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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운달산 김룡사. 명품 숲 전나무가 좋은 운달산 김룡사 여행. 


운달산 아래 자리한 천년고찰 김룡사. 김용마을에서 김룡사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은 가히 명품 숲길입니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김룡사의 입구를 뜻하는 일주문이 위풍당당한 모습입니다. 김룡사는 588년 신라 28대 진평왕 때 온달조사가 창건하면서 운봉사라 불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불탔으며 1624년 조선 인조 2년에 혜총선사가 중창하였으나 다시 소실된 것을 1649년인 인조 27년에 의윤, 무진, 태휴 세분 대사께서 삼창하여 운봉사의 옛 모습을 되살렸습니다.



문경 운달산 김룡사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문경 운달산 김룡사 전화:054-552-7006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한때 김룡사는 48동의 전각에 건평이 1,188평이었을 정도로 큰 대찰이었으나 1997년 불의의 화재로 대웅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이 불탔다가 창건에 버금가는 대 불사를 진행하여 현재 30여 동의 전각이 복구되었습니다. 운봉사가 김룡사로 바뀌게 된 것은 18세기에 절 밑 마을에 살던 김장자에 의해서입니다.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에 큰 죄를 짓고 도망쳐 운봉사아래 몸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신인의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이들은 김룡사 부처님 앞에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며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태어나 이름을 용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집안이 크게 흥하며 부자가 되었으며 마을 사람은 그를 김장자라 불렀습니다. 부자가 된 김장자는 운봉사에 희사를 많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운봉사는 김장자의 아들 이름인 김룡사로 바뀌었으며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도 김룡(용)이 되었다 합니다.

 




일주문에는 ‘운달산김룡사’와 ‘홍하문’ 편액이 걸렸는데 이는 절제된 김룡사의 현재 모습을 보는듯합니다. 홍하(紅霞)의 뜻을 풀이하면 붉은 노을이라 하며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그 음을 취했습니다. 이는 운문종을 창시한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선사께서 남기신 게송의 일부분입니다.


 


생전에 성철스님도 이 게송을 좋아해 즐겨 운문선사의 음을 취했으며 그 때문인지 현재 겁외사를 들어서는 입구 누각에 벽해루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일주문의 두 편액은 독립운동가이자 구한말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던 동농 김가진(1846~1922)선생의 글씨라 더욱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김룡사 절집을 둘러보겠습니다. 어느 대감 집 출입구 같은 솟을대문에는 보장문 편액이 붙었습니다. 이는 보물을 품은 절을 들어선다는 뜻인데 절에서의 보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이곳의 문을 들어섬으로써 진짜 부처님 세상인 불국토에 들어간다는 뜻을 품고 있으며 일주문의 편액을 쓴 동농 김가진선생의 글씨입니다.




 




일주문 오른쪽에는 근심을 푸는 해우소가 있습니다. 이 화장실이 대웅전과 함께 화마가 비껴간 건물이며 300여 년 긴 세월을 이겨냈다 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해우소 건물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머무는 처서 뒤편의 고방가 곧 쓰러질듯하며 진짜 오래된 건물로 보였습니다.








보장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이며 김룡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옵니다. 먼저 만나는 전각은 천왕문입니다. 천왕문은 절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을 모신 곳입니다. 아마 불타고 복원하면서 돌이라면 불에도 끄떡없다고 생각했는지 석물로 만들어 안치했습니다.

 







증장, 지국, 다문, 광목천왕을 모셨는데 이분들을 사천왕이라 합니다. 천왕문을 지나면 다시 돌계단을 오릅니다. 보기에도 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은 전각입니다. 왼쪽 건물은 스님들의 요사채와 강원인 설선당 건물이며 오른쪽은 2층 누 형태인 보제루입니다. 두 건물 사이로 오르면 대웅전 앞마당입니다.

 




먼저 왼쪽 설선당을 보겠습니다. 앞면 9칸에 옆면이 6칸인데 그 규모가 대단합니다. 아마 김룡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재로 타기 전에는 300명이 동시에 들어가서 큰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합니다. 1955년 성철스님은 팔공산의 파계사 성전암에다 철조망을 치고 한 번도 암자 밖으로 나오지 않는 ‘동구불출’의 수행을 10년간 하셨습니다. 1965년에 스님은 성전암 문을 저음 나서면서 김룡사의 강원인 이곳에서 가장 먼저 법문을 행했던 곳입니다.

 


보제루는 입구에서 보면 2층 형태지만 대웅전에서 보면 마당 높이와 맞춘 단층 건물입니다. 이곳에는 보제루와 운달산 김룡사의 편액이 걸렸으며 설선당 등 많은 편액이 서예가 권창륜씨 글씨입니다.





