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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위해 세운 치산서원.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

 

 

☞(울산여행/울주여행)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신라 충신 충렬공 박제상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

 

울산하면 항상 떠오르는 말이 있다. 공업도시가 항상 울산 앞에 붙어 '공업도시 울산'으로 불려왔다. 고속 성장기의 사회에서 울산은 그만큼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울산시는 문화보다는 공업의 색체가 강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공업도시란 색깔을 지우려는 노력을 하였다.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의 이미지인 울산을 문화와 예술 방면으로 돌려 살기 좋은 고장 울산을 홍보하기 위함인지 언제부터인가. '충효의 고장 울산'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시대 때의 충신 박제상으로 '박제상유적지'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 안내도.

 

 

 

☞(울산여행/울주여행)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신라 충신 충렬공 박제상 치술령의 전설로 살아나다.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

 

울산의 북쪽 끝에는 치술령이 있다. 순간적으로 이쪽에서 저쪽을 넘어다니는 고개쯤으로 인식을 하기 쉽지만 치술령은 산이름이다. 울산과 경주의 경계에 솟아 있는 치술령은 박제상의 유적지가 널리 퍼져 있다. 먼저 일본에 간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기 위해 매일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의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끝내 지쳐 숨을 거두고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이 정상 인근에 두곳이 있다. 그 연유를 보면  울산쪽의 바위와 경주쪽의 바위가 각각 그곳인데 울산쪽의 바위에는 언제 누가 새겼는지 모르지만 '망부석'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일본 방면의 바다가 더 잘 보이는 망부석은 경주쪽 망무석이라 어느것을 망부석이라 꼭 단정하기는 어렵다. 박제상 부인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보면 두곳의 바위에 번갈아 올라가면서 까치발로 돌아올 남편을 기다렸을 것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이곳에는 경주와 울산의 지자체에서 각각의 망부석 안내판을 세워 두었다.

 

 

 

 

 

치술령 건너편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다. 그 아래 박제상의 부인이 전설이 되어 이곳 암자인 은을암에 전한다. 은을암은 '새가숨은 바위'라는 뜻으로 부인과 딸의 영혼이 파랑새가 되어 이곳 바위에 숨어 들었다고 전한다. 그와 함께 이곳 만화리의 지명은 전설을 뒷받침 하듯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울산여행/울주여행)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신라 충신 충렬공 박제상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 치술령 유래.

 

박제상이 일본으로 가게된 연유를 보자. 박제상은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눌지왕(재위 417~458)이 임금이 되었다. 그 당시 그의 두 동생이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는데 임금은 두동생을 보고 싶어 안달하였다. 박제상은 눌지왕의 왕명을 받아 음밀하게 고구려로 들어가 복호왕자를 구출하고 돌아와 다시 왜국에 잡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무사히 미사흔을 구출하여 신라로 보내고 그는 정체가 탄로나 대마도에서 그만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된다. 왜왕은 박제상의 사람됨을 알고 회유하여 그의 신하가 되면 목숨도 살려주고 벼슬과 많은 금은보화를 주어 이곳에서 편히 살게 해주겠다 꼬시지만 박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라고 말하며 끝까지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이에 왜왕은 분노하여 고문을 동원하며 끝에는 불에 태워 죽였다. 치술령에서는 그의 부인이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올라 박제상의 무사귀환을 빌며 기다리다 통곡을 하며 죽어 돌이 되었다는 전설로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웠다. 지금 치술령 정상에는 옥돌에 '치술신모' 비석을 세워 부인을 위로하고 있다.

 

 

 

 

 

☞(울산여행/울주여행)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신라 충신 충렬공 박제상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 치산서원에는 박제상과 삼모녀의 위패와 영정 모셔.

 

치산서원은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사당자리에 1745년 영조 21년에 최초로 치산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이르러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다. 이후 1993년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치산서원은 내에는 충렬공 박제상의 영정을 모신 충렬묘와 신묘사에는 그의 부인 금교김씨의 위폐와 영정을 모셨다. 쌍절려는 박제상의 두딸인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 넋을 위로하고 있다.

 

 

 

 

 

☞(울산여행/울주여행)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신라 충신 충렬공 박제상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대마도에서 박제상 화형을 당하다. 그 전설이 내려와.

지금 대마도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찾아가기가 쉬운 곳이다. 당일로도 갔다 오는 곳이 된 대마도는  현재 박제상이 화형된 곳에 그의 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 연유로 1500년이 넘은 지금에도 대마도 주민들은 우리에게 아주 우호적인 모습이라 한다. 실제로 필자도 그리 느꼈다. 이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화형을 당한 신라 충신 박제상의 충성심에 감복한 사연이 전설이 되어 대마도에 전해내려 오기 때문이다.

 

 

 

 

 

 

 

 

 

 

 

 

박제상의 김씨 부인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둔 신모사.

 

 

박제상의 두딸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둔 쌍절각.

 

 

 

 

 

 

 

 

 

 

 

 

만고충신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둔 충렬묘.

 

 

 

 

 

 

 

 

 

 

 

 

 

 

 

 

 

 

 

 

박제상 기념관 여행정보

관람안내

관람시간:09:30~18:00

휴관일:매주월요일, 신정 설날 추석, 공휴일 다음날, 그리고 기념관 관리상 휴관일

관람료:무료.

관람문의:052-254--7964~5

대중교통편:802번 중구청 또는 성남동에서 탑승용이

 

 

 

 

 

 

박제상 김씨 부인과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의 삼모녀상

 

 

 

 

 

 

 

 


 

 

입본으로 건너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울산쪽에 있어 울산망부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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