엿 볼 수 있다. 산행은 독락당 입구에서 왼쪽 장산서원 표지석 방향의 도로를 걸어간다.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5분쯤 가면 자옥산과 도덕산 사이의 정혜사 터에 1200여년 세월을 견뎌온 정혜사지 13층 석탑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석탑이 보이고 잠시 들렀다 오자.



 

관음사 갈림길




도덕암입구로 실질적인 도덕산 입구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신라시대에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 나와 진행방향의 콘크리트도로를 따른다. 도화동에 도덕암 가는 길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도 바로 도덕암 방향으로 오를 수 있다. 무시하고 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편 장산서원이 나오고 서원을 돌아 뒤편으로 올라서면 삼거리인 관음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관음사 방향이고 도덕산은 직진이다. 이곳을 지나면 포장길이 흙길로 바뀌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도덕암 안내판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석탑에서 15분 걸렸다. 이곳이 실질적인 도덕산 등산로 입구다.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가시 숲에 숨어 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도덕산 정상까지 2.44㎞ 남았다.


















 

로프가 쳐진 길에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산길을 부분부분 덮고있어 더욱 산행의 운치를 더한다. 키 큰 소나무의 기운을 받으며 솔 숲길을 따라 간다. 20분이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도덕암의 절 마당까지 올라가는 콘크리트 임도가 보인다. 직진 길도 임도를 따라 도덕암 으로 바로 가지만 포장길이고 하여 왼쪽으로 도덕산 2.03㎞' 안내판을 보고 꺾어 산길을 올라간다. 이곳부터 산길은 급해지며 길은 한층 더 가팔라진다. 10여분을 힘겹게 오르면 도화동의 안내판에서 본 ‘도덕암 가는길’에서 올라오는 길과 서로 만난다. 이곳의 이정표에 정혜사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정표를 지나면 밀양 박 씨 묘와 만나고 명당 터라 그런지 전망이 너무 좋다.



 







도덕암









 

밀양박씨 묘위에서 다시 갈림길과 만나다. 이정표를 보면 왼쪽 능선으로 향하는 산길도 도덕산 방향이나 도덕암을 거쳐 도덕산을 가기위해서는 직진하여 도덕암을 보고 내려간다. 정면에 도덕암의 암자가 새둥지처럼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콘크리트 임도와 만나고 곧 도덕암에 닿는다. 최근에 화장실을 완공하여 도덕암 암자보다 더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라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정면에 어래산 허리를 감아 올라가는 임도가 기계 방향으로 이어진다. 도덕산 정상을 가기위해서는 해우소 앞에서 시작한다. 산행은 우뚝 선 바위위에 오르면 작은 산령각이 나온다. 그 앞의 바위 전망대도 압권이다. 도덕암을 위에서 보면 산중에 이 정도의 넓은 터가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도덕암에서는 보이지 않던 봉좌산, 어래산 능선 뒤의 모습이 멀리까지 보이고 산행은 산령각 옆으로 난 덱 계단을 오른다. 암반에 만든 목재 덱 전망대가 나오고 이곳도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전망대다. 지금부터 정상 밑 삼거리까지 35분은 힘든 오르막길이다. 오르고 쉬기를 반복하면 급사면에 일자로 걸려 있는 덱 계단을 만나고 정상은 이제 지척이다. 곧 정상 밑 갈림길인 능선에 오르고 자옥산은 왼쪽 방향이지만 오른쪽 20m 지점이 도덕산 정상이다. 이곳에는 정상석이 3개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석 뒤로 능선을 따라가면 낙동정맥길과 만나고 능선 길은 운주산 방향 또는 봉좌산을 거쳐 어래산으로 돌아 내려오는 자.도.봉.어 종주 코스다. 그중 도덕산이 가장 높다.





















 

 

정상 우측 어래산 방향으로 나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도덕암 보다 경관이 더 크게 열린다. 이곳에서는 어래산 능선 뒤로 멀리 포항시와 동대봉산, 무장산, 토함산 그리고 동해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도덕산의 유래를 보면 신라 제37대 선덕여왕이 다녀갔다고 두득산이 되었는데 조선 중종 28년(1533년)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이 고향인 이곳에 낙향하여 옥산리 주변에 4산5대를 명명하면서 도덕산이 되었다.
















