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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이육사문학관.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의 청포도 이육사문학관 여행.


안동여행을 하면서 웬 뜬금없는 이육사문학관이 있나 생각했습니다. 민족저항 시인 이육사의 그의 대표작으로 첫손꼽는 ‘청포도’는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전 국민 모두에게 알 게 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했던 시 청포도는 포항시 오천읍 한 어촌 마을의 포도농장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하여 필자는 이육사님의 고향이 경북 포항의 오천 한적한 어촌 마을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곳에도 이육사님을 기리는 안내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육사문학관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

이육사문학관 전화:054-852-7337


2017/06/21 - (안동여행)월란정사. 천원 지폐 뒷면 그림 실제 모델지 겸재정선의 계상정거도 월란정사 여행.

2017/06/15 - (안동여행)퇴계종택. 안동 도산면에서 퇴계 이황의 퇴계종택을 여행하다.

2017/04/01 - (안동여행)퇴계태실 노송정종택과 퇴계종택. 퇴계 이황 태실인 노송정종택과 퇴계 이황 종택을 여행하다.

2017/01/14 - (안동맛집)맛50년 헛제사밥.헛제사밥이라해서 헛배가 부른게 아니예요. 맛있는 음복음식 안동 맛50년 헛제사밥

2016/12/26 - (안동여행)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그러나 이육사님은 포항 오천이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이육사님의 고향은 경북 안동 도산면의 원촌이며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퇴계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암울했던 우리 민족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이육사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904년 4월 4일(음력)에 5형제중 둘째로 태어나셨으며 본명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육사가 아닌 ‘원록’입니다. 그리고 ‘원삼’ 또는 ‘활’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발표한 시에도 그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 이육사입니다.



왜. 육사란 이름을 사용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육사는 1927년 처음 옥고를 치를 때 그때 대구 형무소 수인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그 뒤부터 이육사를 아호로 썼다 합니다. 이육사님의 유년기는 고향 인근인 예안에 설립된 보문의숙을 다니다가 공립으로 개편되면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육사문학관 개관시간과 관람요금 안내

이육사문학관 개관시간

3월~10월: 09:00!18:00

11월~2월:09:00~17:00

이육사문학관 휴관안내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월요일이 공휴일일인 경우 다음날


이육사문학관 관람요금

성인 2,000원. 청소년·군경 1,500원 어린이  1,000원 

이육사문학관 무료 대상자:장애인, 국가유공자, 65세이상, 7세이하

이육사문학관 안동시민 신분증 확인 후 50% 할인





그리고 대구로 이사하였고 부친의 명령으로 1921년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하면서 영천 처가가 있는 백학학원에 다녔습니다. 1924년 4월 일본 동경청치예비교와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 유학을 떠났다가 그 이듬해 1월 귀국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문학 활동을 펼치던 중 성주 출신의 이정기를 만나면서 조재만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조직인 ‘비밀결사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이들은 중국 북경을 답사하기도하였으며 재차 중국을 건너갔다 항일무장단체인 의열단 김창숙, 대한독립당군정서 대표 배병현, 국민당정의부위원 남형우 등과 만나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7년 한인 군관학교 설립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했다가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이육사는 대구에서 체포되어 19개월 투옥되었다가 출소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대구 격문사건 등에 재차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이육사의 투옥 횟수는 모두 17회에 달한다 합니다.









1931년 다시 군관학교입교를 위해 북경으로 건너갔지만,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의열단의 윤세주를 만나 1932년 난징에서 새로 연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하여 1933년 1기로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조선군관학교 출신이 발각되면서 1934년 3월에 구속되었다가 6월에 석방됩니다.

 




이육사 님은 이후 문예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남겼는데 이 시기에 그의 주옥같은 시인 ‘광야’ ‘절정’ ‘청포도’를 1939년 ‘문장’ 8월호에 발표합니다. 중국과 국내를 자주 왕래하면서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앞장서다가 1943년 7월 돌아가신 지 1년 만인 어머니와 큰형의 첫제사에 참석하기위해 귀국했다가 서울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으며 1944년 1월 북경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시신은 화장하여 국내로 운구되어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 원촌마을 뒷산으로 이장했습니다. 이육사님의 41년 남짓 짧은 생애를 오직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바친 독립운동가지만 그보다는 시인으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육사님의 일대기를 알아가면서 평생을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의 활동도 만만치 않으면서 그 상황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은 어떻게 남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표작인 청포도, 황혼, 절정, 광야, 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시의 작품 세계 하나하나를 생각하게 하면 말입니다. 이육사 님은 대구형무소에서 1929년 5월 출소하면서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하였습니다. 1930년 조선일보 1월 3일 자에 ‘말’이라는 시를 처음발표하면서 그의 문학 활동을 시작하려다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 구속됩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조선 군관학교 출신이 탄로 나자 다시 투옥되었다가 출옥하면서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여러 편의 저항 시를 남기 섰습니다. 이육사님이 순국하고 광복 후인 1946년 처음으로 ‘육사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정부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현재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는 이육사문학관이 있으며 문학관에서 2.8km 거리에 이육사 묘소가 있습니다. 다른 일정이 겹쳐져 있어서 이육사 묘소를 찾아뵙지 못하고 온 것이 지금도 많이 후회로 남습니다. 안동여행에서 독립투사로서 민족저항시인으로서 이육사 님의 모든 기록이 보관된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볼 것을 꼭 추천하면서 이육사 님의 시 ‘절정’의 배경지로 알려진 천길 낭떨어지 내살미 칼선대를 만나기 위해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육사문학관 사진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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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월란정사. 천원 지폐 뒷면 그림 실제 모델지 겸재정선의 계상정거도 월란정사 여행.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내살미마을에는 월란정사가 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1546년 하계의 동암 뒤편인 양진암에 거처하면서 이곳 월란암을 자주 찾아 공부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닦았던 곳입니다. 또한, 농암 이현보 선생, 금계 황준량, 매암 이숙량 등과 함께 요성대(월란대)에 올라 시문을 나누고 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그만큼 주위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안동 도산면 월란정사 주소: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내살미마을

