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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일년중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천년고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여행을 하다. 문경 봉암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1년 중 부처님오신날 딱 한 차례 산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여느 사찰처럼 불쑥 대웅전을 참배할 수 없으며 문경여행을 왔다고 해서 봉암사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다른 도량과 달리 창건부터 지금까지 선도량으로 일관되게 이어졌으며 1982년 6월에 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암사의 경내는 법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반경 4km라 하니 희양산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백운대계곡 등 모두 봉암사 소유로 평소에는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봉암사의 내력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 그러니까 879년(헌강왕 5년) 지증대사 지선이 창건했습니다.



봉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의 직지사 말사로 선종산문인 선문구산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종찰입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의 명성을 들었던 심층은 수행도량으로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겠다 하자 지선은 처음에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뒤 지선이 이곳을 둘로 보고 “스님의 수도 도량이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며 이곳에다 절을 세웠습니다.

 


지증은 용의 뿔처럼 우뚝 솟은 희양산의 바위봉우리와 그 아래에 펼쳐진 산자수려한 계곡을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감탄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수도 도량을 세우라는 ‘부처님의 계시’라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나 봅니다.

 


일개 범부인 제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봉암사는 그만큼 좋은 장소라 생각되었습니다. 지선이 절을 짓자 881년에 헌강왕은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지증국사 이후인 935년(태조 18년) 정진대사가 머물 때는 3천여 대중이 봉암사에 몰려 동방장,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수도 할 정도로 선풍을 일으켜 꾸준하게 그 맥이 이어졌습니다.

 


조선 초기인 1431년(세조 13년)에 기화스님이 중수하였고 1674년(현종 15년) 신화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봉암사를 중건하였으며 1915년에는 세욱스님이 쇄락한 당우를 중건하였고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습니다. 봉암사는 1947년 해방과 함께 새로운 변혁기를 맞습니다. 

이는 ‘봉암사 결사’로 성철스님이 앞장서고 청담, 자운, 우봉스님 이 네 분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봉암사로 택했습니다. 그 후 20인이 동참하여 오늘날 봉암사 수행 도량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봉암사를 두른 암봉이 참 대단합니다.

 


봉암사 뒤 솟은 암봉은 희양산입니다. 여기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의 흥한 기운을 끊으려고 희양산 정상 바위에다 칼로 다섯 줄의 홈을 파내어 혈도를 끊은 곳입니다. 참 나쁜 놈입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구원군의 최고장수인 이여송은 지관과 함께 우리나라 명당이란 명당의 혈도를 끊으러 다녔다 하니 그래 올케 전쟁을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암사는 절 입구 삼거리에서부터 일체 차량 진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부터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봉암사 마을버스 종점까지 들어갔고 내려서 걸어 봉암사로 가야 했습니다.


봉정사 일주문은 경내 목조건물에서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되었습니다. 1900년경 봉암사 일주문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18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침류교를 건너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남훈루 현판이 걸린 가운데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봉암사에서 목조건물이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만났습니다. 봉암사는 창건 이래 잦은 전란으로 소실되었지만 그중 극락전만은 용케 화마로부터 남아 보물 제1574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앞면 1칸, 옆면 1칸에 2층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겹처마에 네 모 반듯한 평면건물에 올린 사모지붕을 하였습니다.

 

 

 


그 중앙에 석탑의 상륜부를 올려 탑의 형식을 갖춘 건물입니다. 봉암사 극락전 내부에 어필각(御筆閣) 편액이 있으며 이는 신라 경순왕이 전란에 봉암사로 피신하여 원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며 주위에 남아 있는 지명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습니다.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을 우측에는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에서 2010년 1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될 만큼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이 대단히 뛰어나고 비신의 높이는 273cm, 넓이 164cm, 두께 23cm로 웅장한 규모의 탑비입니다. 지증대사는 신라 진골로 경주김씨이며 법호는 도헌이며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산조입니다. 840년(문성왕 2년)인 17세에 영주 부석사에서 경의 율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강왕은 왕사에 임명하지만 거절하며 그가 창건한 봉암사로 돌아와 59세 법랍 43세에 입적하였습니다. 왕은 그에게 지증이란 시호를 내렸고 탑명은 적조라 하였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과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893년에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짓고 분황사의 석혜강스님이 글씨를 각자 했습니다.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은 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인 무덤입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59세에 봉암사에서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자 헌강왕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인 지증과 탑명인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신라의 승탑양식인 팔각원당형이며 높이는 341cm, 지대석 넓이는 228cm로 옥개석의 부분적인 파손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부도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부도입니다. 기단부의 중대석은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을 장식한 사리함,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또한, 중대받침석은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인 가릉빈가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상대석은 팔각의 탑신에 사리함을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좌우로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과 보살을 돋을새김하여 사리함을 수호하도록 했습니다. 지증대사의 부도는 화려하면서 장엄하며 정교하여 당시 신라예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와 지증대사적조탑 보호각