마당 좌우에는 윗면이 넓고 편편한 돌기둥이 두 개 있으며 이를 노주석이라 합니다. 밤에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다 불을 피워 주위를 밝혔습니다. 노주석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일본풍의 느낌이 많은 데 아니나 다를까 노주석의 뭉갠 글씨는 일본 연호인 소화 15년을 뜻하며 또 다른 노주석에는 희사한 분 이름인 득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김룡사의 대표 전각인 대웅전을 보겠습니다. 이 건물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외 3출목, 내 4출목에 상부 가구는 5량 가입니다. 김룡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1624년 인조 2년에 중창했지만, 다시 1643년 불탔다가 1649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다 최근인 1997년 김룡사 대화재 때에 소실을 면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건물입니다.
















































이외에도 김룡사는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보물 제11-2 문경김룡사동종과 보물 제1640호 문경김룡사영산회괘불도 등 전각과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습니다. 운달산 산행과 함께 짧은 시간에 훑다 보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문경 김룡사 구경을 했습니다. 특히 문경 김룡사에서 유명한 약수도 빠트리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운달산의 산세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며 그중에서도 김룡사는 소의 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꼭 집어 말하면 김룡사 명부전 자리가 핵심인 진짜 소의 눈으로 명부전 마당에 있는 약수터는 소의 눈물이며 항상 우윳빛을 띠는 명수라고 합니다. 운달산 김룡사 여행 시에 저처럼 빠트리지 말고 꼭 마시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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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문경 김룡사 운달산 산행. 삼복더위도 무색한 냉골의 운달산 운달계곡 산행. 


한여름 산행지로 첫손꼽는 문경 운달산 계곡 산행을 하고 왔습니다. 문경 운달산은 1,100m의 고봉답게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개의 계곡이 있습니다. 그중 운달계곡은 냉골, 중앙골 등의 지계곡을 거느리며 7월 염천의 무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얼음장 같은 물과 바람에 산행 내내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무더위를 식히러 떠난 문경 운달산 산행은 여름 최고의 산행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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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운달산 산행경로를 보면 김룡사 주차장~김룡사 입구 삼거리~김룡사~(김룡사 입구 삼거리)~여여교 앞 삼거리~징검다리~화장암 갈림길~운달계곡(합수곡 위 삼거리)~장구목~전망바위 갈림길~전망대~운달산 정상~폐헬기장~석문 밑~이정표 갈림길~화장암~(화장암 삼거리)~김룡사 주차장에 도착하는 원점회귀 코스입니다. 운달산 GPS 산행거리는 9㎞쯤이며 산행시간은 4시간~4시간 30분가량 걸립니다. 식사와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5시간~5시간 30분이면 운달산 산행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운달산 산행은 대부분 김룡사 주차장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도 김룡사 일주문 옆 주차장에다 차를 주차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룡사 주차장에다 주차하면 김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나무숲길을 걷지 못하게 됩니다. 그 여운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김룡사 주차장 주위의 전나무숲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역시 소문난 김룡사의 전나무 숲길은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조금 숲속을 걸었다고 벌써 도심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이 치유된 듯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주차장 옆의 운달계곡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흘렀습니다. 여기에서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김룡사 둘레길 안내판과 일주문을 지나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곧 김룡사 입구 삼거리길이 나왔습니다. 오른쪽에 쭉쭉 하늘로 뻗은 전나무가 사열하듯 절 입구를 지켰고 스님 한 분이 부드러운 흙을 날라 연신 길을 다듬고 계셨는데 속세의 인간이 보기에는 신선을 보는 듯 마음이 아주 편안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김룡사 관람을 하던가 직진하여 운달산을 산행하고 하산해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하던가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김룡사를 먼저 관람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에게 합장하고 단청이 없다면 꼭 양반집 솟을대문 같은 보장문을 지나 절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보장문을 풀이해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품고 있는 불국토에 들어간다“는 뜻이며 이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서게 됩니다.

 


김룡사는 588년인 신라 28대 진평왕 10년에 운달 조사가 창건하면서 운달사라 불렸습니다. 그 뒤에 임진왜란과 함께 절은 완전히 불탔고 1624년에 조선시대 인조2년 혜총선사가 중창했지만,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1649년 인조 27년에 의윤, 무진, 태휴 세 대사가 삼창해 한 때는 건평이 1,188평에 전각이 48동인 대사찰에 이르렀습니다.





1997년 일어난 대화재로 대웅전 등 전각을 빼고 모두 소실되었다가 새로 중수해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만 남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 사찰입니다. 또한, 김룡사에는 우윳빛이 난다는 신기한 약수로 유명한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절의 위치가 와우형국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인 김룡사 동종, 1649년 설잠대사가 조성했다는 대웅전의 불상과 성균대사의 후불탱화가 남아 천년고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룡사의 유래를 보면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짓고 운봉사 아래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녀를 만나 불전에 참회하며 지내다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용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에 김씨는 가문이 번창하고 부자가 되면서 마을은 김룡리, 운봉사는 김룡사로 바뀌게 되었다합니다.



산행시간에 쫓겨 후다닥 둘러보고 다시 김룡사 입구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에서 양진암, 대성암. 화장암 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김룡사의 백구가 손님 왔다고 길 안내를 자처하며 앞장을 서는 게 아닙니까? 지리산 둘레길의 길 안내하던 백구가 생각나 와!! 우리도 여기서 백구의 길안내를 한번 받아보려나 하면서도 내심 마음속으로는 걱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점심으로 김밥 석줄이 전부라 진짜 운달산 정상까지 따라온다면 백구에게 점심으로 줄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온다 했으면 골치 아플 뻔 했습니다. 너른 길에 전나무가 하늘을 가려 사색하며 걷다보면 여여교 앞 갈림길입니다. 직진하여 다리를 건너면 대성암(80m)과 양진암(530m)방향. 운달산은 오른쪽 화장암(940m) 방향입니다.

