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삼광사 연등 축제.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에 선정한 연등의 바다 삼광사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올해에도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삼광사에서 열리는 연등 축제를 보고 왔습니다. 삼광사 연등 축제 행사는 4월 16일부터 시작했고 이제 3일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5월 3일 부처님오신날을 끝으로 연등축제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예년의 기준을 보면 공식적인 연등축제는 끝이 나도 밤을 밝히는 연등은 연장했던 것 같습니다.
부산 삼광사 주소: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54-58
부산 삼광사 전화:051-808-7111
삼광사 대중교통편은 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이 통과하는 서면역에서 영광도서 방향인 9번 출구로 올라오면 영광도서 건너편 분수대 옆에 부산진구 15번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버스 편은 7대가 운행하며 수시로 있어 교통에 불편함이 전혀 없습니다. 자가운전은 이맘때면 삼광사 일대가 혼잡하여 주차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삼광사 연등축제는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에 선정했을 정도로 약 5만 개의 연등은 관광객을 혼을 빼어놓습니다. 전국 어느 사찰을 가도 삼광사 연등과 같은 장관을 보지 못했습니다. 삼광사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연등은 삼광사를 다 채웠고 그리고 삼광사 언덕배기의 산책길까지 하늘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보면 청룡과 황룡의 용 등이 수문장처럼 입구를 지키고 코끼리등, 십이지신등 등 모양과 크기도 다양한 연등이 방문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삼광사 연등은 이제 두 번째 방문입니다. 지지난해 삼광사 연등 사진을 보고 퇴근길에 무작정 찾았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보았던 삼광사 연등의 모습은 일반인으로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주변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찍었습니다. 올해에도 삼광사의 메인 사진은 역시나 지관전과 법화삼매당을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이 블로그의 삼광사 연등 사진으로 도배해 기필코 삼광사 연등 포인트에서 사진을 담기로 작정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란다고 올해에는 부처님이 저의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다행히 이쪽저쪽 계단을 쑤시고 다닌 결과 요행이 삼광사의 연등을 두 눈으로 즐기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한 단을 높인 2층에서 내려다보는 삼광사의 연등은 숫제 불을 밝힌 ‘연등의 바다’를 보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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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황홀했으며 왜 CNN에서 ‘대한민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에 선정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름다운 삼광사 연등으로 눈을 호강하고 즐겼습니다.
이 연등의 밝은 빛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사회의 온갖 어둠을 걷어내는 자비와 지혜가 가득한 빛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아직 부산 삼광사 연등 축제를 구경하지 못했다면 오늘 밤이라도 떠나보세요. 아직도 늦지 않습니다.
맨 끝 용 사진은 삼광사를 여행하고 집에 가던 길에 버스 환승을 기다리다 광복로 입구에 설치된 부처님오신날 용등입니다. 삼광사 자매품입니다.
그러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지증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을 뜻합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으며 지증대사는 통일신라 말에 활동하던 승려입니다. 법명은 도헌(824~882)이며 자는 지선으로 김씨성에 경주사람입니다
아버지 찬괴와 어머니 이(伊)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불가의 가르침를 따르겠다며 영주 부석사로 출가하여 840년 (문성왕 2년)에 그의 나이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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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7년(881)에 왕사에 임명되지만 간곡하게 사양하고 봉암사에 돌아온 다음 해에 결가부좌로 입적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9세에 법랍 43년. 헌강왕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는 지증, 탑명은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 적조탑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승탑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랐습니다. 승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341cm, 지대석 너비가 228cm이며 옥개석이 일부 파손된 것을 빼면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지대석은 넓은 돌을 여러 장 네모반듯하게 바닥 돌로 깔았으며 가운데 탑신부의 탑신에 사리를 봉안하고 위로는 옥개석을 덮어 부도의 상륜부인 머리 장식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이를 받치는 기단부는 하·중·상대석으로 나누는데 하대석은 구름무늬 조각인 안상에 사자를 조각했으며 중대석에는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으로 장식한 사리암,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가릉빈가
그리고 중대받침석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우아하고 섬세하게 조각한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습니다. 가릉빈가는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부처님이 설법할 때 옆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석은 탑신을 괴는 탑신 괴임을 두었고 각 모서리에는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난간을 나타냈습니다. 탑신은 팔각의 몸돌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앞뒤 두 면에는 사리를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문 문양 양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조각하였고, 남은 두 면에는 보살을 돋을새김했습니다. 옥개석은 몸돌과 같은 팔각이며, 아래 면에 조각된 서까래는 두 겹으로 표현하여 겹처마 집을 연상하게 합니다. 처마는 살짝 들렸으며 그 끝에 꽃장식이 달렸습니다.
