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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왕리 푸조나무

☞(경남여행/하동여행)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봄에 걷기 좋은 둘레길. 서산대사 휴정이 신흥마을과 의신마을을 오고가며 걸었던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 길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조성된 서산대사길을 걸었습니다.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을 조직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스님으로 필자는 서산대사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산대사길을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전혀 알고 있는 게 없었습니다.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가까운 여행지 보기



2016/04/13 - (경남여행/하동여행)범왕리 푸조나무.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에 입산하면서 꼿았던 지팡이가 살아나 범왕리 푸조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의 나무.


2016/03/28 - (경남여행/하동여행)칠불사 아자방. 한번 불을 지피면 석달 열흘간 따뜻하다는 칠불사 아자방을 욕심내어 찾아갔지만 보수공사로 보지도 못하고 왔네요. 칠불사 아자방


2009/05/29 - (경남여행/하동여행)화개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지리산 쌍계사 중앙에 자리잡은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화려한 예술성입니다.


2011/06/30 - (경남여행/하동여행)쌍계사.한 겨울 칡꽃이 핀 자리에 쌍계사를 짓고 꽃이핀 마을이라 화개마을




 

서산대사 휴정은 지리산 대성골의 작은 암자 원통암에서 출가했다는 작은 지식만 가지고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래서 서산대사에 대해 공부를 좀해야 했습니다. 서산대사 휴정의 속명은 최여신이며 본관은 완산, 자는 현응이고 호는 청허이며 법명은 휴정입니다. 주로 묘향산에서 주석하여 묘향산인 또는 서산대사로 많이 불립니다.


 세이암

서산대사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안주목사였던 이사증의 양자가 되어 한양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 과거를 보지만 낙방하여 벗들과 함께 지리산 기행을 떠났다가 지리삼매에 빠져 우연하게 찾은 원통암에서 설법을 듣고 깨달은바가 있어 불교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입

그리고 5년 후인 1540년(중종35) 스스로 머리를 깎고 일선에게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습니다. 1549년(명종4)에는 승과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에 오르지만 중이 관직을 가진다는것에 회의를 느껴 사직하고 금강산 묘향산등 명산을 돌며 수행에 전념합니다.



 1589년(선조22)에 정여립 모반사건에 몰리기도 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에는 선조의 명을 받고 맨 먼저 앞장서서 승군을 모집하는 격문을 띄우고 승병을 진두지휘하여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신흥마을 지리산 옛길 게이트

그리고 160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그의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 입적하였습니다.


 

신흥마을~의신마을의 서산대사길은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입구에서 시작합니다. 대성동마을을 돌아오면 약 거리는 10km,  산행시간은 3시간 30분~4시간이 소용됩니다. 먼저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을 찾으면서 세상의 온갖더러운 소리를 들었던 귀를 화개천에서 씻어내고 그가 짚고 왔던 지팡이를 꽃았는데 그게 살아나 오늘날 범왕리 푸조나무가 되었다합니다. 그 푸조나무가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 입구에 있습니다. 


 야생차밭

 

우리나라 푸조나무 중에서 가장 크며 500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길 입구는 왕성분교 축대밑 도로를 따라갑니다. 곧 오른쪽 화개천에 고운이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이 있습니다. 다시 신흥교가 나오면 직전에 왼쪽으로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옛길 4.2km' ‘신흥~의신 옛길’ 게이트를 통과하면 수문장인양 큰 바위가 입구에 턱 버티고 있습니다. 이 길은 서산대사께서 출가하여 신흥마을의 신흥사에서 의신마을의 의신사까지 오르내렸던 옛길이자 의신마을에 도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마을주민이 화개장과 하동장을 다녔던 마을길입니다.


 

서산대사길은 조금은 정리를 하였지만 그래도 옛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지리산 산길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자 그럼 서산대사길을 출발합니다. 먼저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며 콸콸~~ 요란하여 귀가 먹먹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휘어지는 산길에 유난히 진한 초록색 잎이 눈에 보여 자세히 보았더니 야생 차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차나무의 효시가 바로 이곳 화개인데 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3) 김대령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차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신라 흥덕왕이 직접 지리산 기슭에 심으라하여 지금 화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습니다.


 

이곳 서산대사길의 차밭은 모두 그의 후손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보니 참 양지 바른곳에 차나무가 자라는가봅니다. 지리산 옛길이란 예쁘고 작은 명패가 나무에 걸려 있고 멀리 지리 능선이 아직은 겨울의 묵은 때를 다 벗지 못하고 무채색을 띠고 있습니다.


