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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 '영남'이라는 이름을 단 장소 가운데 국민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무엇일까. 물론 영남권, 영남지방 등의 광범위한 지역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추측건대 그것은 단연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건국 훨씬 이전인 조선시대 중반 이후부터 영남루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명성을 날렸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누각을 찾아 밀양강과 용두산 줄기, 종남산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학문과 삶의 길, 정세 등을 논했다. 그래서일까. 영남루는 밀양 8경 가운데 으뜸인 제1경으로 불린다. 오늘날 영남루는 밀양 여행의 1번지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 밀양읍성 추화산성 너머 손씨 고택까지 가볍게 9㎞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추화산으로 오르고 있다. 산성과 봉수대가 있는 추화산 오름길은 가파르긴 하지만 갈 지(之)자 모양의 옛길을 닮아 큰 힘 들이지 않아도 걸을 수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이번 주는 지난주에 이어 제12-1코스 하편으로 영남루에서 시작해 밀양향교까지 가는 길을 엮었다.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밀양의 어제와 오늘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짧지만 알찬 걷기 코스다. 옛날부터 밀양 읍내를 지켜 온 두 개의 산성 성곽을 따라 걷기도 하고 천년고찰 무봉사와 조선시대 정절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아랑의 전설을 엿보기도 한다. 또 영남권의 대표적인 고택 마을인 교동 손씨 고택을 찾아 옛 사람들이 꾸며놓은 고건축물과 돌담길의 정취도 느낄 수 있어서 자녀들과 함께 걸어도 교육적으로 썩 괜찮은 길이다.

총거리는 9㎞ 남짓이고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따지면 3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영남루, 밀양관아, 아랑각, 무봉사, 밀양읍성, 추화산 봉수대와 산성, 충혼탑, 밀양시립박물관, 교동 손씨 고택, 향교까지 여유있게 찬찬히 둘러 보려면 5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하다.

   
밀양시 교동 손 씨 고택 마을의 흙돌담 골목길에 옛 정취가 물씬하다.
제12-1코스 상편의 종착점이었던 밀양교 부근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앞에서 우선 밀양관아(密陽官衙)로 향한다. 북쪽으로 인도를 따라 3분쯤 가면 내일동사무소 건너편에 포졸 2명의 밀랍인형이 보초를 서는 밀양관아가 있다.


다시 영남루 입구 광장으로 돌아가서 영남루를 바라볼 때 오른쪽인 1시 방향 강변길로 내려선다. 석화(石花)와 아랑각을 먼저 본 후 영남루로 오르기 위해서다. 곧바로 석화가 나타난다. 동심원을 그리는 듯한 돌의 모양이 국화꽃을 닮았다고 해서 석화라 불리는 이 돌들은 영남루 경내 안팎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자연 현상이다. 석화 안내판 바로 옆에는 아랑각이 있다.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 윤 씨의 딸인 아랑이 영남루에 달구경 나왔다가 유모와 밀통한 괴한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결했고, 그 이후 주민들은 그녀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사당인 아랑사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고 왼쪽 쪽문으로 나가 보면 '사건의 현장'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다. 지금도 밀양 최대의 축제인 '아랑제'가 열리고 있고 아랑아가씨까지 선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랑이 밀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 아랑각 석화 천진궁 박시춘옛집까지 이야기거리 즐비

   
아동산이라고도 불리는 밀양읍성 성곽 위를 걷는 둘레길 개척단.
아랑각에서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가 보인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찬찬히 건물도 돌아보고 남쪽의 밀양강과 일자봉(산성산) 용두산 줄기, 종남산 일대와 밀양시가지를 감상하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다. 스피커에서는 지역의 민요인 '밀양아리랑'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영남루 뒤의 천진궁(天眞宮)을 둘러보고 밀양이 낳은 한국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 선생(1996년 작고) 생가 복원지도 돌아 본 후 무봉사(舞鳳寺)로 향한다.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 대사가 현재 영남루 자리에 있던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건립한 무봉사는 보물 제493호인 석조여래좌상도 유명하지만 '태극나비'로 더욱 유명하다. 날개에 태극무늬가 그려진 이 나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봉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인데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고 전해온다. 표충비, 얼음골, 만어사 경석 등과 함께 '밀양 4대 신비'로 통한다.


