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북여행/구미여행)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90도 각진 모서리를 깎아 섬세함이 돋보이는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구미 금오산은 도립공원 1호입니다. 경북 구미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습니다. 고려 충신인 야은 길재의 충설을 모신 채미정과 고려시대 때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쌓았다는 금오산성, 그리고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등이 있습니다.



금오산은 역사적인 깊이만큼 고려시대 유적이 많습니다. 자연보호 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구미 금오산 대혜폭포는 27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울림이 금오산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우렁차다하여 명금폭포로도 구미에서는 부릅니다. 그 만큼 구미시민에게는 금오산을 민족의 영산인 구미의 백두산으로 할 만큼 신성시 합니다.



금오산의 8부 능선에는 어느 할배의 애틋한 손자사랑이 오형돌탑으로 만들어지게 된 슬픈 사연 만나고 그곳 언저리를 돌아서면 보물 제 490호 금오산 마애 보살상이 있습니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0호로 일찍부터 지정된 우리의 고려시대 문화재입니다.



금오산의 최고봉 현월봉을 바라보는 모습인 금오산 마애 보살 입상은 90도로 꺾인 자연 암벽 모서리를 깎아 조각한 특이한 보살상입니다. 주위에 편편한 넓은 바위도 많은데 왜 하필 각진 모서리에 보살상을 깎았는지 속세의 한사람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꺾인 모서리 좌우를 이용하여 조각을 하여 입체감을 잘 나타내어 꼭 살아 있는 보살상의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한 모습입니다. 크기는 일반 불상보다 엄청 큰 5.5m로 보살상 전체 크기에 비해서 손이 두드러지게 크며 옷 주름, 연꽃대좌등을 세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연꽃대좌 위 발의 묘사는 투박하며 마애보살입상 좌측 뒤로 광배와 반원형 연꽃대좌등을 처리한 것으로 보면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1 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14/11/09 -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728x90

728x90


☞(경남여행/밀양여행)활성동 영원사지. 밀양 용두산의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 세운 사찰  영원사지


영원사지

밀양시 활성동 구서원마을에는 요즘 많은 차량들이 들락거린다. 구서원 골짜기 안의 절골과 부도골을 까뭉게고 현재는 리더스란 골프장이 들어서서 많은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과 현재의 만남이랄까.

이 골짜기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하기 위해 절을 폐한 그 터에다 1567년에 부사이경우가 이곳에다 덕성서원을 창건하였다. 퇴계이황의 점필서원이란 현판 글씨를 걸고 강학하던 장소로 1637년인 인조15년에 운례촌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상남면 예림동 예림서원으로 옮겨 배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서원이 떠난 옛 서원 자리라 하여 구서원 또는 구손. 덕성동으로 불린다. 





영원사지는 칠탄산과 일자산인 산성산 즉 자씨산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사찰로 자씨산의 형국이 용이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자씨산 아래에 절을 세워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서 창건을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로 보고 있으며 고려 말에 대학자인 익재이재현의 익재집에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서’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때의 석불좌상3구와 부도탑의 귀부와 이수를 1974년 부도골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옛 영원사에는 선조루란 누각이 있었고 사찰의 영화는 온데 간 데 없고 지금은 산사면을 파내어 골프장이 들어서 그때의 영원사를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주 일주일 상간으로 두번이나 찾아 갔는데 하루는 잡초가 무성한 상태로 관리가 되어 있었고 재차 방문때는 잡초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어 내마음도 이발을 한양 가볍게 돌아 올 수 있었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보감국사는 1313년에 고려 충숙왕 이 왕위에 오르자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 후 2년 뒤 물러나 영원사로 들어와 주석하였다.
송림사에서 입적을 하였는데 보감국사는 수도승의 최고경지인 좌탈입망인 앉은자세로 입적을 하였다한다.
현재는 거북모양에 용의 머리를 올린 귀부와 용이 서로 엉켜 있는 이수만 남아 잇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밀양읍지에는 보감국사 비문은 이제현이 지었고 그의 속명은 김혼구(1250~1322)로 보각국사 일련의 제자였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사찰의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곳이고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보관하는 곳은 부도라 한다.
여기 영원사지의 부도는 고려시대 보감국사의 부도로 현재는 몸체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각 부재들이 8각으로 처리하며 통일 신라 시대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남아 있는 받침대는 상중하대로 상대는 연꽃잎 여덟장이 겹쳐저 하늘로 향해 조각되어 있고 중대는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문양이 돌려져 있다.
하대는 팔각으로 돌려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을 새겨 넣었다.
그 위를 덮은 지붕돌은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나타낸 정교한 조각품으로 통일신라 말기를 계승한 고려시대 부도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를 건너 골프장 가든을 지나 갈린길에서 마을 안길인 우측길을 따라 활성2통 마을회관을 지나면 대추밭에 부도밭이 있다.  