사거리 안부






 

자옥산은 정상 밑 갈림길 까지 왔던 길을 내려간다.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능선을 따라 간다. 짧은 로프가 걸린 곳을 내려서면 직진하여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고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정상에서 보지 못한 북쪽의 영남알프스와 서북쪽으로 팔공산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발아래는 영천시의 끝자락인 고경면 오룡리의 벽촌마을 풍경도 보게 된다. 건너편에 불룩 솟은 자옥산을 보고 내려선다. 편안한 능선을 10여분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정혜사지13층 석탑으로 하산하는 능선 길. 자옥산은 오른쪽으로 10분쯤 더 내려서면 안부 사거리에 도착한다. 오른쪽은 영천시 고경면의 오배마을 방향, 왼쪽은 정혜사지13층 석탑으로 하산하고 자옥산은 직진한다. 안부의 높이는 GPS에서 420m를 보여준다. 자옥산까지 150m를 다시 올라가야한다.















 

초반은 급한 경사면을 오르지만 무덤을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씩 완만해진다. 20여분이면 큰 돌탑이 있는 자옥산 정상에 닿는다. 신라시대 때 이곳에서 옥이 많이 생산되어 자옥산으로 불려졌다. 잡목 때문에 정상에서의 조망은 기대할 수 없어 바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석에올라온 방향에서 동쪽 길로 내려간다. 어지러운 갈림길을 지나면 갑자기 바위들이 널려 있고 자옥산 최대의 전망대가 나온다. 정상에서 보지 못한 전망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안강읍의 풍경이 시원하다. 이제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신나게 30분쯤 내려서면 산장식당에 내려서고 다시 독락당 입구 도로에서 독락당 주차장은 왼쪽으로 300m쯤 더 가야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교통편. 


부산 노포동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는 탄다. 약 10분 간격으로 운행.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50m쯤 가면 경주시내버스 종점이고 안강을 거쳐 옥산서원까지 가는 203번 버스를 이용하여 반드시 버스 종점에서 하차한다.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등에 있다. 1시간 안팎 소요. 하산 후 옥산리에서 경주터미널로 나오는 시간은 오후 2시40분, 4시40분, 6시10분에 있다.

원점회귀라 자가운전도 편리하다. 네비에 독락당으로 찍으면 된다.



도덕산 고도표




도덕산 지형도











2014/02/07 -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겨울여행지로 다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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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겨울여행지로 다녀 왔습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 게 합니다. 사계절 여행을 꿈꾸며 떠나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봄에 찾는 느낌 여름에 찾아 가는 느낌, 가을에 보는 느낌, 그리고 겨울의 여행지는 어떠합니따. 이 모두 계절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색으로 뽐내고 있습니다. 겨울여행지로는 쓸쓸하다고 하는 경주 안강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안강은 양동마을과 함께 회재 이언적의 유적지가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경주 안강하고도 옥산 골짜기에는 한겨울의 삭풍 때문인지 어실어실 한 느낌입니다. 먼저 독락당을 찾아갔습니다. 지난해 여름인 7월에도 이곳 독락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독락당은 어찌 찾아 갈 때마다 문화재 보수 공사를 하는지 작년 7월에도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출입을 할 수 없어 옆 계곡에서 독락당 최고의 비경인 계정만 보고 돌아 갔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독락당과 계정 보수를 끝내고 산뜻한 모습입니다.

 

이번 겨울에 찾은 독락당은 다행히 보수공사가 없어 내삼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조선 양반가옥의 전형인 솟을 대문이 그 당시 양반가의 위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이 먼저 눈에 보입니다. 처마 밑에 경청재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백리에 가자되어 청백은 공경지심에서 나온다"하여 그의 후손들이 경청재로 이름을 붙였다합니다.

 

 

 

 

본 고택은 1601년(선조34년)3월12일 회재 이언적의 손자 휘, 준과 순 형제가 독락당과 계정이 있는 옥산 별업을 받들어 지키기 위해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세운집입니다.

 



 

 

 

 

 

‘화의문약설’에는 선조인 회재 이언적의 별서인 독락당과 계정을 보호하고 보수 유지함에 있어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 약간의 토지를 내 놓아 그 뒤에 후손들 중 궁핍하여 이 토지로 인해 다투는 일은 선조에 대한 불효로 간주한다는 내용입니다. 독락당은 옥산 정사로도 불리며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사랑채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 여강이씨종택인 독락당은 경청재이외에는 사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알림’을 보면은 “이 고택은 회재 이언적선생의 아들 잠계공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이므로 본 종가에 특별한 문의외 출입을 금지합니다”란 안내판을 보고는 도저히 들어가 볼 수 없었습니다. 내 만족을 위해 여기서 생활하시는 분들의 사생활을 침해 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참아야 하겠습니다.