상륜부에는 노반인 연꽃받침 위로 복발, 보름, 보개, 보주 머리 장식이 차례로 얹혔습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자 시신을 현계산 안락사(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일대)에 모셨다가 다시 1년 후 인 883년 12월에 그의 제자들이 희양산 아래에다 대사의 시신을 장사 지내고 지금의 자리에 적조탑을 세웠다합니다.
봉암사 적조탑은 883년인 헌강왕 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국보인 화순의 쌍봉사 철갑선사 부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신라시대 부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습니다. 정말 또하나의 아름다운 승탑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만났습니다.
포스팅을 보다가 아니 무슨 사찰을 찾아가는데 벼루로 가는 야고 저에 반문하겠지만, 이곳 희양산 봉암사는 여느 사찰처럼 가고 싶다고 해서 불쑥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년 중에 그것도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봉암사 산문을 개방하고 그 외에는 산문 폐쇄로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혹시나 못 보고 빠트리고 오지 않을까 싶어 미리 집에서 봉암사 여행을 위한 여러 문화재 자료를 찾아 준비를 꼼꼼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분명히 자료집을 챙겼는데 막상 봉암사 앞에서 문화재 자료집을 어찌했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정진대사 원오탑비만 보고 승탑인 정진대사 원오탑은 찾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 ‘함허당득동탑’, ‘환적당지경탑’ 등 조선시대 승탑도 빠트리고 오는 바람에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봉암사 여행이었습니다. 첫술에 배불리 먹으려는 게 지나친 나의 욕심이었는지 아니면 내년에 다시 봉암사 여행을 계획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봉암사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봉암사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이번에는 봉암사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는 중창을 하여 오늘날 봉암사의 뿌리를 있게 했던 분이 정진대사입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봉암사 일주문에서 계곡 건너편 묵밭 가운데 비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승탑과 비문은 대부분 같이 세워져 있는데 정진대사 탑비와 비문은 서로 떨어져 있어 안내판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아쉽지만 정진대사 원오탑비만 이번에 보겠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스님으로 성은 왕 씨며 정진대사(878~956) 긍양의 공적을 각자하여 남긴 기록입니다. 정진대사탑비는 고려시대 965년인 광종 16년에 건립되었는데 높이가 273cm, 폭 161cm, 두께는 26cm로 당시 고려시대 초기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신은 청석이며 귀부와 이수는 일반적인 고려 초기의 탑비 방식을 따랐으며 귀부인 거북받침돌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인 머릿돌을 올렸으며 거북 등에 비를 꽂는 비좌가 큰 게 특징입니다. 이수의 끝에는 불꽃무늬에 둘린 연꽃봉우리 문양의 보주 장식이 정진대사탑비를 더욱 웅장하게 만듭니다.
비문의 필체는 2cm 크기 구양순체 해서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짓고 명필이었던 장단열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비는 정진대사 입적 9년 만에 세워졌으며 현재 비문은 대체로 양호하고 1행에 103글자를 새겨 53행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꽤 큰 비신입니다.
