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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여행/무안여행)나라에 국란이 있을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표충비와 우산을 펼친듯 독특한 밀양 무안면 향나무


경남 밀양시 무안면 표충사에는 

우리나라에 국난이 날 때마다 비석에서 땀이 난다고 합니다. 





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 밀양 사명대사 표충비 주소: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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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국원이 찬탈  당헀을 때, 3.1독립만세운동, 

6.25한국동란 등 많은 국란속에 땀을 흘린 비석입니다. 



이 비의 주인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워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사명당 유정(1544~1610)입니다.

 



전란이 끝나자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왜군에 붙잡혀간 우리 백성 3천명과 귀환하여 

그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2년에 남붕선사가 건립했습니다.

 


비석의 높이 4m, 너비 1m, 두께 54.5㎝ 크기로 

비신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하고 비석을 받치는 

받침돌과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비석의 옆면과 뒷면에는 표충사의 내력과 

사명당과 스승 서산대사 휴정(1520~1604), 

기허대사 영규(?~1592)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환란을 미리 알려 준다는 

땀흘리는 비석인 사명당 표충비는 

특이하게도 땀방울이 글자체 안이나 

비석의 받침돌에는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밀양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고라리 399)번길에는 

사명당 휴정대사의 고향이며 현재 생가를 복원하여 

사명대사를 기리고 있습니다.   







표충비각 앞에는 특이한 향나무가 있습니다. 

향나무는 꼭 우산을 펼쳐놓은 듯 한 모습입니다.

 





밀양 무안리 향나무로 불리며 

이향나무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를 세울 때 

1742년 남붕선사께서 함께 심은 나무입니다.

 




높이는 1.5m, 가슴 높이 둘레는 1.1m이며 

가지가 옆으로 퍼지도록 원줄기를 자르고 

곁가지를 다듬은 독특한 형태입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향나무는 20여 그루 된다고 하며 

이런 모양을 한 향나무는 밀양 무안리 향나무 뿐이라 합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19호  


스님의 신분으로 나라가 국란에 처했을 때 

몸을 던져 국가와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 

휴정스님의 고향인 밀양 무안면 소재지에 있습니다. 

인근에 스님의 생가지를 함께 둘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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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최정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의 승병훈련소였던 천년고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여행.


대구와 경상북도 청도를 경계하는 곳에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있습니다. 우록동으로 불리는 우록리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 김충선(1571~1642)장군의 녹동서원이 있습니다. 일본인 장수로서 조선에 귀화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사성 김해김씨 성과 이름 ‘충선’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이괄의 난에 전공을 세운 삼란공신으로 말년을 이곳에 낙향하여 안빈낙도의 삶을 살며 후학을 지도하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 우록리는 사방팔방 산으로 둘린 꼭 호박 속 같은 모습이며 하늘만 열리는 별천지였습니다. 이런 골짜기에 이런 넓은 지대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며. 그래서 사슴이 뛰어노는 평화스러운 마을인가 봅니다. 산세 빼어난 곳에 대찰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곳에도 오래전부터 천년고찰이 있었습니다.

최정산 아래 남지장사는 신라 신문왕 4년인 684년에 왕명을 받고 양한대사가 창건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 조정에서도 일찍이 이곳이 명당자리임을 간파했는가 봅니다. 지세에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남지장사가 위치한 우록리가 명당임을 단박에 느끼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늙어 노후를 이곳에 보내고 싶은 곳 중 한 곳으로 추가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우록리 남지장사는 지장보살을 모신 사찰로 창건당시에는 8암자에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들었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궁예간의 전쟁에서 절은 폐사하고 1263년인 고려 원종4년에 일연선사가 중창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을 개국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고려말~조선 초의 고승 무학대사도 이곳에서 수도했다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 유정이 이곳에서 승병훈련을 진두지휘했던 호국사찰이었습니다. 나라가 왜군의 침입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승려들이 분연히 털고 일어나 승병 훈련을 받았으며 의병 우배순의 휘하 의병과 함께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승병훈련의 본거지였습니다.

 한양도성을 향하던 왜군은 청도로 들어왔으며 대적사를 불 지르고 남성현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장은 이곳 남지장사에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들의 훈련 본거지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경상감영 공격을 잠시 미루고 남지장사를 공격하여 사찰은 불바다가 되었고 남은 전각이 하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며 폐사되었습니다.

 남지장사

 사찰은 황폐해졌으며 1653년인 효종 4년에 인혜가 중건하여 다시금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769년인 영조 45년에 모계, 풍흡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모계가 중수하면서 팔공산 동화사의 북지장사와 대칭된다는 뜻으로 남지장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 남지장사 당우는 1940년대 신원이 중수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대웅전과 설현당, 삼성각, 광명루, 요사와 부속암자인 청련암과 백련암 등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남지장사를 들어서는 입구에 종각이 있는 빛바랜 출입문이 남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겨질 정도로 퇴색되었으며 종각 옆에는 1653년과 1769년 중건과 중수를 했던 모계, 운계, 경운의 송덕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지장사를 가운데 두고 좌청룡 우백호인양 부속암자로 청련암과 백련암이 자리합니다. 좌청룡은 백련암, 우백호에는 청련암이라 불러도 괜찮아 보입니다. 