(무허가는 아닌것 같은데 건물에 새도로주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2017/06/15 - (안동여행)퇴계종택. 안동 도산면에서 퇴계 이황의 퇴계종택을 여행하다.

2017/04/07 - (안동여행)안동 하회마을 여행. 풍산류씨 집성촌인 서애류성룡의 하회마을 여행

2017/04/01 - (안동여행)퇴계태실 노송정종택과 퇴계종택. 퇴계 이황 태실인 노송정종택과 퇴계 이황 종택을 여행하다.

2017/03/29 - (안동여행)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서애류성룡 종택인 하회마을 충효당을 보다.

2017/03/28 - (안동여행)하회마을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하회마을 양진당을 만나다.



퇴계 선생은 많은 제자 중에서 만취당 김사원선생께 이 아름다운 정자 터를 물려주었다 합니다. 만취당 김사원은 22세 때에 퇴계의 제자가 되었으며 간재 이덕홍과 함께 10여 년간 동문수학했던 곳으로 1860년 월란암 옛터에다 사촌 문중의 만취당 후손들이 선조의 학덕을 기리며 지은 정자입니다.




월란정사는 1909년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김사원의 안동김씨 사촌 문중 소유지만 퇴계의 진성이씨 후손들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합니다. 월란정사 가는 길은 내살미 마을에서 삭실로 가는 산길을 따라 오릅니다,

 


야자 카펫을 깔아 신발에 흙 하나 묻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되었지만, 막상 월란정사를 찾았을 때는 허리까지 자란 잡초에다 고가의 관리가 부실한지 여러 곳이 허물어져 퇴계선생과 겸재정선의 계상정거도 소문을 듣고 찾은 월란정사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주 무거웠습니다.








퇴계선생의 월란대시

月瀾臺(월란대)     

高山有紀堂(고산유기당)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

勝處皆臨水(승처개임수)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

古庵自寂寞(고암자적막)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

可矣幽棲子(가의유서자)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

長空雲乍捲(장공운작권) 넓은 하늘에 구름이 별안간 걷히니

碧潭風欲起(벽담풍욕기) 짙푸른 소沼에 바람 일 것 같네.

願從弄月人(원종농월인)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

契此觀瀾旨(계차관난지)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

오묘한 한시 풀이를 할 수 없어 카페 '도산서원박약재(http://cafe.daum.net/dosanseowon)' 이동구님의 퇴계선생 월란대 시판 해석을 옮겨왔습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는 월란정사가 있는 월란대에서 본 모습이라고 합니다. 겸재는 퇴계 선생을 추모하여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와 '계상정거도'를 완성했으며 대한민국 천 원권 지폐 뒷면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이곳을 방문 시에는 반드시 천 원권 지폐를 지참해서 서로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월란정사 앞 천길 단애인 월란대에서 천 원권 지폐를 들고 맞추어 봤는데 지폐 속의 모습과는 조금은 달라 보였습니다. 아직 그림 보는 눈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월란정사는 도산서원에서 5리 거리에 있습니다. 동향에 낙동강을 보며 앉은 품새와 정자를 두른 왕모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퇴계 선생의 도산 서당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월란정사는 경사진 산을 깎아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다 막돌로 된 초석을 놓고 전면의 네 기둥은 두리기둥을 나머지는 사모 기둥을 세웠습니다.



건물은 앞면 3칸에 옆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이며 가운데 1칸은 마루를 넣고 좌우 양쪽은 1칸의 온돌방을 각각 꾸몄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를 길게 달아내었습니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http://cafe.daum.net/jangdalsoo/)’에서 낙민님의 월란정사의 이만각 중건기 해석을 참고하면 동쪽 방은 은구재(隱求齋) 가운데 마루는 월영헌(月映軒)이라하고 서쪽 방은 관선재(觀善齋)라하였습니다.