정진대사는 공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남혈원의 여해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양부선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수학하였으며 900년인 효공왕 4년에 25년간 당나라에 유학하여 도연을 만났고 924년 신라 경애왕 원년인 7월에 귀국하여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고려 태조, 혜종, 정종도 그의 높은 학식을 존경하여 선문에 들었으며 광종 또한 그를 존경하여 사나선원에 모셨습니다. 광종4년에 봉암사로 들어가 965년 8월에 향년79세로 입적하자 광종은 친히 ‘정진’의 법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렸습니다.
강과 강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곳이 우리나라에는 여럿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경상북도에 있는 삼강나루입니다. 내성천과 낙동강이 서로 만나는 이곳은 우리 민족의 많은 애환을 주렁주렁 달고 최근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럼 필자가 사는 부산과 가까운 곳에는 어떤 곳이 있을까 찾아보았습니다.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삼랑진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나루와 매봉산, 그리고 무척산 등 수려한 경치를 자랑합니다. 또한,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창녕 남지의 창날 나루는 어떠하고요. 건넛마을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편안한 산길을 마다하고 마분산 천길 단애를 뚫고 매일 젖을 먹여 다닌 길이 지금은 동네 사람들의 통행로가 되었고 급기야 개가 길을 뚫었다 하여 ‘개비리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엄마와 자식 간의 모정 못지않게 젖먹이 강아지에 대한 어미 개의 모정 또한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산청의 원지와 마주한 단성면 엄혜산 산행과 겁외산을 연결한 겁외사 둘레길을 걷고 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양천강과 경호강이 서로 만나 남강을 이루며 진양호에서 먼저 숨을 잠깐 돌렸다가 큰 강줄기를 이룬 남강은 굽이굽이 흘러 낙동강에서 몸을 섞어 한몸이 됩니다.
엄혜산 아래인 단성면 묵곡리에는 근대 선종의 선승인 성철대종사의 생가인 겁외사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4월에 출생하여 1936년 합천 해인사의 하동산 스님을 스승으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1955년부터 팔공산 파계사의 산 내 암자인 성전암에서 철조망을 치고 10년 동안 암자 밖을 나오지 않고 동구불출 하며 장좌불와의 수행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성철스님은 1981년 종정 수락 법어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로 또한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993년 11월 어느 늦가을날 스님은 출가했던 해인사에서 “참선 잘하라”는 말씀만 남기고 입적하셨습니다. 겁외사는 2001년 3월에 성철스님의 혈육인 불필 스님의 원력으로 창건과 생가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항상 겁외사를 가야지하며 세월만 보내다가 이번 부처님오신날을 기회로 엄혜산 산행을 겸해서 찾았습니다.
일주문은 따로 없으며 벽해루 누각이 일주문을 대신합니다. 겁외사와 복원한 생가인 ‘율은고거’를 둘러보고 산문인 벽해루로 다시 나와 엄혜산과 겁외사 둘레길을 시작합니다.
엄혜산 산행 경로를 보면 겁외사 주차장~묵곡 생태 숲 맞은편 마을 주차장 통영~대전 고속도로 굴다리 통과~수로 옆 엄혜산 이정표~큰재골 나무다리~원지·엄혜산 이정표 갈림길~원지·도내고개 갈림길~252m봉~해룡사 입구 도로~토현교 갈림길~인도교갈림길~엄혜산정상·법륜암갈림길 이정표 갈림길~잠수교 갈림길~법륜암~원지·엄혜산 이정표 갈림길~수로 옆 이정표 갈림길~겁외사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원점산행이며 산행 거리는 약 9.6km에 산행시간은 3시간 30분~4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겁외사 벽해루 앞에서 왼쪽 겁외사 담장을 끼고 난 도로를 300m쯤 따라갑니다. 남강 수변에 묵곡 생태 숲이 있으며 맞은편 마을 주차장에는 엄혜산 등산로 안내판이 있습니다.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제일 안쪽 연두색 철망 울타리 집 오른쪽 골목길이 엄혜산 가는 길입니다.