 서산대사 의자바위

계곡과 나란히 달리는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 급하지도 지겹지도 않으며 지난겨울 동안 묵혔던 몸에 시동을 거는 코스로 제격이며 자연을 벗 삼아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왼쪽에서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시원한 약수로 목도 축여봅니다.


 


 옛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이더니 작은 돌의자가 있는 안부에 도착했습니다. 일명 서산대사가 앉았다는 의자바위입니다. 의자바위에는 서산대사 전설이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 의신마을의 의신사를 불태우면서 범종을 훔쳐가는 것을 이곳에서 지켜보던 대사는 괘씸하게 생각하여 도술을 부려 범종을 돌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에 왜구는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합니다. 지금도 서산대사길에는 누구나 앉아 쉴 수 있게 돌 의자가 있으며 이곳에서 푹 쉬었습니다. 서산대사의 요술로 만들어서 그런지 푹신푹신한 소파보다 더욱 편했습니다.


 지리산 옛길 독립가옥

다시 화개천을 끼고 옛길을 갑니다.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의신 옛길’ 푯말도 보이며 작은 계곡에는 징검다리가 두 줄로 걷기 좋게 놓여 있습니다. 옛길은 계곡과 붙어가고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 밑에는 벌통이 놓여 연신 꿀벌이 바쁘게 들락날락합니다.


 

곧 파란 지붕을 한 독립가옥이 한 채 있습니다. 때마침 집주인이 어디로 나서는지 새신을 비닐봉지에 담고 샌들은 신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불어난 물에 모두 잠겨 어쩔 수 없어 갈아 신을 신발은 들고 화개천을 건너는 모습을 보면서 지리산에 살려면 먼저 자연에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소중한 땀방울입니다. 손대지 마세요!”하는 안내판이 옛길 내내 붙어 있습니다. 옛길 안내 푯말에는 의신마을이 2km 남았다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신흥마을에서 이제 1/2쯤 왔습니다. 계곡에는 깊고 넓은 소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크크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이 찾아 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곡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계곡내 출입금지” 안내판이 걸려 있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계곡 건너에는 띄엄띄엄 집도 있지만 서산대사길에서는 딱 한집 빼고는 민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옛 집터의 흔적인 축대 등이 남아 있으며 마을터의 흔적도 있었습니다. ‘의신 1.6km. 쉼터’ 이정표 방향으로 오르막을 살포시 올랐더니 키 큰 소나무가 있는 쉼터가 나왔습니다. 푯말을 보면 '의신 옛길 1.4km' 남았습니다.


 숯가마터

참나무를 구웠던 흔적인 숯가마터 구덩이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옛길을 걸어갑니다. 곧 앞에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며 서산대사 길의 끝인 의신마을입니다. 흡사 알프스의 어느 산간지방같이 모든 집이 아주 이국적인 풍경입니다.


 

34년 전 대학 1학년 때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 대성마을로 하산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의신마을을 생각하면 지금의 의신마을은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의신마을에 세워진 게이트를 나오면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 앞입니다.


 

 

 의신마을

 

 지리산반달가슴곰 생태 학습장

지리산 반달가슴곰을 알리는 여러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반달곰에게 먹이주기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계곡에 걸린 출렁다리를 건너면 의신마을입니다. 도로에 올라 왼쪽에 있는 ‘지리산 역사관’을 보기위해 찾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주 월·목요일은 휴무였습니다.


 의신마을 지리산 옛길 게이트

 의신마을 출렁다리

 

 지리산역사관

 

세석대피소·원통암 방향 갈림길

 어쩔 수 없이 도로를 따라 100여m를 내려오면 지리산 세석대피소로 오르는 입구가 나옵니다. ‘서산대사 출가지 원통암 0.9km, 세석대피소 9.1km, 대성마을 2.5km' 이정표를 보고 50m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꺾어 벽소령 산장 앞을 지나갑니다.


 벽소령산장

 

 항일투사 17인 의총

참고로 서산대사가 출가했다는 원통암은 직진합니다. 많은 산행 리본이 붙어 있습니다. 의신마을을 벗어나고 제법 큰 봉분인 ’항일투사 17인 의총‘ 묘지가 있습니다. 1908년 2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결사 항전했던 의병 30인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합니다.


