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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강진여행)월출산 월남사지삼층석탑. 해체해서 발굴조사와 복원을 기다리는 월남사지삼층석탑 여행


진도 출장을 가면서 강진의 병영 읍성이 있는 병영 오일장의 수인관에서 맛있는 연탄돼지불고기를 먹고 월출산 아래에 있는 월남사지를 잠시 들러가기로 했습니다. 

월남사지에는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313호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삼층석탑 주소: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4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삼층석탑 전화:061-430-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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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도 꼭 가보고 싶었던 월남사지였던지라 쌩하며 차를 달렸습니다. 

멀리 닭볏 같이 울퉁불퉁 치솟은 바위 능선이 차츰 눈앞에 크게 다가왔습니다. 

곧 월남사지 안내판을 보고 들어섰습니다. 

함께한 일행이 이쯤이면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상층부가 보여야 하는데 왜! 안보이지 했습니다. 

막상 월남사지 앞에 도착했더니 펜스로 가람막을 해 놓았습니다.



월남사지 2013년도 촬영 사진



월남사지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굴착기가 들어와서 진각국사비가 있는 곳을 막 헤집고 난리였습니다. 

아!!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보려는 열망은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듯 허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ㅋㅋ 갑자기 열불이 확 뻗쳐올랐습니다. 

머시고 만날천날 복구작업이고 하면서 괜히 엉뚱한데다 화풀이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문화재를 찾아 전국의 여러 곳을 많이 답사했지만, 보수공사를 한다고 가림막을 쳐 놓고 했던 곳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몇 시간을 달려 멀리까지 찾아갔다가 막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허탈감이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옛날 속담처럼 어찌 그런 속담과 맞아떨어지는지 하필 월남사지가 가는 날이 장날과 같이 발굴조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 지금은 휑한 모습입니다.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는 아예 형체도 볼 수 없이 산산조각으로 해체해서 큰 건물 안에 일렬로 보게끔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해체한 부재를 한곳에 모아둔 곳이라도 보게끔 해놓아 아쉬운 마음에 해체된 부재를 보고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월남사지는 월출산의 남쪽에 자리한 폐사지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았다합니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말사였다고 합니다. 

월남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으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외의 문헌에도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월남사의 창건을 그 이전으로 보는 게 진도 용장성에서 출토된 청동함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진양부조월남사월악산양삽구인(晋陽付造月南社月岳山樣九印)”의 명문에서 월남사와 당시 고려의 최충헌이 무신정권으로 집권하며 진강후에 봉작되고 그의 뒤를 이은 최우가 진양부를 세워 최씨 무신정권의 중심 권력기구가 됩니다.









여기에서 진양부를 보면 월남사는 최씨 무신과 특별한 관계 속에 사세가 번창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순천 송광사에 2세 사주였던 혜심이 최씨 무인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월남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를 혜심의 창건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최근 발굴되는 유물에서 백제기와와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유구가 함께 출토되며 이를 추정하면 월남사 창건은 백제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문화재 발굴 안내판을 참고하면 월남사의 폐사는 1739년 무위사 사적기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적기에는 정유재란으로 무위사만 남고 주변 모든 사찰이 불탔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때 월남사도 함께 불탔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현재 월남사지는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해체해서 드러누운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왔습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또한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며 문헌과 석탑의 양식에서 고려 초기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벽돌처럼 다듬은 여러 석재를 쌓은 전탑(벽돌탑) 형식을 모방하였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에서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했습니다. 

기단이 단층이고 옥개석의 끝이 미세하고 반전한 것을 보면 이와 비슷한 석탑이 국보 제9호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입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모전 석탑인 백제계 양식의 탑으로 알고 있었으나 높이가 8.4m인 거대한 삼층석탑에다 기본양식과 결구 수법 등이 백제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어 2002년부터 월남사지 모전 석탑이 아닌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일부사진: 문화재 발굴조사 안내판 촬영)



일단 월남사지 삼층석탑도 해체되어 실물을 볼 수 없고 부재만 볼 수 있습니다. 

복원되면 그때 다시 월남사지를 방문하여 완벽한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혜심의 진각국사비를 포스팅하겠습니다. 

큰 부재와 수박만 한 크기의 부재까지 번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하루 일찍 복원되기를 빌었습니다.









월남사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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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구황동 모전석탑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설의 사찰인 도림사가 구황동 모전석탑지.  