   
밀양교에서 바라본 영남루 아래로 밀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무봉사를 나와 일주문 우측의 샛길로 오르면 사명대사 동상을 만나고 조금 더 오르면 아동산에 위치한 밀양읍성이다. 사위가 탁 트인다. 날씨 맑은 날에는 동쪽의 영남알프스 능선까지 보인다. 성곽을 따라 올라 망루 겸 정자인 무봉대에서 심호흡을 한 후 동문고개다. 일단 도로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 30m쯤 가서 왼쪽 작은 마을 앞 공터 쪽으로 꺾는다. 샛길이 나오고 텃밭 우측 길을 따라 5분만 가면 다시 왕복4차로인 큰 도로를 만나는데 건너편에 '대공원' 방향을 가리키는 조그마한 이정표가 보인다. 오른쪽에 조금 떨어진 횡단보도를 건너 이정표에서 대공원 방향으로 산길을 탄다.

첫 갈림길에서 왼쪽 밀성 박씨 묘 방향으로 간 후 무덤 뒤 능선 갈림길에서 다시 왼쪽 길을 택한다. 공동묘지 옆 길을 따라 살짝 내리막을 걸으면 작은 임도 사거리가 나온다. 왼쪽에는 화장장, 직진하면 대공원 방향이지만 우측으로 임도를 따른다. 5분쯤 가면 수십 개의 둥치가 세월이 가면서 서로 엉겨붙은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커다란 모과나무를 지난다.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을강 전홍표 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통과한다. 추화산성(推花山城)으로 오르는 길이다. 솔 향기 짙은 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해발 240m인 추화산 정상 봉수대. 추화산은 신라시대에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밀양 일대를 추화군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지역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다. 특히 추화산성은 가야와 신라, 후백제와 신라 등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반증해 주는 유적이다. 봉수대에서 내려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길을 걷는다. 벤치 우측 길로 접어 들어 임도를 따라 5분쯤 가면 우측에 성곽 복원물이 있는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서 계속 임도를 따른다. 10분 후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일단 왼쪽으로 100m쯤 올라가서 왼편에 있는 성내 우물을 본 후 다시 돌아온다. 우측 내리막을 따라 가면 영천암 입구 삼거리. 우측에 영천암이 있는데, 물 맛 좋은 샘터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백운사 범종이 있다.


◇ 박물관 독립운동기념관까지… 자녀 동반 코스로 적합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와 포장길을 따라 200m쯤 내려서면 왼쪽으로 살짝 벗어나는 흙길을 만난다. 포장길을 버리고 이 흙길을 택한다. 3분 후 무덤 몇 개가 있는 제사고개에서 내리막을 타면 7분 후 충혼탑. 최근에 완공된 이 충혼탑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산화한 이 지역 출신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충혼탑에서 5분 거리에 밀양시립박물관이 있다. 밀양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유적과 근현대의 유적들, 밀양 백중놀이를 비롯한 민속놀이,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항일독립투사들의 기록 등이 소중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니 천천히 둘러볼 만하다. 박물관 앞 뜰에는 바닥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인근 어린이들의 여름철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박물관 정면 도로 우측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넌 후 200m쯤 가면 교동 손 씨 고택에 닿는다. 우측의 운치 그윽한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면 크고 작은 고택들이 길손을 맞아준다. 그 중 '열두대문'이라는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고가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한 때 99칸에 달하는 대 저택이었다. 조선 숙종 때인 17세기 중반 손성증이 최초로 지었다고 전해온다. 손 씨 고가 뒤에는 밀양 향교가 있다. 1602년 건립된 밀양 향교는 대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와 대성전 등이 있는데, 크기가 유독 커서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 지역에서는 가장 큰 향교로 손꼽힌다. 이 향교로 인해 동네 이름도 교동이 됐다.



향교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을 지나서 2분쯤 골목길을 걸어나오면 교동농협 앞 버스정류소다. 이곳에서 코스를 마무리한다.