 


백구가 그래도 눈치는 빨랐는지 이곳을 지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 우리 배낭에 김밥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입니다. 저 인간들 따라갔다가 굶기 딱 십상이라며 줄행랑을 쳤다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섭섭했습니다.

 







곧 징검다리를 건너고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려 햇볕 한점 들지 않는 너른 길은 저수조를 지나 화장암 갈림길까지 이어졌습니다. 상수원보호구역을 뜻하는 철조망 너머에는 계곡의 물소리가 정적을 깨우며 요란하게 흐르며 갑자기 오싹할 정도로 찬바람이 싹 불면서 이마의 식은땀을 식혀주었습니다.



운달계곡은 냉골로도 불린다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닌듯했습니다. 왼쪽은 화장암(380m)을 거쳐 운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직등코스라면 직진하는 길은 우회하여 운달산(3410m)으로 오르는 조금은 편안한 길입니다. 어느 쪽을 올라도 정상에 갈 수 있지만 힘든 화장암 코스보다는 완만한 직진 길을 선택해 정상을 거쳐 화장암으로 내려 오는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지금부터 계곡을 여러 번 건너기에 장마 기간이나 비가 많이 올 때는 위험해서 운달계곡 산행은 삼가야할 것 같습니다. 운달계곡을 건너서도 너른 길은 계속이어집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세찬 물소리가 들리는 게 왼쪽에 폭포가 보였습니다. 폭포 쪽으로 가까이 같더니 온도 차가 확 나는지 정말 시원했습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자며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아직 산행 초반이지만 배낭을 풀었습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이런 곳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며 일행과 이심전심으로 딱 맞아떨어져 쉬면서 ”도끼자루 섞는줄“ 모르며 노닥거렸더니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아쉽지만 폭포를 뒤로하고 마음을 다잡고 빠른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자꾸 계곡의 작은 소와 폭포가 바쁜 발걸음을 붙잡았습니다. 여러차례 운달계곡을 건너면 아래쪽에 냉골과 운달계곡 본류가 서로만나는 합수곡이 보입니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면 큰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틀면 다시 계곡을 건너 오릅니다.

 










너른 산길은 좁아지면서 산길은 물소리가 잦아들고 계곡과 멀어져 급경사 산사면을 오릅니다. 한 발 한 발 올랐더니 장구목에 도착했습니다. 운달산과 966봉을 잇는 안부입니다. 반대편으로 넘어서면 용연리 방향인데 희미한 흔적입니다.

 


오른쪽은 문경대간인 장구령(1.0㎞)으로 가고 운달산 정상(1.1㎞)은 왼쪽으로 꺾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능선 산행입니다. 문경에서 많이 알려진 산행지지만 그래도 산길 중간중간은 희미하고 길이 좁은 구간도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오른쪽으로 우회하는 희미한 흔적을 지나자마자 다시 뚜렷한 산길입니다. 왼쪽 능선길을 전망대가 있는 곳인데 누군가  못가게 나무를 걸쳐 막아놓았습니다. 저는 전망대를 보고 많이 위험하면 되돌아올 작정으로 직진하여 능선을 탔습니다. 두 곳 다 같은 방향을 보는 전망대와 만났습니다. 안왔다면 후회할뻔 했습니다.

 


맞은 편의 갓산과 산행 출발지 김룡사, 온달계곡이 다 들어나며 그뒤 사불산이라 불리는 공덕산과 바위암봉인 천주산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바위구간으로 능선이 끊어져 바로 갈 수 없으며 오른쪽으로 바위를 내려가게 안전밧줄이 매달려 있습니다. 바위는 물기가 흘러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등산로에 복귀하면 전망대 오르기 전 갈림길에서 우회해서 오는 산길과 여기서 만나고 운달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짧지만 바윗길을 지나면 편편한 쉼터바위에서 바위틈을 비집고 내려서면 지금부터 정상까지는 완만한 흙길입니다. 드디어 운달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은 쇠로 만든 안내판과 10m 떨어진 곳에 정상석이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없지만, 정상에는 오른쪽 성주봉으로 빠지는 능선길이 있으며 정상석 옆에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날은 전혀 조망할 수 없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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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문경읍과 성주봉, 석봉산, 조항령, 단산, 그리고 주흘산과 부봉등 문경을 지나는 장쾌한 백두대간 능선이 흘러 가기 때문입니다. 정상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은 석봉산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폐헬기장에서 직진하면 단산, 석봉산·조항령으로 향하지만, 원점회귀 산행을 위해 안전한 왼쪽 금선대·화장암, 대성암·김룡(용)사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하산길 초반부터 경사가 만만치 않을 만큼 가팔랐습니다. 운달산 정상에서 이 능선으로 올랐다면 땀 꽤 뺐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바위기둥에 올려진 큰바위를 보면서 석문, 통천문하며 이름도 붙였습니다. 그래도 오를 때보다는 한결 힘이 들든 하산길이지만 중간중간 위험한 구간도 있어 끝까지 방심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끝까지 마음을 다잡고 내려가면 이제 지루한 능선도 끝이 보이는 이정표를 만났습니다.