이번 경주 여행은 폐사지입니다.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등 폐사지라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를 뜻하는 감투(?)를 하나쯤 모두 쓰고 있는데 구황동 폐사지는 많은 부재가 남아 있음에도 문화재 지정 타이틀이 없이 그저 울타리만 둘려 잡초더미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도로 하나를 두고 있는 폐사지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동네 이름을 따와 구황동 모전 석탑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석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아니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찰 이름을 비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면 현재 구황동 모전 석탑 지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 일본인이 ‘도림(道林)이란 기왓조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추정해보면 도림사가 맞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도림사는 입도림 곁에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수도 즉 서라벌 입구에 자리했던 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가 도림사 폐사지가 맞다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옵니다. 무엇이 재미있냐고요? 모두 아시는 이야기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48대 왕은 경문왕입니다. 경문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경문왕은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큰일 났다며 좌불안석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나귀 귀같이 귀가 길다는 비밀은 왕후와 신하들 모두에게도 비밀로 하였지만, 자신의 왕관을 만드는 사람인 복두장에게 만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만약에 비밀을 발설하면 죽음뿐이라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하하 그리고 보면 사람이란 남이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 했겠습니까.

 


그것도 임금님 귀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요즘 같으면 ’특종‘감인데 말입니다. 아마 복두장이는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제 명에 못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복두장이는 시름시름 몸을 앓았고 죽기 전에 비밀을 다 털고 갈 욕심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하며 큰소리로 외쳤고 복두장이는 죽었습니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복두장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문왕은 큰일 났다며 사람을 시켜 도림사의 대나무숲을 모두 베게 하고 산수유를 심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하며 소리가 났다 합니다. 이게 실제 사실이라면 경문왕은 황당해 했겠습니다.

 


모두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의 실제 도림사라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 지가 도림사였다 생각하니 어디선가 갑자기 복두장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 모전 석탑 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의 벽돌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모전 석탑 또는 전탑이라 하며 남은 부재로 짐작해보면 분황사 모전 석탑과 같은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남·북 감실의 돌기둥 2쌍만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돌기둥이 배치된 모양으로 짐작해보면 탑은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4.5m쯤 되는 크기입니다.



이는 한 변이 13m인 분황사보다는 크기 면에서 아주 작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층 탑신의 사면에다 감실을 넣고 사방불을 모신 형식이며 돌기둥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그 섬세함이 통일신라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한 쌍의 인왕상 돌기둥은 금강역사상으로 국립경주박물관 고분관 입구에다 배치해 놓았다 합니다. 그러나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부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화강암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탑신을 바쳤던 지대석입니다. 이를 보면 모전 석탑에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사학자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에 남아 있는 부재인 인왕상 돌기둥 등을 보면 모전 석탑임이 틀림없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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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사천왕사지. 황량한 폐사지에 잡초만 무성, 초석만 천년 흔적을 말해주는 경주 사천왕사지 여행. 


경주는 신라와 통일신라를 거쳐오면서 오늘날 수많은 불교 문화재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이 나뒹굴어 혹시 돌멩이도 문화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경주를 문화재의 보고라 합니다. 그러나 경주여행을 하면서 황당한 경우를 당하는 게 더러 있는데 폐사지에서 그 많은 불교 문화재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때 입니다. 이번과 같은 사천왕사지 방문이 꼭 그런 경우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



사천왕 사지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 등장하는 사찰입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죽을날을 미리 알려주며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이해 못 한 신하들은 선덕여왕에게 도리천이 어딥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낭산 남쪽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날에 진짜로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신하들은 모여 선덕여왕의 유언대로 낭산에다 장사지내며 왜 여기가 도리천이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리고 30년쯤 후에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란 절이 세워졌습니다. 