 

청련암 오솔길

 

 눈여겨볼 건물이 청련암입니다. 청련암도 신라 신문왕 때 남지장사를 창건하면서 양한조사가 함께 세웠는데 사명당 유정이 승병훈련을 지휘하면서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지장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며 1653년과 1714년에 중건과 중수를 하였습니다.

 또 다시 1806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청련암은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2년 뒤인 1808년에 중건한 건물로 건물 가운데에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법당을 두고 앞뒤로 툇마루를 달았는데 이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건물의 왼쪽 앞과 오른쪽 뒤를 돌출시킨 ‘乙’자 형태의 평면배치에 많은 방이 딸린 것을 보면 아마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와 법당을 함께 접목한 '인법당'의 법식을 갖춘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청련암(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제34호)

 

 

 

 

 

 

 

 

 

 

 

 

 

 청련암 건물은 1990년 보수하면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백련암은 비구니 수행처라 그런지 단아한 모습을 한 암자였습니다. 남지장사를 찾는다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에 백련암과 청련암을 함께 찾아보세요. 사명당 유정과 승병들의 함성이 우록동을 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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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정상에 백련꽃이 피었다하여 창건한 연화사가 전신


 부산에서 수다사를 가기위해서는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 동대구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상행선인 서울방향으로 달린다 . 구미를 지나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또 바꾸어 타 선산인터체인지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도 68번 지방도를 타고 상주방면으로 달리는데 주위로는 유순한 모습을 한 5~600m의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무을면사무소를 지나 상송리가 수다사 들머리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입구의 연리지 쌍정자 전설 


천년고찰답게 수다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넓게 조성이 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마을을 지나 수다사로 가다보면 저수지 옆에 큰 느티나무가 양쪽에 서 있다.  쌍정자로 불리는데 나무의 모습이 특이하다. 서로 몸이 붙어 있는 연리목으로 이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면 그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나무에서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사랑의 약속을 하고 간다고 한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진감국사가 연화사로 창건 그 연혁


구미시와 상주시의 경계선상에 기양산으로 불리는 산이 있다. 그 산 정상 부근에 백길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바위가 백련봉으로 불리는데 그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수다사연혁인 '수다사약전'의 기록을 보면 진감선사 혜소스님이 연악산 정상에 흰연꽃 한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830년 문성왕때에 이곳을 사찰을 짓고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흰연꽃은 백길바위인 백련봉을 두고하는 것 같다. 



 

 

그 후 976년에 화재로 불타고 명종15년인 1185년에 각원대사께서 중창을 하여 성암사로 개칭을 하였다. 그러나 1273년에 뜻하지 않게 수해로 인해 사찰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넘겨오다 선조5년인 1572년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가 크게 중수를 하여 감로수를 의미하는 수다사로 고쳐 불렀다. 사명대사에 의해 수다사는 임진왜란때 승병 일만여명이 '의국법회'를 열정도로 중흥기를 맞다가 1684년인 숙종 10년에 수다사는 또다시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대웅전과 시왕전 극락당등 현재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현재 직지사말사이다.



 

 


수다사를 찾아간 이날에도 전국은 한파에 많은 눈이 내렸다. 수다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경내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이를 두고하는 말이랴.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절마당에 난데 없이 개 짓는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시커먼스한 놈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깜짝이야. 너 늑대야 멍멍이야.... 생기기는 험상궂게 생겼지만 달려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스님도 달려 안나오는 곳에 멍멍이가 달려 나오니 반갑기도하다. 사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명부전 경상북도유형뮨화재 139호 


명부전은 앞면3칸 옆면2칸 크기로 지붕의 옆 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의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형식으로 이 양식은 신라시대때 사용되었던 양식이며 원래의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에는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좌상등의 불상이 모서져 있다. 그리고 내부 벽에는 영조42년인 1771년에 그렸다는 '지옥도'는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좌상과 불상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334호 


수다사 대웅전 내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개금불사로 인해 외형상 목조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의 결을 찾을 수 있다. 


특징을 보면 DAUM문화유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발의 두정(頭頂)에 약간의 육계의 흔적이 보이고, 가늘게 뜬 눈, 코, 입술 등의 조각 수법이 정제되어 있으며, 우너만한 상호와 짧은 양 귀, 목에 둘러진 삼도가 조화를 이루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무늬 조각이 세련되었으며, 무릎 부분이 높고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수다사 사찰측에 의하면 원래 삼존상으로 조성 되었다한다.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있는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수다사불상조성연기가 나왔다한다. 원래는 삼존상이었으나 양 협시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봉안하고, 관세음보살상은 대구서봉암에 옮겨 봉안되었다. 