 

 

 

 

 

 

 

 

독락당의 여강이씨 종택은 흙 담장이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흙사이에 기와(?)가 박혀 있는 흙담장으로 인해 독락당은 더욱 무게가 느껴집니다. 작년의 복원 공사로 인해 써까레와 흙담장등이 아름답게 바뀐 모습입니다. 경청재 현판을 보고 아래채와의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이 자계천으로 나가는 골목길입니다. 좌우측의 아름다운 토담으로 된 골목길을 걷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중간쯤에 산청의 남사마을을 대표하는 크로스 나무는 아니지만 이 골목에도 비스틈한 고목이 걸쳐져 있습니다. 현재 자계천에는 지난해 떨어진 낙엽이 물위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회재선생이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계곡에 몸을 담그듯이 쌓아 올린 독특한 계정은 아궁이가 자계천쪽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궁이도 사람의 허리쯤 높이에 걸려 있습니다.

 

 

 

 

 

 

 

 

널다란 자연석 암반위에 쌓아올린 돌로 2층 누각을 만든 것이 우리 선조님들의 풍류를 알 수 있습니다. 계곡과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독락당은 1516년(조선 중종11년)에 정면4칸에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중간에 대청을 넣었는데 정면3칸 측면2칸이고 그 좌우에 정면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만들었습니다.

 

 

 

 

대청에 앉아 자계천을 볼 수 있게 독락당 옆 담장에 나무로 문살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입니다. 계정은 1533년 완공되었는데 계정안쪽에 걸린 현판에 양진암이란 필체가 눈길을 끔니다. 퇴계 이황의 필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내삼문의 입구로 다시 나가면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13층 석탑을 찾아 갑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국내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정혜사지 13층 석탑 보고 왔습니다. .

주차장에서 장산서원 표지석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독락당과 계정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종택 뒤편으로는 큰 고목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나무를 지나면 왼쪽으로 미려한 모습의 큰 석탑을 만나게 됩니다. 통일 신라시대 9세기 작품이며 정혜사 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창건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동경통지'의 기록에 보면은 신라성덕왕 원년에 당나라 백우경이란 분이 자옥산 아래에다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운 후 그 뒤에 절을 세우고 정혜사라 하였다합니다. 정혜사지13층 석탑은 흙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십삼층의 몸돌을 세운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다시 걸음을 돌려 다음 여행지인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과 세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겨울 여행지로서도  독락당과 자계천변의 계정 그리고 정혜사지13층 석탑이 손색이 없습니다. 

 

 

 

 

 

 

 

 

 

 

2013/06/24 -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40호인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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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강동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의 역사. 양동마을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강동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의 인물.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조선 중기 때 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조정에 진출한 사림들에는 세조 5년(1459년)에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를 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은 성종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등 조정의 요직를 두루 거치며 청백리에 올랐다. 그리고 손소의 외손자인 대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이 배출되면서 퇴계 이황에 앞서 성리학의 기틀을 만들며 해동부자라 하였다. 회재이언적은 동방5현의 한분으로 종묘배향과 문묘에 종사되어 역대임금과 공자와 함께 위패기 모셔지고 전국의 20여곳의 서원에서 배향되기도하였다. 양동마을에서는 월성손씨와 여강이씨에서 모두 문과 26명, 무과14명 사미76명으로 과거에 급제한 분만 116명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주차장을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먼저 만나는 건물이 양동마을 문화관으로 조선시대 양동마을의 모습과 양동마을에서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미니어쳐로 제작이 되어 한눈에 볼 수 있게 편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무료로 볼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관람료 4천원.


이곳을 지나면 매표소 건물이 나온다. 입장료는 4천원. 사실 작진 않은 관람료라 많은 가족이라면 부담도 간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을 볼 수 있고 500년전의 건축물을 볼수 있는 몇안되는 곳 중의 한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양동초등학교를 지나면 양동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정면에 먼저 크게 보이는 가옥이 향단건물로 전체를 차근차근 돌아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시간 제약상 다 볼 수는 없고 양동마을에서 대표적 가옥으로 15~16세기에 지어진 관가정, 서벽당, 향단, 무첨당을 중심으로 보면서 주위에 몇군데를 관람해도 두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필자는 양동마을의 매점에서 왼쪽으로 관가정을 먼저 관람을 하기 위해 왼쪽으로 걸었다. 관가정 아래 양동마을의 주민들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초가집이 많이 보인다. 주민들의 피혜가 가지 않도록 그냥 겉 모습만 보고 지나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관가정.



