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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동구여행/부산동구가볼만한곳)조선통신사역사관. 조선통신사의 모든 기록을 알수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여행 추천이요. 자성대 공원 영가대와 조선통신사역사관



부산 동구 자성대 공원 남쪽에 영가대와 함께한 ‘조선 통신사 역사관’이 있습니다. 영가대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 일본으로 향하는 '회담겸쇄환사'와 조선통신사 행렬의 출발과 환송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산 동구 조선통신사역사관 인근 가볼만한곳



☞2016/06/29 - (부산동구여행/부산동구가볼만한곳)자성대 공원 영가대. 영가대는 일본으로 가던 조선통신사의 환송과 귀환 장소이며 해신제를 올렸던 곳입니다. 영가대

2016/04/19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호랭이 이바구길. 봄에 걷기 좋은 여행지 근대 역사문화박물관 범일동호랭이 이바구길을 걷다. 호랭이 이바구길

2016/04/12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누나의 길. 호랭이 이바구길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누나의 길이 있습니다.

2016/04/11 - (부산여행/동구여행)교통부 보림극장, 서민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부산 최초의 쇼 전문극장 보림극장이 호랭이 이바구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016/04/08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호랭이 이바구길 쉼터 똥산 전망대. 70~80년대 똥구덩이 산이 부산 최고의 힐링코스 호랭이 이바구길 똥산 전망대로 바뀌었습니다.







◆2015년 용두산공원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축제 조선통신사 행렬:

☞2015/05/03 - (부산여행/중구여행)조선통신사 축제. 한국과 일본 국가 사절단 조선통신사 행렬 축제가 열리다. 조선 통신사 축제







그럼 조선 통신사의 모든 것을 전시한 ‘조선통신사역사관’이 과연 어떤 곳인가 궁금하여 방문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를 일본에 파견한 ‘회담겸쇄환사,’와 ‘통신사’에 대한 전시관으로 누구나 알기 쉽고 이해하게끔 전시한 조선통신사 역사교육관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조선통신사의 모든 것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인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나홍유란 분이 처음 ‘통신사’란 직함으로 일본 아시카가 막부에 파견하였습니다.





그 후 1428년 조선 세종10년에 조선 국왕이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을 파견하는데 이는 일본의 막부 장군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습니다. 통신사라는 뜻은 “서로 신의를 통하는 외교사절”이라 합니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 이유를 보면 고려 시대 이전부터 남해와 동해 등 한반도 연안에 수시로 왜구가 나타나 조선인을 헤치고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아 일본의 막부에게 왜구 단속의 확답을 얻기 위해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1590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국왕인 선조는 김성일과 황윤길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 사신으로 보내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사신은 귀국하여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반드시 조선을 침략한다"와 "그런 조선 침략의 의도를 전혀 느낄수 없었다"로 양분하여 보고하는데 서로 당파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상반된 보고로 임진왜란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요즘의 우리 국내 정치상황도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일반 민초는 생각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뒤 일본은 조선에 단절된 양국의 외교를 강화하자며 끈질기게 요구를 하였고 이에 선조는 1604년 사명대사를 전쟁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사로 파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하여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 3500여명과 함께 귀국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강화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전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대마도(쓰시마)의 도주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조선 조정에서는 그사실을 알았지만,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하여 1607년 처음으로 외교사절인 조선 통신사가 출발합니다.


 



그러나 1607년, 1617년, 1624년의 통신사 정식명칭은 ’회담겸 쇄환사‘이며 조선통신사의 정식명칭이 사용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를 말합니다. 이 모든 조선 통신사의 역사를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 역사관은 제1 전시관과 제2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 전시관을 보면 조선 통신사의 정의와 임지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회복까지 모든 과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볼 수 있게끔 하였고 통신사의 파견과 절차와 6개월간의 긴 여정, 그리고 참여한 인물, 당시 한일 외교의 중심지였던 왜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동반하면 내용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3D 입체영상을 시청하는 영상실도 갖추어져있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2 전시관은 2층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통신사에 참여한 분들이 일본으로 가기 전 영가대에서 기다리며 남긴 시구들을 보고 오릅니다. 2층 전시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타고 간 배의 모형인 판옥선과 일본까지의 험난했던 뱃길 여정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통신사의 행로인 모형지도와 애도(도쿄) 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영상 등 그야말로 생생한 정보를 한눈에 보게끔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말을 타고 곡예를 부리는 마상재도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여했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요청을 받아들여 1636년 조선 통신사에서부터 참여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야외전시장의 영가대 복원 등 조선 통신사 역사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일 공동으로 유네스코 ‘외교기록’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합니다. 짐심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봅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정보 안내◆ 