# 교통편

- 밀양역에서 영남루 행 시내버스 수시로 있어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코스 종점인 교동농협앞 버스정류소에서도 밀양역 행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 떠나기 전에

- 답사 후 '똥개' 촬영지 삼문동 '추억의 거리' 가 볼만


'영남제일루'라고도 불리는 영남루는 원래 밀양의 손님들을 머무르게 했던 건물이다. 최초 건립은 고려 말인 1365년 밀양 군수 김주가 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조선시대 들어 여러 차례 중건을 거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84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거대한 건물인 영남루는 좌우의 건물과 복도 또는 계단으로 연결돼 더욱 웅장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천정에 조각된 문양과 용의 몸통을 형상화 한 대들보, 용 그림, 네 귀퉁이의 남주작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그림 등이 모두 빼어난 예술 작품을 이룬다. 이 건물에 특히 용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은 옛날 사람들이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을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해 물과 가까운 용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연인들이 영남루와 아랑각 일대에서 데이트를 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속설 때문에 요즘도 젊은 연인들은 영남루에서는 데이트 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시집을 가지 못한 아랑 낭자의 심술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코스 탐방을 마치고 시간이 남는다면 영화 '똥개'의 주 촬영지인 삼문동 '추억의 거리'를 방문해 볼 만하다. 골목마다 19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 밀양 천진궁의 영욕

- 역대 시조王 위패 모신 성소, 일제가 헌병대 감옥으로 악용
- 독립운동가·우국지사 고초 겪어
- 광복 후 밀양시민 노력으로 천진궁으로 이름바꾸고 복원


   
경남 유형문화재 제 117호로 지정된 밀양시 소재 천진궁.
밀양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영남루. 이곳을 방문하면 반드시 보게 되는 또 하나의 오래된 건축물이 하나 있다. 영남루와 뒷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천진궁(天眞宮)이 바로 그것이다. 1665년(조선 현종 6년)에 건립됐으며 현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천진궁 건물은 우리 민족이 건설했던 역대 국가 시조 왕들의 위패를 모셨던 성스러운 곳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치욕적인 수모를 겪는 등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당초 이 건물은 시조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拱振館)의 부속 건물이었다가 1722년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모신 사당 겸 객사 건물로 이용됐다고 한다.

위패의 배치는 남쪽을 향해 봤을 때 중앙에 민족의 시조왕인 단군왕검의 위패를 두고 왼쪽 벽에 부여와 고구려, 가야 시조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또 오른쪽 벽에는 발해와 백제 신라의 시조왕 및 조선 태조의 위패를 둔 성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일본의 행패가 시작되면서 수난을 겪게 된다.

조선을 침략하고 강제로 이 땅을 빼앗은 일본 측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이곳에 모셔져 있던 역대 시조왕들의 위패를 지하 땅에 묻어버리고 헌병대 감옥으로 이용한 것이다. 숱한 우국지사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광복 이후 공진관의 복원을 위한 밀양 시민들의 노력이 펼쳐졌다. 그리고 1957년에 건물 이름을 천진궁으로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으로 지어 시조왕들의 위패를 다시 모심으로써 민족 정통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다. 대리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가진 주심포식 건물인 천진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웅장한 위상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건물의 건축적 의미를 떠나 일제에 의한 고난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 또한 둘레길을 걷는 이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매년 봄에 어천대제(음력 3월15일), 가을에는 개천대제(음력 10월3일)가 열린다.

한편 영남루와 밀양읍성 망루 사이에 있는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 복원지 안내판을 읽다 보면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914년에 태어나 1996년 작고할 때까지 애수의 소야곡, 전우야 잘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한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감정을 달래 준 숱한 명곡을 남긴 박 씨지만 '친일 작곡가'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혈서지원 등 단 4곡의 노래로 인해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 때 그의 이름이 포함됐다. 한국 가요계의 거목으로서 대중가요 작곡가 최초로 198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기도 한 그였지만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천진궁을 코앞에 둔 그의 옛집 앞에 서면 누구라도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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