200m가량 콘크리트길을 가면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하고 독립가옥입니다. 독립가옥 앞에 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관로가 놓여 있고 그 아래 엄혜산 등산길 이정표가 있습니다. 엄혜산 정상(1.89km)가는 산길은 왼쪽입니다. 곧 큰재골을 건너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조릿대를 통과하면 무덤입니다.
이곳에서 구릉지 같은 능선을 따라갑니다. 크지 않은 소나무가 예쁘며 왼쪽 남강 건너 호랑이가 살았다는 석대산과 지리산의 동쪽 끝 웅석봉이 큰 덩치로 눈길을 확 사로잡습니다. 200m대의 높이도 그렇고 절대로 빠르게 걸을 이유가 없습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의 솔향을 맡고 느끼며 쉬엄쉬엄 걸어갑니다.
큰재골
엄혜산 등산로 입구에서 약 1.2km 가면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나중에 엄혜산을 한 바퀴 돌고나면 이곳에서 하산하는 길입니다. 눈여겨보고 직진하여 엄혜산 정상을 향합니다. 다시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입니다. 왼쪽은 원지(1.39km) 방향이며 산행 막바지 법륜암에서 이쪽으로 올라옵니다. 참고하세요.
엄혜산 정상(0.69km)은 오른쪽 산길입니다. 205m 봉을 돌아 곧 능선길을 탑니다. 500m가량이면 평상이 놓인 삼거리봉이 나오며 정상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왼쪽은 원지(0.81km) 방향 하산길, 이곳에서 직진하는 도내고개(2.03km) 방향이 정상가는 길입니다. 엄혜산 정상은 200m쯤 더 가면 아담한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습니다.
엄혜산 정상까지는 원지에서 많은 주민이 운동 삼아 올라오는 듯 길이 뚜렷하고 잘 나 있지만, 정상부터 도내고개 산길은 조금은 주의해서 걸어야 별 무리 없이 고개로 하산할 수 있습니다. 정상을 출발하자마자 숲에 가려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가기가 쉽습니다. 이곳에서 반드시 왼쪽 길입니다.
여기만 잘 지나면 한동안 능선을 따라 난 뚜렷한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252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조금씩 능선은 높이를 낮춥니다. 곧 직진 길이 뚜렷하지만, 반드시 오른쪽 길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곳만 잘 통과했다면 산길은 임도에 내려서고 왼쪽 방향 하산, 곧 앞이 열리면서 통나무집인 선원을 지나 도로에 내려섭니다. 지금이야 새로운 3번 국도가 시원하게 뚫렸지만 원지를 잇는 옛 3번 국도입니다.
오른쪽 큰 도로가 도내고개. 겁외사 둘레길은 왼쪽 해룡사 안내판을 보고 쌍천강 옆으로 난 옛 도로를 갑니다. 정말 운치 있는 길입니다. 도로 좌우로 대나무가 쭉쭉 뻗어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사각사각 댓잎 소리를 내는 엄청난 대나무 숲에 놀랐습니다.
한참을 걸어야 대나무 숲길을 벗어나고 오른쪽에 양천강이 역류하는 듯 흐릅니다. 그래도 높은 건물인 아파트도 보이고 꽤 규모 있는 신안면소재지의 모습입니다. 30분이면 원지를 연결하던 옛 3번국도 토현교 갈림길입니다. 이곳에서 강을 따라 엄혜산(1.3km)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콘크리트 강변길을 가면 아름다운 모습을 한 인도교가 눈길을 끕니다. 이곳에서 산행을 끝내고 싶다면 인도교를 건너 원지 시외버스정류장으로 바로 가도 됩니다. 겁외사 방향은 계속 직진합니다. 엄혜산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법륜암(0.65km) 이정표를 보고 강변길을 걷습니다. 양천강과 경호강이 서로 합류하여 하나의 큰 줄기인 남강이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바위 절벽에 놓인 덱 길을 걸어면 곧 잠수교 앞 갈림길입니다. 필자가 찾은 이 날은 전날 많은 비가 내려 잠수교가 물에 잠겨 건널 수 없었습니다. 겁외사는 엄혜산 정상(1.13km)방향 이정표를 보고 직지합니다. 300여m 긴터널을 이루는 대숲과 빼어난 경치는 힘든 산행을 상쇄하고 남으며 법륜암에서 계곡을 건너 가파른 능선을 탑니다.
