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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여행/사천가볼만한곳)각산산성. 백제 무왕이 쌓았다는 경남 사천의 각산산성 여행. 


우리나라는 일본과 가까워 이를 대비한 많은 산성을 쌓았습니다. 축성 연대를 보면 길게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갑니다. 특히 남해안을 끼고는 봉수대와 산성이 더욱 많아 남한에만 남아있는 산성이 1,115곳가량 된다고 하니 이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고 산에 쌓은 산성은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는데 이를 테뫼식 산성, 포곡식 산성, 평지성 등으로 구분합니다.








이번에 방문했던 경남 사천의 삼천포항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의 산 정상부에는 각산봉화대와 그 아래 8부 능선에는 각산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산성의 길이는 대략 242m이며 돌로 쌓은 석성입니다. 각산산성의 남문은 원형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성벽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망대와 함께 복원한 상태입니다.



각산산성의 축성은 삼국시대로 605년 백제 제30대 무왕 6년에 축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6세기 중엽에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진주를 공략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 백제 무왕이면 최고의 전성기로 국력이 왕성할 때입니다.


 


무왕은 영토확장을 하면서 이곳까지 힘을 뻗어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의 ‘진주목본백제거열성’,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다”라는 기록에서 백제 땅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령왕 6년 2월에는 여러 산성을 쌓았다는데 진주의 남쪽 76리에 있다 한 것을 보면 각산산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서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가야를 두 나라가 점령하였는데 김해의 가락국은 신라가 복속시켰고, 백제는 거열성을 이용하여 고령과 가야 등을 점령하면서 이곳 각산에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 삼별초 난을 평정할 때에도 각산산성은 이용되었으며 1350년 공민왕 9년에는 왜구가 이곳에 쳐들어오자 각산아래 마을의 주민들은 산성에서 돌팔매로 항거하며 물리쳤습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에도 각산산성은 활용되었습니다. 각산산성의 규모는 7,093.3㎡이며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산산성의 복원된 건물인 장대인 망루입니다.




복원된 마루


저는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복원된 건물은 차지하고라도 마루를 보면 당시에는 아마 소나무 등을 깎아 쪽마루로 깔았지 싶은데 복원된 마루는 건축자재상에서 판매하는 듯한 기성품 느낌이 드는 작은 홈이 팬 그런 형태의 마루였습니다. 복원이 아닌 전망대로 그냥 만들었다면 할말이 없지만 복원 공사라면 좀 그러내요. 공사하면서 일손은 편했겠지만 당시에도 이런 마루였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건 아닌 것 같으며 세심한 복원이 아쉽습니다. (포스팅하고 담당하신분과 통화를 했는데, 요 건물은 문화재가 아니고 하시며 복원한거는 맞으며 바닥 마루는 비바람에 노출되어 쉽게 썩는다고 방부목인 기성품을 깔았다합니다. )











각산산성 정보 안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5호

각산산성 주소: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산 40

각산산성 문의처:055-831-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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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여행/사천가볼만한곳)삼천포 각산봉화대. 삼천포·창선 대교 전망대 사천 각산 봉화대 여행. 


봉수대 하면 무엇인지 다아시죠?? 이번에는 사천의 삼천포쪽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사천시는 내륙과 해안을 함께하는 많은 봉수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각산봉화대를 여행했습니다. 삼천포항과 삼천포대교 인근에 있으며 삼천포와 남해군을 잇는 삼천포·창선대교 전망대로 각산 전망대가 인기가 아주 높습니다.






 

비 오는 날 올랐던 각산봉화대에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삼천포·창선대교에 내려앉은 안개는 그야말로 신선들의 안식처와 같은 선경이었습니다. 역시 삼천포 창선대교 조망 1번지에 손색이 없습니다. 봉수대는 그만큼 전망이 탁월한 곳에 새워집니다.

 

 

각산 전망대로 사방이 시원한 조망권을 펼쳐주는 게 막힘이 없습니다. 각산 봉수대는 삼천포항의 동북쪽을 병풍처럼 막아선 각산 정상부에 세워졌습니다. 봉화는 봉수(烽燧)로도 부르는데 봉(熢)은 횃불과 수(燧)는 연기를 뜻합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서 급보를 전하던 통신수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149년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각산봉화대에 사용된 돌은 자연석으로 다양한 크기의 돌을 쌓아 둥글게 2단으로 만들었습니다.

 

 

 

 

화덕이 있는 아랫단과 달리 연통인 윗단에도 불을 지필 수 있는 사각형의 화덕이 만들어졌으며 아랫단에는 윗단 화덕으로 오를 수 있는 돌계단이 있습니다. 각산봉화대는 현재 남해안에 남아 있는 여러 봉수대 중에서도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남해 금산의 구정봉에서 올린 봉수를 다시 창선도의 대방산을 거쳐 받았으며, 받은 봉수는 내륙의 사천 용현면과 곤양면의 침지봉수와 우산봉수로 각각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바다 건너 왜구의 잦은 침입을 알리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조선 세종 때에 침지봉수를 폐지하고 그대신 용현면의 안점산 봉수로 전하였고, 때로는 통영 사량도의 공수산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고성의 좌이산으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봉수의 역할은 고려 때 왜국의 침입을 전달하는 통신수단으로 설치되었다합니다.


 

 


사천 각산 봉화대 정보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6호

각산 봉화대 주소: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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