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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신라 7대 경주 일성왕릉를 찾아서, 경주 일성왕릉


경주 서남산 아래에 있는 일성이사금(재위134~154)의 능인 일성왕릉을 보고 왔습니다. 

일성왕릉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능은  1730년경에 당시 경주김씨와 경주박씨 두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고 시조인 왕릉 찾기를 하면서 사료나 고증으로 일성왕릉이라 추정하면서 비정한 곳입니다.

이외에도 신라왕릉 대부분이 비정된 상태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신라일성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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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촌장이 박혁거세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2대 남해 차차웅의 뒤를 이어 3대 유리이사금은 유언을 하면서 박씨가 왕이 아닌 석씨인 석탈해가 4대 이사금에 오르게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일성왕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의 장자라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유리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지마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료가 정확하지 않는데 일성왕은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나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저도 일성왕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대해 소설을 한번 써 봤습니다.



3대 유리이사금에는 아도갈문왕과 파사이사금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석탈해왕의 뒤를 이어 유리이사금의 차남인 파사이사금이 5대 왕에 등극하고 6대는 파사왕의 아들인 지마가 이사금에 오르면서 다시 박씨로 정권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7대는 일성이사금입니다. 

일성이사금은 지마이사금의 아들이 아니고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본다면 지마이사금과는 사촌지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 일성이사금에게 왕권이 돌아왔는지에 대해 알수 없으나 지마에게 후사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여튼 제가 추리한 이 대목을 뒷받침하는 게 148년 일성이사금 15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갈문왕이 무엇입니까? 사후에 왕의 자리를 추봉하는 왕을 말합니다. 

일성왕은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아버지를 아도갈문왕에 추봉하여 정통성이 있는 이사금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종종 아버지를 왕으로 추봉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일성왕의 아버지는 아도갈문왕이라 추증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거는 역사학자가 밝히는 거고 저는 그냥 제 생각을 유추해 해봤습니다. 

어머니는 이간생부인이며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 부인이라설 등이 있습니다. 

재위기간 동안 말갈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력의 소모가 많아 대응책 마련에 많은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으며 금은주옥 등 사치품 사용을 금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일성왕은 재위기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성왕이 승하하자 8대 태자 아달라이사금이 해목령 아래 의전동 묘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낸 경애왕릉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능은 조선 영조 6년인 1730년경에 알려졌습니다.

아마 그때  두문중에서 서로 나눠 먹기에서 일성왕릉으로 비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은 나정과 양산재, 남간사지가 있는 탑동의 서남산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은 능선의 경사면에 자리했습니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이 16m이며 높이는 5m 쯤됩니다. 

현재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으로 추정되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습니다. 

봉분 내부에는 석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2단의 축대는 능을 보호하려고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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