원지에서 묵곡마을로 향하는 옛길로 이곳의 드러난 전망대는 벼랑과 단애, 양천강과 경호강의 합류, 웅장한 대지리산 등 엄혜산은 산 높이에 비해 아주 높은 큰 산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주이씨 무덤을 지나고 20분이면 엄혜산 산행에서 처음 만났던 원지·엄혜산 정상 이정표 갈림길입니다. 이곳에서 오른쪽 겁외사(1.76km) 방향, 다시 만나는 ‘Y’자 갈림길에서 왼쪽 편안한 길로 하산하면 산길은 합천이씨묘를 지나고 일사천리로 겁외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산청 겁외사로 가기위해서는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시외버스를 탑니다. 버스는 오전 5시40분부터 30~5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진주터미널을 지나 원지에서 내립니다. 다시 원지정류장에서 원지~묵곡행 군내버스를 바꿔 타고 겁외사 앞 검내골 정류장에서 내리면 산행 출발지입니다. 원지에서 묵곡행 버스는 오전 8시5분과 11시30분에 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겁외사 앞에서 원지로 나가는 버스는 오후 3시10분에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내비게이션 겁외사 입력
남해를 바라보며 많은 암자가 있습니다. 남해도 금산의 보리암과 여수 금오산 향일암 그리고 고성 무이산 문수암을 남해 3대 기도도량으로 불립니다.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 직전에 찾아간 무이산 문수암은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아 남해 3대 도량의 첫 번째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조망이 좋았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 말사인 문수암은 신라 31대 신문왕8년(688년)때 의상대사가 창건을 하였습니다. 의상대사의 문수암 창건 설화를 보면은 대사께서 남해 금산(보광산)으로 기도를 가던 도중 이곳을 지나다가 얼 풋 선잠을 들게 되는데 그때 노승이 나타나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가보라”는 꿈을 꾸다 깨어납니다.
의상대사는 꿈결이지만 이상타 생각하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과연 의상대사 앞으로 한 걸인이 걸어가는게 아닙니까. 어디로 가시는 길이냐고 물어보니 무이산을 간다하기에 의상은 같이 갈 것을 부탁하며 동행을 하게 됩니다.
걸인을 따라 산속을 걸어가던 대사는 점점이 떠 있는 수많은 섬들과 무이산 정상부 아래를 이루는 천길 단애에 다섯 개의 바위가 마치 오대산의 오대 중 중대라 하며절경에 감탄을 합니다. 걸인과 대사가 큰 바위 앞에 다다르자 걸인이 바위를 가르키며 “저곳이 나의 침소다”하니 또 한 걸인이 나타나 함께 바위 틈새로 사라져 버려 의상대사는 두 걸인이 들어간 바위를 유심히 보며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 바위틈에서 문수보살을 보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꿈속에 노승은 관음보살이고 두 걸인은 문수와 보현 보살임을 알게 된 의상은 이곳에다 문수단을 세우고 문수암을 창건합니다. 지금도 문수암 대웅전 안 오른쪽에 있는 바위 틈 석벽에 천연의 문수보살상을 볼 수 있도록 유리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문수암은 의상대사 이후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고 신라 화랑도가 이곳에서 심신을 연마하였을 정도로 산자수려한 모습으로 이곳을 오르는 모든 관광객은 감탄을 합니다. 문수암은 중창과 중건의 사료는 알 수 없고 워낙 급한 산비탈에 터를 닦아 세운 암자다 보니 사라호 태풍때 건물이 붕괴되어 새로 중건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71년 입적한 청담스님은 1955년 이곳 문수암에서 수도를 하였고 한국불교 정화운동과 통합 조계종 2대 종정, 총무원장등을 지낸 한국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1973년 신도들에 의해 문수암에 청담대종사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습니다.
