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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6대 지마왕릉을 찾아서. 경주 남산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왕인 지마왕릉을 찾았습니다. 

지마왕릉은 포석정과 배동삼존석불 사이에 있습니다. 

그럼 지마이사금(재위 112~134)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마이사금은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지마, 지미입니다. 아버지는 신라 5대 파사이사금이며 태자였습니다.

 




경주 지마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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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허루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이며 비는 마제갈문왕의 딸인 애례부인 김씨였습니다. 

즉위한지 4년만인 115년 가야가 국경을 건너 노략질을 일삼자 지마이사금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의 양산시 물금의 낙동강을 건너 가야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가야의 역습에 걸려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으며 그 이듬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가야로 쳐들어갔습니다.

 




가야는 성문을 굳게 잠그며 별반 대응을 하지 않았고 지마의 군대는 우기와 겹쳐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야 정벌의 꿈을 접었습니다. 

121년에는 왜구가 쳐들어오고 다시 이듬해 재침한다는 흉흉한 소문에 민심이 들끓자 사태를 수습하고 왜구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제 한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번에는 난데없는 말갈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지마이사금은 백제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장수를 보내어 말갈족을 격퇴하면서 두 나라는 7대 일성이사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34년 지마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작은아버지인 일성이사금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하겠습니다. 

지마왕의 재위 시절에는 하늘과 땅에서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는 등 많은 변고가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마왕릉은 능의 밑 둘레가 38m이며 높이는 3.4m에 흙으로 봉분을 쌓은 단순한 형태입니다.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와 왜구.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공고히 했다고 안내판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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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신라 7대 경주 일성왕릉를 찾아서, 경주 일성왕릉


경주 서남산 아래에 있는 일성이사금(재위134~154)의 능인 일성왕릉을 보고 왔습니다. 

일성왕릉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능은  1730년경에 당시 경주김씨와 경주박씨 두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고 시조인 왕릉 찾기를 하면서 사료나 고증으로 일성왕릉이라 추정하면서 비정한 곳입니다.

이외에도 신라왕릉 대부분이 비정된 상태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신라일성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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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촌장이 박혁거세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2대 남해 차차웅의 뒤를 이어 3대 유리이사금은 유언을 하면서 박씨가 왕이 아닌 석씨인 석탈해가 4대 이사금에 오르게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일성왕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의 장자라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유리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지마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료가 정확하지 않는데 일성왕은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나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저도 일성왕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대해 소설을 한번 써 봤습니다.



3대 유리이사금에는 아도갈문왕과 파사이사금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석탈해왕의 뒤를 이어 유리이사금의 차남인 파사이사금이 5대 왕에 등극하고 6대는 파사왕의 아들인 지마가 이사금에 오르면서 다시 박씨로 정권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7대는 일성이사금입니다. 

일성이사금은 지마이사금의 아들이 아니고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본다면 지마이사금과는 사촌지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 일성이사금에게 왕권이 돌아왔는지에 대해 알수 없으나 지마에게 후사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여튼 제가 추리한 이 대목을 뒷받침하는 게 148년 일성이사금 15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갈문왕이 무엇입니까? 사후에 왕의 자리를 추봉하는 왕을 말합니다. 

일성왕은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아버지를 아도갈문왕에 추봉하여 정통성이 있는 이사금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종종 아버지를 왕으로 추봉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일성왕의 아버지는 아도갈문왕이라 추증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거는 역사학자가 밝히는 거고 저는 그냥 제 생각을 유추해 해봤습니다. 

어머니는 이간생부인이며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 부인이라설 등이 있습니다. 

재위기간 동안 말갈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력의 소모가 많아 대응책 마련에 많은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으며 금은주옥 등 사치품 사용을 금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일성왕은 재위기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성왕이 승하하자 8대 태자 아달라이사금이 해목령 아래 의전동 묘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낸 경애왕릉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능은 조선 영조 6년인 1730년경에 알려졌습니다.

아마 그때  두문중에서 서로 나눠 먹기에서 일성왕릉으로 비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은 나정과 양산재, 남간사지가 있는 탑동의 서남산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은 능선의 경사면에 자리했습니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이 16m이며 높이는 5m 쯤됩니다. 

현재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으로 추정되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습니다. 

봉분 내부에는 석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2단의 축대는 능을 보호하려고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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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신라 제49대 전헌강왕릉과 신라 제50대 전정강왕릉 여행. 헌강왕릉과 정강왕릉


경주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문화재 중 하나가 신라 왕릉입니다. 

신라는 935년에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 의해 망할 때까지 긴 역사를 가진 왕조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왕릉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아마 경주 왕릉을 다 둘러보려면 몇 날 며칠을 잡아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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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주의 많은 왕릉은 29대 태종무열왕을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무덤 주인을 밝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와 유사한 기록을 보고 후대에서 모두 비정한 상태입니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도 삼국사기의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1730년경에 경주김씨 문중에 의해서 비정된 상태라 합니다.