먼저 관가정 입구에 늘어진듯 서 있는 고목나무에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오른쪽 오르막을 가면 관가정의 솟을 대문이 나타난다. 관가정으로 중종때 청백리에 옹았던 우재 손중돈선생의 옛집이다. 관가정의 앞쪽은 탁 트이게 하여 낮은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건물 배치를 한것이 특이하다.


 

 


관가정은 '농사 짓는 광경을 내려다 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손중돈은 이곳 관가정 의 탁 트인 누마루에 올라 세상사 다 잊고 안강 들판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보인다.이름그대로 누마루가 있는 정자로 양동 마을 초입의 물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관가정을 나와 영귀정과 설천정 관람을 위해 관가정 뒤 산길을 따라 간다. 먼저 영귀정 가옥과 만난다. 



영귀정

 

 


영귀정은 향토문화재로 회재 이언적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 모옥을 지어 놓고 시를 읊으면서 산책을 하던 곳으로 후손들에 의해 정자를 지어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설천정사는 향토문화재로 회재 이언적의 세째 손자였던 설천정 이의활공이 학문을 강학하기 위해 지었던 정자라 한다.  그 앞에 초가집이 한동 지어져 있다.


 

설천정사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보물제 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대성헌은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34호로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18세기 중엽에 지어졌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며 'ㅁ'자를 이루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만재 손숙돈이 분가 할 때 지은 건물로 낙선당은 병자호란때 순절한 손종로(1598~1636)의 호에서 따 왔다.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천석꾼의 집으로 창고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건물의 구조를 보면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나누며 중문채와 함께 'ㅁ'의 형태지만 조금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서백당.



서백당은 중요 민속문화재 제23호로 당호의 뜻은 '매일 하루에 참을 인(忍)자 100번을 쓴다'는 의미이며 서백당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어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될 것이 없다하였다.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년)~1484년)가 이곳에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향단.



향단은 보물제412호이며 회재 이언적(1491년~1553년)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때 병환중인 모친을 돌 볼 수 없어 중종이 지어준 건물이다. 다시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 준 후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향단이란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이 집의 이름을 따왔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정충비각.



정충비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각은 조선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인 버린 손종로와 그의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7년에 세웠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인 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때 쌍령전투에서 그의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하여 그의 시체를 찾지못하고 옷을 넣은 관으로 장례를 치렀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먼저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로 알려져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독락당.



독락당은 건물 자체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사랑채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을 보며 소일을 하였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안으로 빼꼼히 보니 가정집이라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독락당을 못보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멋스런 건물은 자계전에 반쯤 발을 빠트리고 있는 독특한 계정이다. 널따른 암반위에 생긴 그대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2층 누각은 계곡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양동마을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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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서백당(書百堂).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자 세번을 쓰면 살인도 면한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밉고 죽이고 싶은 철천지 원수라도 기껏해야 忍자 세번으로 그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 진다고 하는데 그럼 매일 하루에 참을 인(忍)자 100번을 쓴다면 어찌 될까. 철천지 원수라도 33번은 살릴수 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당호를 가진 곳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으로 원래는 서인백(書忍百)이었다한다. 서인백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어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될 것이 없다며 빙긋이 웃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경주손씨 종택.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이다.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년)~1484년)가 이곳에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흔히종택은 어떤곳인가 종손은 문중을 위하여 자신은 버려야하는 무거운 자리다. 그럼 얼마나 많은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새겼는지 알 수있다. ㅎㅎ 뜬 구름 같은 이야기는 접어두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물자형 명당..

 

양동마을에 있는 서백당에 대해 알아보자. 서백당의 입지는 양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창산과 문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네줄기의 능선이 물(勿)자 형을 이루는 독특한 지형을 이룬다. 이는 양동마을 주차장이 있는 입구에서는 그 마을 존재 조차 보이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서야만 양동마을의 모습이 들어나 온전하게 볼 수있는 물자형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3명의 현인 배출.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이중환의 택리지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도 삼남의 4대 길지로 언급한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손소는 세조2년에 서백당을 지을때 지관으로 부터 이곳의 지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정한것으로보여진다.  서백당이 있는 이곳은 혈이 모이는 지점으로 3명의 현인이 배출된다는 곳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손중돈과 이언적 배출 또 한명은.