태화산 마곡사 춘마추곡의 마곡사는 봄이 아름다운 사찰로 유명합니다. 예로부터 호사가의 입으로 내려온 봄은 마곡사요 가을은 갑사라~~~. 그 실체를 알아보고자 찾아간 공주여행입니다. 여행 이틀째. 올해는 예년보다 봄도 일찍 찾아 왔습니다.
첫째 날은 가을갑사로 유명한 계룡산 갑사를 방문하여 꼭 추갑만 좋은 것이 아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갑사도 나름대로 너무 좋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만큼 기대를 걸었던 마곡사 여행, 역시 춘마로 불리는 봄의 마곡사는 우리 일행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일찍 찾아온 봄 날씨에 마곡사는 절정을 넘어 끝무리에 춘마의 기운이 걸려 있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봄의 마곡사를 느껴본 여행이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추갑으로 유명한 가을 갑사를 찾으면서 마곡사도 함께 찾아와 보고 갔습니다.
그 때는 국화 전시가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5월의 축제인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오색 연등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마곡사. 봄의 마곡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마곡사 해탈문
먼저 마곡사의 유래를 보면 신라의 보철 화상이 설법을 할 때 신도들이 인산인해를 이룰정도로 많아 꼭 마밭의 삼(麻)대 같아 마곡사라 하였습니다. 마곡사는 일주문부터 이어지는 벚꽃과 오래된 고목에서 생기를 받아 움트는 봄의 빛깔, 봄기운을 받아 올라오는 야생화가 태화산과 함께하여 더욱 아름다운 곳입니다.
마곡사는 640년인 백제무왕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고려의 명종때에는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 도선국사, 각순대사등 유명선사를 거쳐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며 현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와서도 세조가 이절에 와 영산전이란 사액을 내렸다합니다.
창건당시에는 30여칸의 대사찰 이었습니다만 현재는 보물인 대웅보전과(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오층석탑(보물 제799호)과해탈문, 사천왕문등 많은 문화재가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먼저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을 찾았습니다. 보물 제 801호이며 조선 중기인 효종 2년 각순대사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중수기에는 대장전의 기록이 있으며 외부는 2층으로 보이지만 통층의 구조로 지어진 건물로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3칸, 측면3칸으로 1.5m의 기단으로 인해 더욱 웅장한 모습입니다. 대웅보전은 법화경에서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는 데서 유래를 하며 마곡사 대웅보전은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특이하게도 전각 안에 네 기둥의 싸리나무가 있는데 이 싸리나무 기둥을 돌면 아들을 낳는다하여 많은 분들이 오늘도 이 기둥을 붙들고 돌고 있다합니다.
마곡사 천왕문
마곡사 명부전
그 아래에는 대광보전을 두었습니다. 마곡사의 본전 건물로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며 순조 13년인 조선후기에 와 지어진 건물입니다. 보물제 802호이며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동쪽으로 향하게 안치된 것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내부 바닥에는 참나무 돗자리가 깔려 있으며 창호의 꽃살무늬가 조각되어 있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정면5칸에 측면3칸의 다포계 양식인 단층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합니다. 이곳에는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타고온 어가가 보관되어 있다하며 다음기회에 그 어가를 꼭 보고 와야 겠습니다. 대광보전에는 앉은뱅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할 삿자리를 짜며 자신의 업장 소멸을 빌었다하며 그 뒤 두발로 걸어 나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650년에 중수되었고 보물 제800호입니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안치되어 있으며 세조의 영산전 친필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한 곳으로 알려진 영산전은 정승과 장수를 배출한다는 군왕대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이며 그래서 이곳을 세조가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곡사 범종각
마곡사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에는 특이한 오층석탑이 턱 버티고 있습니다.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으로 불리며 보물 제 7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방불이 2층의 네 면에 세겨져 있으며 특이한 것은 상륜부가 청동제인 풍마등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7.8m이며 라마식 보탑과 비슷하고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나라의 기근을 3일 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가인 선생님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터지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마곡사에서 은거하였습니다. 1898년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마곡사에서 출가하였고 백범 김구 명상길엔 선생이 처음 머리를 깎았던 삭발터가 남아 있습니다. 광복 후 다시 찾은 마곡사 대광보전에 걸린 주련(거래관세간 유여몽중사)를 보고 그때를 회상하며 응진전 앞에 향나무 한그루를 심었습니다. 지금도 김구나무라며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마곡사 대광보전
마곡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에 자리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입니다. 봄의 마곡사는 많은 문화재와 전설이 남아 있고 또한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김구선생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떠올릴 수 있는 뜻 깊은 곳입니다.