 

80여명의 의병은 지금의 지리산 역사관 뒤 배명고지에 초병을 세우고 주위 경계를 하던 중 설날아침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이틀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막강한 화력 앞에 많은 의병이 숨졌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 대성골 게이트

후에 의신주민이 시신을 수습하여 여러 곳에 묻었습니다. ’항일 투사 17인 의총묘소‘도 그중 한곳인데 광복66주년에 훼손된 봉분을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시멘트길이 이어지고 곧 지리산 국립공원 입구인 게이트가 나옵니다.


 

지금부터 흙길로 바뀌며 여기서부터 대지리산 산길이 시작됩니다. 멀리 삼신봉 능선이 보였으며 걸어왔던 화개천 옆 서산대사길도 가늠해 보며 대성동마을로 향했습니다. 대성골 20분 남았어요” 작은 안내판이 나오고 다시 갈림길입니다.


 

 

 

 원통암 갈림길

 원통암

 

 

 

 

의신마을에서 약1.8km 거리 입니다. 직진하면 원통암 가는 길이며 등산로 아님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대성동마을(0.9km)은 오른쪽으로 내려갑니다. 이제 거의 다왔습니다. 대성동마을에는 지금 다섯가구가 살고 있으며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와의 최대 격전지중 한곳입니다. 이곳 대성동마을에서 왔던길을 되짚어 의신마을로 향했습니다.


 대성동마을

 

 대성동계곡


☞(경남여행/하동여행)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대중교통편.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 구례행 첫차를 타고 하동터미널에서 내립니다. 하동터미널에서는 오전 10시20분 출발하는 칠불암 의신행 버스를 이용하여 신흥마을정류장에 하차하여 화개초교 왕성분교를 찾아갑니다 곧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 길 들머리입니다.. 의신마을에서 하동으로 나오는 버스는 오후 1시, 4시20분, 6시40분(막차)에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내비게이션에는 범왕리푸조나무 또는 화개초등교 왕성분교 입력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고도표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 길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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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정상에 백련꽃이 피었다하여 창건한 연화사가 전신


 부산에서 수다사를 가기위해서는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 동대구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상행선인 서울방향으로 달린다 . 구미를 지나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또 바꾸어 타 선산인터체인지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도 68번 지방도를 타고 상주방면으로 달리는데 주위로는 유순한 모습을 한 5~600m의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무을면사무소를 지나 상송리가 수다사 들머리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입구의 연리지 쌍정자 전설 


천년고찰답게 수다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넓게 조성이 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마을을 지나 수다사로 가다보면 저수지 옆에 큰 느티나무가 양쪽에 서 있다.  쌍정자로 불리는데 나무의 모습이 특이하다. 서로 몸이 붙어 있는 연리목으로 이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면 그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나무에서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사랑의 약속을 하고 간다고 한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진감국사가 연화사로 창건 그 연혁


구미시와 상주시의 경계선상에 기양산으로 불리는 산이 있다. 그 산 정상 부근에 백길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바위가 백련봉으로 불리는데 그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수다사연혁인 '수다사약전'의 기록을 보면 진감선사 혜소스님이 연악산 정상에 흰연꽃 한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830년 문성왕때에 이곳을 사찰을 짓고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흰연꽃은 백길바위인 백련봉을 두고하는 것 같다. 



 

 

그 후 976년에 화재로 불타고 명종15년인 1185년에 각원대사께서 중창을 하여 성암사로 개칭을 하였다. 그러나 1273년에 뜻하지 않게 수해로 인해 사찰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넘겨오다 선조5년인 1572년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가 크게 중수를 하여 감로수를 의미하는 수다사로 고쳐 불렀다. 사명대사에 의해 수다사는 임진왜란때 승병 일만여명이 '의국법회'를 열정도로 중흥기를 맞다가 1684년인 숙종 10년에 수다사는 또다시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대웅전과 시왕전 극락당등 현재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현재 직지사말사이다.



 

 


수다사를 찾아간 이날에도 전국은 한파에 많은 눈이 내렸다. 수다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경내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이를 두고하는 말이랴.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절마당에 난데 없이 개 짓는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시커먼스한 놈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깜짝이야. 너 늑대야 멍멍이야.... 생기기는 험상궂게 생겼지만 달려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스님도 달려 안나오는 곳에 멍멍이가 달려 나오니 반갑기도하다. 사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명부전 경상북도유형뮨화재 139호 


명부전은 앞면3칸 옆면2칸 크기로 지붕의 옆 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의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형식으로 이 양식은 신라시대때 사용되었던 양식이며 원래의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에는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좌상등의 불상이 모서져 있다. 그리고 내부 벽에는 영조42년인 1771년에 그렸다는 '지옥도'는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좌상과 불상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334호 


수다사 대웅전 내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개금불사로 인해 외형상 목조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의 결을 찾을 수 있다. 


