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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행/옥천여행)부소담악 환산 산행. 고리산으로 불리는 옥천 환산의 독특한 비경에 깜놀....  


산의 이름으로 그 산을 대충 유추할 수 있다. 국내 산 이름에서 가장 많은 이름은 단연 백운산으로 산정에 흰 구름을 두르고 있어 얻은 이름이다. 그럼 충북 옥천의 환산은 어떤 모습이 연상 될까? 환산은 둥근 고리를 뜻하여 고리산으로 부른다. 산이 고리 모양으로 생겼다니 언 듯 이해가 가지 않는데 무작정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로 달려갔다. 환산아래 금강에 걸린 대청호에는 소옥천의 물도 흘러드는데 대청호와 만나기 직전에 옥천 최대의 비경을 빚어내니 이곳을 ‘부소담악’이라 부른다.



바위가 병풍을 친 듯 소꼬리처럼 길게 700m 나와 마을에서는 ‘병풍바위’라 하며 ‘부소마을에 있는 물위에 뜬 바위’란 뜻의 부소담악이란 유래다. 소옥천을 흐르며 환산의 지능선을 감고 여러번 'S'자로 돌아가는 물돌이 현상으로 그 모습을 산에서 보면 꼭 고리 같이 보여 얻은 이름이다. 2008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뽑혀 그중에 베스트 6선에 올라 부소담악의 아름다움을 뽐내었고 수려한 산세로 인해 조선중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 선생은 ‘소금강’의 절경이라며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리산은 삼국시대때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당시 백제가 축조하였던 산성과 6개의 보루가 남아 있어 그 당시 환산성 전투의 격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공부는 듬으로 할 수 있는 산행 코스다.






고리산인 환산 산행은 초반에 가파르다. 능선에만 올라서면 여유를 가지고 산행을 할 수 있음에 유의하자. 산행경로를 보면 군북면 추소리 황룡사 입구 출발~물아래길, 봉화대 갈림길~580m봉~전망대(봉화대 터)~이평리 갈마당 2코스 갈림길~환산 정상(환산성 제5보루)~삼각봉~비야마을 갈림길(마당재)~감로마을 갈림길~감로봉(환산성 제4보루)~안양골 갈림길~묘지 갈림길~좋은 기도동산 앞 도로~부소담악 입구 느티나무 정자~폐광산~추소정~황룡사 입구로 돌아오는 코스로 부소담악을 포함한 전체 산행거리는 약 8.5km다. 산행 시간은 4시간 안팎이 소요되며 부소담악을 포함하여 넉넉하게 5시간이면 충분하다.




추소리 버스정류소가 있는 황룡사 입구는 서낭당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환산 입구의 등산안내도를 보고 하산지점을 머리에 그려 넣은 뒤 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시작부터 오르막 산길이 시작된다. 산행 페이스를 잃지 않도록하며 천천히 15분 정도 오르면 주위로 나무가 없어지며 갑자기 하늘이 열린다. 이곳에서 뒤돌아보면 나무막대를 걸쳐 놓은 듯 길게 뻗어 나간 부소담악이 모습을 볼 수 있어 신비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10분 쯤 더 오르다 보면 작은 봉우리를 넘고 안부에서 숨을 고른 후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러나 능선으로 산길이 이어져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으며 능선 주위로 울울창창한 노송들이 만들어 내는 자태는 오름길의 힘겨움을 잊게 한다. 산길은 능선 삼거리에 닿는데 이곳에서 숨을 돌린다. 성터(봉화대) 갈림길로 오른쪽 하산길은 물아래길 방향이며 환산 정상은 왼쪽 방향이다. 소나무의 자태와 어울리는 바위 능선을 걷다보면 곳 해발580m의 편편한 봉화대 터가 나온다. 전망도 탁트여 이곳에서 바라보는 소옥천의 부소담악과 대청호의 모습까지 그야 말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서 정상을 가기위해서는 살짝 내리막길이다. 안부에 닿으면 오른쪽 이평리 갈마당 2코스 갈림길 이정표가 있지만 직진하여 오르막을 탄다. 10분이면 헬기장인 환산정상이다. 환산성 제5보루와 환산정상 빗돌이 서 있다. 빗돌 왼쪽으로 항곡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능선을 이어타기 위해서는 왼쪽 헬기장을 지나가면 산성의 흔적이 나타난다. 백제와 신라가 이곳에서 맞붙어 싸웠던 역사의 현장에는 지금도 백제가 쌓았던 산성이 환산 능선으로 퍼져 있다. 총 6개의 보루가 세워졌고 그중 정상에 세워진 5보루가 통괄지휘본부였다 한다.