☞(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봄의 향기를 따라갔던 계룡산 갑사 가을 갑사못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에 질정 없는 발걸음이 추갑으로 유명하다는 갑사로 옮기게 하였다면 이번에는 춘마로 유명한 마곡사를 찾아가든 길에 들러 보았던 계룡산 갑사. 명산에 명찰은 계절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춘마추갑의 가을갑사라지만 봄의 갑사도 봄바람난 여행객의 발걸음을 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을 받아서인지 연둣빛 색감으로 서서히 옷을 갈아입는 갑사 오름길을 그야말로 자연의 천국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겨울을 지낸 다람쥐의 몸동작에도 봄의 소리를 아는지 흥이 묻어나 있습니다. 갑사를 오르는 오리의 숲길에는 지난 가을의 붉은 단풍은 어디론가가고 대신 노란 황매화가 마치 마이다스의 손 인양 갑사를 황금의 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계룡산은 돋아난 용의 등처럼 울퉁불퉁한 능선이 갑사와 함께 어우러져 마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습니다. 4월의 갑사는 한창 바쁜 모습입니다.
5월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위해 예쁜 오색 연등이 갑사 하늘를 수놓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연등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계룡산 갑사의 창건은 고구려 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분으로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사의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국인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게 됩니다. 그 때 상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계룡산을 비추니 아도는 그 빛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곳에는 천진보탑이 세워져 있어 부처님을 모시기에 위해 아도는 420년에 갑사를 창건합니다. 통일신라에는 의상대사가 갑사에 주석하여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을 있게 됩니다.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등과 함께 계룡산 갑사는 나라의 으뜸사찰인 화엄10대 사찰중 하나가 됩니다. 임진왜란때 영규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 갑사로 전국 최초라 하며 영규대사는의병장 조헌과 금산성 전투에서 왜적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를 하게 됩니다. 갑사의 표충원에는 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이 함께 모서져 있습니다.
물소리 바람소리도 더욱 정겹게 들리는 봄의 계룡산 갑사, 계룡산과 함께 찾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사월초파일은을 위해 삼광사에서 올해도 부산역에 탑등과 청용과 황용을 배치하여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고 있습니다. 부산역의 탑등은 4월15일 오후 6시에 점등식을 하였다네요. 부산역을 올라가는 계단옆에 설치되어 있는 용과 탑으로 인해 밤에는 많은 시민들이 사진 촬영을 한다고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달려 있는 연등의 의미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한방법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지혜로 어지럽고 번뇌와 무지로부터 어두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의 지혜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하여 연등을 단다합니다.
부산의 삼광사에서 오는 5월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 하여 설치한 조형물입니다. 용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시간이 되면 입안에서 불을 뿜고 다리도 움직이고 하는 것이 흡사 살아 있는 용이 부산역 광장에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용은 불교에서 과연 어떤 존재일까?.
흔히 최고의 지존을 두고 하는 말로 예로 부터 용을 지칭하여 왔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