특징을 보면 DAUM문화유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발의 두정(頭頂)에 약간의 육계의 흔적이 보이고, 가늘게 뜬 눈, 코, 입술 등의 조각 수법이 정제되어 있으며, 우너만한 상호와 짧은 양 귀, 목에 둘러진 삼도가 조화를 이루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무늬 조각이 세련되었으며, 무릎 부분이 높고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수다사 사찰측에 의하면 원래 삼존상으로 조성 되었다한다.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있는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수다사불상조성연기가 나왔다한다. 원래는 삼존상이었으나 양 협시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봉안하고, 관세음보살상은 대구서봉암에 옮겨 봉안되었다. 


조성연기의 기록을 보면 1650년 효종1년 9월에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 불상의 삼존상 조성했다는데 현재 수다사 대웅전에 모서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그 당시 조성된 주존불로 여겨진다. 복장유물에 나왔던 조성연기의 종이질도 검사를 하니17세기에 만들어졌다한다.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바로 당시 조성된 주존불이었던 것이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석가모니 후불탱화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후불탱화는 1731년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현재의 본존불 뒤에 걸린 탱화다. 후불탱화에 대해 '디지털구미문화대전'에서 잘 설명하여 그것을 인용하자면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주존 탱화로서, 폭 39~40㎝ 정도의 세마포(細麻布)를 7폭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한 바탕의 중앙 연화좌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정수리로부터 상부로 퍼져나가는 광명은 석가모니의 설법이 시방 세계를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좌우에 8명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은 석가모니불 좌대 양옆에 붉은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의 좌우에 있는 사천왕은 비파, 검, 용과 여의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상 위 좌우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옆에 배치되어 있는데, 범천은 3목(目)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외 상단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부처,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포함한 10대 제자, 신장(神將) 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주제는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탱화는 모사본이며 진품은 직지사에 보관하고 있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건륭 37년 명문이 뚜렷하다, 즉 1772년(영조 48)에 조성된 것이며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을 보면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과 유곽, 용뉴 등의 양식 및 수법은 다른 예와의 비교, 연구에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다사 대웅전 내에 위치한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 아래에 있으며, 사찰내에 있는 유일한 동종이다. 4구의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대를 만들고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9곳에 1행씩 모두 9행이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건륭삼십칠년임진 삼월일 화주근징장승통광능 경상우도 선산 서령 연악산 수다사 중종개조 중이백근야 삼강(乾隆三十七年壬辰三月日 化主僅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 善山 西嶺 淵岳山 水多寺 中鍾改造 重二百斤也 三綱)’이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또하나의 볼거리는 이곳의 300년된 배롱나무는 봄이면 화려한 백일홍으로 장관을 이룬다. 수다사를 방문하였을때는 눈이 와 있었는데 기양산(연악산)~수선사 산행을 할때 폭설이 내려 하산 후 수다사는 그야말로 설국을 보여 주었다. 그때 다시 담은 사진을 함께 올렸다. 수다사는 겨울의 설국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여 더욱 화려한 수다사가 된다. 



 

 

 

 

 

 

 

 

 

 

 

 

흰연꽃을 의미하는 백길바위, 백련봉이라 부른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연악산 수다사 교통편


부산에서 구미를 거쳐 선산읍으로 가서 수다사 방향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 가는 버스는 오전 830, 940분에 있다구미터미널에서는 20번 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로 가서 21, 21-1, 121번 버스를 갈아타고'상송수다사입구정류장에 내려 수다사까지 걸어 들어가면 된다구미에서 부산 행 버스는 오후 435, 740, 850(막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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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해남여행)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는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의 능선이 있습니다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은 대흥사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주봉인 가련봉을 비롯, 노승봉(능허대) 두륜봉 고계봉 도솔봉 혈망봉 등 8개의 봉우리가 연꽃모양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주차장에서 걸어들어오는 숲속길 또한 운치 있는 길이지만   해탈문을 들어서면 대흥사 경내로서  정면에 대흥사를 두른 암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서부터 두륜봉 가련봉 노승대. 불심을 가지고 능선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두륜산 산행중의 구름다리가 두륜산의 명물이라면 대흥사의 볼 거리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아닐까?.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 두개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대둔사 또는 대흥사로 불렸는데 현재는 대흥사로 부른다.대흥사는 426년인 백제 구이신왕 7년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과 함께 창건을 하였다한다. 그러나 정관존자에 관한 정확한 자료가 없어544년 신라진흥왕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죽미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그 이후 자장과 도선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기록도 옅볼 수 있다. .임진왜란때는 호국사찰로서 서산대사의 의발 및 부도탑이 전해지며 풍담스님에서 초의선사에 이르기까지 13대종사가 배출되었고 만화스님부터 범해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 강사가 배출된 유서 깊은 곳이다.