왜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며 도리천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로 나오는 전각이 대부분 천왕문입니다. 이곳에 네 분의 사천왕을 모셨는데 모두 험상궂게 생겼으며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 등 부처님의 나라인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사천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28개의 하늘나라가 있으며 그중에서 첫 번째 나라가 사천왕이 지켜주는 시왕천이며 두 번째 나라가 부처님의 나라로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입니다. 그러니까 사천왕사 위인 즉, 선덕여왕릉이 부처님의 나라인 도리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덕여왕의 도리천 예언은 맞아떨어졌으며 이 모든 게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사천왕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천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기술하고 있습니다. 679년 신라 문무왕 19년에 명랑법사가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낭산 남쪽의 신유림에 창건했다 합니다. 당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임시 건물을 짓고 명랑법사는 중국에서 배운 밀교인 문두루비법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파도를 일으켜 당나라 배를 모두 침몰시켰습니다. 이는 범어로 문두루는 무드라(mudry)의 음사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됩니다. 명랑법사는 1.2차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나서 건물을 다시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했다 합니다. 현재 사천왕사지의 구조를 보면 통일신라 양식인 금당이 1개에 동·서탑 두 개의 목탑 형식으로 가람배치를 했는데 이는 통일신라 양식으로 사천왕사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사천왕사는 주춧돌과 목이 달아난 귀부 2개,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어 당시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사천왕사는 대사찰의 사격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폐허로 남아있던 사천왕사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처음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1922년, 1928년에도 사천왕사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2006년에 들어 와 서탑지의 정밀조사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사천왕사의 체계적 인 발굴조사로 탑의 기단부와 하부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반파된 채로 남아 있던 녹유사천왕상전이 기단석에서 발견되어 사천왕상의 배치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당시 신라 최고의 조각승인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눈을 부릅뜨고 귀는 축 늘어 졌으며 익살스러운 치아와 생동감 넘치는 인체표현 등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갑옷과 테두리의 장식된 꽃무늬 등 모든 거 하나까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2016/10/31 - (경주여행)신라 27대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낭산 도리천의 선덕여왕릉 여행과 세가지 예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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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당간지주


현재 사천왕사지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은 사천왕사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사 당간지주입니다. 보통 사찰의 입구에 절을 알리는 당을 거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그 당간을 잡아주는 두 기둥을 말합니다. 지면에서 높이가 230cm에 당간의 폭은 50cm이며 현재 당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이한 점은 3개의 구멍이 있는데 가운데가 원형이고 나머지 상·하는 네모 구멍입니다. 또한, 당간을 받쳤던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목이 달아난 미석 받침돌 귀부


사천왕사지를 알리는 표지석


경주 사천왕사지 목탑지


사천왕사의 목탑지는 1금당 2 목탑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동·서 2개의 목탑으로 금당지 앞에 좌우에 세워졌습니다. 동탑은 1.3m 높이로 흙을 쌓은 기단 위에 3칸 정사각형을 하고 있습니다. 목탑의 받침돌인 초석은 각각 정사각형이며 크기는 약 50cm입니다. 초석의 가운데 심초석은 약 118cm 크기의 네모 반듯한 모양이며 그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30cm에 7cm 깊이로 패인 사리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탑지 또한 초석과 심초석이 동탑지와 같은 형태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금당터


금당지는 사찰의 가운데 위치하며 대웅전을 말합니다. 이곳 사천왕사의 중심부에도 금당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 있어 금당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가운데 현재 없어진 3개의 초석은 무덤을 조성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남아 있는 초석으로 금당지의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입니다. 그 가운데에 불상을 안치했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가로 약 200cm, 세로 약 100cm인 정사각형 받침돌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좌·우경루터


금당지에서 북쪽으로는 사천왕사 좌·우경루터입니다. 사천왕사의 좌·우경루는 금당지 앞의 동·서 목탑지와 배치되도록 세워졌습니다. 초석의 배치를 보면 경루는 3칸 4방의 건물이며 초석의 중심에 지름이 20cm 크기인 둥근 구멍이 패여 있어 아마 이곳에 어떤 시설물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2006년 경주 사천왕사지 발굴 현장의 사진입니다. 가운데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그리고 좌·우경루터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있습니다.(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벽전이란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을 뜻하며 동목탑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동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서탑목지에서 발견된 녹유벽전으로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폐사지인 사천왕사를 방문하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황량하게 변해버린 터에 잡초만 무성하고 그사이에 초석만 드문드문 보여 발굴 당시의 모습과 발굴과 함께 나왔던 유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녹유벽전’ 이외에도 ‘녹유사천왕상’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의 유물은 현재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참 궁금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경주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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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들의 천년 흔적 보문사지 여행.


