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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정자항여행)울산 북구 정자항 유포석보와 신라 충신 박제상 발선처 여행


동해와 남해 쪽으로 가다 보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선을 침입한 왜군이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쌓은 왜성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울산 북구의 정자동을 갔다가 조금은 독특한 ‘유포석보’란 이름을 한 산성을 만나고 왔습니다.





울산 북구 정자동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와 유포석보 주소: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455-6





유포석보는 정자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만들어진 석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포석보는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름도 생소하고 그래서 마을 주민을 잡고 유포석보가 어딥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 마을에 살지만 그런 곳은 처음 듣는다고 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큼지막한 유포석보 안내판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화살표는 오른쪽 마을 길로 안내했습니다.



마을을 들어서서 산성의 흔적을 아무리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안의 향나무 식당에다 유포석보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분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저기 전봇대 뒤에 하얀 판이 보이죠!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들어오는 입구 오른쪽 대나무 숲 꼭대기였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동해안로 도로에서 10m쯤 들어서면 ‘동해안로 1467-4’호 민가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대나무 숲에 올라서서 맨 끝에 안내판과 석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포석보 석성 주위에는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유포석보는 조선 시대의 보로 고을의 수령인 만호가 관리하는 제진을 보조하는 방어적 시설로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하면서 위급할 때에 주민의 대피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투를 하는 규모가 작은 성을 말합니다. 보 주위는 봉수대가 설치해 있어 즉시 신호나 기타 소리로서 주민대피를 시키면서 인근 지역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정자동의 유포석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삼도 도체찰사 정분이 왜구를 막기 위해서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으며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목책 성을 설치했으나, 1452년에 다시 석성을 쌓을 것을 건의해서 1455년인 세조 원년에 기존의 목책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다 석성을 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정자항의 유포석보는 왜구의 동태를 살피는 방어기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경상좌병사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정자동 유포석보는 병영·울산과 경주의 군사 3백 명이 3교대로 주둔하면서 수비할 만큼 중요했던 곳입니다. 유포석보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약 755m였고, 계곡을 끼고 능선과 구릉의 낮은 평지 주위에다 쌓았습니다.

 

유포석보



현재 유포석보는 황폐할 정도로 그 존재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정자항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유포석보의 큰 돌을 빼서 쌓았다 합니다. 남아 있는 석성의 규모를 보면 동문 쪽에 2m 정도의 높이로 약간 남아 있습니다. 유포석보는 바닷가에 들어섰지만, 육군이 담당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석보라는 점에서 그 가지와 의의가 매우 높다는 평가입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



이곳 유포석보는 신라 시대 충신이었던 박재상의 발선처 비가 있습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입니다. 왜국에 볼모였던 미해(미사흔)를 구출하려고 사신을 가장하여 율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띄웠다 합니다. 그 율포가 현재 북구 정자동의 유포마을로 보고 있습니다. 유포석보에는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난 곳을 기리는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유포석보를 한 바퀴 돌면서 정자항의 전경과 멀리까지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그야말로 작은 나룻배 한 척도 보일 만큼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왜군의 방어 진지인 유포석보를 만나보세요 유포석보는 1998년 10월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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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금정산에는 필자가 어릴때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긴 산성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서문의 좌우로는 아직도 허물어져 있고 개인사유지로 인해 황폐화가 되어 있다. 금정산성의 전체 길이는 18km로 흡사 고구마를 닮아 있는 모양세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뽁쪽에는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파리봉이 솟아 있어 서로 대치를 이룬다. 금정산성에도 동서남북으로 4대문을 두고 있다. 북문은 금정상 정상 아래의 편편한 평지에 자리를 잡았고 동문은 금정산의 입구답게 항상 많은 인파로 쌓여 금정산성을 대표하는 성문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읍성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동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1807년 오인환이 동문 준공,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동문은 금정산의 주능선인 해발 415m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이곳을 넘어서면 금성동 산성마을로 바로 넘어 갈 수 있는 주 통행길에 위치를 한다. 금정산성 4대문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도 매우 뛰어나다. “금정산성 부설비”에 보면은 “1807년 늦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민,군,관이 힘을 보태어 완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홍예문식의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스승과 재자의 전설이 있는 동문과 서문 완공이야기.