봉암사 수도도량 공간으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금색전 

 


봉암사 삼층석탑은 육중한 희양산의 암봉을 떠받치는 듯 장엄 웅장하며 가볍고 날렵하지만, 결코 촐랑대듯 경망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지만, 상륜부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으며 예술성을 갖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석탑 중 한곳입니다.

 

 


봉암사 경내인 금색전 앞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양 높게 솟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631cm, 상륜부 높이 238cm, 지대석 넓이 324cm로 대단히 큰 규모의 석탑입니다.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완벽한 구성으로 남아 있는 상륜부로 노반 위에 네 개의 꽃잎을 돋을새김한 복발을 놓고 그의에 사각 모양의 양화를 올렸습니다.

 

 

 


방형모양에 4면과 각각의 모서리에 6엽과 4엽의 연꽃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5단의 보륜을 올렸으며 팔각의 보개를 놓고, 십자 모양의 수연 끝에 용차와 보주를 차례로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륜부의 원형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철심을 관통하여 상륜부를 잡아주었기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균형 잡힌 모습에 안정감이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완벽미까지 인정받아 보물 제16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2016/06/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의 꽃이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예술품 문경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문경 봉암사


 

 

 

 

 


범종각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는 봉암사 입구인 침류교로 되돌아 나오면 마애불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용추동천인 백운대계곡을 따라 700m가량 계곡 옆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가면 물소리가 요란한 백운대입니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마치 옥구슬이 구른다 하여 옥석대로도 부릅니다. 등줄기의 땀을 식히며 푸른 녹음에 감탄하다 보면 그 한 쪽에 4m 높이의 편편한 바위에 조각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과 마주합니다.

 

 

 

조선시대 승려 환적의천선사의 원불이라는 기록이 백운대 미륵비명에 나와 있으며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은 깊게 파내어 감실 같은 느낌을 들게 처리했습니다. 몸통과 결가부좌한 다리 쪽으로 내려갈수록 조각이 옅어지며 머리에 쓴 보관에 꽃무늬가 있으며 반달 같은 양쪽 눈썹에 백호가 뚜렷하고 반쯤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두손은 연꽃을 들었고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을 얇게 선각하였고 옷의 띠 매듭, 주름선 까지 아주 유려하고 뚜렷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불상의 제작기법을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신라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백운대를 각자 한 바위와 돌로 암반을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목탁바위도 있습니다.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스님의 수행 도량이며 부처님오신날까지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문이 꽉 잠겨진 진공문.

 

 봉암사 설봉대사비

 

 

 


정진대사 원오탑비입니다. 보통 부도와 함께 조성하는데 특이하게도 멀리 떨어져있어 정진대사 원오탑인 부도는 보지 못하고 왔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진대사 긍양은 신라말에서 고려 초 스님이며 성은 왕씨입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고난 뒤 공적을 각자한 비문으로 965년(광종 16년)에 세웠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의 높이는 273cm, 폭 161cm, 두께 26cm로 고려 초기의 조형미를 잘 보여줍니다.

 

 

 


비신은 청석이며 이수와 귀부는 고려 초기의 탑비 양식을 따랐습니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는데 거북 등에 비를 꽂는 비좌가 큰 게 특징이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불꽃무늬에 둘린 연꽃봉우리 문양의 보주 장식이 웅장하게 조각되었습니다. 비문의 필체는 2cm 크기의 구양순체 해서로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짓고 명필로 이름 날렸던 장단열의 글씨라 합니다.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올해 부처님오신날 찾았던 문경 봉암사는 스님의 수도 도량이라 그런지 정말 맑고 깨끗한 법신이 머무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찾았던 봉암사라 그런지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으며 2017년 부처님오신날이 또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그때는 더욱 자료 등을 준비하여 이번에 찾아보지 못한 곳을 여행해야겠습니다.

 

 

 

 

희양산 

 

◆문경 봉암사 정보◆

봉암사 주소: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전화:054-571-9088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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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입니다. 봉암사 경내에는 구산선문의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대사의 사리탑인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무덤입니다.