신라 시대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령스러운 영산의 대상이었던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보문들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런 황금 들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문단지를 간다고 북천 옆 도로를 따라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 골짜기 안쪽이 이리 넓은 줄 이번 경주여행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경주 보문리 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보문들을 가로질러 닿았던 보문사지는 보문들의 가운데 황금 들판을 울타리 삼아 무심한 듯 오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보문동의 유래도 아마 이곳 보문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마을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 보문사지 주위로는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황복사지가 그러하고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이 현실이 되었던 사천왕사지가 보문사지와 함께 서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지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보문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만 될 뿐입니다.

 

 

 

 

현재 보문사 터는 주위가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당지와 동·서탑지 등 모두가 1~2m 정도로 흙이 쌓여 높은 상태 있습니다. 금당지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깔려 있으며 금당 지 앞 좌우 높은 단에는 동·서의 목탑지가 남아있습니다.

 

금당지의 모습입니다. 

 

 

 

 

 

 

 

 금당지 아래 옛날 논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등 부재들...


동탑지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현재 연꽃무늬가 조각된 목탑의 받침돌인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목탑건물이나 황룡사 9층목탑과 유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이 고려 시대 몽골침입 때 소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탑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금당지 앞에는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 등이 뒹굴고 있는 게 신라 천 년의 뒷모습인 양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현재 보문사지 서쪽으로는 보물 제123호인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62m 떨어진 북쪽으로는 보문사지 당간지주인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가 남아 당시 보문사의 현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m이며 보문사지의 여러 부재와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 때에 조성되었습니다. 절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고정했던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돌로 된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당간은 철당간과 목당간 석당간이 있는데 당간지주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가 손꼽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안쪽 면이 평면이라면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가늘어집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렸고, 북쪽의 돌기둥은 구멍이 반만 패여 있어 특이한 경우입니다. 두 기둥 중 북쪽 기둥은 윗부분이 부러진 상태이며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크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 또한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로 형태의 직육면체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같이 그저 밋밋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석조의 북쪽만 아랫부분에 배출구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들에서 만나는 천년전의 보문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물로서 당시 보문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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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의령여행)의령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보천사지 승탑. 폐사지인 보천사지에서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보천사지 승탑인 아름다운 부도를 만나세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벽화산 깊은 골에 보천사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합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승탑인 부도, 그리고 보천사지의 규모를 보면서 그 당시 보천사가 엄청나게 번창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폐사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보천사에 많은 빈대가 들끓어 폐사되었다합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처럼 남아 있는 절터의 폐사 원인을 보면 빈대로 인해 폐사되었다는 게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보천사지는 빈대가 폐사 원인으로 보기에는 조금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봅니다.

 현재 보천사지가 있는 곳에는 벽화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벽화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하며 임진왜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장군이 이곳 벽화산성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큰 승리를 하였던 곳입니다.

당시 벽화산성에서 왜적 수천 명을 몰살 시켰기에 왜구로부터 호남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천사지와 벽화산성은 직선거리로 수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왜구들은 이곳 보천사애 주둔하며 벽화산성 탈환을 시도했던 것은 아닌지.

 또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의 힘은 약해 질대로 약해진데다 전란으로 보천사는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진 것은 아닌지 추정을 해 봅니다. 보천사지에는 현재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보천사지 승탑이 보물로 남아 전성기의 보천사를 짐작하게 할 뿐입니다.

 먼저 1960년 12월 보물 제373호로 지정된 의령 보천사지 삼층석탑을 찾았습니다.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되었지만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른 석탑입니다.

 전체적으로 원만한 비례로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기단부의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매우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1967년에 도굴범의 소행으로 사리유물은 도난당했고 석탑은 파괴되어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리함의 흔적을 찾았는데 그 안에 청동 불상과 광배 모양의 구슬조각, 흙으로 만든 탑이 발견되었습니다. 넓은 빈터에는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어 보천사지 승탑인 부도를 찾을 수 없어 현재 수암사 어디쯤 남아 있나 싶어 333개의 관음상이 세워진 진입로를 올라갔습니다.