대흥사의 대웅전은 조선 현종 8년인 1667년 심수대사가 중수를 하였다 하나 그 이후에도 여러분 중수 과정을 거쳤다.

대웅전을 앉히기 위해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아 정면5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올렸다.
양쪽 귀퉁이의 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위쪽으로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다 연꽃을 새겼고 각 기둥사이에 빗살무늬의 2분 합문을 달았다. 조선 후기의 작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전면 현판의 대웅보전은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이다.  
http://www.daeheungsa.kr/coding/main.asp



대흥사 삼층석탑

대응사 절 마당 응진전 앞에 삼층석탑이 자리 하고 있다.
원래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불교계에서는 신성시하고 있는 신앙적인 대상이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4.3m로 간결하면서 날렵한 미미지를 가지고 있다.
1967년 래체 보수과정에서 12cm 크기의 동으로 만든 여래좌상이 기단부에서 나왔다 한다. 보물제320호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2





만일암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암 또는 북미륵암으로 불린다. 대둔사지』에는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754년에 중수되었다. 북미륵암에 1985년에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용화전을 지었다. 국보308호로 대흥사의 관내에 유일한 국보이다.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5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보물제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은 대흥사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처럼 고려시대 작품으로
신라시대 불교의 영향이 이곳 서남해 까지 영향역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결하고 날렵하한 모습을 하고 있다.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3

찾아가기

부산에서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여수 벌교 17번 국도~지하도~2번·17번 국도 벌교 여수~2번 국도 벌교 낙안민속마을~순천 청암대학에서 좌회전~벌교~보성~장흥~완도 해남 강진~진도 해남(호산삼거리) 직진~두륜산 대흥사~경찰서 진도 완도~대흥사 827번 좌회전~대흥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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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곡성여행)곡성 동악산 도림사 여행.도승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숲을 이루었다는 곡성 동악산 도림사

 

곡성의 진산 동악산은 형제봉과 대장봉 그리고 신선대를 연결한 능선 아래에 흰 암반을 이루는 도림사 계곡인 청류동 계곡이 흐른다. 그래서 인지 예로 부터 이곳 도림사 부근인 청류동 계곡에 시인 묵객들이 들어와 글을 남기고 그것도 부족해 암반에다 흔적을 남겼다. 계곡 옆 이곳 도림사에도 원효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익대사등 많은 선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인숲을 이루었다하여 그 이름 또한 도림사라 하니 사찰의 이름 또한 재미가 있다.

 



도림사는 660년 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구례의 화엄사에서 옮겨와 지었다고 하는 데 그해가 백제가 멸망을 하던 때였다.
도선국사가 헌강왕 2년인 876년에 다시 한번 사세를 키우고 고려때에는 지환대사가 , 그후에도 2차례나 더 중창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때는 신덕사로 불렸다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가 도림사를 후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문인지 도림사는 조선왕실의 원력 사찰이 되었으며 응진당 후불탱화에도 명성왕후가 시주를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도림사에는 1683년에 제작된 보물제1341호인 괘불이 소장되어 있으며 당우로는 보광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지장전 응진전 칠성각과 요사체를 둔 단출한 절집으로 변했다 한다.
도림사는 1984년 지방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었고 청류동계곡은 전남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어 관리 되고 있다.



