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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비사는 고려시대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 이전의 오갑사 사찰은 어떤 이유에선가 모두 폐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운문사도 폐찰되었다가 보양국사가 까치의 도움을 받아 절터를 찾아 운문사로 이어져 오고 있듯이 대비사도 그 이전의 소작갑사는 폐찰이 된 모습을 박곡리 곡란마을 뒤 베틀바위 아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 대비사는 신라진흥왕 18년인 557년에 복호산 아래에 있는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한 신승이 3년 동안 수도한후 560년에 7년간에 걸쳐 대작갑사 소작갑사,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인 오갑사를 창건하였다. 대작갑사가 현재의 운문사이며 소작갑사가 현재의 대비사이다. 소작갑사에서 대비사로 이름이 바뀌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자대비"'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절에 머물렀다하여 대비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비사는 신라진평왕22년인 600년에 원광법사가 운문사와 함께 중창을 하였다한다. 그후 사찰은 폐찰의 수순을 밟다가 고려시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중건이 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인 대웅전은 보물제8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중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다포계의 공포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의 외관은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원래의 목재건축물로 돌아가 있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지 대웅전의 빚바렌 단청으로 그의 무게가 더욱 느껴진다.

교통편: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2차례)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과 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박곡리석조여래좌상을 지나 박곡저수지를 돌아가면 대비사앞 주차장이다.








대비사는 이무기의 전설이 남아 있다. 어느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사 작은 암자에 스님과 상좌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방에서 잠을 자던 스님은 감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을 보니 상좌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상좌의 몸을 만저 보니 몸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데 그 다음날도 상좌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는게 아닌가. 다음날밤 스님은 잠자는 척 하면서 상좌의 동태를 살펴보니 상좌는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와 옆에 눕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저 들었다. 역시 몸이 차가운 상태였다. 다음날 밤이 되어 상좌는 다시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 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자는 척 하던 스님도 뒤따라 나와 상좌를 따라가니 상좌는 대비사 앞 연못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뒤 상좌의 몸은 이무기로 변해 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가 다시 나와 옷을 입고는 산너머 골짜기인 이무기못안골에서 빗자루를 들고는 쓸고 있지를 않는가. 놀란 스님은 '네 이놈.상좌야. 네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느냐'하며 호통을 치니 상좌는 감짝놀라  이무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며 '아 억울하다 천년을 기다렸는데. 오늘만 지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수 있었는데'하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억울함에 꼬리로 뒷산의 바위를 힘껏치고는 뒤편의 호박소로 날아갔다는는 전설이 있는 대비사. 그 깨어진 바위가 억산의 깨진 바위가 되었다 한다.

대비사에는 오래된 연륜 만큼이나 부도밭에 고승대덕의 부도탑이 11기 남아 있다. 지금은 부도밭 뒷편의 자연석에 석가여래좌상을 새겨 놓았다.









대비사의 전신인 소작갑사터로 신라시대 신승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창건된 오갑사의 대비갑사 즉 소작갑사터다.
지금은 대추나무 밭으로 조성이 되어 있고 밭사이로 연꽃무늬대좌와 석등의 받침대 그리고 깨어진 기왓장등이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소작갑사터에서 바라본 박곡리마을 전경. 그아래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 능선이 와불능선으로 명명을 하였다. 사진상으로는 안나오지만 왼쪽 끝 부분에 봉우리가 남양리에서는 부처산으로 불리고 있다 한다. 어째 이름이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이...
소작갑사터 아래에 있는 골안저수지로 이곳이 혹 대비사의 이무기 전설이 전하는 그 연못이 아닐까.상좌로 변한 이무기가 밤마다 나와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는 이야기의 대비지가 아닐까. 정면 중앙에 보이는 독립가옥 밑이 옛대비사 터인 소작갑사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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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560년경 신라 진흥왕21년에 북대암 금수동에서 수도를 하던 신승에 의해 창건 되었다. 그 후 608년 원광법사가 이절에 머물며 신라가 불교로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 뒤 후삼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작갑사인 운문사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며 보양국사가 중국에서 유학한 후 돌아오는 길에 서해용왕의 부탁으로 설법을 전하니 금색비단으로 된 가사 한 벌과 그의 아들인 이목을 딸려 보내 보양을 보필하게 하였다.