조성연기의 기록을 보면 1650년 효종1년 9월에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 불상의 삼존상 조성했다는데 현재 수다사 대웅전에 모서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그 당시 조성된 주존불로 여겨진다. 복장유물에 나왔던 조성연기의 종이질도 검사를 하니17세기에 만들어졌다한다.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바로 당시 조성된 주존불이었던 것이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석가모니 후불탱화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후불탱화는 1731년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현재의 본존불 뒤에 걸린 탱화다. 후불탱화에 대해 '디지털구미문화대전'에서 잘 설명하여 그것을 인용하자면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주존 탱화로서, 폭 39~40㎝ 정도의 세마포(細麻布)를 7폭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한 바탕의 중앙 연화좌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정수리로부터 상부로 퍼져나가는 광명은 석가모니의 설법이 시방 세계를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좌우에 8명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은 석가모니불 좌대 양옆에 붉은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의 좌우에 있는 사천왕은 비파, 검, 용과 여의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상 위 좌우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옆에 배치되어 있는데, 범천은 3목(目)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외 상단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부처,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포함한 10대 제자, 신장(神將) 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주제는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탱화는 모사본이며 진품은 직지사에 보관하고 있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건륭 37년 명문이 뚜렷하다, 즉 1772년(영조 48)에 조성된 것이며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을 보면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과 유곽, 용뉴 등의 양식 및 수법은 다른 예와의 비교, 연구에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다사 대웅전 내에 위치한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 아래에 있으며, 사찰내에 있는 유일한 동종이다. 4구의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대를 만들고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9곳에 1행씩 모두 9행이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건륭삼십칠년임진 삼월일 화주근징장승통광능 경상우도 선산 서령 연악산 수다사 중종개조 중이백근야 삼강(乾隆三十七年壬辰三月日 化主僅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 善山 西嶺 淵岳山 水多寺 中鍾改造 重二百斤也 三綱)’이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또하나의 볼거리는 이곳의 300년된 배롱나무는 봄이면 화려한 백일홍으로 장관을 이룬다. 수다사를 방문하였을때는 눈이 와 있었는데 기양산(연악산)~수선사 산행을 할때 폭설이 내려 하산 후 수다사는 그야말로 설국을 보여 주었다. 그때 다시 담은 사진을 함께 올렸다. 수다사는 겨울의 설국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여 더욱 화려한 수다사가 된다. 



 

 

 

 

 

 

 

 

 

 

 

 

흰연꽃을 의미하는 백길바위, 백련봉이라 부른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연악산 수다사 교통편


부산에서 구미를 거쳐 선산읍으로 가서 수다사 방향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 가는 버스는 오전 830, 940분에 있다구미터미널에서는 20번 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로 가서 21, 21-1, 121번 버스를 갈아타고'상송수다사입구정류장에 내려 수다사까지 걸어 들어가면 된다구미에서 부산 행 버스는 오후 435, 740, 850(막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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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무안면 홍제사. 땀흘리는 일이 없어면  좋을 것 같은 땀흘리는 표충비와 홍제사

*표충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


 



일명 땀흘리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 송운대사(1544-1610)의 높은 뜻을 기린 비석으로 영조18년인 1742년에 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경산에서 가져온 옥돌로 건립을 하였다. 국가의 길흉사를 날씨에 관계 없이 땀을 흘려 사전에 미리 알려주는 비석으로 사명대사의 나라사랑을 볼 수 있다.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스승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37년에는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담판하여 포로로 잡혀간 백성 3500명을 본국의로 송환을 하였다.


표충비 보호를 위해 너무 칸막이를 한 보호각에 틈이 좁아 비문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한때 이곳에는 서산, 기허, 사명대사 세분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당이 있었으나 재약산 아래 표충사로 옯기고 현재 삼비문안에는 1742년 남봉선사가 조성한 표충비와 향나무,표충비를 보호하는 수호 사찰 홍제사만 남아 있다.

뒤에서 본 표충비각으로 우측에 수령 300년 된 향나무를 볼 수 있다.

 

홍제사는 사명대사의 표충비각과 표충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수호사찰로 창건 연대 또한 그때로 보고있다.



표충각안의 사명대사 영정

표충각안의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내외분의 영정도 걸려 있다.

 

홍제사와 표충비는 밀양면 소재지 편편한 평지에 민가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어 지나가다 들러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제사로 들어서면 먼저 우측에 근래에 조성한 삼층 석탑과 좌측으로는 범종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표충비가 있는 표충비각은 우측으로 따로 중삼문을 두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측으로 돌면 표충각과 향나무, 땀흘리는 비석인 표충비를 볼 수 있습니다.

 

홍제사 입구입니다. 표충비각 앞인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무안 고라리에서 태어나 직지사로 출가를 하신 사명대사의 영정과 땀흘리는 비석을 보시고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땀흘리는 비석에  그분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읽어 봤서면 합니다. 무안은 이곳 말고도 홍제사 좌측 중산 표지판을 따라가면 고라리란 마을이 나옵니다. 현재 고라리는 사명대사 출생지인 생가터와 그 분의 기념관을 조성하여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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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곡성여행)곡성 동악산 도림사 여행.도승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숲을 이루었다는 곡성 동악산 도림사

 

곡성의 진산 동악산은 형제봉과 대장봉 그리고 신선대를 연결한 능선 아래에 흰 암반을 이루는 도림사 계곡인 청류동 계곡이 흐른다. 그래서 인지 예로 부터 이곳 도림사 부근인 청류동 계곡에 시인 묵객들이 들어와 글을 남기고 그것도 부족해 암반에다 흔적을 남겼다. 계곡 옆 이곳 도림사에도 원효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익대사등 많은 선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인숲을 이루었다하여 그 이름 또한 도림사라 하니 사찰의 이름 또한 재미가 있다.

