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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종을 치면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하며 꼭 어린이가 엄마를 부르는 듯해 그 종을 사람들은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이종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며 처음에는 봉덕사에 있어 봉덕사 종이라고도하고 성덕대왕 신종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2016/10/14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최치원의 사산비명 비석 귀부였던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을 보다

2016/10/13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하라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2016/10/12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대왕의 생전 공덕을 기리고자 봉덕사에다 종을 만들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봉덕사신종은 그의 아들인 771년 혜공왕 때에 완성하는데 그게 성덕대왕신종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은 종을 주조할 때 시주해온 어린아이를 종과 함께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


그 전설을 보면 경덕왕은 봉은사에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봉은사로 달려갔지만, 그때마다 종소리는 맑지 못하고 둔탁하며 깨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경덕왕은 실망하였고 주지 스님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렇다며 열성을 다하여 시주해올 것을 스님들에게 당부합니다. 경덕왕은 봉덕사 스님에게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신라 백성들은 삶은 궁핍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입에 풀칠할 건더기도 없는 생활이었는데 하루는 주지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한 농가에 찾아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지 스님이 직접 시주를 받으러 왔는데 시주할게 없는 게 미안하여 “우리 집에서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저 아이밖에 없습니다. 저 애라도 필요하시다면…….” 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비천상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아이를 어찌 시주로 받습니까?” 하면서 돌아 나왔습니다. 그날 밤 주지 스님의 꿈에 “봉덕사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생한 울림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고심 끝에 스님은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 아이를 시주로 받아 갈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시주로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다 부처님 뜻”이라며 합장을 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 나왔습니다. 그 뒤 봉덕사에는 새로운 종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혜공왕은 물론이며 경주의 모든 백성이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종소리를 들으려고 봉은사로 달려왔습니다. 왕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스님은 종을 힘차게 쳤습니다.


 




그런데 청아한 어린이의 목소리가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듯 “에밀레, 에밀레” 하며 종은 슬픈 소리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며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는 게 교리입니다. 그래서 에밀레종을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종의 성분을 조사하였는데 뜻밖에도 사람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혀졌습니다. 아마 성덕대왕신종의 신비로움을 강조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용뉴와 음통





에밀레종의 크기를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높이가 333cm, 종구 너비는 227cm, 무게가 18.9톤의 초대형 종으로 국보제29호 지정 되었습니다. 또한, 종의 표면을 조각한 무늬를 보면 위쪽에는 보상화무늬와 모란당초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렀고 종신에는 4개의 유곽이 있으며 그 유곽안에는 각각 9개로 다 합쳐 36개의 유두가 있습니다. 흔히 유두는 연꽃봉우리와 비슷하여 연뢰라고도 합니다. 종을 치는 부분에는 두 개의 연화 당좌를, 또한 종신 가운데에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받쳐 들은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위에 무릎을 꿇어 앉고 공양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비천상의 대표라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나타내는 듯한 비천상은 더욱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하여 성덕대왕신종의 의미를 말하는듯합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자와 합해 범종이라 합니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하며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던 중생까지도 모두 구제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하면 한자로 쇠 금(金) 자와 아이 동(童)자를 합해 일반적으로 종(鐘)자를 쓰며 이는 중국과 일본의 종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은 쇠 금에 무거울 중(重 )짜가 합해진 새벽종·쇠북종(鍾)자입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종은 우리 종과는 많이 다른데 종을 매다는 용뉴는 중국은 머리 둘 달린 용이라면 우리 종은 한 마리의 용이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또한, 우리 종의 특징은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음통이 용뉴 옆에 붙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상원사동종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범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성덕대왕신종을 경주여행에서 만나보고 에밀레종의 의미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밀레, 에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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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 동부동 KT 건물 뒤에 도심지의 있는 고려 시대 돌로 만든 경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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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옛 경주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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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경고이 쌓은 석성의 모습이 90m정도 남아 있다.

경주읍성을 보면서...

제 고향은 경주입니다. 경주의 이야기나 남산의 이야기가 나오면 옛 추억들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나곤합니다. 이번에도 벌초를 한다고 고향에 하늘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벌초후 경주시내의 경주 읍성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산을 다니다 보니 산성의 흔적은 여러번 보았지만 평지인 마을의 성은 보기가 힘든 구경입니다.
금전산 밑의 낙안읍성과 서울 장안의 4대 문등 경우 떠오를 정도입니다. 금전산을 산행하다가 잘 보존되고 있는 낙압읍성의 현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랬는데 도심한복판의 서울 4대분이나 경주의 읍성은 모든 성이 주택가가 들어차서 성의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정도입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읍성의 존재를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찾아본 경주읍성은 현재 90m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예전에 여기가 성이였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주택의 담장에 걸쳐져 있어 옛 성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석성의 위의 큰 고목만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읍성은 사적 제96호이며 경주시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주에는 열매시장인 성동시장과 아랫시장이 있습니다. 그 대로변 중간에 kt 건물이 있어며 그 건물 뒤에 석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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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남은 석성의 흔적은 담쟁이가 덮혀 있는 어느집 돌담역활도 하고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함께한 성을 의미한다합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부동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가 4,075자(尺:2400m)이며 높이가 12자(尺:3.6m)인 돌로 만든 석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경주읍성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합니다. 이곳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과 관아, 우물80여개를 있었다하니 많은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서남북으로 사대문을 두어 향일문인 동문, 망미문인 서문, 남문인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을 두었다 하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해자(垓字)도 갖추었다 한다.
남문인 징례문에는 현제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주읍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는데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였다한다.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헐리고 읍성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인 90m 남아 현재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경주시에서 최근 경주 읍성 복원계획을 실행을 하고 있다 한다. 고려 태종 왕건이래 역대고려왕들은 경주읍성을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 994년에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을 삼은 경주읍성을 복원하기위해 2002년부터 주위의 토지보상과 건물철거등으로 83억원을 투입하였고 2012년 까지 총605억원을 들여 동북성곽 1100m및 동문의 향일문과 북문인 공진문을 복원한다고 한다.

하루빨리 복원이 되어 옛 경주의 모습을 보았서면하고 낙안읍성처럼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었서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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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에서 출토된 주춧돌과 경주읍성을 알리는 초라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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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모습을 보이는 경주 읍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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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성곽의 모습과 그 뒷면으로 돌아가면 보는 모습으로 쓰레기가 나뒹굴고 자라난 나무등으로 곧 허물어질 태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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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현장의 오래된 고목, 밑둥치만 남기고 있지만 고목에 그래도 싹이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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