은구재와 관선재는 퇴계 선생이 써 준 주자의 무이잡영에서 따왔으며 마루의 월영은 퇴계선생이 서림원에 화답해 쓴 시인 “산 위의 달이 외로운 이불 비추는 것을 스스로 가련하게 여기네”에서 따왔다 합니다. 편액 또한 “달빛이 여울에 아름답게 비춘다”는 뜻에서 월란정사(月瀾精舍)라 하였습니다. 실제 이곳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여울 속에 들어간 또 하나의 달이 월란정사를 아름답게 비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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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 하회마을 여행. 풍산류씨 집성촌인 서애류성룡의 하회마을 여행


고장마다 같은 성씨가 모여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 우리나라에 여러 곳 있습니다. 경주 양동마을과 영양의 두들 마을이 그러하고 또한,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은 600여 년 동안 풍산류씨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마을 집성촌입니다.







안동 하회마을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176-1

안동 하회마을 전화:054-853-0103


2017/04/01 - (안동여행)퇴계태실 노송정종택과 퇴계종택. 퇴계 이황 태실인 노송정종택과 퇴계 이황 종택을 여행하다.

2017/03/29 - (안동여행)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서애류성룡 종택인 하회마을 충효당을 보다.

2017/04/01 - (안동여행)퇴계태실 노송정종택과 퇴계종택. 퇴계 이황 태실인 노송정종택과 퇴계 이황 종택을 여행하다.

2017/01/17 - (안동여행)안동 이천리 석불상, 제비원석불,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오뚝이를 닮은 독특한 마애불.

2016/12/26 - (안동여행)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기와지붕과 초가를 인 지붕이 조화롭게 마을을 이루는 안동 하회마을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풍속을 가장 잘 이어오고 있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안동 하회마을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에 지정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지구촌 사람들이 모인 유네스코에서도 지구촌이 보호할 유산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풍속과 문화가 마을주민에 의해 긴 세월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을 이제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이 지키고 이어갈 유산이라 평가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그이름을 올렸습니다.





하회마을의 지명도를 더욱 높인 것은 조선 시대의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겸암 류운룡선생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과거에는 별뜻을 두지 않았으며 임금의 명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직책과 인동 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에 재임하여 목민관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법을 공평하게 다스려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이조판서 추증과 문경공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불멸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을 선조에게 천거하여 두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을 남겨 후세에 전란의 참상을 겪었던 후회와 교훈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낙양의 정호와 정이 형제의 우애와 견주어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 칭송합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굽이쳐 'S'자로 크게 휘돌아 마을을 감싸며 강물이 흐르는 곳의 마을로 흔히 물돌이 마을이라 합니다.



하회는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풍수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이라는 명당에 조선 시대부터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 알려졌습니다. 태백산의 지맥이 마을의 주산인 화산을 솟구쳤다면 일월산의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빚어 그 사이로 낙동강의 물길이 흘러 ‘산태극 물 태극’의 가운데에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는 연화부수형의 풍수지리설에서 마을의 주산은 화산, 마을과 부용대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을 따로 화천이라 하는데 이는 ‘연화’인 연꽃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마을의 가장자리에는 터줏대감인 최고령 600살의 느티나무가 지키고 노거수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된 독특한 형태의 마을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은 정남향 동남향을 보고 있다면 하회마을은 집의 앉은 모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또한, 기와집을 초가들이 빙 둘러싸며 배치된 게 이채롭습니다. 하회마을의 규모는 구한말까지 350여 가구였으나 현재 150여 가구만 남았습니다. 하회마을 내부에는 127가구에 437개 건물이 현재 있습니다.



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 세거 이전에 허씨와 안씨가 먼저 마을을 이루었다 합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해오고 이는 안동 하회마을의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 제작자가 허 도령이란 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풍산 류씨가 하회미을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풍산류씨 7세인 전서 류종혜공이 가뭄과 홍수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마을 주산인 화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물의 흐름을 관찰하며 면밀하게 따져 최고의 명당으로 터를 잡았지만 그과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뼈대인 기둥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넘어져 건물을 지을수 없었습니다. 그때 꿈에 현몽하기를 이곳에다 터를 잡으려면 3년 동안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리는 활만인을 베풀라는 계시를 받고 그 길로 마을 입구 고개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배가 고프면 음식을, 노자가 필요하면 노자를, 짚신이 필요한 사람에게 짚신을 나누어주고 베풂으로써 하회마을에서 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베풂의 삶 때문인지 서예선생 등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풍산 류씨는 대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번창하였습니다. 하회마을에는 서민과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전래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이는 굿을 겸한 탈놀이를 말합니다. ‘하회선유불놀이’는 부용대 단애에서 열리는데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이 모든게 하회마을의 전부는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작은 지식을 습득했다면 이제 마을 길을 따라 출발합니다. 시간상으로 많은 고가를 전부 둘러보지 못하고 주민이 모두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 관람할 수 있는 고택은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마을길을 중심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초가집 지붕을 이엉하는 모습은 실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자주 보았지만, 한동안 보지 못했고 이제 이런 전통마을에 와야만 만나는 하나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먼저 화경당을 찾았습니다. 솟을대문 입구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습니다.





