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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에 설총묘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설총하면 신라 중대 문장가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원효대사이며 어머니가 요석공주로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뼈대 있는 신라 왕족 집안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며 친할아버지는 나마담날로 설총은 경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설씨와 순창설씨의 중시조이며 신라 10현이자 고운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로 꼽고 있습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일화를 보면 출가한 요석공주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요석궁에 머물렀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긴 행로로 몸도 피곤하고 하여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자다 원효는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마침 손에 잡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 물 참 꿀맛이다”며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는 뒤로 까무러칠뻔했습니다. 목이 말아먹었던 그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으며 지난밤 단꿈에 쩔어 잤던 곳은 무덤 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총묘는 지금 이발중 ㅋㅋ



원효는 그곳에서 일체유심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와 노래를 불으며 민중 속을 파고드는 불법을 전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 원효는 색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하며 불렀지만 아무도 그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무열왕만은 노랫말을 듣고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는 뜻으로 단박에 이해하고는 과부로 있는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줄 묘책을 짜냅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향하다가 그만 문천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다 젖게 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과 원효는 서로 이심전심이듯이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원효와는 별 바쁜 일이 없던 관계로 태종무열왕은 온몸이 젖었는데라며 옷을 말린 후 내일 보자며 바로 원효를 요석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라 했는데 그날 밤에 바로 사달이 났고 10개월 후에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원효는 이 일로 파계승을 자처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설하고 설총은 중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두를 만들었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닮은 설총묘 석상다리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인 소리와 뜻을 새겨 우리말로 적은 것을 말합니다. 유교 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하여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으며 이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설총이 저술한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도 있습니다. 제목도 없이 삼국사기에 실렸다가 풍왕서란 이름으로 동문선에도 실렸으며 후대에서 화왕계로 불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이 설총에게 마음이 울적한데 이를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설총은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할 것을 우화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신문왕은 현명한 임금답게 글로 남겨 후세 임금은 모두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1022년인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1623년 조선 인조원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크기는 지름이 15m, 높이 7m이며 흙을 쌓아 올린 반구형으로 아랫부분에는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봉분은 작지만 꼭 신라왕의 무덤 같으며 앞에는 큰 상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위패를 모시는 자리는 흡사 돌의자 같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이며 전 홍유후 설총묘(傳 弘儒侯 薛聰墓)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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