절 입구의 부도전





일주문













보광전 앞 화단의 연리지

고광전 아래 여채의 모습을 한 나무

범종각

요사체





보광전












도승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로 동악산 등산로 상에 있으며 좌우측에 음각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부산서부버스터미널에서 구례행 버스를 이용한 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부산발 구례행 버스는 오전 7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13600, 3시간 소요.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까지는 광주행 또는 전주행 버스를 타고 가다 곡성에서 내리면 되는데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요금은 2700원이다. 곡성읍에서 도림사 입구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20분 간격으로 탈 수 있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곡성IC에서 내린 후 27번 국도를 타고 곡성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 곡성읍 방향으로 가다가 도림사 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도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부산에서 2시간30분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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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터인 유적지는 4만9146㎡의 부지에 사당인 숙청사,어린 유년기를 보낸곳을 육영당, 그리고 거처를 하던 사랑채를 사명당으로 각각 복원하였다 합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 사명대사의 고향 마을인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댕겨 왔습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됨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연락처:055-359-5647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임씨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납니다.
사명당이 태어난 고라리는 풍수지리설에 의 한 명당으로 주변에 하서산에서 이어진 능선이 영취산 종암산으로 흘러내린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라리에서 그의 조부 때 부터 터를 잡아 살았는데 사명당은 커면서부터 매우 독특하였던 어린이 인 것 같습니다.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떠 자 그는 명종14년인 1559년에 김천의 황학산 직지사로 찾아가 신묵대사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또다시 금강산의 보현사에 찾아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됩니다. 1592년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문을 나와 승려들과 규합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를 합니다. 그는“의승도 대장”이 됩니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1593년 명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번 왜구의 적진으로 찾아가 왜군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하고 휴전협정의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37년인 16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적장과 담판을 하여 전쟁 중에 잡혀간 백성 3000여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쾌거도 올립니다.
8개월간 일본에서 머문뒤 돌아와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그후 그는 해인사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홍제암이란 암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입적한 사명당의 시호에서 따 왔다 합니다. 사명대사의 부도탑도 현재 홍제암에 있다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기념관과 생가지에서는 최근까지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였는데 지난 10월24일 입장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우리 부산의 충렬사와 대조가 됩니다.

*생가터 둘러보기









*기념관 둘러보기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사명대사 유적지(5㎞) 크게 우회전(영산정사)~갈림길에서 왼쪽(영농법인 농정, 갈탄보일러)~영취산 하서산 등산안내도 지나~영산정사 방향~다례 서가정 사명대사 유적지 영산정사 우회전~다례 서가정~사명대사 유적지순입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유적지는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tour.miryang.go.kr/01/04_01.php?pT_idx=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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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칠선계곡엔 명성에 비해 명찰이 별로 없다. 백무동 안에만 해도 영원사를 비롯한 수십개의 암자나 절이 포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칠선계곡의 유명세에 비해 벽송사와 그의 암자 서암정사만 달랑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벽송사는 어떠한 절인가. 조선중종때인 벽송지엄대사에 의해 1520년 창건되었다. 다른 사찰에 비해 창건 연도가 많이 늦었지만 서산 사명 두 대사가 도를 딱 고 깨달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을 보면 벽개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서산휴정 부휴선수, 사명유정,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희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등 큰스님들이 수행 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가 되었다. 




벽송사는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 108분을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는 별칭을 얻어서며 많은 도인을 배출하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을 한다”고 할 정도 였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그리고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푸른학이 알을 품고 있는 청학포란형의 명당자리로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갔다. 벽송산문의 제2대 제자가 부용영관 선사인데 그의제자가 바로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벽송사의 3대 조사인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팔도도청섭이 되어 승군을 모집하였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진력을 기우렸다.

서산대사의 문하에는 사명대사. 청매조사 두분이 있는데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불법을 깨우쳤어며 특히 함양 넘어가는 오도재는 청매조사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1704년(숙종30년) 환성지안대사때 벽송사는 크게 중수 번창을 하였다. 최대의 위기는 한국전쟁때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는 바람에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하여 완전 소실되었다.
1960년대 이후 불태워진 벽송사를 구한원응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다. 신라 양식을 계승한 삼층석탑(보물제474호)과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져 있으며 천년의 세월을 견더온 도인송과 미인송은 벽송사를 대표하고 있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을 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에다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진다한다.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 벽송사를 찾고 있다. 단풍이 물들고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지리산을 더욱 가까서 볼 수 있는 가을의 벽송사를 추천해 본다.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두길이다. 먼저 칠선계곡 입구인 의탄교를 건너면 승용차를 이용한 길과 지리산길을 이용하여 도보로 자연을 느끼며 우리의 옛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칠선계곡입구인 추성동까지 가면 마을입구에서 도로는 갈린다. 좌측으로 광점동과 벽송사 방향. 다시 갈림길로 좌측 벽송사로 오르는 오르막 도로이다. 또 한길은 의탄교 건너 100M 걸어가면 좌측으로 지리산 길임을 알리는 표지막대를 따라가면 된다. 산길을 오르는 오붓한 지리산길이다.


벽송사를 알리는 벽송산문이다 한면에는 벽송산문글귀와 한면에는 사천왕상 같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석상이...