뚜렷한 오른쪽은 나무로 출입을 막아 놓았지만 아마 금선대 방향인 듯 보였습니다. 왼쪽 ‘김용사(1360m)’ 이정표를 따라갑니다. 곧 화장암인 듯 출입문과 돌담이 둘러진 폐가 비슷한 게 나타났습니다. 화장암은 매우 한적한게 수도도량인 듯 신도들의 발길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초창기 화장암은 중암이라 불렀다가 1758년 영조 34년에 백련화상이 중건하면서 화장암이라 불렀습니다. 1768년에 영파성규화상이 영각을 건립한 다음 양학대사, 수은상인, 풍곡연안화상이 각각 영각을 중수했으며 법당에는 여러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화장암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 너른 길을 따라 초반에 만났던 화장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서 김룡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끝마쳤습니다.

 




(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문경 김룡사 운달산 산행 대중 교통편.


문경 운달산 산행 대중교통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 출발한다면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총 6회 운행하는 문경·충주행 버스(오전 8시40분, 11시25분, 오후 1시30분, 3시50분, 5시20분, 6시50분)를 타고 문경공용터미널에서 내립니다. 문경공용터미널에서 김룡(용)사·석봉행 50번 좌석버스(오전 6시50분, 8시30분, 10시30분, 낮 12시50분, 오후 3시10분, 5시10분, 6시40분)를 타고 김룡사에 내리면 됩니다. 산행 후 김룡사 또는 석봉 종점(오전 7시30분, 9시, 11시15분, 오후 1시50분, 4시10분, 6시5분 7시35분)에서 되돌아 나오는 버스를 타고 문경터미널로 가면 되는데 김룡사와 석봉에서 출발시간이 각각 차이가 날 수 있으니 여유를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문경터미널에서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행은 오전 8시30분, 10시20분, 낮 12시35분, 오후 1시55분, 3시20분, 6시25분(막차)에 있어니 참고하세요. 

자가운전 시 내비게이션에 김룡사 입력



문경 운달산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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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사불산 대승사. 사면석불의 공양절인 공덕산 대승사 천년사찰 여행하기.  


문경의 공덕산에는 천년고찰인 대승사가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사불산으로 더 알려져 대승사 일주문 현판에도 사불산 대승사라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사불산조에 나온 기록을 보면 사불산의 유래는 대승사와 윤필암 사이의 바위봉우리에 신라 시대 진평왕 9년인 587년 갑신년에 큰 돌이 붉은 비단보자기에 싸여 떨어졌는데 사면에 사방여래불이 조각되어 있다 합니다. 이 소문이 흘러 흘러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왕도 기괴하게 생각하여 사면 석불의 바위가 떨어진 봉우리에 올라 친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이곳에다 사면 석불을 공양하는 절을 짓게 하였는데 그게 오늘날의 대승사입니다.




◆문경 대승사 주위 가볼만한곳◆

2016/09/07 - (문경여행)문경 공덕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경허, 성철, 청담 등 근대 선승의 수도처 문경의 사불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2016/07/08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곳)문경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머리에 뿔처럼 꽃무늬를 돋을 새김한 이색적인 불상을 만나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2016/07/07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 곳)공덕산·사불산 사불암. 그럴싸한 전설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신비의 세계 사불암 사면석불, 공덕산·사불산 사면석불 사불암을 만나다.








사불암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여 사불산 또는 역덕산이라 하고 사불암 공양절로 진평왕은 대승사라 이름하였습니다. 대승사는 묘법연화경을 외울 수 있는 자를 주지로 삼았는데 이대승사의 주지가 죽자 그의 무덤에 연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대승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소하였습니다. 









그리고 1604년 선조 37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1701년까지 근 100년 동안 대승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승당, 관음전, 조전, 미륵전, 금당, 십왕전 등 여러 전각을 신축하여 큰 사찰다운 뼈대를 갖추어나갔습니다. 1725년 영조 1년에 의학스님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복장유물로 사리 1과와 705년 신라 성덕왕 4년에 금을 입힌 화엄경 7권이 함께 나왔다 하니 천년 고찰은 틀림없나 봅니다.







그 후에도 종각과 금강문, 천왕문, 일주문을 중건하였고 1831년인 순조 31년에 구담스님이 중창을 하고 9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는 등 대승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1862년인 철종 13년에 명부전과 응진전을 제외한 대승사의 모든 전각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의운, 취월, 덕산 스님 등이 중건을 시작하면서 다시 극락전, 회랑, 염불당, 동별당 등 많은 전각을 중건했지만 1956년 또다시 일어난 화재로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기고 소실되었습니다.