 



도림사는 660년 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구례의 화엄사에서 옮겨와 지었다고 하는 데 그해가 백제가 멸망을 하던 때였다.
도선국사가 헌강왕 2년인 876년에 다시 한번 사세를 키우고 고려때에는 지환대사가 , 그후에도 2차례나 더 중창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때는 신덕사로 불렸다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가 도림사를 후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문인지 도림사는 조선왕실의 원력 사찰이 되었으며 응진당 후불탱화에도 명성왕후가 시주를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도림사에는 1683년에 제작된 보물제1341호인 괘불이 소장되어 있으며 당우로는 보광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지장전 응진전 칠성각과 요사체를 둔 단출한 절집으로 변했다 한다.
도림사는 1984년 지방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었고 청류동계곡은 전남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어 관리 되고 있다.



절 입구의 부도전





일주문













보광전 앞 화단의 연리지

고광전 아래 여채의 모습을 한 나무

범종각

요사체





보광전












도승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로 동악산 등산로 상에 있으며 좌우측에 음각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부산서부버스터미널에서 구례행 버스를 이용한 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부산발 구례행 버스는 오전 7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13600, 3시간 소요.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까지는 광주행 또는 전주행 버스를 타고 가다 곡성에서 내리면 되는데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요금은 2700원이다. 곡성읍에서 도림사 입구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20분 간격으로 탈 수 있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곡성IC에서 내린 후 27번 국도를 타고 곡성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 곡성읍 방향으로 가다가 도림사 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도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부산에서 2시간30분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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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구봉산(구계산)아래에는 사명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구계산 금수사란 사찰이 있다. 금수사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사명대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금수사에서 보면 바로 아래가 바다로 전망과 경치가 매우 뛰어난 사찰이었을 것이다. 6.25가 끝난후 피난민 들이 사찰 아래에 까지 올라와 터전을 잡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꽤 깊숙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금수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3.1일절에도 민족 대표 3.3인을 모시고 그외 애국독립지사 김좌진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등 22인의 위폐를 모시고 추모 법회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류재란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선조는 1604년에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 데 사명대사는 일본에 가기전에 이곳에 와 머물렀다 한다. 구계산 아래의 물맛과 뛰어난 경치를 보고는 감탄을 하며 감로금정수라 격찬을 하였다 한다. 그 후 대사의 제자가 이곳에 머물며 금수암이란 작은 움막을 짓고 현재의 금수사란 명맥으로 발전 되어 왔다. 이곳에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대사는 우리 백성3500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였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을 모두 받아 경내에 머물게 하였고 피난민들의 수용소를 건립하기도 하여 대중들과 함께한 사찰이다..





현재는 원효대사의 법통을 잇는 원효종의 총본산이며  사명대사와의 깊은 인연으로 대중불교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버스는 52번 86번 186번 38번 22번 금수사하차
연락처 051~467~3316


금수사 입구 계단으로 일명 108계단이다. 사진 작가들이 일몰을 찍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금수사 뒷산이 구봉산이라 부르는 데 언제부터 구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구계산금수암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공덕탑과 부도탑

금수사 일주문

일주문 안의 사천왕상

삼성각













법당의 본존불



금수사 입구에서 본 부산항. 멀리 용호동 신선대 부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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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무안면 향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119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

향나무는 향나무과에 속하는 사철 푸르고 키가큰 교목(喬木)이다.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리는 향나무는 줄기에 갈색의 비닐 모양의 껍질을 갖고 있다.

무안리 향나무는 땀흘리는 표충비각 앞에 위치를 하고 있다. 1742년 영조 18년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 한다.

향나무는 높이1.5m, 둘레1.1m 정도의 크기로 수령은 300년 쯤 되었다. 보통 향나무는 하늘로 가지를 쭉쭉 뻗어 올라가는 형태이지만 무안리 향나무는 우산을 펼쳐 놓은 형상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향나무의 원가지를 자르고 가지를 사방, 팔방으로 뻗게하였더니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갖추게 되었다 한다. (안내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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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서산~영취산

(영취산을 향해가는 산악회)
밀양 무안에는 나라에 변고가 있슴을 미리 알려주는 홍제사의 표충비각이 있다. 2008년 6월19일에도 표충비각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돌을 타고 흘러 내렸다 한다. 지난 일요일 12월28일에 홍제사를 거쳐 밀양 하서산~영취산을 산행 하기로 하여 무안읍에 들러게 되었다. 그기서 할머니 한분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12월21일 동짓날에 홍제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표충비에 굵은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다. 그리고 홍제사의 큰 범종에서도 같은 땀이 흘렀다 하시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땀흘리는 표충비. 비각안에 안치되어 있다)
하산을 한후 집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최근에 동지를 전후에 표충비에 땀을 흘렸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메스컴에서는 표충비에 땀이 흐르면 꼭꼭 방영을 하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비재하여 이제는 그것이 뉴스 꺼리가 안되어 그래서 뉴스에도 취급을 안하는지 맞다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우째든간에 입적후에도 나라의 변고를 미리 알려 주실려고 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깊이 새겨야 할 것 같다.

산행은 홍제사 정문앞에서 시작을 한다. 하서산 들머리는 두군데로 홍제사와 또 한곳은 중산리로 들어가는 길의 서촌마을이다. 서촌마을 등산로 입구에는 안내도가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산행 경로를 살펴보면 홍제사~체육공원~하서산정상~4각정자~사명대사 생가지 갈림길~임도~철탑(임도)~심명고개~서가정마을 갈림길~영취산 삼거리봉~영취산정상~영취산 삼거리봉~서가정마을 갈림길~평산신씨묘~서가정 저수지 아래 농로~서거정마을 주차장순 산행시간 전체 6시간30분.

