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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강가에 있는 용암서원과 뇌룡정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고향마을 삼가면 토리마을.

 

남명 조식 선생은 경남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 났다. 승무원 판교를 지낸 부친 언형과 모친 인천이씨의 3남2녀중 2남으로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이며 호는 남명이다. 남명선생 부친은 삼가현의 판현에서 이곳 처가로 결혼과 함께 옮겨와 살게 되었는 외토리는 남명조식선생의 외가다.

 

 

남명선생 생가터로 찾아가는 길.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외가가 있는 삼가면 토리마을

 

남명선생의 외가가 위치한 곳은 풍수설에 명당터로 알려진 곳이다. 닭의 해에 태어나는 아기는 자라서 현인이 된다고 하였는데 그해 남명조식선생이태어 나던날 우물에서 무지개빛이 온사방으로 퍼지며 남명선생을 잉태한 모친의 방안을 환히 비추었다. 그 빛을 받으며 남명조식선생이 태어나니 선생은 태어날때 부터 남 달랐다.

 

 

남명조식선생 생가터의 안내판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유림의 태두,

 

선생은 퇴계이황과 함께 영남 유림의 태두로 우뚝서며 경과 의를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30세에 남명선생은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제자릴 가르쳤다. 48세에 고향 삼가의 토동으로 돌아와 향천강 언저리에 뇌룡정과 강 건너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남명조식선생 생가터의 모습, 밭이였던 이곳에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용암서원. 뇌룡정의 유래와 남명조식선생

 

뇌룡정은 조식선생이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 가기전 12년을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던 곳으로 뇌룡이란 장자의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에서 따온말로 풀이를 하자면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은 뇌룡정에서 을모사직소(단성소)상소.

 

선생의 나이 55세에 이곳 뇌룡정에서 당시의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상소문을 올린다. 이를 을묘사직소라는데 단성소라고도 한다. 단성소에는 남명선생의 기개와 선비정신이 잘 나타나며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인 왕을 고아라고 하고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라 하여 조정과 사림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고향마을 삼가면 토리마을 뇌룡정.

 

그 단성소의 내용이 지금 뇌룡정 옆 용암서원 앞에 대리석으로 삐까번쩍하게 만들어 놓았다. 용암서원은 1576년에 삼가현 서쪽 회산마을에 노흠등 남명의 후학들이 회산서원을 지었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1601년 향천강 앞으로 옮겨 지어면서 향천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8년 후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서원지는 1987년 합천댐에 수몰되면서는 2006년 뇌룡정 옆으로 옮겨와 다시 복원을 하였다.

 

 

남명선생 생가터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용암서원과 함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남명조식선생.

 

당시의 뇌룡정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된 후 1678년 합천군 봉산의 계산에 있었다. 용암서원의 부속건물로 로 뇌룡정은 재건되고 1758년과 1831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그 후 1868년 서원철폐령에 용암서원과 함께 뇌룡정은 훼철되었다.

 

 

합천군 생가면 외토리마을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신묘사도에 따라 뇌룡정 지어.

 

지금의 뇌룡정은 1883년 조희규의 발의에 의해 현감 신두선의 협조로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전체 건물의 배치는 남명조식선생이 지은 '신명사도'의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다. 정면5칸 측면 2칸의 뇌룡정은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왓집으로 중앙에 대청을 넣고 좌우로 방을 3개 두었다. 지금 외토리는 남명조식선생의 고향이라 그런지 복원공사가 여러곳에서 진행중이었다.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고향마을 삼가면 토리마을. 복원공사의 문제점.

 

먼저 남명선생의 생가터로 그 당시의 흔적은 찾을길 없이 밭으로 흔적이 바뀌었는데 안내판이 없다면  이곳이 선생의 집터인지 알 수가 없다. 마을 입구 안내판을 보고 남명선생 생가터를 찾아 갔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찾을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집 뒤로 올라가라며 가르켜 주는데 현재에는 목조 건물을 한동 복원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건물을 토대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게 한동을 짓는 중이었다. 그곳을 나와 왼쪽 향천강 쪽으로 보면 큰 기왓집이 보이는데 새로 지은 건물인 용암서원 복원현장이고 그 옆에 무너질 듯이 서 있는 건물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9호인 뇌룡정이다.

 

 

   

외토리 쌍비.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뇌룡정 복구가 더 시급.

 

사라진 건물을 복원하는게 더 급한 것인지 있는 문화재를 먼저 복구하는 것이 더 급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뇌룡정은 방문때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고 대청의 마루가 뜯겨나가 있는등 황폐화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용암서원 복원 공사도 중요하고 남명선생 생가터 복원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를 제 모습으로 중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복원도 중요하고 복구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의 관리 문제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산청군 시천면 덕산의 남명 유적지 관리 상태를 보다 이곳을 보니  말만 남명선생은 이황과 함께 영남의 거목이라 떠들지 말고 실질적인 관리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경남여행/합천/삼가여행)삼가 뇌룡정. 남명조식선생의 고향마을 삼가면 외토리 쌍비인 효자비 유래.