1960년에 대승사는 남인, 기종, 대휴 스님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 불사인 삼창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주지인 철산 스님에 이르기까지 객사, 범종루, 백련당 회랑 등을 복원하면서 대승사의 옛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대승사의 많은 볼거리 중 가장 눈여겨볼게 보물 제991호인 대승사 금동보살좌상과 보물 제1634호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입니다. 제가 누런 금붙이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금동불상에만 눈이 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외에도 대승사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과 관계문서는 보물 제575호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사실 사찰에서 법당의 본존불을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 찍기가 좀 민망한 곳도 있습니다. 유명사찰은 보통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문경의 대승사에도 건물 외관만 사진을 찍고 불상 촬영을 하지 않아 대승사 포스팅을 하면서 너무 허전하여 문경시청 홈페이지의 문화재 사진을 출처를 밝히며 옮겨왔습니다.


 

노주석 






 




 





 

 

대승사 금동보살좌상(사진:문경시청 홈피)


대승사 금동보살좌상은 대승사의 선방에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습니다. 불상의 전체적인 높이는 90cm이며 보관 높이만 15cm에 불두를 포함하면 37cm, 어깨너비는 28cm, 무릎너비 57.5cm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입니다. 특히 머리에는 별도의 금속 보관을 썼는데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문경시청 홈피)


양쪽 귀의 보발은 여러 가닥이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으며 이목구비는 원만한 얼굴에 미간에는 백호를,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습니다. 금동보살좌상의 조성 시기는 “정덕 11년 병자사월개금”의 기록이 남아 있어 1516년인 조선 중종 11년에 개금이 이루어졌으며 불상 조성 시기는 그보다 빠른 15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진:문경시청 홈피)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사진:문경시청 홈피)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주존불로 불상 높이는 87.5cm, 무릎 너비가 63cm입니다.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301년 고려 충렬왕 27년을 전후하여 조성되었음을 복장유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고려 후기의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복장유물에서 수습된 다라니 12매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불복장되어졌습니다.

 


문경 대승사 주소: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번지

문경 대승사 전화:054-552-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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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일년중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천년고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여행을 하다. 문경 봉암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1년 중 부처님오신날 딱 한 차례 산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여느 사찰처럼 불쑥 대웅전을 참배할 수 없으며 문경여행을 왔다고 해서 봉암사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다른 도량과 달리 창건부터 지금까지 선도량으로 일관되게 이어졌으며 1982년 6월에 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암사의 경내는 법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반경 4km라 하니 희양산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백운대계곡 등 모두 봉암사 소유로 평소에는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봉암사의 내력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 그러니까 879년(헌강왕 5년) 지증대사 지선이 창건했습니다.



봉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의 직지사 말사로 선종산문인 선문구산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종찰입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의 명성을 들었던 심층은 수행도량으로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겠다 하자 지선은 처음에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뒤 지선이 이곳을 둘로 보고 “스님의 수도 도량이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며 이곳에다 절을 세웠습니다.

 


지증은 용의 뿔처럼 우뚝 솟은 희양산의 바위봉우리와 그 아래에 펼쳐진 산자수려한 계곡을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감탄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수도 도량을 세우라는 ‘부처님의 계시’라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나 봅니다.

 


일개 범부인 제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봉암사는 그만큼 좋은 장소라 생각되었습니다. 지선이 절을 짓자 881년에 헌강왕은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지증국사 이후인 935년(태조 18년) 정진대사가 머물 때는 3천여 대중이 봉암사에 몰려 동방장,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수도 할 정도로 선풍을 일으켜 꾸준하게 그 맥이 이어졌습니다.

 


조선 초기인 1431년(세조 13년)에 기화스님이 중수하였고 1674년(현종 15년) 신화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봉암사를 중건하였으며 1915년에는 세욱스님이 쇄락한 당우를 중건하였고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습니다. 봉암사는 1947년 해방과 함께 새로운 변혁기를 맞습니다. 

이는 ‘봉암사 결사’로 성철스님이 앞장서고 청담, 자운, 우봉스님 이 네 분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봉암사로 택했습니다. 그 후 20인이 동참하여 오늘날 봉암사 수행 도량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봉암사를 두른 암봉이 참 대단합니다.

 


봉암사 뒤 솟은 암봉은 희양산입니다. 여기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의 흥한 기운을 끊으려고 희양산 정상 바위에다 칼로 다섯 줄의 홈을 파내어 혈도를 끊은 곳입니다. 참 나쁜 놈입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구원군의 최고장수인 이여송은 지관과 함께 우리나라 명당이란 명당의 혈도를 끊으러 다녔다 하니 그래 올케 전쟁을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암사는 절 입구 삼거리에서부터 일체 차량 진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부터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봉암사 마을버스 종점까지 들어갔고 내려서 걸어 봉암사로 가야 했습니다.


봉정사 일주문은 경내 목조건물에서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되었습니다. 1900년경 봉암사 일주문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18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침류교를 건너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남훈루 현판이 걸린 가운데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봉암사에서 목조건물이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만났습니다. 봉암사는 창건 이래 잦은 전란으로 소실되었지만 그중 극락전만은 용케 화마로부터 남아 보물 제1574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앞면 1칸, 옆면 1칸에 2층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겹처마에 네 모 반듯한 평면건물에 올린 사모지붕을 하였습니다.