(300년된 향나무로 표충비각 앞에 있다)
홍제사에 잠시 들러 표충비각과 300년이 넘은 향나무의 모습을 구경하고 다시 나오면 좌측으로 “금룡” 간판의 중국집을 볼 수 있다. 중국집 담벼락에 “에림성당 무안공소 100m”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동부복지회관과 예림성당 무안공소를 지나면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남 밀성대군 박언침을 모시는 재실인 만운재 안내판과 고가인 만운재를 좌측으로 끼고 돌면 또 좌측으로 경덕단의 옛 고가들을 볼 수 있다. 밀양박씨의 상조인 밀성대군박언침과 아들 박욱,손자 박란의 단비를 모산 제단으로 비문은 독립운동의 33인중 한분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전서허였다 한다. 등산로는 만운재 담벼락을 끼고 오르면 하서산 들머리로 오를 수 있다.

(밀성대군 박언첨을 모시는 만운재와 경덕당)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가면 포장길은 한굽이 돌고 빗돌과 만나는데 그 전 우측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잘 나 있다. 무안읍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널리 이용을 하는 것 같다. 능선을 따라 일직선상으로 뻗은 산길은 상당히 힘이 든다. 낮은 산봉우리인줄 알고 덤볐다간 큰 코 다치는 봉우리이다. 임도를 다라 우측으로 돌아가 능선에 오르면 체육시설과 그 위에 정자가 서 있다. 천천히 올라야 한다. 상당한 오르막길이다. 입구에서 25분이면 삼거리로 서촌에서 올라오는 갈림길과 만난다.

하선산 방향은 우측 1.4km뒤. 그래도 이제는 능선에 올라 왔다고 안심을 할 수 없다. 근교산의 300m능선을 따라 가 보면 보통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는게 수없이 많아 진을 빼게하는 산길이기 때문이다. 정상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다 정상에 서니 조망권은 없고 스텐 안내판이 서 있다 갈 길인 영취산 9.9km. 올라온길 3.0km, 직진을 하면 바로 산길은 좌측으로 돌아간다. 노란 등산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직진하는 길을 따라가면 엉뚱한 방향을 내려가니 주의하길. 능선은 높이를 최대한 낮추고 간다. 소나무 숲길로 발아래 떨어진 솔가리가 덮혀 있는 이번 산길은 소나무 숲 산길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내려서면 안부로 이부근에는 특이하게 둥근모양의 바위들이 많이 나뒹구러져 있다. 개구리, 새 두마리가 앉아 있는 모양, 장독대 같은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산길 좌우로 진열되어 있다.

25분이면 이제는 소나무는 사라지고 아카시아 등 잡목들이 포진을 하고 있다. 동래정씨묘등 많은 무덤을 지나게 된다. 뒤돌아 보니, 하서산등 작은 봉우리 4개를 넘어 선것 같다. 평산신씨묘와 영취산 8.0km 이정표에서 산길은 봉우리 좌측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부에 멋진 사각정자가 기다린다. 황량한 이곳에 왠 정자, 좌측으로는 중산리1.67km. 우측은 화봉리1.0km, 예전에는 이길이 고갯길로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나 보다. 그러나 우측 길은 찾기 힘들고 영취산은 7.4km 직진 오르막길이다.

소나무가 다시 우점종으로 자리잡고 바위에 흰 페인트로 좌측 철수 화봉고개라 표기를 한 곳을 지나게 된다. 묘지4기가 있는 가족묘를 좌측으로 오르고 수도 없는 작은 봉우리를 넘어 왔는데 아직도 넘어 가야할 봉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는 고라리의 사명대사 생가지와 기념관이 좌측으로 모습을 보여 주고 생가터 갈림길 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60분후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사명대사 생가지 갈림길과 만난다. 여기서 좌측 1.0km, 영취산은 이제 4.6km 남은 것 같다.
 
직진하여 봉우리를 올라서면 가야할 능선을 볼 수 있다. 정면의 철탑에서 좌측 능선을 타고 그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영취산 정상으로 서가정 마을에서는 산봉산으로 불리고 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각점과 김녕김씨묘를 지나면 사명대사 생가지(2.3km)로 내려가는 임도와 만난다. 20분소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여기서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왼쪽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영취산은 임도를 건너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철탑이 있는 임도에서 좌측으로 따라간다. 화왕산에서 관룡산을 거쳐 부곡온천으로 가는 능선으로 너른 공터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심명고개이다. 물론 우측은 헬기장을 거쳐 화왕산 방향, 한때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녔을 고개는 이제 고개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정표 상 영취산(1.7km) 방향으로 올라서면 된다. 마지막 힘까지 따 빼는 구간으로 봉우리에는 영취산 d.9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40분 소요. 좌측 소나무 뒤로 가면 오랜만에 멋진 전망대와 만난다. 하서산에서 올라온 능선을 전부 볼 수 있다. 그 뒤로 열왕산,화악산, 옥교산등 밀양 청도의 산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부터는 산상의 너른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때는 사람이 거주를 한 흔적도 느낄 수 있는 제법 넓은 터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산길은 우측으로 틀어 갈림길과 만난다.
 