◆문경 봉암사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그러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지증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을 뜻합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으며 지증대사는 통일신라 말에 활동하던 승려입니다. 법명은 도헌(824~882)이며 자는 지선으로 김씨성에 경주사람입니다

 


아버지 찬괴와 어머니 이(伊)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불가의 가르침를 따르겠다며 영주 부석사로 출가하여 840년 (문성왕 2년)에 그의 나이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에 임명되지만 간곡하게 사양하고 봉암사에 돌아온 다음 해에 결가부좌로 입적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9세에 법랍 43년. 헌강왕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는 지증, 탑명은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 적조탑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승탑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랐습니다. 승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341cm, 지대석 너비가 228cm이며 옥개석이 일부 파손된 것을 빼면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지대석은 넓은 돌을 여러 장 네모반듯하게 바닥 돌로 깔았으며 가운데 탑신부의 탑신에 사리를 봉안하고 위로는 옥개석을 덮어 부도의 상륜부인 머리 장식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이를 받치는 기단부는 하·중·상대석으로 나누는데 하대석은 구름무늬 조각인 안상에 사자를 조각했으며 중대석에는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으로 장식한 사리암,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가릉빈가 



그리고 중대받침석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우아하고 섬세하게 조각한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습니다. 가릉빈가는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부처님이 설법할 때 옆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석은 탑신을 괴는 탑신 괴임을 두었고 각 모서리에는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난간을 나타냈습니다. 탑신은 팔각의 몸돌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앞뒤 두 면에는 사리를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문 문양 양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조각하였고, 남은 두 면에는 보살을 돋을새김했습니다. 옥개석은 몸돌과 같은 팔각이며, 아래 면에 조각된 서까래는 두 겹으로 표현하여 겹처마 집을 연상하게 합니다. 처마는 살짝 들렸으며 그 끝에 꽃장식이 달렸습니다.

 


상륜부에는 노반인 연꽃받침 위로 복발, 보름, 보개, 보주 머리 장식이 차례로 얹혔습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자 시신을 현계산 안락사(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일대)에 모셨다가 다시 1년 후 인 883년 12월에 그의 제자들이 희양산 아래에다 대사의 시신을 장사 지내고 지금의 자리에 적조탑을 세웠다합니다.

 

 


봉암사 적조탑은 883년인 헌강왕 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국보인 화순의 쌍봉사 철갑선사 부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신라시대 부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습니다. 정말 또하나의 아름다운 승탑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만났습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보물 제137호

문경 봉암사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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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부처님오신날만 산문을 개방하는 봉암사를 방문하면서 여러 곳을 한꺼번에 보려니 가랑이가 찢어지게 바쁘게 쫓아 다녔습니다. 봉암사 경내인 극락전, 지증대사 탑비와 승탑, 그리고 봉암사 삼층석탑을 보고 난 뒤 돌아 나와 다시 침류교를 건넜습니다.





◆문경 희양산 주위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백운대에 있는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마애보살좌상까지는 700m 정도를 용추동천를 따라 계곡을 거슬러 가야 합니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엊그제 같았는데 봉암사를 찾은 5월 14일은 완전 녹음방초가 우거진 초여름 날씨였습니다.

 