728x90

728x90


지금의 대비사는 고려시대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 이전의 오갑사 사찰은 어떤 이유에선가 모두 폐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운문사도 폐찰되었다가 보양국사가 까치의 도움을 받아 절터를 찾아 운문사로 이어져 오고 있듯이 대비사도 그 이전의 소작갑사는 폐찰이 된 모습을 박곡리 곡란마을 뒤 베틀바위 아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 대비사는 신라진흥왕 18년인 557년에 복호산 아래에 있는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한 신승이 3년 동안 수도한후 560년에 7년간에 걸쳐 대작갑사 소작갑사,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인 오갑사를 창건하였다. 대작갑사가 현재의 운문사이며 소작갑사가 현재의 대비사이다. 소작갑사에서 대비사로 이름이 바뀌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자대비"'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절에 머물렀다하여 대비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비사는 신라진평왕22년인 600년에 원광법사가 운문사와 함께 중창을 하였다한다. 그후 사찰은 폐찰의 수순을 밟다가 고려시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중건이 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인 대웅전은 보물제8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중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다포계의 공포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의 외관은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원래의 목재건축물로 돌아가 있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지 대웅전의 빚바렌 단청으로 그의 무게가 더욱 느껴진다.

교통편: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2차례)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과 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박곡리석조여래좌상을 지나 박곡저수지를 돌아가면 대비사앞 주차장이다.








대비사는 이무기의 전설이 남아 있다. 어느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사 작은 암자에 스님과 상좌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방에서 잠을 자던 스님은 감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을 보니 상좌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상좌의 몸을 만저 보니 몸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데 그 다음날도 상좌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는게 아닌가. 다음날밤 스님은 잠자는 척 하면서 상좌의 동태를 살펴보니 상좌는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와 옆에 눕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저 들었다. 역시 몸이 차가운 상태였다. 다음날 밤이 되어 상좌는 다시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 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자는 척 하던 스님도 뒤따라 나와 상좌를 따라가니 상좌는 대비사 앞 연못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뒤 상좌의 몸은 이무기로 변해 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가 다시 나와 옷을 입고는 산너머 골짜기인 이무기못안골에서 빗자루를 들고는 쓸고 있지를 않는가. 놀란 스님은 '네 이놈.상좌야. 네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느냐'하며 호통을 치니 상좌는 감짝놀라  이무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며 '아 억울하다 천년을 기다렸는데. 오늘만 지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수 있었는데'하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억울함에 꼬리로 뒷산의 바위를 힘껏치고는 뒤편의 호박소로 날아갔다는는 전설이 있는 대비사. 그 깨어진 바위가 억산의 깨진 바위가 되었다 한다.

대비사에는 오래된 연륜 만큼이나 부도밭에 고승대덕의 부도탑이 11기 남아 있다. 지금은 부도밭 뒷편의 자연석에 석가여래좌상을 새겨 놓았다.









대비사의 전신인 소작갑사터로 신라시대 신승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창건된 오갑사의 대비갑사 즉 소작갑사터다.
지금은 대추나무 밭으로 조성이 되어 있고 밭사이로 연꽃무늬대좌와 석등의 받침대 그리고 깨어진 기왓장등이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소작갑사터에서 바라본 박곡리마을 전경. 그아래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 능선이 와불능선으로 명명을 하였다. 사진상으로는 안나오지만 왼쪽 끝 부분에 봉우리가 남양리에서는 부처산으로 불리고 있다 한다. 어째 이름이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이...
소작갑사터 아래에 있는 골안저수지로 이곳이 혹 대비사의 이무기 전설이 전하는 그 연못이 아닐까.상좌로 변한 이무기가 밤마다 나와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는 이야기의 대비지가 아닐까. 정면 중앙에 보이는 독립가옥 밑이 옛대비사 터인 소작갑사터이다.

 

 

 

728x90

728x90


천관사는 천관산의 북서쪽인 관산읍 농안리의 용소 골짜기인 해발 300m에 위치를 하고 있다. 절터의 앉은 지형이 특이한 모습으로 갑자기 바닷가에서 솟은 특이한 지형위에 넓은 분지를 이루는 이곳에 신라시대 진흥왕때 영통화상이 창건을 하였다 한다. 창건당시에는 화엄사란 꽤 큰 사찰로 주위에 89암자를 거느린 대 사찰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저 조계산의 승보사찰인 송광사 말사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관사의 폐찰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나 바닷가에 위치한 관계로 임진왜란등 많은 외침으로 인해 사찰의 규모는 급격하게 축소된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1659년 에 간행된 지제산사적기에서도 천관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도 천관사 극락보전을 중수하며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도 절의 규모가 남아 있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현재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와서 장한택 스님이 대웅전과 칠성당을 중건하면 서 부터이다 현재는 대웅전이 극락보전으로, 칠성당은 도통스님이 다시 중창을 하며 삼성각으로 바뀌었고 아마 최근에 와 범종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건립이 되었다. 현재 천관사는 2008년 10월부터 너른 터에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천관사삼층석탑(보물795호) 석등(전남유형문화재제134호), 5층석탑(전남유형문화재제135호)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고 천관산의 특이한 산세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한다.


