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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동방오현의 한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며 도동이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도동서원의 볼거리는 서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400년된 은행나무로 서원의 건립을 축하하며 한강정구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켜켜히 세월의 때가 묻어 시멘트 기둥에 한몸을 뉘이고 있지만 그의 풍모만은 하늘로 뻗어 올라가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보여 준다. 그런 이유로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400년된 은행나무의 기품이  대단 도동서원


현풍IC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약 10km거리이다. 다림재를 넘어  낙동강을 따라  강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도동서원은 도산서원, 소수서원,병산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서원이며 보물제 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원래 도동서원은 1568년 조선선조원년에 비슬산 자락에  쌍계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마로 불타고 1604년인 선조37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871년 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든 서원은 훼철되지만 도동서원과 함께 47개 서원은 제외되어 도동서원은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400년된 은행나무로 도동서원 앞에 있다. 도동서원 완공기념으로 한강정구선생이 직접심었던 나무다.

 

 

도동서원은 기존의 서원과는 다른 형태다. 일반 서원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도동서원은 낙동강으로 인해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때문에 중정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 볼 수 있는 도동서원의 풍치는 그야말로 가을의 노란 은행나무와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중정당의 기단에 4개의 용머리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 역활 도동서원


도동서원으로 오르는 길은 1973년에 복원된 2층 누각 수월루를  지나가면서 시작된다. 좁다른 층층 돌계단을 올라 좁은 환주문을 들어서면 도동서원의 경내다. 정면에 강당인 중정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두줄의 급한 돌계단이 퇴색한 모양을 하고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서원과 사당을 구분짓는 내삼문은  꼭꼭 잠겨져 있고 이곳은 김굉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그때 도동서원을 관리하시는 분이 올라오시며 보여줄것이 있다고 같이 가잔다.  사당옆의 담벼락을 가르키며 전국 서원에서 유일하게 도동서원에만 있다는 작은 창을 가르켰다. 문을 빼꼼히 밀어 왼쪽 담벼락을 보니 사각모양의 창틀이 보였다. 그 창틀의 용도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태울때 나는 연기를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도동서원도 여느 서원처럼 수월루에서 사당까지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전학후묘의 양식으로 앞에는 공부를 하는 강당을 뒤로는 신주를 모신 사당이 위치함을 말한다. 




2층의 수월루. 이곳을 지나면 도동서원으로 올라갈수 있다.

 

 


강당인 중정당은 스승과 함께 학문을 닦고 배우는 공간이며 그 아래에는 동재인 거인재와 서재인 거의재를 서로 마주보게 두어 유생들은 이곳에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중정당을 받치는 기단을 자세히보면 완구의 블록을 쌓는 것처럼 잘짜여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용은 물의 신을 의미한다. 도동서원의 기단에 있는 4개의 용머리는 여름철에 수시로 낙동강의 물이 범람을 하여 서원으로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며 아울러 화재로 부터 서원을 보호하기위한 비보책이다. 도동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중정당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도동서원의 흙담장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중정당은 정면5칸에 측면 2칸반의  규모로 옆에서 볼때 사람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고 앞으로 툇마루도 달았다. 온돌방 사이에 3칸의 대청마루를 넣어 툇마루와 서로 통하게하였다. 가을의 도동서원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인해 한층 더 중후한 모습을 선사하는 곳으로 많은 문화재 답사팀들의 단골코스로 익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대구 달성 여행지의 도동서원으로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중정당을 위해 들어서야하는 환주문 아래에 설치된 조형물.

 

 

서재인 거의재로 유생들이 생활하는 곳

 

 

 

 

 

 

강당인 중정당

 

 

바둑판처럼 퍼즐 맞추듯 쌓은 기단의 모습과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로 설치한 용머리의 모습.

 

 

 

 

 

 

동재인 거인재

 

 

 

 

 

 

 

 

 

 

 

 

 

김굉필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삼문.

 

 

 

 

 

 

 

 

김굉필의 신주를 모신 사당

 

 

사각 모양의 창틀이 다른 서원에는 없다. 그용도는 재사를 모시고 난뒤 축문을 태우면 저 창문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내삼문 앞에서 바라본 낙동강의 모습

 

 

 

 

 

 

 

 

 

 

보믈로 지정된 아름다운 도동서원의 흙담장

 

 

 

 

 

 

 

 

 

 

 

 

도동서원의 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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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관아

밀양시 내일동인 아북산 자락인 밀양시장 맞은편에는 조선시대의 밀양관아 터이다.

1895년 고종32년에는 이 곳이 밀양군청으로 사용이 되다가 1927년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이 옮겨가면서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 사무소로 변천을 하면서 사용을 하게 되었다. 2010년 국권회복 차원에서 밀양관아가 복원을 하였다.

조선시대 밀양관아를 복원하기 위해 밀양관아터를 2008년부터 발굴을 하게 되었다. 밀주구지에 따르면 밀양읍성이 축성될 당시에 함께 세워졌는데 100여칸의 웅장한 건물로 축성이 되었다 한다. 본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인 선조25년 즉1592년에 모두 불타버린 것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32년인 1599년에 밀양부사인 이영이 영남루 경내에서 집무를 보다가 1611년인 광해군 3년에 와서 밀양부사 원유남에 의해 현재자리에 밀양관아를 세웠다.

중건후 300년동안 관청 건물로 사용이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와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연훈당, 전월당, 신당등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에는 정확한 규모와 세워진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내삼문, 동헌, 매죽당, 북별실이 복원되어 있다.

지방의 수령이 공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은 동헌으로 근민헌(近民軒)으로 불렀는데 목민관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었다.‘백성을 친근히 하되 낮추어는 보지 않는다’. 사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큰 건물과 마주 한다. 그 중간에 집무를 담당하던 부사의 모습이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동헌에 앉아 백성의 마음을 읽는 목민관을 보는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내삼문 계단을 올라서기 전 좌측편으로 19기의 비석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밀양 부사와 밀양을 관할하던 관찰사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이 소상히 적혀 있는 유허비로 밀양 목민관의 논공행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헌 우측으로 담장을 둘러 중문을 달아 관아와 분리를 한 곳은 매죽당으로 관아의 별실이다. 이 건물은 부사의 비서가 사무를 보던 곳이며 밀양관아의 자재들이 공부를 하던 곳으로 이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의 관리동 뒤로는 누각건물이 들어 서 있다 . 조선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ㄱ’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북별실로 정확한 용도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별실이란 이름에 의해 공무는 동헌에서 보았지만 업무 이외의 일들을 보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를 지나 밀양시장 앞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옆으로 가면 된다.


내삼문의 모습으로 포졸 두명이 관아를 지키고 있다.

밀양 부사및 관찰사들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한 19기의 유허비


동헌의 모습으로 현판에는 목민관이 마음에 새겨야 할 '근민헌'





관아의 자재들이 공부를 하던 장소 도는 부사의 비서가 업무를 보던것으로 관아와 분리를 해 놓았다.




부사의 별업으로 업무는 동헌에서 보지만 그 이외의 일들을 본 것으로 추정을 하는 북별실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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