좌측 뒤로 내려 가는 능선으로 잘 찾지 않으면 찾기가 힘든 길이다. 정상은 여기서 직진하여 계단길을 올라서면 바로 영취산 갈림길로 왼쪽은 부곡온천 가는 길. 정상은 우측으로 3분 정도 더 가면 삼각점이 설치 되어 있는 봉우리와 만난다. 영취산 정상은 창녕군에 속해 있다. 영취산 정상 25분. 다시 되 내려와 갈림길 까지 10분 소요, 산길은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발아래 낙엽이 산길을 덮고 있어 길 찾기에 유의를 하여야 한다. 산허리를 돌아 지능선에 오르면 산길은 작은 암릉길로 이어지고 봉우리 끝에서 우측으로 직각으로 내려 쏟는 하산길로 조심하며 내려간다.

산림청의 고정 표본점의 노란리본을 지나고 썩은 바위봉에서 다시 한번 더 산길은 급하게 내려간다. 낙엽이 덮힌 산길에다 발아래가 미끄러운 마사길로 주위를 기우려 하산한다. 산길은 그 지점을 벗어나면 큰 바위아래를 좌측으로 돌아 능선에 복귀하게 된다. 평산신씨묘를 지나면 임도 같은 넓은 길을 따르던지 희미한 등로를 따라 하산을 하면 서가정 저수지 밑 농로에 내려선다. 60분소요. 여기서 서가정 주차장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하다.

*맛집:돼지국밥의 원조인 밀양에서도 '원조'로 통하는 곳이 이번 산행지 영취산이 위치한 무안면의 동부식육식당(055-352-0023)이다. 3대째 내려오는 원조 중 원조집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 최수곤 사장의 할아버지가 무안면 시장터에서 운영하던 '양산식당'이 바로 이 동부식육식당이다. 한편 최 사장의 부친은 인근에 '시장옥'이란 상호로 분가해 이후 최 사장의 형이 지금의 무안식육식당으로 이름을 바꿔 영업하고 있다. 최 씨의 또 다른 형은 제일식육식당이란 상호로 돼지국밥집을 열어 영업하고 있다.



*찾아가기: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무안면 소재지 홍제사순


홍제사 앞 산행 출발지

뒤돌아본 무안면 소재지
체육공원











사명당 생가터 갈림길


심명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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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터인 유적지는 4만9146㎡의 부지에 사당인 숙청사,어린 유년기를 보낸곳을 육영당, 그리고 거처를 하던 사랑채를 사명당으로 각각 복원하였다 합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 사명대사의 고향 마을인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댕겨 왔습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됨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연락처:055-359-5647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임씨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납니다.
사명당이 태어난 고라리는 풍수지리설에 의 한 명당으로 주변에 하서산에서 이어진 능선이 영취산 종암산으로 흘러내린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라리에서 그의 조부 때 부터 터를 잡아 살았는데 사명당은 커면서부터 매우 독특하였던 어린이 인 것 같습니다.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떠 자 그는 명종14년인 1559년에 김천의 황학산 직지사로 찾아가 신묵대사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또다시 금강산의 보현사에 찾아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됩니다. 1592년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문을 나와 승려들과 규합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를 합니다. 그는“의승도 대장”이 됩니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1593년 명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번 왜구의 적진으로 찾아가 왜군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하고 휴전협정의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37년인 16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적장과 담판을 하여 전쟁 중에 잡혀간 백성 3000여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쾌거도 올립니다.
8개월간 일본에서 머문뒤 돌아와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그후 그는 해인사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홍제암이란 암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입적한 사명당의 시호에서 따 왔다 합니다. 사명대사의 부도탑도 현재 홍제암에 있다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기념관과 생가지에서는 최근까지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였는데 지난 10월24일 입장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우리 부산의 충렬사와 대조가 됩니다.

*생가터 둘러보기









*기념관 둘러보기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사명대사 유적지(5㎞) 크게 우회전(영산정사)~갈림길에서 왼쪽(영농법인 농정, 갈탄보일러)~영취산 하서산 등산안내도 지나~영산정사 방향~다례 서가정 사명대사 유적지 영산정사 우회전~다례 서가정~사명대사 유적지순입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유적지는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tour.miryang.go.kr/01/04_01.php?pT_idx=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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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칠선계곡엔 명성에 비해 명찰이 별로 없다. 백무동 안에만 해도 영원사를 비롯한 수십개의 암자나 절이 포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칠선계곡의 유명세에 비해 벽송사와 그의 암자 서암정사만 달랑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벽송사는 어떠한 절인가. 조선중종때인 벽송지엄대사에 의해 1520년 창건되었다. 다른 사찰에 비해 창건 연도가 많이 늦었지만 서산 사명 두 대사가 도를 딱 고 깨달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을 보면 벽개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서산휴정 부휴선수, 사명유정,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희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등 큰스님들이 수행 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가 되었다. 




벽송사는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 108분을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는 별칭을 얻어서며 많은 도인을 배출하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을 한다”고 할 정도 였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그리고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푸른학이 알을 품고 있는 청학포란형의 명당자리로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갔다. 벽송산문의 제2대 제자가 부용영관 선사인데 그의제자가 바로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벽송사의 3대 조사인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팔도도청섭이 되어 승군을 모집하였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진력을 기우렸다.