최근에 부주의로 작은 화재가 일어나서 부득이 취한 조처라 합니다. 목재건축물은 작은 실수 하나에도 큰불이 납니다. 우리 모두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출입문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 유교책판’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화경당은 “화채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1797년인 조선정조 21년에 류사춘이 처음 집을 지었습니다. 사랑채와 대문채, 날개채를 짓고 1862년 철종 13년에 그의 후손인 류도성이 안채와 큰 사랑채. 사당을 지으면서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특히 큰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보는 풍광은 매우 아름다우며 큰 사랑채를 두른 300년이 넘은 노송들은 하회마을을 굽어도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합니다. 고가 내부를 못 보는 아쉬움은 크지만, 그래도 대문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골목을 돌아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하회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삼신당의 노거수를 찾았습니다. 처음 입향한 류종혜공이 심었다는 느티나무로 하당이며 화산 중턱의 상당서낭당과 중단국사당을 합해 삼당이라 하며 마을 주민의 소망을 비는 곳입니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상당과 중단에서 지내고 하당에서는 다음 날 아침에 제를 올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열립니다.





이번에 찾은 고가는 하회마을 북촌의 대표 기와집인 양진당입니다.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류종혜가 하회마을에서 최초로 지은 집입니다. 긴 세월동안 여러 번 어려움을 껶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화재로 일부 불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번 새로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웅장함을 잃지 않은 풍산류씨 대종택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열리며 ‘양진당’은 풍산류씨 족보를 처음 완성한 류양(1687~1761)의 호에서 따 왔고 사랑채의 입암 고택은 류종영의 호에서 따왔습니다. 





다시 돌아 나와 이제 건너편의 서애 류성룡 종택인 ‘충효당’을 찾았습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이곳에서 묵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해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고가입니다.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마주하고는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며 심었다는 구상나무가 있습니다.



 이 집은 서애류성룡 종택이지만 그 당시의 건물은 아니며 17세기에 지어졌습니다.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서예선생의 생전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으며 류성룡이 유난히 제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강조해서 충효당이라 부르게되었습니다.

 






들어서는 대문체에 붙은 12칸의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류성룡의 8세손인 유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군사를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서예선생의 유물전시관도 있습니다. 하회마을을 나와 화천 둑길을 가기 전에 작천 고택이 있습니다.







건물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두 채로 지어졌지으며 1934는 대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문간채가 쓸려나가면서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습니다. 류도관의 호에서 따와 작천 고택이라 부릅니다. 다시 하회마을 입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둑길을 따라갑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인 만송정 숲과 화천 건너 천길 단애를 이룬 부용대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겸암 류운룡공이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잡아주고 북서쪽으로 들어오는 허한 기운을 메우려는 비보로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 만송정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소나무는 1906년에 다시 심었다 합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조망을 한눈에 하는 곳으로 60m의 단애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송정


 


부용대



부용대는 중국고사에서 취했으며 부용은 연꽃을 뜻합니다. 하회마을의 풍수가 연화부수형이고 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연꽃 같다는데서 유래하고 하회마을 전망대라 하여 부용대라 부릅니다. 하회마을 북쪽의 언덕이라 하여 ‘북애’로도 불렸다는 부용대에는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하회마을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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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퇴계태실 노송정종택과 퇴계종택. 퇴계 이황 태실인 노송정종택과 퇴계 이황 종택을 여행하다.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선생은 경북 안동 도산면의 온혜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에는 이황 선생이 태어난 퇴계태실 노송정종택이 있습니다. 안동을 여행하면서 여행의 피로도 풀 겸해서 온천수가 좋다는 도산온천을 일행과 함께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온천 못미처 퇴계 태실 안내판과 우측으로 고래등 같은 고가의 위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퇴계태실 노송정종택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

퇴계태실 노송정종택 전화:054-856-1052


2017/03/29 - (안동여행)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서애류성룡 종택인 하회마을 충효당을 보다.

2017/03/28 - (안동여행)하회마을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하회마을 양진당을 만나다.

2017/02/10 - (경북맛집/봉화맛집)봉화송이 용두식당. 춘향목의 솔향이 가득한 봉화 송이돌솥밥 용두산장에서 맛보다.

2017/01/17 - (안동여행)안동 이천리 석불상, 제비원석불,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오뚝이를 닮은 독특한 마애불.

2017/01/14 - (안동맛집)맛50년 헛제사밥.헛제사밥이라해서 헛배가 부른게 아니예요. 맛있는 음복음식 안동 맛50년 헛제사밥

2016/12/26 - (안동여행)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갑자기 궁금증도 생기고 해서 퇴계태실 노송정을 갈 욕심에 도산온천 앞에서 일행과 헤어졌습니다. 혼자 차를 몰고 퇴계 태실을 찾았습니다. 노송정종택은 퇴계 이황 선생 이외에도 송재선생, 온계선생 등이 태어나고 분가할 때까지 생활했던 생가입니다.