바위를 타고 구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그만큼 반가운 것을 보면 계절은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와 덩달아 봉암사 백운대 계곡도 앙상한 나무였던 겨울의 잔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연두색 나뭇잎으로 모두 갈아입었고 오랜만에 콸콸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보면서 백운대의 감흥에 취했던 하루입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은 석면 미륵불로 조선 시대 승려 환적의천선사(1603~1690)의 원불이라는 기록이 희산구법의 백운대 미륵비명에 실려 있습니다. 4m 높이의 편편한 바위에 조각하였는데 머리 부분을 깊게 파내어 감실 같은 느낌과 광배 역할을 겸하도록 처리했으며 몸통과는 달리 머리 부분은 눈에 띄게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조각하였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몸통과 결가부좌한 하체는 선처럼 홈을 파서 새긴 선각 기법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의 중간에는 꽃무늬가, 양쪽 눈썹은 백호가 뚜렷하고, 반달 같은 눈썹에 반쯤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손상된 코는 후에 보수 하였으며 입은 아주 얇고 작으며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 긴 귀와 주걱턱 같은 턱,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었습니다.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을 얇은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띠 매듭과 옷의 주름선은 유려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두 손으로 연꽃을 들었으며 드러난 발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른발을 위로 올린 결가부좌의 자세에 하체를 높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릎 사이 간격을 넓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연화 문양의 대좌는 심한 마멸로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이 불가하고 불상의 제작기법으로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봉암사 경내에 있어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암반을 봉암사 백운대라 부르고 신라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백운대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료부족으로 백운대 각자는 만나지 못하고 내려와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백운대 너럭바위 위로 구르듯이 흐르는 물이 마치 옥과 같다 하여 옥석대라는 닉네임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백운대의 너럭바위를 돌로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난다 하여 목탁바위라고 도합니다. 이는 바위를 두드리면 속이 비어서 내는 공명음으로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상이 자리한 백운대는 용추동천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주위 경치가 매우 빼어나 누구나 이곳에 들면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생각합니다. 아쉬운 봉암사 여행이지만 이제 또다시 내년 부처님오신날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청정수도도량인 봉암사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백운대 마애보살좌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백운대를 찾을 때는 최치원이 각자 한 백운대 글씨와 목탁소리를 낸다는 바위도 꼭 두드려 보아야 겠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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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이번 부처님오신날 문경에 있는 희양산 봉암사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봉암사를 가기 위해 여러 번 벼루고 벼룬 절집여행인데 갔다 왔다는 행복감보다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움이 많았던 여행이었습니다.




◆희양산 주변 가볼만한 여행지◆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포스팅을 보다가 아니 무슨 사찰을 찾아가는데 벼루로 가는 야고 저에 반문하겠지만, 이곳 희양산 봉암사는 여느 사찰처럼 가고 싶다고 해서 불쑥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년 중에 그것도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봉암사 산문을 개방하고 그 외에는 산문 폐쇄로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혹시나 못 보고 빠트리고 오지 않을까 싶어 미리 집에서 봉암사 여행을 위한 여러 문화재 자료를 찾아 준비를 꼼꼼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분명히 자료집을 챙겼는데 막상 봉암사 앞에서 문화재 자료집을 어찌했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정진대사 원오탑비만 보고 승탑인 정진대사 원오탑은 찾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 ‘함허당득동탑’, ‘환적당지경탑’ 등 조선시대 승탑도 빠트리고 오는 바람에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봉암사 여행이었습니다. 첫술에 배불리 먹으려는 게 지나친 나의 욕심이었는지 아니면 내년에 다시 봉암사 여행을 계획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봉암사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봉암사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이번에는 봉암사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는 중창을 하여 오늘날 봉암사의 뿌리를 있게 했던 분이 정진대사입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봉암사 일주문에서 계곡 건너편 묵밭 가운데 비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승탑과 비문은 대부분 같이 세워져 있는데 정진대사 탑비와 비문은 서로 떨어져 있어 안내판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아쉽지만 정진대사 원오탑비만 이번에 보겠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스님으로 성은 왕 씨며 정진대사(878~956) 긍양의 공적을 각자하여 남긴 기록입니다. 정진대사탑비는 고려시대 965년인 광종 16년에 건립되었는데 높이가 273cm, 폭 161cm, 두께는 26cm로 당시 고려시대 초기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신은 청석이며 귀부와 이수는 일반적인 고려 초기의 탑비 방식을 따랐으며 귀부인 거북받침돌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인 머릿돌을 올렸으며 거북 등에 비를 꽂는 비좌가 큰 게 특징입니다. 이수의 끝에는 불꽃무늬에 둘린 연꽃봉우리 문양의 보주 장식이 정진대사탑비를 더욱 웅장하게 만듭니다.

 

 


 비문의 필체는 2cm 크기 구양순체 해서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짓고 명필이었던 장단열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비는 정진대사 입적 9년 만에 세워졌으며 현재 비문은 대체로 양호하고 1행에 103글자를 새겨 53행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꽤 큰 비신입니다.


 


정진대사는 공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남혈원의 여해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양부선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수학하였으며 900년인 효공왕 4년에 25년간 당나라에 유학하여 도연을 만났고 924년 신라 경애왕 원년인 7월에 귀국하여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고려 태조, 혜종, 정종도 그의 높은 학식을 존경하여 선문에 들었으며 광종 또한 그를 존경하여 사나선원에 모셨습니다. 광종4년에 봉암사로 들어가 965년 8월에 향년79세로 입적하자 광종은 친히 ‘정진’의 법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렸습니다.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보물제172호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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