벽송사 서암정사 안내표지판. 삼거리 길로 좌측 서암정사 가는 길, 우측은 벽송사 가는길. 서암정사를 보고 다시 이곳 까지 되돌아 나와야 벽송사로 갈 수 있다. 




삼거리 이정표와 우측 사진은 서암정사를 알리는 두 기둥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천왕상이 서 있습니다,

우측 벽으로 조각 되어진 사천왕상의 모습, 절안으로 들어오는 잡귀와 악귀를 몰아 내는 역활을 한다.

뒤돌아본 모습, 멀리 지리산 능선이 펼쳐지는 전망좋은 곳에 터를 잡았음을 알수 있다.


사천왕상

일주문 격인 대방광문으로 많은 등산객이 들어서고 있다.

대방광문의 모습


대방광문 안에서 본 서암정사.그리고 뒤돌아 본 대방광문

서암정사. 정면에 요사체가 보인다.

암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벌써 가을이 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굴법당 입구의 모습이며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음보살상이 들고 있는 우측 호리병에서 약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가뭄으로 관음상의 약수까지도 말라 버린 지경이다.

굴법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한국불교예술를 보여주는 굴법당입니다. 한분이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


지장보살






서암정사는 원응스님이 6.25를 전후에 전쟁과 빨치산등으로 많은 대중들이 희생이 되어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고 기도하면서 발원하기 위해서 서암정사 굴법당인 극락전을 조성한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서암정사에서 본 전망으로 아래 마을이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마을인 추성동이며 마을 뒤로 난길을 따라 오르면 두지터로 갈 수 있다.


새로 조성한 목장승입니다. 나무로 만들어 비바람을 견뎌내기 때문에 새로 벽송사 입구에 만들어둔 목장승입니다.

벽송사의 가을 단풍. 지금쯤 벽송사에도 완전 단풍으로 물들었을 것 같습니다.








목장승입니다. 지방기념물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찰에 들어 서는 악귀를 막고 사찰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어로. 사냥을 금지하며 풍수지리상의 비보 역할등 다향한 목적으로 세워졌다한다. 이 목장승은 바깥에서 비바람등을 맞으면서 서 있어 올해 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좌측인 금호장군은 왼쪽의 큰 왕방울 눈만 남아 있어 목장승의 모습을 잃었지만 우측의 호법대신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서 있다. 20여년전에 방문을 해 본 석장승의 모습은 금호장군의 머리부분이 검게 탄 흔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탄 흔적이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빨치산들이 야전병원으로 사용을 할때 한겨울에 워낙 추워불을 피울 땔감으로 사용을 해 불에 태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벽송사의 목장승은 머리와 큰눈, 큰코,일자형의 입과 수염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험악하게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시골 할아버지의 순박한 모습을 가진 익살스러운 목장승은  재치가 넘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오늘도 벽송사를 지키는 수문장 역활을 하고 있다.


벽송사 현판입니다.

벽송사의 대웅전 격인 법당입니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이 모서져 있고 우측 사진은   벽송사 부속 건물입니다.


삼층석탑 옆의 부도탑과 내려오면서 본 벽송사 뒷 모습입니다.


도인송과 미인송입니다. 도인송에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지게 하고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 선녀들이 찾고 있다.

벽송사 삼층탑(보물제474호). 원래 이탑은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졌는데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방화로 소실된 것을 원응스님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그때 사찰이 아래로 옮겨 져 사찰뒤에 현재 미인송과 도인송 탑만 남아 있다. 2중기단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조성연대는 1520년 조선시대에 벽송사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높이는 3.5m

 

미인송과 도인송 그리고 삼층석탑이 함께 어울려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잘 단장된 벽송사의 모습입니다.

벽송사 입구 마을인 추성동으로 갈여면 함양까지가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교통편을 참고 해주세요.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는 오전 7시, 9시에 있다. 2시간 소요. 1만2100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길건너 위치한 군내버스 터미널에서 추성행 군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매시 정시와 30분에 각각 출발한다. 1시간 걸리고 3300원. 백무동에서 함양터미널행 버스는 낮 12시30분, 오후 1시20분, 2시, 2시30분, 3시30분, 4시, 4시30분, 5시30분, 6시, 6시30분, 7시, 7시40분에 있다.