 

 

 

 

 

퇴계태실(노송정종택) 출입문에 성림문 현판

물론 퇴계 이황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나셨는데 이황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박씨는 퇴계 선생을 낳을 무렵에 성인이 찾아오는 꿈을 꾸고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 하여 노송정종택의 솟을대문인 출입문을 성림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 태어날 무렵 성인이 왕림하는 꿈을 꾸었다하여 성림문 현판

 

노송정

 

 

또한, 태어나신 방은 태실, 선생이 공부하던 방은 책방, 선생이 기거했던 방 등 여러 편액이 집안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처음 노송정 종택은 1454년인 단종 2년에 이황 선생의 할아버지인 이조판서 이계양공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켰던 계유정난을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살기로 작정하고 처음 이곳에다 집을 지었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옵니다. 이계양공이 봉화현의 훈도를 지냈는데 하루는 이곳을 지나다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취해 신라현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때 고개를 넘어오는 허기진 노승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서로 온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 노승과 함께 다시 온계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의 노송정종택은 그 당시 노승이 집터를 정해주면서 이곳에다 집을 짓고 살면 후에 귀한 자손을 얻을 것이라는 말에. 이계양공은 이곳에다 집을 짓고 가계를 이룹니다. 그 후 이곳에서 아들인 송재 이우와 손자인 온계 이해 선생, 1501년 11월 퇴계 이황이 태어나 노승의 귀한 자손은 맞춘 샘이 되었습니다.


 

 

 

온천정사

 

 

노송정은 이계양공의 호이며 퇴계 태실 등이 있는 건물은 그분의 호를 따와 노송정 종택이라 부릅니다. 먼저 성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이 있습니다. 퇴계 태실이 있는 본채는 노송정 앞마당에서 왼쪽에 ‘ㅁ'자로 앉았으며 퇴계 태실은 본채 가운데에 누각 형태를 한 건물이 있는데  ’퇴계선생태실‘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태실은 돌출된 건물에 앞쪽에는 작은 마루와 방이 독립형태로 앉았습니다. 삼면은 쪽마루를 덧붙여 계자난간을 달은 독특한 건물로 꾸며져 있는 게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형태입니다. 또한, 성림문 옆인 본채 건물 동남쪽 모서리고 마루로 꾸며져 있습니다. 큰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 4 합의 살문은 달아 여닫는 마루로 온천정사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퇴계선생태실

 

 

 

 

본채 앞에는 누마루와 온돌방이 붙은 노송정이 있으며 그 오른쪽에 사당도 있습니다. 노송정종택은 1985년 지방문화재 제60호에 지정되었으며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면모와 태실을 갖춘 독특한 건물은 당시 상류 가옥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송정 

 

퇴계종택 

퇴계 태실을 보고 나서 급하게 차를 몰아 퇴계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으로 달렸습니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리인이 매표소 문을 닫으면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다시 차를 몰고 퇴계 이황선생 종택으로 달렸습니다.



퇴계종택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생가에 도착했더니 사위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늦게 집을 찾아가는 것도 실례고 하여 문 앞에서 그냥 분위기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퇴계종택은 퇴계 태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퇴계종택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입니다. 현재 지어진 퇴계종택은 1929년 선생의 13대손인 하정공이 옛 종택 건물을 짐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앞면 6칸에 옆면 5칸인 ‘ㅁ’형 건물로 대문과 정자, 사당으로 구분하고 석축을 높이 쌓아 그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혼용하여 지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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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서애류성룡 종택인 하회마을 충효당을 보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두 번째 방문지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입니다. 서애 류성룡의 호를 따 서애종택으로도 불리며 보물 제414호에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 하면 조선 선조 때의 충신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천거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환란 속에서 나라를 구했던 분입니다.





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방문하면서 심었던 기념식수



또한, 7년간인 두 전란의 모든 과정을 기술한 징비록은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으며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전란의 참상을 당시 겪게 되었던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기록한 징비록. 류성룡은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 정인홍과 이이첨 등 북인의 상소로 영의정에서 파직당합니다.





그 길로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선조의 부름을 받지 않고 징비록을 저술했다 합니다.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의 물난리로 학가산 기슭의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기거하다 1607년 5월에 농환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회마을의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후손과 그를 따르던 문하생들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 1600년대에 건립했던 가옥으로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중수와 증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집 양반가옥의 모습을 하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 등 52칸만 남아있습니다.

 






또한, 서애선생의 저서와 유품 등을 모아 전시하는 영모각이 따로 마련해 있으며 문간채 밖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방문하면서 심었던 기념식수가 있습니다. 하회마을 북촌은 양진당이 대표 가옥이라면 충효당은 남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서로 하회마을 길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충효당을 들어서면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一’자로 놓여 있으며 그 뒤편에 ‘ㅁ'자를 한 안채와 안채에서 길게 연결된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 뒤로는 사당과 그 우측에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이 자리했습니다. 충효당 역시 안채는 관람할 수 없으며 사랑채와 영모각만 둘러볼 수 있습니다.