능선의 난 산길은 봉우리를 오르고 다시 내려가고 하면 알미늄 벤치와 해발 566m 삼각봉을 알리는 표식이 소나무에 걸려 있다. 다시 내려가면 곧 오른쪽으로 비야마을 방향 갈림길이 나오고 안부인 마당재에 닿는다. 이곳에서 다시 오른쪽 하산로는 감로마을 방향. 필자는 직진하여 오르막 능선을 오르면 환산성 제4보루 빗돌이 있는 감로봉에 선다. 발아래 무덤이 있고 이곳은 시야가 트이며 부소담악의 모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또한 올라온 능선이 한눈에 다 들어오며 산길은 황골을 한바퀴 능선을 따라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양골로 하산을 하기 위해서는 무덤 쪽이 아닌 오른쪽 능선을 조금 가면 왼쪽 방향의 큰 이정표와 만난다. '추소리 안양골 1.5㎞'을 보며 들어서면 외길의 하산길은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길로 변한다. 걸음을 조심조심 해야 할판. 급경사 하산길도 무덤직전에 오른쪽으로 틀면서 한숨 돌리다가 또 다시 안양골 계곡으로 뚝 떨어진다. 계곡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기도원 담장을 끼면 ‘좋은 기도동산’ 앞 도로로 나오게 된다. 능선에서 약 40분쯤 걸렸다. 추소리 방향은 왼쪽 도로를 걷는다.











왼쪽으로 15분 정도 도로를 따라 가면 느티나무인 당산나무와 돌탑이 서 있고 부소담악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소담악 답사에 나선다. 소나무 오솔길이 좋은 산길은 곧 무덤을 지나고 울타리로 막아 놓은 폐광산 터와 장승공원의 덱 계단을 오르면 '추소정(湫沼亭)' 정자가 있는 전망대다. 부소담악의 병풍바위와 소옥천의 물돌이가 부소담악을 휘감고 지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병풍바위를 조금 더 걸어보기 위해 덱 계단을 내려서면 구 정자가 있고 곧이어 탐방로는 좁은 오솔길 좌우로 낭떨어지로 바뀐다. 큰바위와 그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소나무를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된다. 길이 뚝 끊어지는 지점에서 되돌아 나와 추소정에서 오른쪽 덱 계단을 내려서 장승공원을 지나면 출발지였던 서낭당 터의 황룡사 입구 버스 정류장에 10분이면 닿는다.


















☞(충북여행/옥천여행)부소담악 환산 산행. 고리산으로 불리는 옥천 환산 교통편


부산에서 신대구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동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바꿔타고 서울 방향으로 향한다. 옥천IC에서 내린 뒤 군청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400m쯤 가서 통계청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한다. 직진하면 만나는 삼양삼거리에서 4번 국도와 합류해 대전 보은 방향으로 직진한다. 3.8㎞쯤 가면 이백삼거리에서 환산로 추소리(이평리) 방면 우회전하여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다시 오른쪽 추소리(환평) 방면으로 3.9km 이동하면 황룡사 입구에 도착한다. 내비게이션에는 부소담악으로 입력하면 된다.



옥천환산지도

옥천환산고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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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9 - (충북여행/옥천여행)옥천성당.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옥천 성당의 모습. 옥천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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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행/옥천여행)옥천성당.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옥천 성당의 모습. 


지난 옥천 여행에서 언덕 빼기에 하얀색의 정갈한 모습으로 보였던 옥천 성당입니다. 그때는 시간도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쳤던 옥천 성당. 이번에 다시 옥천을 방문하면서 “꼭 찾아가봐야지”하며 시간을 내어 다시 방문을 하였습니다.



안내판을 보면은 옥천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1880년 경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로베르 신부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김보록 신부의 전교로 옥천에서 천주교가 첫발을 내디뎠다면 1900년경에는 부이용 신부에 의해 본격적인 천주교 전교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옥천천주교회는 홍병철 루가신부가 초대신부로 부임하면서부터 공소와 본당등으로 이전과 승격, 격하를 겪다가 1928년 다시 본당으로 승격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옥천성당은 제8대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미국인 사제들에 의해 페티프렌 신부 재임시인 195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6년 4월에 신축 준공을 하였습니다.

 


시멘트 벽돌을 사용한 단층 건물로 지붕은 변형된 왕대공 형식이며 목재로 삼각형 지붕을 만든 구조로 하고 있습니다. 1966년에는 종탑부에 함석으로 마감한 것이 심하게 부식되어 기와로 바꾸면서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이 철거되기도 하였습니다.



