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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백민 황상규등 밀양 독립운동가 거리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안동을 양반의 고장이라면 밀양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선비가 곧 양반이라 할 분도 있겠지만, 그 뜻은 엄연히 다르며 선비는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태가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항상 곁에 둡니다. 그만큼 국가가 어려울 적마다 선비들은 들고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렸습니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주소:
경남 밀양시 내일동 516-23



임진왜란·정유재란 등 많은 병란에도 민초와 선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도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때에도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국난을 극복하는 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밀양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그 밑바탕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밀양에서 일제 강점기 때에 저항 운동을 벌였던 항일 독립투사가 70여 분이나 나왔다는 게 이게 밀양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선비정신인 밀양의 기개가 흐르는 곳이 내이동과 내일동를 가로지르는 해천입니다. 해천은 밀양 읍성의 방어를 위해 성벽 아래에다 파낸 인공하천입니다.





이는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일반 하천이던 것을 읍성 방어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해자라 하여 해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해천 주위로는 밀양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할 정도로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분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천 옆 밀양 관아 앞에서 1919년 3월 13일 밀양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이라 합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3·13 밀양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등 경남 밀양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항쟁을 실감 나게 그린 벽화와 조형물 그리고 웹툰을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조성해 놓았습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13개의 주제로 그려졌으며 3·13 밀양 만세운동과 김원봉, 윤세주의 새로운 조명과 생가터 발굴, 태극기 나무, 밀양 출신 독립군 69기 명패, 희망우체통, 시민 1,000여명의 메시지를 담은 타일 부착, 태극기 변천사, 천만 영화 ‘암살’의 그림벽화와 독립군의 활동상황, 조선의용대의 모습 등 말로만 듣던 독립운동의 수많은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민의 휴식공간인 쉼터를 함께 조성하여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 등장하는 약산 김원봉은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잊힌 분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만 겨우 알려졌던 약산 김원봉. 그분의 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약산의 어린 시절 밀양 상동면 모정리에 있었던 고명학교에 백민 황상규와 윤세주 등이 함께 다녔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김원봉과 친구들은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통에다 처박아 넣고 일왕 생일 경축을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일장기 훼손 사건은 발각되었고 고명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김원봉은 1916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19년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무장단체 의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의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요인과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 단장을 맡은 김원봉은 23차례나 국내·외에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를 단행하여 일본경찰를 경악에 떨게 하였습니다.



김원봉은 당시 김구 선생 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목에 항상 붙어 다녔던 것을 보면 일제의 최고 경계 인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광복 두 달 후 임정 요인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그에게 기다린 것은 친일 경찰 출신에게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난과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자괴감을 빠졌으며 1948년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속회담에 참가했다가 혼자 북에 남았습니다. 그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북한에서 서열 3위로 오르는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습니다. 김일성에게는 한국동란의 공헌을 인정 받아 북한 최고훈장인 노력훈장을 받았던 인물로 한국동란과 대한민국을 교란하는 남파 간첩을 지휘하여 대한민국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북한 김일성을 위해 많은 애를 섰으나  김일성은 권력 강화를 위해 미제스파이란 죄목으로 박헌영을 처형하고 1958년 소련파와 연안파 숙청을 하면서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에 일조한 약산 김원봉도 숙청당했다는 소문입니다.





 한동안 김원봉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석정 윤세주는 약산 김원봉과 꼬치 친구로서 김원봉보다 두 살 아래였습니다. 생가 또한 해천변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다녔던 동화 중학이 폐교하자 서울로 상경하여 오성 중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으로 내려와 고향의 여러 동지와 규합하여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랴오닝 성 유하현으로 망명 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헤어졌던 친구 김원봉과 상봉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13인이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석정 윤세주는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하지만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하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윤세주와 많은 동지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장을 맡고 창군된 조선의용군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0년 겨울에 조선의용대 제3 지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나간 후 1942년 5월에 중국 태항산의 마전 전투에서 총탄으로 중상을 입고 흑룡동 동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독립장을 추서. 밀양 삼남면 마산리의 최수봉 또한 김원봉과 함께 동문수학했으며 그는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를 보고 고무되어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에 밀양경찰서는 반파하였으며 거사 후 붙잡혀 사형 선고 받았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당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제는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거로 위축되었던 항일무장태러가 다시금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합니다.












올해 12월은 국가 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수봉 의사를 선정했으며 정부에서는 1963년에 그의 높은 항일정신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외에도 백민 황상규 등 밀양의 많은 독립투사의 행적을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태극기로 둘러싸인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하는 소리가 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듯 했습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석정 윤세주






조선의용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처 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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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래구여행)박차정 의사 생가. 6월 호국보훈의 달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생가 방문


 부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 있습니다. 여성 항일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차정 의사와 일본경찰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장군입니다. 지금 약산 김원봉은 우리에게 잊힌 분이지만 그의 아내였던 박차정 의사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그와 함께 생가도 복원하였습니다. 






그럼 박차정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차정 의사는 1910년 5월 8일 부산 동래에서 부친 박용한과 모친 김맹련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 또한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다 자결하셨고 신간회와 의열단에서 활동한 첫째 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인 박문호 등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항일 민족의식을 깨쳤습니다.



1925년에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항일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일신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하였으며 ‘일신’ 교지에 항일민족의식을 표출하는 문학작품도 남겼습니다.



1929년에는 근우회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30년 일어난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일으키다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납니다.