입구의 행랑채는 총 12칸으로 사랑채와 마주보며 사랑채의 정면에 솟을 대문인 대문간을 내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에 옆면 2칸이며 가운데 개방한 4칸 크기의 대청마루를 깔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대청마루 뒷면 오른쪽은 골판문을, 왼쪽은 머름이 없는 높은 살문을 달아내어 안채와 뒷마당을 오가게 했습니다.





왼쪽 2칸은 온돌방과 침방을 앞뒤로 놓고 오른쪽은 작은 마루와 방을 앞뒤로 두었습니다. 작은 마루는 앞쪽과 왼쪽에 골판문과 살문를 달았고 오른쪽은 개방한 상태입니다. 이는 사랑채가 서향으로 앉았기 때문에 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볕과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막으려는 조처로 보이며 전면과 우측면은 쪽마루를 달아내고 계자난간을 돌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각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당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막 전시관으로 들어서는데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느냐는 일행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모두 하회마을 주차장에 다 도착했다며 빨리 나오라는 성화였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유물관을 보지 못하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여행에서 양진당과 충효각은 꼭 보고 나오길 추천합니다. 










서애류성룡의 유물관인 영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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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하회마을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하회마을 양진당을 만나다.


안동 하회마을을 여행하면서 워낙 넓어 먼저 무엇을 보는 게 우선일까 하고 많은 고민을 모두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을 하다 보물 제306호인 풍산류씨 겸암 류운룡(1539~1573)의 대종가인 양진당과 보물 제414호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충효당을 가장 눈여겨보고 왔습니다. 그럼 하회마을의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을 둘러보겠습니다.




 


안동하회마을 양진당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9-4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와룡산, 천하를 호령하던 용이 몸을 뉘며 쉬었다는 와룡산에서 안동호의 한반도 지형을 만나다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그러나 아쉽지만, 우리나라 고택 대부분이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부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 양진당도 마찬가지로 사랑채로 들어서는 솟을대문에 딸린 방과 사랑채의 겉모습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양진당은 확실하지 않지만 1600년대에 건립했다 하며 하회마을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입니다.

 


임진왜란에 안채가 불타 17세기에 중수하였으며 사랑채와 연결하는 부분에 당시 화재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합니다. 양진당은 특이하게도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 중기의 양식이 혼용된 모습이며 건립 당시에는 99칸의 저택이었지만 현재 53칸만이 남아 있습니다.


문간채에서 본 사랑채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풍산류씨 입향조는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는 13세기에 전서 류종혜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으며 그리고 가장 먼저 집터를 잡은 곳이 양진당입니다. 또한,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여러 가옥과 다르게 정남향을 보고 있으며 하회마을은 풍수에서 연화부수형에 해당하는데 양진당이 연꽃의 꽃술 부위인 명당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아마 풍산류씨의 대종가다운 면모를 당시에 갖추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가옥이 다 그러하듯이 안채와 사랑채는 독립된 형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건물 형태를 보면 좌측은 중문간채와 안채는 ‘ㅁ’자 형태이며 안채와 접해져 오른쪽에 ‘一’ 형태로 길게 이어진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


하회마을 주 통로에서 사랑채를 들어서는 입구는 솟을대문을 한 앞면 5칸인 문간채와 행랑채가 ‘一’ 형태로 길게 이어졌습니다. 가운데 출입문을 내고 좌우에 방과 마구간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가 위엄있게 앉아있습니다.






가운데 작은문이 안채로 연결하는 통로 



사랑채에는 입암고택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겸암 류운룡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1515~1573) 선생의 호에서 따왔으며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의 6대 후손인 류영(1687~1761)의 아호에서 따와 오늘날 입암고택 또는 양진당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겹처마는 하회마을에서 유일하다 합니다. 왼쪽에는 1칸씩의 온돌방과 서재를 넣었으며 오른쪽 3칸은 6칸의 통마루를 깔았습니다. 이곳에서 하회마을의 풍산류씨 문중회의 등이 열린다합니다.


하회마을에서 유일한 겹처마 건물


앞에서 보는 사랑채는 삼면에다 쪽마루가 달렸으며 앞면만 계자난간을 달았습니다. 그 왼쪽 끝에는 안채와 연결하는 작은 통로가 있으며 3칸의 대청은 각각이 4개의 문짝을 붙인 여닫이문을 달아 대청마루를 여닫게 했습니다. 사랑채 뒤 오른쪽에는 두 개의 사당이 있습니다.

 



문간채·행랑채에 붙은 마구간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선생이,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신위를 모셨는데 두 분 모두 불천위 사당으로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합니다. 짧은 시간에 하회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바로 서애종택인 충효당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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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면서 오래되었다는 전탑 중 하나인 안동 법흥사 칠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으로는 신라 시대의 유일한 석탑인 국보 30호 분황사 구층 석탑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이 분황사 모전 석탑이 9층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 최고의 높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7-9


2016/06/18 - (경북여행/안동여행)의성김씨 학봉종택. 안동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택을가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2016/06/17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고건축물인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만나다.