 

남명선생의 유적지는 아니지만 외토리 쌍비로 불리는 비석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며 비각안에는 두개의 비석이 남아 있다. 왼쪽의 비석인 앞면에 '효자리'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 이전인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온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세운 비석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말 이성계가 병마순찰을 영남지방으로 순시하였는데 선생의 효행을 듣고 왕에게 보고를 하니 1383년 고려우왕 9년에 고성군사 최복인에게 명하여 효행비와 비각을 세웠다전하며 비석의 명문이 남아 있다.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은 현재 판독이 불가할 정도로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여 백비로 부른다. 왼족비와 함께 효행비로 추정 할뿐 알 수 없다. 원래 비신만 남아 있어 1686년 숙종12년 비석의 대석과 이수를만들어 세웠다.

 

 

용암서원 앞에 남명조식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단성소 상소문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때 도로공사로 인해 원래 비가 있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 

 

 

용암서원 앞의 남명조식선생상.

 

 

용암서원.

 

 

남명조식선생 유적지 뇌룡정.

 

 

 

 

 

 

 

 

대청의 마루가 뜯겨 나간 모습.

 

 

향천강가로 내려서는 쪽문

 

 

뇌룡정의 뒷 모습.

 

 

잡풀이 무성한 뇌룡정.

 

 

 

 

 

 

 

 

 

 

 

 

 

 

 

 

 

 

 

 

 

 

신명사도를 따라 지었다는 뇌룡정.

 

 

뇌룡정 옆의 용암서원.

 

 

 

 

 

 

뇌룡정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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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에 대해...


남명선생 기념관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로 말년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물려준곳으로 산천재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는 남명선생 탄생 500주년에 그의 학덕을 기리고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2004년에 건물을 완공하였다. 남명조식 선생은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를 지낸 부친 조언형과 모친  인천이씨의  3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이며 남명은 호다. 19세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처형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된 것을 보며  잘못된 정치의 모습을 아쉬워 하였다.

 그는 30세때 부터 그의 처가인 김해시 대동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짓고 이곳에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을 것을 작심하며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를 산림처사라한다. 다시 48세에 삼가의 외토리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는 55세때 이곳에서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조정에 올리게 된다.




61세에 그는 현재의 위치인 산청 덕산으로 와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진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명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 두글자로 함축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직內, 義以方外)'에 따온 것으로 경은 내적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선생은 학문과 삶이 일치하는  생활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역설하였다. 


그의 사후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전치원등 50여명에 이르고 오건, 김우웅, 최영경, 하항, 정구, 정탁등  많은 석학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였다.(남명학연구원의 남명선생 사적지 팜프렛 발췌)






남명기념관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선생이 뇌룡정에서 올린 단성소...


단성소 국역비는 남명선생 동상 오른쪽에 위치를 항다. 2009년 10월10일  남명학연구원에서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웠는데 내용을 보면 단성소는 명종 10년인 1555년 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와 당시의 국정의 문란을 질타하는 상소문으로 '을묘사직소'라 한다. 임금의 권력이 절대 지존이었던 조선시대에 왕을 '고아'라하고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라 칭하여 조정과 사림을 놀라게하였다. 이것만 봐도 남명선생의 곧은 성품이 잘 드러난다하겠다.

 

 

 

 

신명사도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의 신명사도와 같은 생활....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으로  그림에서 보는 둥근 성곽안은 사람의 마음이고 그 성곽의 바깥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체의 내외부로 부터 일어나는 모든일을 나타낸다 하겠다. 남명선생은 인간의 마음을 성곽에 비유한 것은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을 반드시 막아야한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선생은 합천삼가의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었고 그의 삶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실천하려고하였다.

 

 

남명조식선생 영정

 

 

 

 

덕천서원

 

 

 

 

 

 

 

 

 

 

 

 

 

 

 

 

 

 

 

 

 

 

교지광해군 10년(1618년)내암 정인홍에게 내린 영의정 교지

 

 

유서광해군 1년(1609년)광해군이 내암장인홍에게 내린 유서

 

 

 

 

 

 

 

 

 

 

 

 

 

 

왕실하사 오경백편왕실에서 하사한 책

 

 

 

 

덕천서원사우록남명 선생 스승과 친구 그리고 봉인의 행적을 기록한 책

 

 

 

 

 

 

남명집

 

 

학기유편

 

 

사성현유상병풍남명선생이 직접 그린 공자, 주렴계,정명더, 주자의 유상병풍

 

 

 

 

 

 

 

삼가토리의 뇌룡정

 

 


뇌룡정은 선생이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면에서 4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을 짓고 산천재로 옮겨가기전까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


 

경의검

 

 

 

경의검(敬義劍으로 남명선생은 '내명자경 외단자의"라 새겨진 장도를 가슴에 항상 품고 다녔다.

 

성성자

 

 

성성자(惺惺子)라 부르며 남명선생은 평소에도 작은 두개의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녔다. 성은 께닮음을 뜻하며 성성자는 남명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며 방울소리를 들을때 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하였다.

 

 

 

 

 

 

 

 

 

 

 

여재실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위패를 모신 여재실.


여재실은 문중에서 남명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이다. 여재실에는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불천위로 지정되어 매년 2월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명선생 동상 왼쪽에 있는 비로 신도비다. 이비는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잘 표현한 글로 우암송시열이 지었다 한다.

 

 

남명선생묘지

 

 

남명기념관 뒷산 임좌원에 자리잡고 있는 남명선생의 묘소. 생전에 선생이 직접 묫자리를 정하였다한다.  대곡성운 선생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산해정과 신산서원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김해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과 신산서원.


신산서원과 산해정은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신어산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산해정은 선생이 30세때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학문에 정진하며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신산서원은 그 후 신산서원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1999년 김해시에서 산해정 뒤에 사당을 건립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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