대웅전이었는데 1963년에 극락보전 바꾸어 오늘에 이름
극락보전 내부에 모습으로 삼존불이 모서져 있다.
칠성각의 건물을 삼성각으로 바꾸었다 한다.

*천관사삼층석탑(天冠寺三層石塔)

보물 제795호
지 정 일: 1984.11.


극락보전 좌측 한켠에 떨어져 있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천관 보살을 모섰다는 천관사의 삼층석탑은 기단은 2단이고 3층의 탑신을 올린 고려시대 작품이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본떠 새겨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형태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게 4단씩이고, 윗면에 흐르는 경사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는 경쾌하게 치켜올라 세련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둥그런 복발(覆鉢)이 한돌에 새겨져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며 단아함을 풍긴다. 기단 각면의 가운데기둥이 생략되고, 지붕돌의 받침이 얇아져 퇴화된 수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시대가 바뀌면서 일부 양식이 지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7950000,36

*천관사 석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지정일:1986년 2월7일
소재지: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740


천관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석등으로 절에 불을 밝혀두었을 때 사용을 하는 것으로 등불을 밝히는 부분을 화사석(火舍石)이라 한다. 화사석은 동서남북 네군대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저 나가도록 하였다 . 아래에는 3단으로 받침을 두었고 받침부분에는 아래로 향하는 연꽃을 세기고 윗받침에도 연꽃을 새겨 서로 대칭을 주었다. 그 중간에 육각의 기둥을 세웠다. 연꽃 무늬를 새긴 아랫단 아래에는 8각으로 된 1개의 넓은 돌을 깔고 각면에는 안상을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지대석은 4각의 넓은 돌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화사석 위로는 지붕돌을 올렸는데 아랫부분은 평면이지만 위선은 귀퉁이가 모두 올려간 것을 볼 수 있다.



그 위로 연꽃봉우리를 올려 놓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1340000,36&queryText=V_KDCD=21

*천관사5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일 : 1986.02.07


천관사에 서 있는 5층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좌우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며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2층기단이 주류인데 반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의 전형 양식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추정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1350000,36&queryText=V_KDCD=21

2008년 10월 부터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천관사 좌측에서 본 모습입니다.

극락보전과 삼성각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최근에 조성된 범종각은 화려하고 사찰의 규모에 비해 웅장하다.

종의 문양



천관사 뒤편의 천관산은 하늘의 면류관을 쓴듯 각종 바위의 전시장으로 천관사에서 보는 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찾아가는길:승용차 이용시 순천I.C~장흥~벌교 장흥 순천만 2번~고흥 벌교 장흥 강진 낙안민속마을 2번 좌회전~청암대학앞 장흥 보성 벌교 2번~장흥 벌교 나로 우주센타~목포 벌교 2번~목포 보성 장흥~목포 장흥 보성차밭~목포 장흥 제암산 천관산~천관산 목포 장흥2번도로~목포 강진 ~천관산 관산 23번 지방도 우회전 후 좌회전(순지교차로)~굴다리~대덕 관산 23번지방도~천관산9.5km안내판~관산 우측 837번 지방도~관산읍소재지~ 칠량 837번 우회전~ 용전리 와룡마을~천관사순

728x90

728x9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연암벽의 모서리에 좌우로 조각된 특이한 마애보살입상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보물제490호로 구미시를 내려다 보고 있다.

구미 금오산은 구미시를 대표하는 산이다.

금오산은 도립공원 1호로서 자연보호 운동이 처음으로 실시하였던 곳이 대혜폭포 밑

이다. 30m의 높이에서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물소리는 천지를 진동한다하여 명금폭

포로도 불린다. 그 폭포를 돌아 8부 능선상의 바위 모서리에 새겨진 보살상을 볼 수 있

다. 금오산 마애 보살상으로 보물 제 490호 1968년 12월 19일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구

미시 남통동 산 24-1이 주소지이며 금오산 현월봉 북쪽 할딱 고개를 거쳐 오르는 능선

상 좌측 자연 암벽 모서리를 깍아 조각한 특이한 보살상을 만날 수 있다.

모서리 좌우를 이용하여 입체감을 주어 살아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하다.

크기는 5.5m로 전체에 비해서 손이 큰 것이 눈에 들어오며 세심한 옷 주름, 연꽃대좌
 
위의 발 또한 묘사가 투박하다. 그리고 마애보살입상 좌측 뒤로

광배를 처리한 것과 반원형 연꽃대좌등 고려시대 작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살상에 새겨진 정교한 옷주름과 전체적으로 큰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풍만한 얼굴모습과 가는 눈 작은 입을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등뒤로 처리한 전신광배가 뚜렷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심하게 묘사된 옷주름과 근엄한 모습까지 보이는 마애보살입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행을 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불상을 볼 수 있다. 바위 모서리를 이용하여 좌우로 균형을 주어 만들어진 마애보살입상. 편편한 바위에 새겨진 입상은 여럿 보았지만 돌출된 바위 모서리를 이용한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같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4900000,37#
문화재청 홈페이지 가시면 더욱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