2016/06/16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그 높이가 16.8m이며 탑을 받치는 기단의 폭은 7, 75m로 현재 남아 있는 전탑의 규모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합니다.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으로 몸돌을 조금씩 줄여가며 쌓았는데 모전 석탑 주위의 지명이 법흥동인 점을 보면 법흥사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석탑 이외에 어떠한 법흥사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 전탑 주위로 고성이씨 탑동파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단부에는 희미하게나마 판석에다 돋을새김으로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이들 부조의 조각수법은 시대가 다르게 서로 차이가 나며 탑신부는 아무 무늬가 없는 회색 벽돌을 쌓았습니다. 전탑의 각층 옥개석의 윗면에 기왓장을 올렸던 것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전탑 이전에는 목탑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목탑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탑 이후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화강암을 깎아쌓은 석탑으로 그 양식이 바뀌었는데 목탑-전탑-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화강암 석탑의 많은 부분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상륜부는 금동제로 만든 상륜이 올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안타깝게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축조방식을 보면 기단은 방형이며 동·남·북 3면에 6장씩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판석에 세기고 맨 아래층의 탑신 밑면은 원분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면의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며 8개의 계단 끝에는 높이 90cm, 너비 54cm인 부처님을 모신 감실을 두었습니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1487년 성종 18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까지도 3칸 정도의 법흥사 건물이 남아 있었다합니다. 필자는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을 만나기 위해 2014년에도 찾았습니다.



당시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은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전탑 외부를 가린 가림막만 보고 안타까워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안동여행 때 그때 보지 못했던 칠층 전탑을 만나기 위해 안동의 여행지를 바꿔가며 다시 찾았습니다. 석탑을 마주 보고 섰는데 그 웅장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으며 코스를 바꿔 왔던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에게는 감명을 주었습니다. 당시 해체복원 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웠던 ‘심주’구멍이 확인되어 또 한 번 이목을 끌었습니다.

 


칠층 전탑이 워낙 높아서 가로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었으며 전탑 바로 옆에는 철길까지 있어 어수선하고 협소해 보여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건립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며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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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안동 봉정사에는 석조조형물 중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고려 시대 중엽에 극락전과 함께 조성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극락전 앞마당에 자리합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석탑의 전체적인 무게 때문인지 기단부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안동 봉정사 꼭 보야할 곳◆


☞2016/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2016/06/02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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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양화는 남아 있으며 그 외에는 분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층석탑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습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의 방형석탑으로 기단부보다는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은 적당한 데 반해 옥개석은 높이보다 폭도 좁고 옥개석의 처마 또한, 반전이 약합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날렵하지 않은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입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전체높이는 318cm이며 기단부의 한변은 237cm로 2층 기단을 만들어 탑의 토대를 만들고 다시 삼층의 몸돌을 올려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단과 2단의 기단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기단부보다 폭이 확 좁아진 탑신부 각층의 몸돌 크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비례감 있게 줄어들면서 폭의 변화도 적습니다.


 

 

 

 


지붕돌은 높이에 비해 폭도 좁고 두께도 두툼한 게 당시에 조성된 다른 석탑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고 드러난 게 없는 그저 평범하며 일반적인 고려 중엽 석탑양식을 보여줍니다.


 

 

 

 

 

 

 

 

 

 

 

 


안동 봉정사 


☞봉정사 주소: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전화: 054-853-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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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의 봉정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과 그에 못지않게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대웅전이 국가 문화재인 국보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봉정사는 국보 이외에도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보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에서 이리 많은 목조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자체가 드문 일입니다. 봉정사의 여러 목조건물을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안동 봉정사 둘러보기◆



2016/06/02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봉정사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각각 둔 두 개의 중심법당이 있습니다. 극락전과 대웅전의 공간을 가르는 건물은 화엄강당이며 고금당은 극락전 앞에서 화엄강당의 뒷면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금당을 보겠습니다. 고금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단층 목조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렸습니다. 고금당의 규모는 작아도 보물로 지정될 만큼 당시 건축 기법이 주목받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고금당의 특이한 건축기법을 보면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집 계통입니다. 기둥 윗부분에 꽂은 홑첨차와 그 위에 주두에서 나온 살미첨차가 겹쳐친 위에 다시 행공첨차를 가로로 놓았으며, 그리고 외목도리를 받쳐놓았습니다. 주두의 좌우 벽면에 배치된 첨차와 창방은 포벽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건물 뒷면은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동의 봉정사 고금당은 해체 수리를 위해 1969년 찾아낸 기록을 보면 1616년(광해군 8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뿐이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1969년에 극락전과 함께 봉정사 건물 대부분이 해체와 수리과정에서 본모습을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현재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방 앞쪽 쪽마루와 칸마다 달린 외짝문뿐이라 하니 고건축물의 보수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겠습니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현재의 고금당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았습니다. 북쪽 측면은 후예 팔작지붕으로 바뀌었고 남쪽의 지붕은 연장하여 칸을 막아서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방은 온돌을 넣어 선방이든 것을 요사채로 사용하였으며 방 앞에는 쪽마루를 깔고 벽간마다 띠살문을 달아 원래의 문짝이 아니라합니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 형태 등을 보면 조선 전기의 특색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변형되어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로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당호는 고금당(古今堂)이라 쓰는데 금당의 뜻인 고금당(古金堂)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보면 봉정사의 중심건물인 불전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 힘든데도 현재 불전을 뜻하는 고금당(古金堂)으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449호