하도 왕릉이 많아서 훌륭한 업적이나 치적이 많지 않아 생소한 왕도 있습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 찾았던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은 약 400m 거리를 두고 다정하게 있습니다. 

이 두 분의 능은 경주 통일전 옆 남산자락에 있습니다. 

여느 왕릉과 마찬가지로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예스러움이 가득 묻어나 경건하게 옷매무시를 고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신라건국을 한 6촌장중 한 분의 후손으로서 예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헌강왕릉을 보고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정강왕릉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헌강왕은 그래도 많이 알려진 왕입니다. 

신라 49대 왕이며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이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알려진 경문왕의 아들입니다. 

875년에 즉위해서 12년간 통치했고 886년에 승하했습니다.

 


헌강왕 재위 시절의 통일신라는 태평성세를 누려 서라벌 민가의 지붕은 모두 기와를 올렸으며 밥은 나무 대신 숯으로 짓고 온 장안에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고 합니다. 

일왕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을 바쳤을 정도였다 하니 말입니다. 

또한. 헌강왕 시절에 ‘처용무’도 만들어졌습니다. 

하루는 헌강왕이 울산지방의 세죽에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물가에서 여유롭게 앉아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껴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헌강왕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하였고 동해의 용왕이 한 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헌강왕은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 이곳에다 동해 용왕을 위한 절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사라졌습니다. 

이러하여 개운포라는 지명이 현재에도 남아 있습니다.

 


동해 용왕은 헌강왕이 자신을 위해 절을 짓고 망해사라 한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일곱 왕자와 함께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였습니다. 

용왕의 왕자 중에서 한 명을 궁궐에 남게 하여 헌강왕을 도와 정사를 돌보게 했는데 그 왕자가 처용이었습니다. 

처용이 하루는 궁궐에서 늦게 귀가하자 아내를 범하려는 천연두를 옮기는 귀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용이 자신이 지은 노래와 춤을 추어 역신을 물리쳤다는 설화인데 그때 춘 춤과 노래가 오늘날의 처용무입니다. 

처용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2009년 지정되었습니다. 

헌강왕릉의 높이는 약 4m이며 능의 지름은 약 15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입니다. 

현재 헌강왕릉의 하단부에 4단의 호석을 두른 상태입니다.


신라 제49대 전헌강왕릉



1993년 왕릉 내부 조사과정에서 벌써 도굴된 상태였으며 길이 142cm, 너비 128~96cm 크기의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는 구조입니다.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에다 벽면은 큰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았는데 천장으로 올라갈수록 원형으로 모이는 형식입니다.











정강왕릉은 신라 제50대 왕을 지냈습니다.

 경문왕의 아들로 헌강왕의 아우였습니다. 

이름은 ‘황(晃),’ 헌강왕이 승하하자 태자 요(嶢)가 돌이 안 된 어린 나이였기에 김황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886년에 왕위를 이어받아 1년간 재위하다 887년 승하했습니다.



신라 제50대 정강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워낙 재위기간이 짧아 뚜렷한 업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황룡사에서 열린 백고좌에 참석하였고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했을 정도입니다. 

봉분의 높이는 약 4m이며 지름은 약 15.5m로 헌강왕과 마찬가지인 원형 봉토분입니다.

 봉분 아래쪽에 2단의 호석을 돌렸는데 맨 아래쪽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다 자연석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았습니다.

능 앞에 1장의 넓은 돌인 상석이 있고 그 앞에 장방형의 돌을 다듬어 석단을 만들었습니다. 

 






헌강왕름과 정강왕릉의 호석에 관한 새로운 재기를 발표한 논문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의 호석구조에 관한 위덕대학교 이진락교수님의 연구 논문입니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의 호석구조는 민애왕릉과 비숫하며 두 왕릉의 요석 층수는 4단과 2단이 아니라 모두 3단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나오는 1910년대 헌강왕릉과 정강왕릉 기록사진과 1995년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간행한 ‘헌강왕릉보수수습조사보고서(憲康王陵補修收拾調査報告書)’에 나오는 헌강왕릉 토층단면도 등 자료를 비교 분석하였다"는 이진락교수님의 ‘전헌강왕릉과 전정강왕릉의 호석 원형에 대한 일고찰’의 논문에서 입니다. 


신라 제50대 전정강왕릉



그러니까 논문은 두 왕릉 모두 지대석 위에 3단 요석, 그 위에 갑석을 올린 형식이라 합니다. 

이진락교수님 논문의 일부지만 이러한 사실을 보지 못했다면 헌강왕릉은 4단 호석이고 정강왕릉은 2단 호석으로만 그저 알고 넘어 갈 뻔 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왜 다른 호석을 했는지 문화재청의 정확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헌강왕릉과 전정강왕릉 호석은 이러한 사실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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