손소때에 벌써 두명의 현인이 태어 난것을 알 수 있다. 손소의 둘째 아들이 우재 손중돈(1463년~1529년)으로 정2품 의정부 우참잔의 벼슬에 올랐던 분이며 손소의 외손자며 손중돈의 생질인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이 또  한분이다.

 

 

사랑채와 내실을 가르는 작은 담장으로 왼쪽은 사랑채며 담장 오른쪽은 3명의 현인중 두명은 배출 되었지만 남은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배출 되어랴 한다며 며느리만 해산을 할 수 있다는 산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550년 향나무 손소가 직접 심어.

아직도 월성손씨 종택에서는 한분의 현인이 태어날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 이곳 서백당에서는 손씨의 며느리는 서백당의 산실에서 해산을 할 수 있지만 출가한 딸은 서백당의 산실에서 몸을 풀수 없다고 하며 몸을 풀러온 딸들은 이웃의 일가 친척집으로 내려 보낸다한다. 마지막 남은 현인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며 다른 문중에 빼앗길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의 구조는.

서백당의 구조를 보면 먼저 한일자형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앞에 사랑채와 만난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안채는 'ㅁ'자 형태를 취하며 오른쪽으로 손소를 모신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의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랑방과 잠을자는 침방이 대청을 두고 'ㄱ'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쪽에 두었다. 툇마루가 작은 사랑방과 대청으로 연결된 점이 이채로우며  서백당 현판의 맞은 편에는 손소가 이 집을 짓고 기념하기 위해 직접 심었다는  550년된 향나무를 보며 월성손씨에게는 서백당의 존재가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다.

 

 

 

현재에는 안채 방향으로 가는 입구는 출입을 통제하는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양동마을의 여러 건물이 현재에도 그의 후손들이 함께 거쳐를 하고 있어 건물의 보존상태가 얼마나 양호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550년의 풍진 세월도 잘 견디며 이어온 건축물 서백당. 우화하며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단정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고가의 모습이다.

 

 

 

 

 

 

세월의 때가 켜켜히 배어나오는 기둥과 마루에는 그 당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을때의 븐주한 모습이 그려지며 지금 보고 있는 향나무를 그 당시 두 현인도 보았다고 생각하니 그  흔적을 찾아보며 서백당을 내려와 향단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월성손씨 며느리에게만 내어 준다는 산실.

 

 

 

 

 

 

 

 

 

 

 

 

 

 

 

 

 

 

 

 

 

양동아을 문화관에 있는 서백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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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손종로의 호에서 따와...


낙선당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만재 손숙돈이 분가 할 때 지은 건물로 낙선당은 병자호란때 순절한 손종로(1598~1636)의 호에서 따 왔다. 





낙선당의 입구. 처음 보이는 건물이 대문채.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천석꾼의 집을 말해주듯 곳간을 많이 두고 있다.


낙선당의 가옥 주인은 천석꾼으로 알려져 있어선지 나락을 보관하는 곳간이 많은 것이 특징이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디딜방아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안에서 본 대문채.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나누며 중문채와 함께 'ㅁ'의 형태지만 조금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낙선당 편액.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건물 형태는....


서백당 뒤로 비탈진 오르막을 오르면 만나는 낙선당은 먼저 대문채와 만난다. 대문을 통할 수 없고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안에서 대문채를 보면 정면3칸에 옆면 1칸으로 중간에 출입구인 대문을 두고 왼쪽에는 행랑채를 달고 오른쪽은 마굿간을 두었다. 



대문채와 곳간채.




행랑채 오른쪽으로 4칸의 곳간채 건물에 방을 한칸 넣었고 대문채를 마주보며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는 중문채와 연결 되는 것 같이 한일(一)자 형으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안채와 서로 연결 된다. 



중문채로 7칸.



정면 4칸에 옆면 1칸의 사랑채는 왼편에 2칸의 대청을 넣었고 오른쪽으로 사랑방을 2칸 넣어 방을 만들었다. 그 옆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문채를 통해 들어가면 안채.