조선통신사역사관

★조선통신사역사관 주소: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380-4)

★조선통신사역사관 개관시간:오전9시~오후6시

★조선통신사역사관 관람료 무료

★조선통신사역사관 휴관일:1월1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시 그 다음날 휴관

★조선통신사역사관 문의전화:051-631-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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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갈맷길)갈맷길 3-2코스. 이바구가 주렁주렁 달린 가을철 걷기 좋은 코스 갈맷길에서 힐링을 하다. 


부산 둘레길인 갈맷길 3-2 코스를 걸었다. 부산 원도심을 걷는 길로 자성대 공원에서 남항대교 구간까지 약 15.8km, 5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그러나 갈맷길 3-2 구간을 조금 줄여서 부산진 시장에서 용두산 공원까지 걷기로 하고 떠난 둘레길 여행, 부산의 도심을 활보하며 부산의 특징인 산복도로의 형성 과정을 알 수 있는 구간이다. 이번 구간이 6.25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에 의해 형성된 근대 부산의 모습으로 판자집의 의미를 알수 있다. 요즘 자라나는 어린이와 함께 걸어보면 너무 유익한 코스이다. 왜 부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증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며 또 한 통영 출신 청마유치환 선생의 우체통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부산역 건너편에서 시작하는 동구 이바구길의 유래를 알 수 있고 초량동과 상해거리, 중앙동의 40계단 문화거리 등 용두산공원에서 걷기를 끝낼 때 까지 살아있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끝임 없이 샘 솟는 재미있는 갈맷길 구간으로 걷기 마니아에게 강력 추천한다.

  


출발은 자성대공원 건너편에 있는 부산진 시장이다. 자성대는 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쌓은 부산진성의 지성이다. 정식명칭은 부산진지성이며 1972년 6월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7호로 지정되었다. 자성대의 유래를 보면 부산진성을 본성 또는 모성이라하고 자성대의 성을 지성 또는 자성이라 하였고 자성대 정상에 자성을 만들어 장대로 삼았다는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함락되는 치욕을 겪었고 왜장 모리 부자에 의해 부산성이 헐리고 왜군이 다시 왜성으로 쌓았으며 소서성, 환산성이라 하였다. 자성대 구경을 하고 부산진역으로 돌아나오면 갈맷길 3-2 둘레길은 시작된다.


 

부산진시장 앞에 가로 걸린 육교를 건너 진시장 정문에서 왼쪽으로 시장바깥을 돌아간다. 건물 끝에는 남문시장 건물과 서로 붙어 있다. 남문시장을 오른쪽으로 돌아 시장를 끼고 있는 도로를 따라간다.


 

바닥에는 노란 글씨로 ‘긴급차통행로’라 써 놓았다. 직진하여 끝까지 들어가면 육교형 계단이 나온다. 육교 아래는 경부선과 경전선이 이곳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지나간다.

 

 

 

 

 

 

육교를 건너면 부산에서 가장 크다는 좌천동 가구거리이다. 좌천동 도로 양쪽에 늘어선 가구점은 1950년대부터 형성되어 현재 200여곳이 성업중이며 부산 시내 가구점의 발상지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은 모두 이곳에서 가구를 장만하였다는 좌천동 가구거리.