 

 

 


그 중앙에 석탑의 상륜부를 올려 탑의 형식을 갖춘 건물입니다. 봉암사 극락전 내부에 어필각(御筆閣) 편액이 있으며 이는 신라 경순왕이 전란에 봉암사로 피신하여 원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며 주위에 남아 있는 지명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습니다.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을 우측에는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에서 2010년 1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될 만큼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이 대단히 뛰어나고 비신의 높이는 273cm, 넓이 164cm, 두께 23cm로 웅장한 규모의 탑비입니다. 지증대사는 신라 진골로 경주김씨이며 법호는 도헌이며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산조입니다. 840년(문성왕 2년)인 17세에 영주 부석사에서 경의 율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강왕은 왕사에 임명하지만 거절하며 그가 창건한 봉암사로 돌아와 59세 법랍 43세에 입적하였습니다. 왕은 그에게 지증이란 시호를 내렸고 탑명은 적조라 하였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과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893년에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짓고 분황사의 석혜강스님이 글씨를 각자 했습니다.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은 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인 무덤입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59세에 봉암사에서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자 헌강왕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인 지증과 탑명인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신라의 승탑양식인 팔각원당형이며 높이는 341cm, 지대석 넓이는 228cm로 옥개석의 부분적인 파손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부도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부도입니다. 기단부의 중대석은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을 장식한 사리함,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또한, 중대받침석은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인 가릉빈가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상대석은 팔각의 탑신에 사리함을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좌우로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과 보살을 돋을새김하여 사리함을 수호하도록 했습니다. 지증대사의 부도는 화려하면서 장엄하며 정교하여 당시 신라예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와 지증대사적조탑 보호각

봉암사 수도도량 공간으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금색전 

 


봉암사 삼층석탑은 육중한 희양산의 암봉을 떠받치는 듯 장엄 웅장하며 가볍고 날렵하지만, 결코 촐랑대듯 경망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지만, 상륜부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으며 예술성을 갖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석탑 중 한곳입니다.

 

 


봉암사 경내인 금색전 앞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양 높게 솟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631cm, 상륜부 높이 238cm, 지대석 넓이 324cm로 대단히 큰 규모의 석탑입니다.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완벽한 구성으로 남아 있는 상륜부로 노반 위에 네 개의 꽃잎을 돋을새김한 복발을 놓고 그의에 사각 모양의 양화를 올렸습니다.

 

 

 


방형모양에 4면과 각각의 모서리에 6엽과 4엽의 연꽃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5단의 보륜을 올렸으며 팔각의 보개를 놓고, 십자 모양의 수연 끝에 용차와 보주를 차례로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륜부의 원형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철심을 관통하여 상륜부를 잡아주었기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균형 잡힌 모습에 안정감이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완벽미까지 인정받아 보물 제16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2016/06/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의 꽃이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예술품 문경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문경 봉암사


 

 

 

 

 


범종각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는 봉암사 입구인 침류교로 되돌아 나오면 마애불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용추동천인 백운대계곡을 따라 700m가량 계곡 옆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가면 물소리가 요란한 백운대입니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마치 옥구슬이 구른다 하여 옥석대로도 부릅니다. 등줄기의 땀을 식히며 푸른 녹음에 감탄하다 보면 그 한 쪽에 4m 높이의 편편한 바위에 조각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과 마주합니다.

 

 

 

조선시대 승려 환적의천선사의 원불이라는 기록이 백운대 미륵비명에 나와 있으며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은 깊게 파내어 감실 같은 느낌을 들게 처리했습니다. 몸통과 결가부좌한 다리 쪽으로 내려갈수록 조각이 옅어지며 머리에 쓴 보관에 꽃무늬가 있으며 반달 같은 양쪽 눈썹에 백호가 뚜렷하고 반쯤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두손은 연꽃을 들었고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을 얇게 선각하였고 옷의 띠 매듭, 주름선 까지 아주 유려하고 뚜렷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불상의 제작기법을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신라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백운대를 각자 한 바위와 돌로 암반을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목탁바위도 있습니다.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스님의 수행 도량이며 부처님오신날까지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문이 꽉 잠겨진 진공문.

 

 봉암사 설봉대사비

 

 

 


정진대사 원오탑비입니다. 보통 부도와 함께 조성하는데 특이하게도 멀리 떨어져있어 정진대사 원오탑인 부도는 보지 못하고 왔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진대사 긍양은 신라말에서 고려 초 스님이며 성은 왕씨입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고난 뒤 공적을 각자한 비문으로 965년(광종 16년)에 세웠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의 높이는 273cm, 폭 161cm, 두께 26cm로 고려 초기의 조형미를 잘 보여줍니다.

 

 

 


비신은 청석이며 이수와 귀부는 고려 초기의 탑비 양식을 따랐습니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는데 거북 등에 비를 꽂는 비좌가 큰 게 특징이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불꽃무늬에 둘린 연꽃봉우리 문양의 보주 장식이 웅장하게 조각되었습니다. 비문의 필체는 2cm 크기의 구양순체 해서로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짓고 명필로 이름 날렸던 장단열의 글씨라 합니다.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올해 부처님오신날 찾았던 문경 봉암사는 스님의 수도 도량이라 그런지 정말 맑고 깨끗한 법신이 머무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찾았던 봉암사라 그런지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으며 2017년 부처님오신날이 또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그때는 더욱 자료 등을 준비하여 이번에 찾아보지 못한 곳을 여행해야겠습니다.