 

금정산성의 동문은 무지개 형태를 갖춘 홍예문식으로 폭은 3m, 홍예문의 높이는 3.4m로 바위를 깎아 끼워 맞추어 돌려놓은 예술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정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문과 동문에 얽혀 있는 전설도 산성과 함께 전한다. 동래부사 오한원이 성문축조를 위해 요즘 말하면 장인의 석공을 수소문 하였다. 마침 그때 스승과 제자가 동문과 서문을 세우기 위해 나타났는데 스승은 동문을 만들고 제자는 서문을 짓기로 하였다. 제자의 석공 솜씨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 먼저 서문을 완공을 하였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승과 제자 밀양의 영남루를 공사하다.

 

서문의 규모는 웅장하고 예술성에 모두들 놀라며 제자의 솜씨를 칭송하였다. 스승은 옹졸한 성격에 그의 제자를 질투하며 시기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는데 그 뒤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스승과 제자는 화해를 하고 둘이 힘을 합쳐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의 영남루를 완공하였다는 훈훈한 전설이 전한다. 현재에 서문과 동문은 그 당시 모습을 복원하였다. 남아 있는 주춧돌과 성문으로 복원되었지만 동문보다는 서문이 더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동문은 시기심 많은 스승이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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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 동부동 KT 건물 뒤에 도심지의 있는 고려 시대 돌로 만든 경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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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옛 경주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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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경고이 쌓은 석성의 모습이 90m정도 남아 있다.

경주읍성을 보면서...

제 고향은 경주입니다. 경주의 이야기나 남산의 이야기가 나오면 옛 추억들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나곤합니다. 이번에도 벌초를 한다고 고향에 하늘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벌초후 경주시내의 경주 읍성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산을 다니다 보니 산성의 흔적은 여러번 보았지만 평지인 마을의 성은 보기가 힘든 구경입니다.
금전산 밑의 낙안읍성과 서울 장안의 4대 문등 경우 떠오를 정도입니다. 금전산을 산행하다가 잘 보존되고 있는 낙압읍성의 현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랬는데 도심한복판의 서울 4대분이나 경주의 읍성은 모든 성이 주택가가 들어차서 성의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정도입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읍성의 존재를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찾아본 경주읍성은 현재 90m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예전에 여기가 성이였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주택의 담장에 걸쳐져 있어 옛 성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석성의 위의 큰 고목만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읍성은 사적 제96호이며 경주시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주에는 열매시장인 성동시장과 아랫시장이 있습니다. 그 대로변 중간에 kt 건물이 있어며 그 건물 뒤에 석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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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남은 석성의 흔적은 담쟁이가 덮혀 있는 어느집 돌담역활도 하고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함께한 성을 의미한다합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부동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가 4,075자(尺:2400m)이며 높이가 12자(尺:3.6m)인 돌로 만든 석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경주읍성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합니다. 이곳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과 관아, 우물80여개를 있었다하니 많은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서남북으로 사대문을 두어 향일문인 동문, 망미문인 서문, 남문인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을 두었다 하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해자(垓字)도 갖추었다 한다.
남문인 징례문에는 현제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주읍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는데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였다한다.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헐리고 읍성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인 90m 남아 현재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경주시에서 최근 경주 읍성 복원계획을 실행을 하고 있다 한다. 고려 태종 왕건이래 역대고려왕들은 경주읍성을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 994년에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을 삼은 경주읍성을 복원하기위해 2002년부터 주위의 토지보상과 건물철거등으로 83억원을 투입하였고 2012년 까지 총605억원을 들여 동북성곽 1100m및 동문의 향일문과 북문인 공진문을 복원한다고 한다.

하루빨리 복원이 되어 옛 경주의 모습을 보았서면하고 낙안읍성처럼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었서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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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에서 출토된 주춧돌과 경주읍성을 알리는 초라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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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모습을 보이는 경주 읍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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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성곽의 모습과 그 뒷면으로 돌아가면 보는 모습으로 쓰레기가 나뒹굴고 자라난 나무등으로 곧 허물어질 태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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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현장의 오래된 고목, 밑둥치만 남기고 있지만 고목에 그래도 싹이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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