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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동구여행/부산동구가볼만한곳)조선통신사역사관. 조선통신사의 모든 기록을 알수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여행 추천이요. 자성대 공원 영가대와 조선통신사역사관



부산 동구 자성대 공원 남쪽에 영가대와 함께한 ‘조선 통신사 역사관’이 있습니다. 영가대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 일본으로 향하는 '회담겸쇄환사'와 조선통신사 행렬의 출발과 환송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산 동구 조선통신사역사관 인근 가볼만한곳



☞2016/06/29 - (부산동구여행/부산동구가볼만한곳)자성대 공원 영가대. 영가대는 일본으로 가던 조선통신사의 환송과 귀환 장소이며 해신제를 올렸던 곳입니다. 영가대

2016/04/19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호랭이 이바구길. 봄에 걷기 좋은 여행지 근대 역사문화박물관 범일동호랭이 이바구길을 걷다. 호랭이 이바구길

2016/04/12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누나의 길. 호랭이 이바구길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누나의 길이 있습니다.

2016/04/11 - (부산여행/동구여행)교통부 보림극장, 서민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부산 최초의 쇼 전문극장 보림극장이 호랭이 이바구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016/04/08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호랭이 이바구길 쉼터 똥산 전망대. 70~80년대 똥구덩이 산이 부산 최고의 힐링코스 호랭이 이바구길 똥산 전망대로 바뀌었습니다.







◆2015년 용두산공원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축제 조선통신사 행렬:

☞2015/05/03 - (부산여행/중구여행)조선통신사 축제. 한국과 일본 국가 사절단 조선통신사 행렬 축제가 열리다. 조선 통신사 축제







그럼 조선 통신사의 모든 것을 전시한 ‘조선통신사역사관’이 과연 어떤 곳인가 궁금하여 방문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를 일본에 파견한 ‘회담겸쇄환사,’와 ‘통신사’에 대한 전시관으로 누구나 알기 쉽고 이해하게끔 전시한 조선통신사 역사교육관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조선통신사의 모든 것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인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나홍유란 분이 처음 ‘통신사’란 직함으로 일본 아시카가 막부에 파견하였습니다.





그 후 1428년 조선 세종10년에 조선 국왕이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을 파견하는데 이는 일본의 막부 장군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습니다. 통신사라는 뜻은 “서로 신의를 통하는 외교사절”이라 합니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 이유를 보면 고려 시대 이전부터 남해와 동해 등 한반도 연안에 수시로 왜구가 나타나 조선인을 헤치고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아 일본의 막부에게 왜구 단속의 확답을 얻기 위해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1590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국왕인 선조는 김성일과 황윤길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 사신으로 보내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사신은 귀국하여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반드시 조선을 침략한다"와 "그런 조선 침략의 의도를 전혀 느낄수 없었다"로 양분하여 보고하는데 서로 당파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상반된 보고로 임진왜란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요즘의 우리 국내 정치상황도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일반 민초는 생각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뒤 일본은 조선에 단절된 양국의 외교를 강화하자며 끈질기게 요구를 하였고 이에 선조는 1604년 사명대사를 전쟁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사로 파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하여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 3500여명과 함께 귀국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강화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전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대마도(쓰시마)의 도주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조선 조정에서는 그사실을 알았지만,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하여 1607년 처음으로 외교사절인 조선 통신사가 출발합니다.


 



그러나 1607년, 1617년, 1624년의 통신사 정식명칭은 ’회담겸 쇄환사‘이며 조선통신사의 정식명칭이 사용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를 말합니다. 이 모든 조선 통신사의 역사를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 역사관은 제1 전시관과 제2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 전시관을 보면 조선 통신사의 정의와 임지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회복까지 모든 과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볼 수 있게끔 하였고 통신사의 파견과 절차와 6개월간의 긴 여정, 그리고 참여한 인물, 당시 한일 외교의 중심지였던 왜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동반하면 내용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3D 입체영상을 시청하는 영상실도 갖추어져있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2 전시관은 2층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통신사에 참여한 분들이 일본으로 가기 전 영가대에서 기다리며 남긴 시구들을 보고 오릅니다. 2층 전시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타고 간 배의 모형인 판옥선과 일본까지의 험난했던 뱃길 여정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통신사의 행로인 모형지도와 애도(도쿄) 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영상 등 그야말로 생생한 정보를 한눈에 보게끔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말을 타고 곡예를 부리는 마상재도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여했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요청을 받아들여 1636년 조선 통신사에서부터 참여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야외전시장의 영가대 복원 등 조선 통신사 역사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일 공동으로 유네스코 ‘외교기록’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합니다. 짐심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봅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정보 안내◆ 


조선통신사역사관

★조선통신사역사관 주소: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380-4)

★조선통신사역사관 개관시간:오전9시~오후6시

★조선통신사역사관 관람료 무료

★조선통신사역사관 휴관일:1월1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시 그 다음날 휴관

★조선통신사역사관 문의전화:051-631-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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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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