옥천 성당은 준공당시에는 장방형의 강단형 평면구성이었으나 1991년에 또 다시 증축공사를 실시하면서 성당 뒤편의 벽을 철거하고 트랜셉트와 제단앱스부를 달아내어 현재의 십자가 형태를 갖춘 평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부식된 함석을 들어내고 기와지붕으로 교체한 것을 다시 보수공사를 하여 그 당시 함석으로 원형을 복원하였습니다. 성당의 입구인 정면은 2층 높이의 박공형 매스에 현관홀을 두었으며 박공지붕으로 처리한 중앙 현관과 좌우양쪽 현관에 반원형의 아치를 돌였고 중앙아치의 폭이 양쪽 현관 아치의 폭 보다 두 배 더 넓게 건축되었습니다.

 


옥천 성당은 지방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근대 성당이며 한국전쟁 이후 국내의 종교건축변화를 알 수 있는 건축사적 의의와 희소적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호가 되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옥천 성당을 찾았던 시간이 조금 늦어 신도님들의 예배를 보는 시간과 겹쳐 성당의 내부를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하였지만 발걸음을 돌리 수 밖에 없었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방문을 하여 내부를 둘러보고 싶습니다. (참고:문화재 안내판)








1991년 성당 증축공사때 달아낸 트랜셉트와 제단앱스부 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십자형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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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여행/옥천여행)옥천 정지용생가, 문학관.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방문기

 

옥천은 한국시단의 거목인 시인정지용의 고향이다. 그의 대표적 시 '향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에서 생가앞 실개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푸른색의 넓쩍한 돌이 놓여 청석교로 불렸지만 현재의 청석교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변해 있다. 바짝말라버린 실개천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지금의 모습에서는 향수의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눈을 감고 어린 지용이 이곳에서 뛰어 놀았을 그모습을 그려 본다.   

 

 


 

다리를 건너면 먼저 '정지용 생가터'를 알리는 입간판이 있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검은 빗돌에 새겨진 '향수'를 소리내어 불러본다. 정지용의 향수보다는 더 유명해누구나 알고 있는 이동원 박인수가 부른 '향수'를 생각하며 서정적인 나의 고향 하늘이 향수와 얼버무러져 언듯 언듯 스쳐간다.

 

 

 




 

 (충북여행/옥천여행)옥천 정지용생가, 문학관.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방문기

 

시인 정지용의 성장을 보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지용 사이버 문학관'을 검색해 보면 '1902년 5월15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정미하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한약상을 경영하여 별 어려움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느해 물난리를 만나 가산을 모두 수마에 잃고 빈털털리가 되어 소년 정지용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된다.



 


 

정지용의 지용은 모친이 그를 잉태하였을때 꾼 태몽에서 비롯되었다.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하여 아명으로 지룡이라 하였고 발음만을 차용하여 본명을 지용(芝容)으로 했다한다.

 




12세에 송재숙과 혼인을 하였고 1918년인 17세때 휘문보통고에 입학하였다. 가정 형편의 어려움을 명석한 두뇌로 극복하여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2학년인 1919년 3.1운동때 그는 학교 시위를 주동하였다하여 무기정학을 받았고 그해 12월 창간호인 ‘서광’에 그의 유일한 소설인 ‘3인’를 발표하였다.

 

 


 


 


1923년 휘문고의 교비생으로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29년 졸업후 휘문고에 교사로서 첫발을 딛는다. 그의 시심은 6년의 일본 유학시절에서 완성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향수’ ‘고향’ 등 6년간 유학생활을 하면서 옥천 고향과 부모님 생각 그리고 나라를 잃은 설움등 그의 감정이 잘 묻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유년기를 보낸 생가터에는 현재 초가집이 그 당시의 모습을 기초로하여 복원되어 있다.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에 수증기를 내뿜어며 밥물이 스며나오고 그 옆에 밥상에는 밥보가 덮혀 있다. 밥상의 주인인  어린 지용이를 기다리는 어머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 

 


 



 

장독대와 함께 있는 우물에는 고향의 모습이 어찌이리 똑 같을까. 우물가에서  등물을 치며 뚜레박으로 펀 냉수에다 꽁보리밥을 말아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던 그 고향의 향수에 시인 정지용도 얼마나 그리워 하였을까.

