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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임진왜란 의병장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경주 김호장군고택


단일 시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곳이 경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주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입니다.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이번에는 절충장군 부산첨사 김호 장군 고택을 찾았습니다. 

김호장군 종택은 그의 호를 따서 월암종택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경주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33

경주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전화:054-772-9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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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김호장군 월암종택을 방문하면서 조선시대 한 장수의 집이구나 하면서 쉽게 생각했습이다. 

그러나 역사가 400여 년이 넘은 고택이며 가정집 건물로는 몇 안 되는 오래된 건물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감짝 놀랐습니다. 

안내판을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 공을 세운 부산첨사 김호장군의 생가”로만 표기해 놓았습니다.

 


김호장군 월암종택 포스팅을 하면서 김호장군님의 연역을 알아보았습니다. 

김호장군은 1534년 경주부의 월남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70년(선조 3년) 식년 무과에 을과로 급제해 일찍부터 무인으로 20여 년 근무하다가 훈련원봉사를 끝으로 고향인 경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노비와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경주부윤은 그에게 경주 오봉산에 있는 부산성을 방비토록 했으며 경상초유사로 있던 학봉 김성일도 경상좌도 의병도대장에 김호를 임명했을 정도로 충·절·의가 남달랐던 분 같습니다. 

경주사람은 김호장군을 남면대장이라 따로 불렀습니다. 

이는 백운산(열박산)의 남쪽에서 오는 왜적을 모두 막아냈다 하여 붙은 별칭이라 합니다.

 




영천성 탈환에 여러 경주의 의병장과 나서기도 했으며 휘하에 1,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 부산첨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지 않고 경주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읍성 탈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경주부에 들어온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올라오는 적의 기병 500기와 노곡에서 맞붙어 왜적을 궤멸시키고는 자신 또한 전사했습니다.



이전투가 당시 경주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였다 합니다. 

김호장군을 경주사람은 동도오절중 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는 조선시대 때 경주를 동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김호장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숨지자 첫째와 둘째 아들 또한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다 전사한 호국집안입니다.

 

경주월암종택 우물


경주 남간사지 석정, 비슷하지 않나요



김호장군은 사후 당상관에 추증과 전란이 평정되고는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영조 34년에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으며 김호장군 경주월암종택은 중요민속자료 34호입니다.

 


김호장군 종택인 월암종택은 17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심건물인 안채가 대략 4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호종택에서 경주향교와 남간사지에서 본 똑같은 형태의 돌우물인 석정이 사랑채 터 앞에 있었습니다.



경주향교의 돌우물에 비교해서는 그 규모가 아주 작았고 남간사지 우물과는 그 크기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의 우물이 모두 앉은뱅이 식인 신라시대 우물인데 김호장군 종택의 우물 또한 똑같은 양식이며 주변에 신라 절터 유구가 남아 있는 게 오래전에는 절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있고 왼쪽에 초가집으로 엮은 아래채가 있습니다. 

주인장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계십니까?” 하고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채에 붙은 작은 방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현재 김호장군종택은 전통한옥체험을 하는 민박집으로 운영 중인데 민박손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쥔장이 나왔습니다. 정중히 집을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양해를 구했고 “흔쾌히 구경하세요” 하기에 종택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 힘든 초가집이 있습니다.” 하니까 “원래는 초가집이 아니었고 모두 기와집이었습니다” 하시면서 처음에는 대문도 현재의 자리가 아니고 방향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쥔장은 대문은 집 앞 공터 바깥인 마을 길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채도 안 보이고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는 게 건물 배치가 조금 이상합니다" 하니까 "대문 오른쪽에 현재 정원으로 꾸며진 곳이 사랑채가 있던 곳입니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때 화재로 전소하여 급하게 짓다 보니 아래채를 초가집으로 짓게 되었고 사랑채는 아직도 복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채가 있던 자리를 자세히 보았는데 연못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꽤 풍치 있는 누마루가 있는 정자식 사랑채였을 것이라 짐작되었습니다. 

안채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 규모로 왼쪽부터 부엌·방·대청·방인 아주 단순한 구조이며 대청에는 문짝을 달았습니다. 

아래채는 앞면 3칸에 옆면 1칸인 초가지붕입니다.

 왼쪽부터 방·방·부엌 순이며 굴뚝은 부뚜막 한쪽에 설치한 특이성을 보여줍니다.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공간구성입니다. 

종택 내에 김호장군 사당도 모셔져 있습니다. 

경주 남산 아래에 포석정, 배리삼존불, 삼릉, 남간사지와 청림사지 그리고 양산재, 나정, 신라왕릉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에 있어 민박체험 하기에 정말 좋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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