 수암사는 보천사지 터에 최근 세워진 사찰로 옥석으로 제작된 2.8m 크기의 관음보살상이 볼거리이며 650m 거리에 양쪽으로 세워져 있어 장관입니다. 관음보살상을 보면서 가다 보통 승탑인 부도는 사찰 입구에 세워지는 게 일반적이다 싶어 다시 돌아 나와 수암 마을로 통하는 옛길을 찾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옛길 중간쯤에 의령 보천사지 승탑 1기를 찾았습니다. 승탑인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곳입니다. 보천사지 승탑은 부도의 주인은 알 수 없으며 1968년 12월에 보물 제47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주로 석종형 형태를 이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부터 고려시대 초까지 조성된 팔각원당형과 구분이 됩니다. 승탑의 높이가 2.35m인 보천사지 승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팔각원당형의 기본 틀을 따랐습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따르면 “지면에는 넓은 방형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 괴임을 일단 각출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상하를 갑석 모양의 팔각대로 구분하고 용과 구름무늬를 얕게 돋을새김 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중대석도 하대석과 같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으며 상대석은 밑에 이단의 받침을 두고 앙련을 두텁게 새겼습니다. 팔각형 몸돌 한쪽 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이며 추녀는 얇으면서 옥개는 두꺼운 편입니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다 추녀 부분에서 완만해지며 상륜부는 유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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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서산여행)서산 보원사지. 서해안 폭설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서산 보원사지 여행.


충남 서산 여행에서는 문화유적지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태안반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많은 문물이 이곳에서 왕래가 이루어 졌습니다. 불교문화도 마찬가지로 신라의 승려들은 이 루터를 따라 백제 땅으로 들어와  서산에서 배를 이용하여 유학길에 올랐던 스님의 '구도의 길'입니다. 



특히 충남 서산 가야산에는 천년사찰이 여럿 있습니다. 대중가요인 '수덕사의 여승'으로 너무나 유명한 수덕사가 이곳 가야산 자락에 숨어 있습니다. 사찰 이름만 들어도 애잔함으로 마음이 아려오는 느낌입니다. 



또한 개심사도 이곳 가야산에 있습니다. 수덕사의 말사로 의자왕 11년인 651년에 혜감국사에 의해 창건을 하였습니다. 이번 서산여행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갑자기 내린 폭설로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과 문화재 자료인 명부전, 심검당 등 건물이 여럿 있는데 참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고 급하게 찾아간 보원사지도 가야산 깊은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승려들이 거쳐 갔다는 보원사는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절터의 흔적만 덩그런히 남아 있어 삭풍이 부는 겨울철에는 넓은 터 때문인지 쓸쓸한 모습입니다.



보원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폭설로 인해 들어 갈 수 없을 정도 였는데 관광버스는 겨우 겨우 거북이 걸음으로 몸을 낮추며 갔습니다. 그 길목에 있는 큰 바위 방선암을 보았습니다. 혜미현의 선비들이 봄이면 산자수려하고 천혜의 비경인 이곳 계곡의 마당바위로 소풍을 나와 시를 짓고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방선암이라 새겼다 합니다.  



폭설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버스를 돌리는 시간에 흔적만 만나보기위해 잠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서산 보원사지는 사적 제316호로 1987년 7월 지정되었습니다. 백제시대 때 세워 진 것으로 전하는 보원사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융성되었다 합니다. 특히 왕사와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기거하였을 때에는 인근에 100개의 암자와 1,000명의 승려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습니다.



길 옆에 세워져 있어 버스에 내리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당간지주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세워진 당간지주의 모습에다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대형 철불 두 점이  모두 중앙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1967년도에는 금동여래입상까지 출토되어 그 당시 보원사의 가람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보원사지에서 나온 문화재는 백제와 신라, 고려 초 불교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합니다.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


큰 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국내 최대의 돌로 만든 물통인 석조는 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 102호입니다. 석조와 사찰의 불교행사 때에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보물 제 103호인 당간 지주, 백제 양식의 기단위에 통일 신라와 고려의 양식을 혼합한 보물 제104호 보원사오층석탑,



광종 26년인 975년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어명으로 세운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물 제 106호인 법인국사보승탑비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그 당시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보물제102호 석조


그러나 폭설로 인해 하나하나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버스에서는 호각을 불고 난리 났습니다. 빨리 버스에 올라타라고요. 아니면 계곡에 갇혀 나갈 수 없다면서.... 멀리서 바라본 보원사지의 불교 문화재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며 다음 서산 여행때에는 오늘 가보지 못한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천천히 보고 싶습니다. 




2015/01/02 - (충남여행/서산여행)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2014/12/31 - (충남여행/서산여행)서산간월도 간월암. 서산 낙조 일번지라는 간월도 간월암의 해넘이 구경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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