서산대사의 문하에는 사명대사. 청매조사 두분이 있는데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불법을 깨우쳤어며 특히 함양 넘어가는 오도재는 청매조사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1704년(숙종30년) 환성지안대사때 벽송사는 크게 중수 번창을 하였다. 최대의 위기는 한국전쟁때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는 바람에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하여 완전 소실되었다.
1960년대 이후 불태워진 벽송사를 구한원응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다. 신라 양식을 계승한 삼층석탑(보물제474호)과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져 있으며 천년의 세월을 견더온 도인송과 미인송은 벽송사를 대표하고 있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을 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에다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진다한다.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 벽송사를 찾고 있다. 단풍이 물들고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지리산을 더욱 가까서 볼 수 있는 가을의 벽송사를 추천해 본다.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두길이다. 먼저 칠선계곡 입구인 의탄교를 건너면 승용차를 이용한 길과 지리산길을 이용하여 도보로 자연을 느끼며 우리의 옛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칠선계곡입구인 추성동까지 가면 마을입구에서 도로는 갈린다. 좌측으로 광점동과 벽송사 방향. 다시 갈림길로 좌측 벽송사로 오르는 오르막 도로이다. 또 한길은 의탄교 건너 100M 걸어가면 좌측으로 지리산 길임을 알리는 표지막대를 따라가면 된다. 산길을 오르는 오붓한 지리산길이다.


벽송사를 알리는 벽송산문이다 한면에는 벽송산문글귀와 한면에는 사천왕상 같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석상이...

벽송사 서암정사 안내표지판. 삼거리 길로 좌측 서암정사 가는 길, 우측은 벽송사 가는길. 서암정사를 보고 다시 이곳 까지 되돌아 나와야 벽송사로 갈 수 있다. 




삼거리 이정표와 우측 사진은 서암정사를 알리는 두 기둥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천왕상이 서 있습니다,

우측 벽으로 조각 되어진 사천왕상의 모습, 절안으로 들어오는 잡귀와 악귀를 몰아 내는 역활을 한다.

뒤돌아본 모습, 멀리 지리산 능선이 펼쳐지는 전망좋은 곳에 터를 잡았음을 알수 있다.


사천왕상

일주문 격인 대방광문으로 많은 등산객이 들어서고 있다.

대방광문의 모습


대방광문 안에서 본 서암정사.그리고 뒤돌아 본 대방광문

서암정사. 정면에 요사체가 보인다.

암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벌써 가을이 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굴법당 입구의 모습이며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음보살상이 들고 있는 우측 호리병에서 약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가뭄으로 관음상의 약수까지도 말라 버린 지경이다.

굴법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한국불교예술를 보여주는 굴법당입니다. 한분이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


지장보살






서암정사는 원응스님이 6.25를 전후에 전쟁과 빨치산등으로 많은 대중들이 희생이 되어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고 기도하면서 발원하기 위해서 서암정사 굴법당인 극락전을 조성한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서암정사에서 본 전망으로 아래 마을이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마을인 추성동이며 마을 뒤로 난길을 따라 오르면 두지터로 갈 수 있다.


새로 조성한 목장승입니다. 나무로 만들어 비바람을 견뎌내기 때문에 새로 벽송사 입구에 만들어둔 목장승입니다.

벽송사의 가을 단풍. 지금쯤 벽송사에도 완전 단풍으로 물들었을 것 같습니다.








목장승입니다. 지방기념물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찰에 들어 서는 악귀를 막고 사찰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어로. 사냥을 금지하며 풍수지리상의 비보 역할등 다향한 목적으로 세워졌다한다. 이 목장승은 바깥에서 비바람등을 맞으면서 서 있어 올해 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좌측인 금호장군은 왼쪽의 큰 왕방울 눈만 남아 있어 목장승의 모습을 잃었지만 우측의 호법대신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서 있다. 20여년전에 방문을 해 본 석장승의 모습은 금호장군의 머리부분이 검게 탄 흔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탄 흔적이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빨치산들이 야전병원으로 사용을 할때 한겨울에 워낙 추워불을 피울 땔감으로 사용을 해 불에 태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벽송사의 목장승은 머리와 큰눈, 큰코,일자형의 입과 수염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험악하게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시골 할아버지의 순박한 모습을 가진 익살스러운 목장승은  재치가 넘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오늘도 벽송사를 지키는 수문장 역활을 하고 있다.


벽송사 현판입니다.

벽송사의 대웅전 격인 법당입니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이 모서져 있고 우측 사진은   벽송사 부속 건물입니다.


삼층석탑 옆의 부도탑과 내려오면서 본 벽송사 뒷 모습입니다.


도인송과 미인송입니다. 도인송에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지게 하고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 선녀들이 찾고 있다.

벽송사 삼층탑(보물제474호). 원래 이탑은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졌는데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방화로 소실된 것을 원응스님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그때 사찰이 아래로 옮겨 져 사찰뒤에 현재 미인송과 도인송 탑만 남아 있다. 2중기단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조성연대는 1520년 조선시대에 벽송사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높이는 3.5m

 

미인송과 도인송 그리고 삼층석탑이 함께 어울려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잘 단장된 벽송사의 모습입니다.