용왕이 이르길 ‘지금 삼국이 어지러워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어니 그대가 작갑에 절을 중창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와 삼국을 통일하게 될것이다“하니 운문사를 중창하게 대는데 보양이 운문사 북쪽 능선마루에 올라가 절터를 찾았는데 광체를 발하는 5층의 누런 전탑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와 찾아 보니 그 전탑을 찾을 길이 없어 다시 북대암에 올라가 보니 까치가 그 자리에서 쪼고 있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 보니 벽돌이 나왔다 한다. 벽돌을 쌓아 올리니 5층의 전탑이 되었는데 보양국사가 능선마루에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을 때 본 그 누런 황탑이었다. 보양국사는까치들의 도움으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았다하여 중창한 사찰을 작갑사라하였다. 그 후 까치들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기리고자 작압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작압사로 불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보양국사가 운문사 인근의 왕건을 반대하는 잔당들을 소탕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전지500필과 운문선사란 사액을 하사한 후로 운문사로 바뀌었다한다. 현재의 작압은 1941년에 일제때 종무소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겨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41년 이전 모습의 작압전은 전탑 형태를 유지하는 1층의 모습이었다 한다. 운문사 개보수를 할 때 나왔던 63cm 크기의 석불좌상과 전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만 할뿐 사용 용도가 불분명한 사천왕상 4기가 작압전에 함께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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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는 천년고찰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어떤 곳이냐?.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현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내려와 도반10여명의 도움을 받아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7년 동안 오작갑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오작갑사인 운문사는 대작갑사(현운문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현 대비사.대비갑사라고도 함),  소보갑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현 대작갑사인 운문사를 중앙에 두고 동서 남북으로 사갑사를 배치하였다 한다. 600년인 신라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주지로 와 중창을 하게 된다. 원광국사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서 주석을 하며 가슬갑사에서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전해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큰 역활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증강을 위하여 불교와 손을 잡고 운문사 일원에 화랑도의 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 운문사는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화랑도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였으며 운문면 일대에는 선사시대때 부터 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 되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이 모두 화랑도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운문사의2차 중창은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후 왕건을 도와 이 일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양국사에게 운문선사란 사액을 내리고 전지500결을 하사하였다. 그후 1105년에 원응국사 학일스님이 왕사로 책봉되고 운문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1277년 고려 충렬왕때 일연선사가 주지가 되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운문사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대 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운문사를 자세히 보면 여타 사찰과 다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운문사는  대웅전 비로전 금당등 모든 건물들이 운문산와 마주보고 있다. 즉 남쪽의 산을 향해 건립되었는데 풍수학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와는 정 반대이고 왼쪽은 복호산, 우측은 장군봉인 호거대로 운문사의 가람배치가 배산임수를 그대로 따라 운문산을 등지고  건물이 서 있었다면 현재의 운문사는 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한다. 그 이유는 운문사 옆으로 흐르는 약야계가 절 앞으로 곧장 빠져나가 재산을 모을 수 없고 운문산의 화기가 절을 덮쳐 비보 차원에서 다른 절과 반대방향인 가람배치를 하였다 한다. 

사실 운문사 경내를 들어설때 보통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운문사는 일주문 대신 2층의 법종루 밑으로 통하면 된다.

영남알프스에 걸 터 앉은 절집 현판에는 모두 그 뒤 모산의 산명을 따라 이름을 붙인다. 가지산 아래 가지산석남사가 그러하고 통도사는 영축산통도사, 재약산표충사등 모든 사찰들이 그러하다. 영남알프스 운문사만은 유독 ‘운문산운문사’가 아닌 ‘호거산운문사’로 현판에 적혀 있어 어... 호구산이 어디지, 왜 운문산이 아니고 호거산으로 하였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호거산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어느곳도 정답이 없으며 단지 현재의 우리도 옛 자료를 보며 추측을 할뿐이다. 먼저 운문사는 사찰이름에 나왔듯이 운문사란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운문산이 먼저인지 의문이 간다. 운문사란 937년인 태조20년에 후삼국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왕건이 보답으로 '운문선사'란 사액과 전지500결을 내렸다한다. 그러면 운문산 보다 대작갑사로 불리던 운문사가 먼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전부터 운문산으로 불리었을까하는 의구심도 해 본다..

호거산은 과연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운문사로 들어서는 왼쪽으로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세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통점과 염창등 신원마을에서는 복호산으로 부른다. 그리고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창건 할때에도 신승이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도를 깨닫고 운문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곳을 호거대, 호거산으로 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다른부류는 운문산 일대로 범봉과 억산을 포함한 이곳을 호거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운문사 입구 우측의 툭 튀어오른 암봉이 호거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원리에서는 등선바위, 등심바위, 등신바위등으로 불리는 바위로 운문사에서 이 암봉을 장군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도 향토사학회장 경북향토 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운문사 옆 호거대와 그 인근을 호거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호거산을 ‘호랑이고 걸터 앉아 있는 산’이 아닌 다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소주에도 똑 같은 이름의 호거산이 있는데 원광법사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원광법사는 운문사에 거주를 하면서 바위가 있는 호거대 일원을 호거산으로 지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계곡인 운문사를 가로자르는 큰골도 약야계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호거산은 원광법사가 중국의 소주 호거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어며 위치는 호거대와 부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군평 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인 호산으로 부르고 있다.




운문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처음 반기는 것이 500년 된 반송이다. 가지를 밑으로 축처저 일명 처진소나무로 불린다. 봄에 25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나무로 유명하며 안내판에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하며 높이는 6m,둘레는 3.5m로 나와 있다. 천연기념물제180호.




처진 소나무 옆으로는 만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약150평의 크기이며 목조건물이다. 넓은 우물마루에 천장은 천장은 산자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으로 기와명문에는 강희17년, 상량문에는 순치12년이라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용도는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어 법회나 설법을 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의 내부 모습








대웅보전으로 조선 숙종 44년에 중건되었다.정면3칸 측면3칸으로 다포계 양식이며 마륵전이라고도 부른다. 운문사의 대웅보전 터는 행주행으로 전복되는 배모양이다.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대웅보전 앞에 쌍탑인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보물제835호




삼층석탑 보물제678호



오백전안의 모습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제318호





원응국사비 보물제316호.



이목소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귀국을 할때 서해 용왕의 초청을 받고  용왕을 만나 설법등 해박한 지식으로 용왕을 감동시키니 용왕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인 이목(離目)을 같이 데리고 가 스님을 도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보양국사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귀국울 한다. 이 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운문사 옆 깊은 소에서 지내며 보양국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의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스님이 이목을 찾아와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천제는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양국사에게 보내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고 나서 이목을 내어 달라고 하는 사자에게 법당앞의 배나무를 가르키며 '이목 여기 있소' 하니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두고 이무기 또는 꽝철이라 하는데 이무기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다. 운문사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이목소는 잦은 사태로 인해 메워지고 사찰의 중창으로 메워져 볼품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보양국사가 부임하던 때에는 아마 둘레가 100여m나 되는 깊은 연못이었는 것 같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사 매표소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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