 

 

 

 

희양산 

 

◆문경 봉암사 정보◆

봉암사 주소: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전화:054-571-9088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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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의 중심법당인 대웅전 왼쪽의 비각에 지증대사적조탑과 나란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였다가 2010년 1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될 만큼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비신의 높이는 273cm, 넓이 164cm, 두께 23cm로 규모가 웅장하고 아주 큰 탑비입니다.





◆문경 봉암사와 주위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지증대사는 신라 진골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이며 경주 출신입니다. 법호는 도헌이며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로 희양산문을 개창한 개산조 입니다. 824년인 헌덕왕 16년에 출생하여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어머니께 불교에 귀의할 뜻을 비추며 9세에 출가하였습니다. 840년 (문성왕 2년)인 17세에 영주 부석사에서 경의율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헌강왕 6년에 심충이 희양산 용추동천의 땅을 희사하자 그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습니다. 헌강왕은 지증대사를 왕사에 임명하지만, 대사는 거절하고 봉암사로 돌아가 882년인 헌강왕 8년에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의 나이 59세 법랍 43년 헌강왕은 애통해하며 시호를 지증이라 내리고 탑명은 적조라 하였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증대사가 입적하고 11년만인 893년에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짓고 분황사의 석혜강스님이 글씨를 각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완공은 경애왕 원년인 924년입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와 초월산 대숭복사비, 만수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지리산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와 함께 최치원의 사산비문이라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의 비문 내용을 보면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면서 도신(道信)을 시작으로 쌍봉(雙峰), 법랑(法朗), 신행(愼行), 준범(遵範), 혜은(慧隱)에서 도헌(道憲)인 지증국사로 법통이 이어지는 신라 하대의 불교사 중에서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입니다.





또한, 탑비를 세운 연대와 비문과 글씨를 각자한 인물이 정확하게 알 수 있어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습니다. 이 비문에서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 ‘신이한 사실’ 육이(六異)와 ‘여섯 가지 훌륭한 행적’인 육시(六是)를 예를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라 합니다.

 






또한, 신라 후기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와 사원에 토지를 기증하는 소소한 절차와 후원자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신라 유일의 비입니다. 또한, 백제 소도(蘇塗·큰나무를 세우고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일, 솟대)의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한 비문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탑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신은 1090년이 넘는 동안 풍찬노숙을 겪어서 그런지 지금은 넘어지지 않게 비신을 떠받치는 지주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신을 받치는 귀부의 머리는 용머리이며 몸은 거북 모양입니다. 등에는 비를 꽂는 비좌를 두었고 머릿돌인 이수는 연봉이 물결 위에 솟아나는 ‘앙연판문((仰蓮辦紋)’에 서로 경쟁하듯 얽혀 있는 8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는 더욱 웅장해 보이며 신비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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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입니다. 봉암사 경내에는 구산선문의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대사의 사리탑인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무덤입니다.





◆문경 봉암사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그러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지증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을 뜻합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으며 지증대사는 통일신라 말에 활동하던 승려입니다. 법명은 도헌(824~882)이며 자는 지선으로 김씨성에 경주사람입니다

 


아버지 찬괴와 어머니 이(伊)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불가의 가르침를 따르겠다며 영주 부석사로 출가하여 840년 (문성왕 2년)에 그의 나이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에 임명되지만 간곡하게 사양하고 봉암사에 돌아온 다음 해에 결가부좌로 입적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9세에 법랍 43년. 헌강왕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는 지증, 탑명은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 적조탑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승탑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랐습니다. 승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341cm, 지대석 너비가 228cm이며 옥개석이 일부 파손된 것을 빼면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지대석은 넓은 돌을 여러 장 네모반듯하게 바닥 돌로 깔았으며 가운데 탑신부의 탑신에 사리를 봉안하고 위로는 옥개석을 덮어 부도의 상륜부인 머리 장식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이를 받치는 기단부는 하·중·상대석으로 나누는데 하대석은 구름무늬 조각인 안상에 사자를 조각했으며 중대석에는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으로 장식한 사리암,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가릉빈가 



그리고 중대받침석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우아하고 섬세하게 조각한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습니다. 가릉빈가는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부처님이 설법할 때 옆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석은 탑신을 괴는 탑신 괴임을 두었고 각 모서리에는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난간을 나타냈습니다. 탑신은 팔각의 몸돌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앞뒤 두 면에는 사리를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문 문양 양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조각하였고, 남은 두 면에는 보살을 돋을새김했습니다. 옥개석은 몸돌과 같은 팔각이며, 아래 면에 조각된 서까래는 두 겹으로 표현하여 겹처마 집을 연상하게 합니다. 처마는 살짝 들렸으며 그 끝에 꽃장식이 달렸습니다.

 


상륜부에는 노반인 연꽃받침 위로 복발, 보름, 보개, 보주 머리 장식이 차례로 얹혔습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자 시신을 현계산 안락사(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일대)에 모셨다가 다시 1년 후 인 883년 12월에 그의 제자들이 희양산 아래에다 대사의 시신을 장사 지내고 지금의 자리에 적조탑을 세웠다합니다.