벽송사 입구 마을인 추성동으로 갈여면 함양까지가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교통편을 참고 해주세요.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는 오전 7시, 9시에 있다. 2시간 소요. 1만2100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길건너 위치한 군내버스 터미널에서 추성행 군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매시 정시와 30분에 각각 출발한다. 1시간 걸리고 3300원. 백무동에서 함양터미널행 버스는 낮 12시30분, 오후 1시20분, 2시, 2시30분, 3시30분, 4시, 4시30분, 5시30분, 6시, 6시30분, 7시, 7시40분에 있다.

함양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 6시, 6시30분(막차)에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진주로 가서 부산행 버스를 타면 된다. 늦게까지 자주 있다. 승용차를 추성리에 주차했을 경우 백무동에서 택시(055-962-5110, 011-678-5119)를 불러야 한다. 1만2000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화계 방면 좌회전~함양 마천 우회전~마천 함양 자연휴양림 좌회전~백무동 마천 좌회전~지리산 마천 직진~지리산 백무동 칠선계곡 마천~의탄교~칠선계곡 벽송사 서암 우회전~ 벽송사 서암정사 광점동 좌회전~벽송사 서암정사 좌회전~벽송사주차장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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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의 경내로 들어설여면 반드시 이문을 통과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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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산세를 보면 명산에 대찰임을 실감할 것이다.왼쪽으로 천황산의 암봉이 오롯하고 우측으로 재약산에 걸린 암봉이 웅장하며 문수봉과 관음봉이 나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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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으로 향로산과 재약봉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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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에서 본 표충사이며 범종루 우측으로 천황산과 재약산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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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종루 좌측으로 붓끝형상의 문필봉도 확인된다. 표충사에서 본 필봉 끝에는 힘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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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본 필봉이다. 이리보아도 붓끝, 저리보아도 붓끝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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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에 걸린 필봉과 백일홍이 더욱 조화를 이루며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는 백일홍이 지금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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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을 통과하면은 대가람 표충사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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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귀를 쫒는다는 좌청룡 우백호 격인  수문장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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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467호 표충사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7.7m의 삼층석탑이다.


흔히 사명당 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시 비석에서 땀을 흘리며 앞으로의 변고를 예고해주는 표충비각, 보통 그 땀흘리는 표충비각이 현 재약산 표충사에 있는 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표충사 어디를 둘러 보아도 땀흘리는 비석은 없었다.

땀흘리는 비석인 표충비각은 밀양시 무안면에 있다.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무안면 소재지에 자리잡고 있어 땀흘리는 표충비각까지는 동서로 극과극을 달리고 있다.

여기 재약산 표충사는 경남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이다.
654년에 신라진덕여왕때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며 죽림정사란 이름으로 산문을 처음 열었다.
 
천황산과 이웃한 재약산 맞은편으로 향로봉, 마지봉, 법수봉, 우측은 재약봉, 문필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지장봉, 미륵봉,사자봉이며 우측으로는 수미봉, 화엄봉, 미타봉, 중앙에는 사자봉, 전방에는 노적봉과 백마봉이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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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사진은 영정약수로 신라 흥덕왕 4년에 셋째왕자가 불치병인 나환에 걸여 재약산의 산초와  약초 그리고 영정의 샘물로 완치를 하였다하여 영정사로 불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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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전 안의 석가모니불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은 표충사 중심으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동쪽으로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 서쪽으로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신라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지만 전란등으로 소실되어 1929년에 다시 지어졌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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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년 신라 흥덕왕4년에 인도의 고승인 황면선사께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가져와 주석하였다. 그리고 흥덕왕의 셋째아들이 나환에 걸려 재약산 죽림정사에서 영정의 샘물과 재약산의 약초를 먹고 치유를 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영정사란 절이름을 하사하였다한다.

그 후 1596년 선조 29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왜적이 퇴각을 할때 사명당은 영정사에서 승병을 모집하여 사자평에서 승병 훈련을 하였고 전장에 나가 왜적과 싸웠다.

그 후 무안면의 표충사당에 있던 서산, 사명, 기허 삼대선사 영정이 영정사로 옮긴후 표충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재약산표충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를 둘러 싸고 있는 산을 천황산과 재약산으로 불여지고 있다.

그러나 산꾼들에게는 재약산 사자봉, 수미봉으로 더 많이 불여지고 있다. 천황산이 일재시대때 일본인이 일본천황을 의미하며 붙였다 하여,밀양시에서 재약산 사자봉과 수미봉으로 명칭변경을 건의하였지만 그이전에도 천황산으로 불였다고 한다합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천황산 재약산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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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사진은 철확으로 직경 113.6cm철제솥으로 많은 사람들의 식사준비를 할 때 국 또는 밥을 하는 대 사용되었어며 목재함도 너비85cm 길이597cm인 목재함 역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밥을 담는 용도로 사용 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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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과 우측 팔상전은 유형문화재 자료141호로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표현을 한 탱화와 존상을 모시는 법당이라 합니다. 팔상이란 하천, 탁태,강탄,출가, 항마, 성도, 전법륜,입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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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은 통일신라시댜 비석으로 추정되며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이 500여년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 대중100여명이 뜻을 모아 개보수 한다는  기념비석이라하며 우측은 표충사 일주문이다.

재약산 표충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은 표충사 홈페이지로
http://www.pyochung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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