 




 

 

정지용 생가와 나란히 있는 정지용 문학관은 시인 정지용의 일대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와 인간 정지용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학창시절에 모두 다 알고있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청록파 시인이라 한다  정지용은 이분들을  문단에 등단시키는 역활을 하였다. ㅎㅎ 우연인지 1989년 '제1회 정지용 문학상'에 박두진시인이 눈에 뛴다.

 



 

 

그리고 토지의 박경리 선생 사위 김지하선생도 2002년 제14회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1회에는 도종환선생등 모두 쟁쟁한 분들에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필자는 시에 대해 문외한이라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의 포스팅을 하는 자체를 많이 망서렸다. 일반인으로서 시인정지용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 이분에게 누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정지용 생가, 문학관' 포스팅은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옥천을 방문한다면 꼭 들러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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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득이 혼자 즐긴다는 독락정을 창건.




☞(충북여행/옥천여행/독락정)혼자 즐긴다는 옥천의 독락정.


독락이란 혼자 즐긴다는 뜻이다. 경주시 안강읍 옥천리에는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내려와 소일하며 즐겼다는 독락당이 있다. 자계천변에 다리를 걸치면 서 있는 독특한 계정을 보면 그의 풍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마 그래서 혼자로도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닌지.


 





☞(충북여행/옥천여행/독락정)옥천 독락정. 금강천변에 혼자 즐긴다는 옥천의 독락정.

경주 안강의 독락당과 같은 당호를 걸고 있는 곳이 또 있다. 서로의 살아 온 시대는 다르지만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안주리에 강물이 휘감아 도는 남강천변에 홀로 즐기기 좋은 정자가 서 있어 안강의 독락당과 비교가 된다. 흐르는 강물을 그저 바라만 보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곳이다.


 




☞(충북여행/옥천여행/독락정)옥천의 독락정. 초계주씨 주몽득이 창건한 독락정.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독락정은 조선 시대 40년(1607)절충장군 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낸 주몽득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그의 나이 57세에 이곳에 독락정을 창건하였다. 원래는 주변의 경치가 너무 빼어나 혼자 즐기며 주위의 선비들과 함께 이곳에서 담론과 풍류를 즐기는 정자 였지만 후 대에 와서는 유생들의 학문을 연구하는 서원으로 바뀌었다. 독락정은 1772년인 정조 48년에 고쳐 지은 후 여러번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건물규모를 보면 정면3칸에 옆면 2칸으로 여덟팔(八)자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독락정 현판은 당시 군수였던 심후의 필체며 마루에는 송근수의 '율사기문'등 10여편점의 기문 액자가 걸려 있다".


  


ㅋㅋ 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 잡아 먹은 독락정 양수장.




☞(충북여행/옥천여행/독락정)옥천의 독락정. 독락정 양수장으로 주변 경치를 망쳐.


지금의 독락정은 어떠한가. 주몽득선생이 이곳에 독락정을 지을 당시와는 현재 많이 다르다. 그 당시 독락정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정자을 휘감아 돌듯한 착각에 빠질듯 금강의 물줄기는 흘러갔고 여름이면 학동들이 흐르는 개울에서 조잘거리며 물고기를 잡았던 아름다운 모습에 주몽득 선생은 혼자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독락정 양수장 건물이 정면에 턱 버티고 있어 지금은 한낮 그저 그런 풍경을 보여 준다. 굳이 아름다운 이곳에 정수장을 세워야 했을까 꼭 세워야 했다면 조금 비켜서서 독락정을 세웠다면 독락정의 그 값어치는 더욱 높혀 지겠다. 


  




☞(충북여행/옥천여행/독락정)옥천의 독락정. 문화재 관리 소홀이 아쉬운 독락정.



주몽득의 독락정을 찾아 솟을 대문을 들어서니 어디선가 왱왱왱~~~하는 사이렌 소리가 귓전에 작게 들린다. 눈앞에 벌들이 자신의 할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듯 주인이 되어 독락정 앞 뜰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객인 우리는 그 벌들을 피한다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정작 벌은 마루 아래에 난 구멍으로 열심이 들락날락을 하고 있다. 벌들이 현재 집을 지었는데 이곳 문화재를 담당하시는 분은 무엇을 하는지 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면 그에 따른 관리를 하여야 하는데 문화재자료 23호란 말이 무색하다. 문화재를 안심하고 바랄 볼 수 있는 조처가 아쉽다. 마루바닥 아래다 보니 송근수의 율사기문등 10여점의 기문액자는 볼 엄두도 못내고 옆으로 돌아 뒷 모습을 열심히 보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당시 군수 심후의 독락정 현판 글씨




마루 바닥 아래 벌들이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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