중문채는 모두 7칸으로 긴 형태의 건물이다. 중간에 1칸의 중문이 있고 왼편에 2칸은 방이며 나머지는 모두 나락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었다. 현재 안채는 아직도 손종로의 후손이 이곳에 거처를 하고 있어 들어 가 볼 수 없다.






낙선당의 모습과 이곳 안채 사랑채등을 자세히 보면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기단에 비해 매우 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양동마을의 양반가옥중에서는 가장 낮은 축대가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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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의 뜻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건물.

 

무첨당의 용도는 친구와 벗하며 손님접대와 독서등의 용도로 만들었다. 현재에도 무첨당에는 이언적의 장손인 여강이씨 이지락선생과 그의 아들이 지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동방5현의 여강이씨 이언적은...

 

이언적은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또는  자계옹이다. 아버지  찬성공 이번(1463~1500)은 여강이씨로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성균관 생원으로 손소의 8남매중 둘때달과 혼인을 하여 처가인 양동마을로 입향하였다, 그의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으로 동방5현의 한분이다. 중종9년인 151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되어 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중종32년인 1537년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복직하며 중종의 신임을 받지만 명종2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모함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고 만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그 구조는.

 

무첨당의 구조를 보면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앞면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3칸을 대청을 넣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르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뒷면은 벽채를 만들어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 자 형으로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구분하였다.(문화재청 참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의 편액 좌해금서는 대원군 필체.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  무첨당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30~35분이 소요된다.

그외 안강행 버스를 이용하면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양동마을까지 걸어가면 된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8분소요.


승용차는 네비에다 양동마을을 치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안채로 이언적의 후손 이지락 선생이 생활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필체 좌해금서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이 있는 양동마을 유래에 대해...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무첨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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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는 아주 특별한 석탑이 있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으로 기존의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옥산과 도덕산 그리고 봉좌산과 어래산의 능선을 서로 연결하면 엎어놓은 밥그릇 모양으로 감싸고 그 안으로 흘러 내리는 계곡인 자계천 골짜기 안에 신라시대의 절터에 세워진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독특한 모양의 석탑.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성덕왕 원년에 당나라 백우경에 의해 자옥산아래 경치 좋은 곳에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그 후에 그곳에다 절을 세우고 정혜사라 하였다며 '동경통지'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정혜사터에 탑이 남아 있는데 이탑을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이라 부른다.  맨 밑단은 흙으로 쌓아 올렸고 그 위에 기단을 올려 십삼층의 탑신을 세웠다.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1층에 감실이 만들어진 정혜사지십삼층석탑.


현재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을 보면 독특한 모양의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은 다른 곳에서 찾아 보기가 힘들다. 1층의 탑 몸돌은 거대하며 네모서리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보조 기둥을 세워 감실을 만들었고 문을 달았다. 이것은 열린공간을 추구하고자한 의지를 표현하였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이며 국보 40호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2층 부터는 몸돌과 지붕돌이 급격히 작아져 지붕돌만 올려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었고 직선으로 내려 오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날렵하게 하늘로 들려 있다. 비교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꼭대기 머리 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국보 제 40호로 지정.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필자도 여러곳의 절터에서 만난 석탑을 여럿 보았지만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독특한 모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웅장하며 2층 부터 조금씩 작아지며서 13층 까지 쌓아 올린 석탑의 정교함에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한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으로 추정.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45~55분이 소요된다.


승용차는 네비로 독락당이나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을 치면 된다. 위치는 버스 종점인 독락당 앞에서 장산서원 방향으로 따라가면 된다. 독락당 뒷편 자옥산과 도덕산의 부드러운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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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처가입향 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무료 관람.



이러한 모든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양동마을 입구에 주차장과 연결된 곳에 양동마을 문화관이 들어 서있다. 문학관 건물은 2층으로 1층은 양동마을을 이루게 된 역사와 그 당시의 생활상 그리고 조선시대 반촌의 모습을 전시하였고 2층에는 문서등을 전시하여 양동마을을 찾는 관람객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미니어쳐로 만날 수 있는 양동마을문화관.



이곳 전시실안의 볼거리는 보물로 지정된 처가입향인 손소의 초상화를 볼 수 있고 관가정, 향단, 서백당, 무첨당등 고택들의 모습을 미니어쳐로 만들어 사실감을 더 하였고 관람객에게 현장감을 느끼도록 한부분이 너무 좋은 것 같다. 양동마을의 입장료는 4천원이지만 양동마을 문화관은 입구에 있어 양동마을 관람료를 주지 않고 무료로 볼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자녀에게 훌륭한 교육 자료.