그리고 화엄강당은 대웅전 앞 경내로 올라서면 왼쪽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앞면3칸 옆면 2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입니다. 화엄강당은 ‘양법당중수기’ 등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경내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 화엄강당도 함께 창건이나 수리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



강당으로서 규모가 큰 건물인데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면서도 대웅전의 위상을 고려하여 간결하게 장식을 갖추어 법당과 강당의 차별성을 두려 했습니다. 처음부터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라 기둥은 낮으나 공포를 크게 하여 외관과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앞면 4칸, 옆면 4칸으로 현재 온돌방 뒤쪽에 4칸의 마루가 깔렸으며 부엌도 지금보다 넓었다고 하지만 언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화엄강당은 봉정사 창건과 극락전 중창 그리고 조선 전기의 대웅전 중창 등 어떤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보면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448호


 

 


안동 봉정사 무량해회


무량해회는 앞면 4칸에 옆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달고 양쪽의 중앙에 칸 벽을 설치하여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조는 ‘트인 ㅁ자형’


 









 (참고:안동시청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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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500m가량 높이의 천등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산의 높이와 품새보다 산이 지닌 품격은 여느 명산에 비교해도 부럽지 않습니다. 천등산 정상 아래에는 천년고찰을 두개씩이나 품고 있는데 봉정사와 개목사입니다.




◆안동 개목사 인근 맛집과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2014/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와룡산, 천하를 호령하던 용이 몸을 뉘며 쉬었다는 와룡산에서 안동호의 한반도 지형을 만나다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2014/02/0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맛집 남안동 휴게소. 안동에서는 꼭 먹어야 할 음식 1호 안동 간고등어 맛집 남안동휴게소



그중 봉정사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현존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봉정사는 국보와 보물 등 작은 산에서 큰 사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동 천등산 봉정사는 앞으로 포스팅하겠지만 오늘은 소경 전설이 있는 개목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개목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스님이 창건하고 처음에는 흥국사라 하였습니다.




창건설화를 보면 천등산 정상아래 바위굴에서 능인스님이 정진수행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천녀는 스님의 수행을 시험하고자 온갖 감언이설로 파계하여 속세로 하산해 함께 살 것을 꼬시지만, 스님은 오직 부처님만 믿을 뿐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안동 개목사 원통전


천녀는 스님의 마음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님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시험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스님의 수도처인 동굴이 너무 어두워 옥황상제께서 보낸 등불로 환하게 밝혀 더욱 용맹정진하여 도를 이룰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능인스님은 더욱 정진하였고 마침내 크게 깨우쳐 하늘이 내린 등으로 도를 깨우쳤다 하여 대망산이라 불렸던 산은 천등산으로 바뀌었고 스님이 도를 깨친 굴은 천등굴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천등굴 아래 너른 터에다 99칸의 절을 세우니 이곳이 개목사의 전신인 흥국사입니다.




흥국사가 언제 무슨 연유로 개목사로 바뀌게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명제상이던 고불 맹사성(1360~1438)은 풍수지리에도 아주 밝았습니다. 그가 안동 부사로 부임하면서 안동 관내를 시찰하다가 유달리 소경(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천등산에서 흐르는 지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흥국사를 찾았고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게했더니 더 이상의 소경은 없어졌다 합니다. 그와 비슷한 전설은 천등산의 지세로 인해 소경이 많았는데 능인스님이 도를 깨치고 흥국사를 세운 다음부터 소경이 없어졌다하여 개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보면 모두다 개목사로 인해 눈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개목사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1969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천순원년(天順元年)' 글귀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1457년인 세조 3년에 처음 지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개목사 원통전의 규모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단층으로 맞배지붕형식에 풍판을 달았습니다.




내부의 천장은 뼈대가 드러난 연등 모양으로 윗부분이 노출되었으며 법당 안을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특히 개목사의 건물 형태는 안동의 많은 고가 종택을 닮았습니다. 사대부 문간채형식의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개목사 중심 건물인 원통전입니다.

 




문간채의 분위기를 보면 억겁의 세월이 내려앉은 듯한 무게 때문인지 원통전보다 더 오래된 모습입니다. 요즘같이 무더운 때 개방된 대청마루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았습니다. 낮은 돌담으로 넘어오는 바람은 오후의 나른했던 피로를 싹 삭혀주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 한다며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 쫓아다니고 눈도 충혈되고 피로했는데 소경을 치료했다는 개목사에서 잠시라도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혹시 아나요? 개목사 이름답게 아픈 눈을 시원하게 낫게 해줄지요. 



 

◆안동 개목사 여행정보

★안동개목사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개목사길 362 

보물제242호 1963년 1월21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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