 

큰 도로로 나와 왼쪽으로 꺾어  도시철도 좌천역 8번 출구를 지나 있는 건널목을 건넌다. '좌천동 가구1번지거리' 광고판이  있고 갈맷길은 대진 침대 오른쪽 도로를 따라 간다.  정공단과 갈맷길 이정표를 보고 도로를 따라가면 일신기독병원 주차장 건물 앞의 'T'자 갈림길에 도착한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임진왜란때 부산진성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충장공 정발장군과 군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1766년에 세운 정공단 건물이 있다. 평소 출입구가 닫혀진 경우가 많은데 이날도 문이 굳게 닫혀져 외관만 보고 갔다.   


 

 

다시 왕갈지 기념관과 일신유치원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는 길이 갈맷길 코스이다. 70m를 올라 부산진교회 앞에 부산 최초의 여학교인 일신여학교 기념관에 닿는다.

 

 

1905년 호주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로 근대문화유산이다. 현재 그 당시의 원형을 잘 가지고 있으며 비례와 군형미가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고 건축학 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3.1 운동때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부산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인 박차정여사도 이곳 출신이며 뒤에 동래여고로 바뀌게 된다. 한국 기독교 사적 제7호. 비탈길을 거슬러 오르면 금성 중.고등학교 입구의 중복도로에 선다.


 

금성중고등학교 입구 왼쪽 계단을 오른다. 동구와 중구의 수정동, 좌천동, 대청동은 부산의 대표적인 서민주택지로 소위 까꼬막이란 비탈에 집을 지어 오르기가 힘이 든다. 다시 '증산동로' 길인 도로와 만나고 오른쪽에 금성 이용원이 있다.

 

 

 

금성중고등학교 후문쪽에 있는 금성아파트 사이 계단으로 오르면 농구 골대가 한개 있고 오른쪽에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갈맷길은 왼쪽이지만 오른쪽 70m에 있는 전망덱에 잠깐 둘러보자. 부산 북항과 부산항대교, 영도가 한눈에 보인다.


 

 

 

다시 체육공원으로 돌아와 진행방향으로 직진하여 큰 은행나무가 있는 숲길을  파고든다. 덱계단을 올라 증산동로 37번길 21호 앞에서 오른쪽  증산공원 방향 계단을 오른다. 야구장 오른쪽 철망을 돌면 공중화장실이 나온다. 

 

 

동구도서관이 있는 증산공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증산공원 허리로 난 도로를 따른다. 증산에서 부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 이유를 보면 부산의 부(釜)는 가마솥 부자를 사용한다. 증산의 모양이 꼭 가마솥과 닮아 15세기부터 부산으로 불렀다는 설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수정산과 범천동 그리고 황령산과 부산의 새로운 중심지로 바뀐 서면일대등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범일 배수지 입구를 지나면 증산공원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틀면 성북시장이다. 산 능선에 시장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성북시장을 나오면 성북고개 삼거리. 새마을 금고 앞 이정표에 오른쪽 방향은 안창마을방향.  가야할 갈맷길은 왼쪽 수정초교 1.0km 방향이다. 망양로라 부르는 도로를 내려가면 수정 삼거리가 나온다. 


 

 

수정삼거리에서 왼쪽 내리막은 동구청 방향, 오른쪽 수정초교. 동구 장애인 복지관 방향이 갈맷길 코스다. 수정산과 구봉산 허리를 도로가는 산복도로를 망양로라 부른다. 수정지구대와 수성초교를 지나고 곧 만나는 수정5동 우체국 앞 사거리에서도 직진한다.


 

 

 동구장애인 복지관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왼쪽은 동구청(0.5km)으로 내려가는 수정로길. 부산종합사회복지관 0.25km, 초량천 숲 체험장 2.0km, 용운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청광아파트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사회 복지관 방향이지만 직진 도로다. 수정아파트 우편취급국 맞은 편에 동구 신복도로 안내판이 있다. 산복도로는 산의 중턱에 있으며 도로가 서민의 삶인 양 구불 구불 하게 이어져 있다. 한국전쟁과 함께 생성된 수정동산복도로는 부산 근대 발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스토리화하여 아름다운 길로 탄생하였다는 설명이다.  