이곳인 양동마을 문화관만 보아도 어지간한 양동마을의 모습은 한눈에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실제의 양동마을을 들어가서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지만 이곳 양동마을 문화관만 관람해도 자녀들에게는 훌륭한 공부가 될 것 같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동마을 문화관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30~35분이 소요된다.

그외 안강행 버스를 이용하면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양동마을까지 걸어가면 된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8분소요.


승용차는 좋은 네비에다 양동마을을 치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양동마을 문학관 정보


주소: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52-1

전화:054-779-6127

관람시간:오전9시부터 18시까지

양동마을 문화관 관람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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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고을은 현재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유네스코에 지정된 양동마을이다. 이곳 경주 양동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반가의 내력을 볼 수 있는데 혼인과 함게 처가에 들어와 살았던 풍습이 있었는 것 같다. 어 그럼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처가와 똥간은 멀리 있는게 좋다는 말이...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지정.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인 하회마을 보다 150년이 바른 이곳 양동마을은 월성손씨의 손소가 이곳으로 들어게 되고 그 뒤에는 여강이씨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를 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 양동마을은 천하의 길지라 3명의 인물을 배출된다고 한다. 월성손씨는 청백리로 불리는 우재 손중돈을 낳았고 여강 이씨는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출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옥산서원 진입로 울창한 숲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현재 공사중인 옥산서원 전시관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옥산서원 정문의 역락문 뜻은...

 

 

먼저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한석봉과 김정희 현판 글씨.

 

 

또 다른 옥산서원의 현판은 아산 이산해선생의 필체다. 이곳 옥산서원은 규모면에서는 작은 서원이지만 당대의 명필가들의 필체가 서원의 여러 곳에 현재에도 남아 있어 회재 이언적 선생이 당대에 어떠한 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세심정에서 마음을 씻다.

 

 

옥산서원을 나와 회재 이언적선생의 사랑방이었던 독락당을 가기위해서는 도덕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드는 자계천을 건너야 한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자계천에는 작은 폭포를 이루고 ‘ㄷ’ 모양의 소는 금방 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다. 회재이언적은 이곳에서 매일 얼굴만 세수 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딱 고 씻었다 한다. 지금도 암반에 ‘세심정’이란 글귀가 뚜렷하다.

 

 

현판의 역락문은 한석봉의 글씨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이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남 거유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한석봉의 글씨

 

 

추사 김정희의 글씨

 

 

 

 

 

 

 

 

 

 

 

 

바위에 새겨진 세심정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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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동방 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사랑채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을 보며 소일을 하였다하는데 아쉽게도 여러번 가봤지만 어찌 이곳은 갈때마다 이리 문화재 공사로 출입을 삼가해 달라고 하는지 모를일이다. 할 수 없이 오른쪽 자계천에 구름처럼 걸린 정자 '계정'을 보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최고 건물은 자계천의 계정.

독락당은 건물 자체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안으로 빼꼼히 보니 가정집이라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독락당을 못보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멋스런 건물은 자계천에 반쯤 발을 빠트리고 있는 독특한 계정이다. 널따른 암반위에 생긴 그대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2층 누각은 계곡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자연석의 암반위에 세운 계정.

 

계정의 독특한 면은 계곡쪽의 아궁이다.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 1m이상 올려져 있다. 자연상태의 암반을 그대로 이용을 하다 보니 이런 독특한 모양이 된것 같다.  그날 자계천 작은 소에  누군가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낚았다. 일을 끝내고 소일삼아 고기를 잡는다며 부자지간이라 소개 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옥산정사로도 불려.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곳에서 회재선생도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보낸것은 아닌지. 그때의 모습이나 지금의 자계천은 변하지 않고 500년을 이어져 왔다. 독락당은 조선중종 11년인 1516년에 세워졌고 옥산정사로도 불린다. 안내판을 보면 낮은 단위에 세워진 정면4칸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대청은 3칸에 2칸이고 나머진 1칸에 2칸의 온돌방을 넣었다. 독락당 옆 자계천 천변으로 담장을 세웠는데 그 곳에 나무살을 달아 독락당 대청에서 계곡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는 게 이색적이다.

 

 

 

 계정은 양진암이라 불리며 회재 선생이 1533년에 완공을 하였다한다. 이곳 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며 회재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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