 

 


봉암사 적조탑은 883년인 헌강왕 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국보인 화순의 쌍봉사 철갑선사 부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신라시대 부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습니다. 정말 또하나의 아름다운 승탑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만났습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보물 제137호

문경 봉암사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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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문경의 명산인 희양산 기슭 백운대 계곡을 끼고 천년사찰 봉암사가 있습니다. 처음 창건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지증대사 지선이 창건했으며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로 자못 웅대합니다.





◆문경 희양산 봉암사와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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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딱 한번 부처님오신날만 산문을 개방하여 기쁜 마음으로 봉암사를 찾았다면 전체적인 봉암사 건물을 보고 실망 하게 됩니다. 여느 천년고찰처럼 빛바랜 당우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임진왜란 등 잦은 화재로 봉암사가 깡그리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래도 용케 남아 있는 당우가 있으니 그게 바로 일주문과 보물 제1574호인 봉암사극락전입니다.



이곳까지 쳐들어온 왜군은 봉암사 건물 하나하나에 불붙은 장작개비를 올려 불태웠으며 마지막 남은 극락전을 태우기 위해 장작개비를 올렸지만 장작개비만 타고 꺼져버려 극락전은 불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단념하고 물러갔다합니다.


극락전 내주 천정모습

극락전 아미타불



 









봉암사 극락전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1칸이며 2층 건물입니다. 겹처마에 정사각형의 네모반듯한 평면 건물에 올린 사모지붕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 정점에다 특이하게도 석탑의 상륜부을 올려 탑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봉암사 극락전은 창건당시의 기단석 위에 독특하지만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 잘 표현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전란에 봉암사로 피신하면서 원당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암사 극락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1984년 화재로 소실된 보물 제163호 쌍봉사 대웅전 등과 같은 몇안되는 우리나라 목탑형식 건물 중 한곳입니다. 일제 강점기때에 들어 보수가 있었는지 옥개기와인 망와에 소화 16년(1941)이란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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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부처님오신날만 산문을 개방하는 봉암사를 방문하면서 여러 곳을 한꺼번에 보려니 가랑이가 찢어지게 바쁘게 쫓아 다녔습니다. 봉암사 경내인 극락전, 지증대사 탑비와 승탑, 그리고 봉암사 삼층석탑을 보고 난 뒤 돌아 나와 다시 침류교를 건넜습니다.





◆문경 희양산 주위 가볼만한 여행지◆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백운대에 있는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마애보살좌상까지는 700m 정도를 용추동천를 따라 계곡을 거슬러 가야 합니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엊그제 같았는데 봉암사를 찾은 5월 14일은 완전 녹음방초가 우거진 초여름 날씨였습니다.

 



바위를 타고 구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그만큼 반가운 것을 보면 계절은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와 덩달아 봉암사 백운대 계곡도 앙상한 나무였던 겨울의 잔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연두색 나뭇잎으로 모두 갈아입었고 오랜만에 콸콸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보면서 백운대의 감흥에 취했던 하루입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은 석면 미륵불로 조선 시대 승려 환적의천선사(1603~1690)의 원불이라는 기록이 희산구법의 백운대 미륵비명에 실려 있습니다. 4m 높이의 편편한 바위에 조각하였는데 머리 부분을 깊게 파내어 감실 같은 느낌과 광배 역할을 겸하도록 처리했으며 몸통과는 달리 머리 부분은 눈에 띄게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조각하였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몸통과 결가부좌한 하체는 선처럼 홈을 파서 새긴 선각 기법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의 중간에는 꽃무늬가, 양쪽 눈썹은 백호가 뚜렷하고, 반달 같은 눈썹에 반쯤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손상된 코는 후에 보수 하였으며 입은 아주 얇고 작으며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 긴 귀와 주걱턱 같은 턱,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었습니다.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을 얇은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띠 매듭과 옷의 주름선은 유려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두 손으로 연꽃을 들었으며 드러난 발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른발을 위로 올린 결가부좌의 자세에 하체를 높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릎 사이 간격을 넓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연화 문양의 대좌는 심한 마멸로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이 불가하고 불상의 제작기법으로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봉암사 경내에 있어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암반을 봉암사 백운대라 부르고 신라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백운대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료부족으로 백운대 각자는 만나지 못하고 내려와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백운대 너럭바위 위로 구르듯이 흐르는 물이 마치 옥과 같다 하여 옥석대라는 닉네임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백운대의 너럭바위를 돌로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난다 하여 목탁바위라고 도합니다. 이는 바위를 두드리면 속이 비어서 내는 공명음으로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상이 자리한 백운대는 용추동천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주위 경치가 매우 빼어나 누구나 이곳에 들면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생각합니다. 아쉬운 봉암사 여행이지만 이제 또다시 내년 부처님오신날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청정수도도량인 봉암사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백운대 마애보살좌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백운대를 찾을 때는 최치원이 각자 한 백운대 글씨와 목탁소리를 낸다는 바위도 꼭 두드려 보아야 겠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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