 

 

 

수정4동 주민센터 앞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도로는 살짝 올라 오른쪽으로 틀어 수정1배수지와 묘심사를 지나면 홍곡남로 갈림길. 계속 직진하면 초량이바구길 안내판이 붙어 있다. 


 

초량 이바구길 기.종점인 까꼬막 갈림길 안내판에서 직진하면 초량 이바구길의 중요 지점인 유치환 우체통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 일대의 조망이 갈맷실 3-2 코스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아 포토존도 설치되어 있다.  산복도로와 가정집 옥상 높이가 같아 대부분 주택들은 옥상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청마유치환의 고향은 통영으로 유치환 선생은 이곳 부산고등학교 재직시 뺑소니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였다. 유치환 선생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이영도에게 연서를 5천통이나 보냈던 것으로 유명한데 현재 통영에서 이영도 선생에게 편지를 붙혔던 통영 중앙우체국이 아직 남아 있다.  


 

유치환 선생과 빨간 우체통을 보고  직진하면 멀리 중앙공원의 충혼탑도 보인다. 금수사 앞 삼거리에서 왼쪽 부산역, 초량돼지갈비 방향으로 꺾는다. 직진은 민주공원, 중앙공원 0.3km 방향이다. 


 

 

 

초량 6동 주민센터를 지나고 (구)해룡약국 버스 정류장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인 '초량상로 79번길'로 들어선다. 한일탕이 있고 초량성당에서는 급경사 내리막이다. 사거리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초량전통시장을 통과한다.


 

 

 

부산역과 연결되는 도로에 내려서면 하나은행 초량지점이 나오고 오른쪽 김광덕 이빈후과의원을 돌아 부산역 방향으로 걷는다. 부산역 맞은편 보리밥 집 앞에 초량 이바구길이 시작된다는 안내판을 보고 직진하면 초량 상해거리인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홍성방 앞에 갈맷길 안내판이 있다. 직진하면 초량사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영주터널 방향중앙대로를 따라 직진하여 건널목을 건넌다.   중부경찰서 0.6km, 40계단 문화거리 1.0km 이정표 방향으로 10여분 걸어 중부 경찰서 앞에 닿는다. 경찰서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 일방통행 길로 들어선다. 


 

 

 

 

250m를 발품을 팔면 유행가 '경상도 아가씨'에 나오는 40계단 문화 거리이다.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여객부두를 왕래하던 계단길로 6.25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피난때 헤어진 가족 상봉 장소로 영도다리와 함께 널리 알려진 곳이다.  피난살이의 설움과 애환을 그대로 간직한  40계단 길. 


 


 힘든 노동에 지쳐 잠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아버지의 휴식' '어머니의 마음"등 다양한 동상을 40계단 테마거리에서 만난다.



 

 

 

 

백산기념관(426m) 가는 길은 직진하여 부산우체국 뒷길을 따른다. 부산우체국 옆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 오른쪽으로 틀어 KD 대우증권 빌딩을 지나 금생약국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백산상회 터에 세운 백산기념관이 삼각형 건물로 세워져 있다. 


 

 

백산 상회는 백산안희제 선생이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가게로 부산의 항일 독립 운동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 곳이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꼭 함께 가봐야 할 곳이 이곳 백산 기념관이다. 이곳을 지나면 타워호텔이 나오고 호텔 왼쪽으로 돌아가면 용두산 공원을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용두산 공원은 소나무가 너무 많아 송현산으로 불렀는데 용두산의 유래를 보면 산의 형태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를 닮아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때에는 왜인들이 우리나라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다 신사를 짓고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 용두산 공원의 대표적인 명소는 부산탑이다. 1972년 당시 진로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1973년 말에 완공이 되었다. 해발 69m의 정상에 높이 120m의 거대한 부산탑은 일명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로 부르며 부산의 상징 같은 존재다.

 

 


한때 헐릴 운명에 처할 뻔한 부산 타워는 부산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제 도약을 꿈꾸고 있다. 갈맷길 3-2 구간은 보수동과 부평동을 거쳐 영도다리를 지나 남항대교에서 끝을 맺어야 하지만 부산의 상징인 용두산 공원의 부산 타워 아래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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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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