중국에서 의열 단원이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망명하여 1931년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과 결혼을 합니다. 결혼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 단원으로 활동하며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 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1936년에는 이청천 장군의 처 이성실과 ‘조선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이 단결하여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민족 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선전 홍보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장으로 의용대원 사기진작에도 힘을 썼습니다. 1939년 2월 장쑤성 곤륜산 전투에서 크게 다치고 병세가 악화하여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34세로 서거하였습니다.(박차정 의사 홍보물 참고)



그의 남편 약산 김원봉 장군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경에 폭탄 등 자살 테러 단체 의열단에 대해서도 배웠지만, 정작 그 의열단 단장 김원봉 장군에 대해서는 모두 지워져 버렸습니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항일 무장 테러인 자살 특공대 ‘의열단’ 단장이었습니다. 의열단에서 주도한 굵직한 사건만 23차례나 일으켰으며 일본 요인암살과 주요 건물 폭파 등을 감행하여 일경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그의 부인인 박차정 의사의 유해와 함께 귀국하여 그의 고향 밀양에 부인을 안장합니다. 그때 밀양읍내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김원봉의 귀향 환영식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조국에서 더 큰 시련과 핍박을 받으며 암살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1948년 김일성의 초청으로 백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한 뒤 혼자만 북에 남게 되었고 급기야 자진 월북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58년 연안파 숙청 때 함께 숙청을 당했다 합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은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정작 남북한 모두가 그를 버렸습니다.

 


6월 호국 보훈의 달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국 독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차정 의사 생가를 자녀와 함께 한번 쯤 방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차정 의사 생가 정보 안내◆

박차정 의사 생가 주소:부산광역시 동래구 박차정길 23(칠산동 319-1)

동래고등학교 정문 앞골목에 위치

박차정 의사 생가 개관일자:2005년 7월8일

박차정 의사 생가 관람시간 화요일 08:00~18:00, 일요일 10:00~16:00

박차정 의사 생가 휴관일: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1월1일, 명절연휴

박차정 의사 생가 문의처:박차정 의사 생가 051-556-0527, 문화공보과 해설예약 051-550-4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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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기념관의 안희제 선생님의 흉상입니다.




지하1층으로 내려서면 정면에 처음 만날 수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부산 중구 백산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회사원들이나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뛰였습니다.



현재 백산 기념관의 모습입니다. 옛 백산상회가 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이 전시관은 지하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이 백산기념관이며. 지하2층은 제2전시실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나는 액자입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에 내려서면 먼저 백산선생님의 흉상을 만나게 됩니다.

입구에 쌀 수집통이란 단지가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은 의령군 부림면에서 출생하였어며, 생가 한학을 공부하였던 재실등이 스크랩되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의 모습입니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백산선생님의 일대기를 보기가 쉽습니다.

 백산상회의 설립목적과 운영등에서도 설명을 하였어며 1970년과 1990년 때의 옛  백산상회모습이 사진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산상회 운영에 관한 내용과 백산선생의 친필서한문등을 볼 수 있다.

 

 

 백산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며

 백산선생님의 초상화입니다.

 국내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과 대동청년당 단규등이 나와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명예학사학위 증서

백산기념관이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동 옛 선생님이 운영하던 백산상회 그 자리에 기념관을 세워습니다.
이름하여 백산기념관.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운영을 하시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합니다.
그 뒤에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합니다.
범위를 확대하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및 외국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는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합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 백산상회는 그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어며 백산안희제선생님의 애국심을 기리며 후세에 그뜻을 길이 전하고자 백산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선생은 일제식민지 아래에서도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항일운동등 여러방면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한 민족독립운동가였습니다.

자는 태약(泰若), 호는 백산, 본관은 강진입니다.

안희제 선생님의 기념관을 살펴보면 출생과 성장, 교육구국운동, 국내 비밀결사 단체 활동, 백산상회 설립과 운영 언론학회활동,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과 대종교의 활동으로 나누어져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1885.8.4 경남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을 하였어며 그후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을 하고 1907년에 구명학교, 의신학교를 설립하셨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을 결성, 1911년에는 러시아로 망명도 하였다한다,
1914년에 귀국을 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과정등을 볼 수 있으며 3.1운동 때는 영남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에 참여를 그리고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을 하며 자력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합니다.
국외에서는 발해농장을 경영하여 둑립운동의 기지로 이용을 하였어며 1942년 11월19일에 임오교변때 일경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8월3일 순국을 하였다 한다.
백산선생의 일생은 나라의 독립를 위해 당신의 삶은 뒤로하고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분입니다.

하늘 높은 가을날 백산안희제 기념관과 40계단 기념관을 찾아보세요.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의 백산선생님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의 교육열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합니다.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셨고 1918년 서간도에서 망명생활을 할때 안효제의 부음을 듣고 애통한 심정과 장례절차등을 적어 안효제의 동생에게 보낸 조위문이
아래 액자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도장입니다.









터치스크린으로 선생님의 일대기, 업적등을 화면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지하2층의 전시실 모습입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 되어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은 휴관)
관람시간:09~18:00(단 토.일요일은 17:00까지)
관람료:무료
교통편:지하철 1호선을 이용하여 중앙동역에 하차, 3번 출구로 나오면 3분거리에 위치
버스정류소:백산기념관.부산데파트, 연안여객터미널
홈페이지:www.baeksan.bsjunggu.go.kr
문의전화:051-600-4067~8
주소: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거리 62(동광동3가 10-2) 6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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