함양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 6시, 6시30분(막차)에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진주로 가서 부산행 버스를 타면 된다. 늦게까지 자주 있다. 승용차를 추성리에 주차했을 경우 백무동에서 택시(055-962-5110, 011-678-5119)를 불러야 한다. 1만2000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화계 방면 좌회전~함양 마천 우회전~마천 함양 자연휴양림 좌회전~백무동 마천 좌회전~지리산 마천 직진~지리산 백무동 칠선계곡 마천~의탄교~칠선계곡 벽송사 서암 우회전~ 벽송사 서암정사 광점동 좌회전~벽송사 서암정사 좌회전~벽송사주차장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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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의 경내로 들어설여면 반드시 이문을 통과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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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산세를 보면 명산에 대찰임을 실감할 것이다.왼쪽으로 천황산의 암봉이 오롯하고 우측으로 재약산에 걸린 암봉이 웅장하며 문수봉과 관음봉이 나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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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으로 향로산과 재약봉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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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에서 본 표충사이며 범종루 우측으로 천황산과 재약산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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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종루 좌측으로 붓끝형상의 문필봉도 확인된다. 표충사에서 본 필봉 끝에는 힘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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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본 필봉이다. 이리보아도 붓끝, 저리보아도 붓끝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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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에 걸린 필봉과 백일홍이 더욱 조화를 이루며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는 백일홍이 지금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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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을 통과하면은 대가람 표충사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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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귀를 쫒는다는 좌청룡 우백호 격인  수문장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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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467호 표충사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7.7m의 삼층석탑이다.


흔히 사명당 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시 비석에서 땀을 흘리며 앞으로의 변고를 예고해주는 표충비각, 보통 그 땀흘리는 표충비각이 현 재약산 표충사에 있는 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표충사 어디를 둘러 보아도 땀흘리는 비석은 없었다.

땀흘리는 비석인 표충비각은 밀양시 무안면에 있다.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무안면 소재지에 자리잡고 있어 땀흘리는 표충비각까지는 동서로 극과극을 달리고 있다.

여기 재약산 표충사는 경남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이다.
654년에 신라진덕여왕때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며 죽림정사란 이름으로 산문을 처음 열었다.
 
천황산과 이웃한 재약산 맞은편으로 향로봉, 마지봉, 법수봉, 우측은 재약봉, 문필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지장봉, 미륵봉,사자봉이며 우측으로는 수미봉, 화엄봉, 미타봉, 중앙에는 사자봉, 전방에는 노적봉과 백마봉이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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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사진은 영정약수로 신라 흥덕왕 4년에 셋째왕자가 불치병인 나환에 걸여 재약산의 산초와  약초 그리고 영정의 샘물로 완치를 하였다하여 영정사로 불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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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전 안의 석가모니불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은 표충사 중심으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동쪽으로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 서쪽으로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신라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지만 전란등으로 소실되어 1929년에 다시 지어졌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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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년 신라 흥덕왕4년에 인도의 고승인 황면선사께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가져와 주석하였다. 그리고 흥덕왕의 셋째아들이 나환에 걸려 재약산 죽림정사에서 영정의 샘물과 재약산의 약초를 먹고 치유를 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영정사란 절이름을 하사하였다한다.

그 후 1596년 선조 29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왜적이 퇴각을 할때 사명당은 영정사에서 승병을 모집하여 사자평에서 승병 훈련을 하였고 전장에 나가 왜적과 싸웠다.

그 후 무안면의 표충사당에 있던 서산, 사명, 기허 삼대선사 영정이 영정사로 옮긴후 표충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재약산표충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를 둘러 싸고 있는 산을 천황산과 재약산으로 불여지고 있다.

그러나 산꾼들에게는 재약산 사자봉, 수미봉으로 더 많이 불여지고 있다. 천황산이 일재시대때 일본인이 일본천황을 의미하며 붙였다 하여,밀양시에서 재약산 사자봉과 수미봉으로 명칭변경을 건의하였지만 그이전에도 천황산으로 불였다고 한다합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천황산 재약산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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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사진은 철확으로 직경 113.6cm철제솥으로 많은 사람들의 식사준비를 할 때 국 또는 밥을 하는 대 사용되었어며 목재함도 너비85cm 길이597cm인 목재함 역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밥을 담는 용도로 사용 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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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과 우측 팔상전은 유형문화재 자료141호로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표현을 한 탱화와 존상을 모시는 법당이라 합니다. 팔상이란 하천, 탁태,강탄,출가, 항마, 성도, 전법륜,입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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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은 통일신라시댜 비석으로 추정되며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이 500여년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 대중100여명이 뜻을 모아 개보수 한다는  기념비석이라하며 우측은 표충사 일주문이다.

재약산 표충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은 표충사 홈페이지로
http://www.pyochung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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