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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진주여행)명석면 광제산 봉수대 여행, 진주 광제산 봉수대


방가방가

오늘 여행지는 진주 명석면에 있는 

광제산(420m) 정상에 세워진 봉수대입니다.

광제산봉수대 광제봉수대라 불립니다.





진주 광제산봉수대 주소:경남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16




2020/06/17 - (경남여행/진주여행)'돌이 울었다'하여 운돌인 명석이 진주의 행정명인 명석면이 된사연. 진주 명석각

2020/06/10 - (경남진주맛집)진주성 전투의 마지막 성찬인 진주육회비빔밥이 꽃밥이라 불려요. 진주 중앙시장 제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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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가 있어서 그런지 전망 하나만은 

동서남북 끝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답사 당일 날씨가 좋지 않아 

멀리까지는 조망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광제산 봉수대에서 지리산 천왕봉도 보이며 

망진산, 달음산, 진양호, 진주시내 등 

주위 조망이 다보인다고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ㅎㅎ

 


광제(廣濟)란 ‘넓게 백성을 구제한다’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광제산 아래 '큰 덕'을 뜻하는 덕곡리를 보면 '광제'의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광제산과 이웃한 집현산 사이에 

큰 고개는 무넘이 고개이며 

아주 오랜 옛날에 천지가 물바다였을 때 

물이 넘나든 고개였다고 합니다.

집현산은 봉우리가 집채만큼 남고 다 잠겼으며 

광제산은 광주리만큼 남았다하여 

광제산이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광제산봉수대는 전국의 5개 직봉가운데 

동래 다대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2간봉이었습니다.

 


남쪽으로 남해 금산에서 봉수를 받아 

창선 대방산~사천각산~ 진주 망진산을 거쳐 

광제산에서 산청 신안 벽계봉수대~합천 금성산 봉수대를 거쳐 

충주 망이산으로 봉수가 연결되었습니다.




봉수대는 오장과 봉수군 32명이 근무할 만큼

큰 규모로 연대가 3개 있었습니다.

오른쪽에 봉수군이 사용했던 샘터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봉수는 기록으로 나타 나는게 고려 중기이며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봉수대 체계가 정비된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 입니다. 

때가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이며 

광제산봉수대 역시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습니다.

 


광제산봉수대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었다가 

200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158호에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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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주여행)서생 이길봉수대. 잦은 왜구의 출몰을 중앙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서생 이길봉수대 보고 왔습니다.


지금이야 긴급을 필요로 할 때 여러 방면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통신수단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전망 좋은 봉우리에 설치된 봉수대를 이용하였습니다.




필자의 집 뒤에도 천마산 봉수대가 있는데 너무 해안가로 나와 있어 구봉산 봉수대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 봉수대 시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봉수대가 긴요한 통신수단이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다 보니 잦은 왜구의 침입에 수시로 한양으로 급보를 날렸을 것 같습니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와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보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봉수대를 통신으로 이용한 것은 1149년 고려 의종 때라 합니다. 

그 후 조선시대 세종대에 들어와 연대의 축조와 봉수로의 체계적인 정비 등을 수립하였고, 1894년까지 봉수대는 통신수단으로 이용하다 전보통신이 보급되면서 봉수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봉수대는 약 120년 전까지 성행했던 통신수단이라 생각하니 요즘은 한사람이 휴대전화기인 핸드폰을 한 개씩 가지고 다니는 세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웬 뜬금없는 봉수대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울산시 울주군 서생 바닷가에 갔다가 ‘서생 이길봉수대’ 안내판을 보고 무조건 차를 꺾어 봉대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승용차로는 조금 힘든 길이었는데 어찌 어찌 하여 겨우 봉수대 옆까지 가게 되어 구경하고 왔습니다.

이길 봉수대는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봉대산(121m) 정상에 세워졌습니다. 이길봉수대으; 남서쪽에 있는 아이봉수대에서 받아 북쪽 하산봉수대로 그 신호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거리는 각각 약 5.8km와 4.2km입니다.

봉수대의 아궁이 터인 연대는 현재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으며 하부 둘레가 30m 정도에다 지름은 10m에 높이는 1.5m로 돌로 쌓은 원통형 연대입니다. 북쪽 면은 부분적으로 허물어져 있으나 남쪽 면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연대 주변으로 3m 내외의 방어용 호 시설도 남아 있습니다. 

이길봉수대는 출몰하는 왜구의 출현을 중앙에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원래 부산시 기장군의 아이봉수대도 이길 봉수대라 불렀는데 같은 이름이라 아이와 이길봉수대로 이름 정리를 하여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5호 (참고:대한민국문화재청-이길봉수대)

#서생이길봉수대 #울산여행 #울주서생여행 #여행 #통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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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아리랑길 추화산 둘레길. 밀양의 옛이름 추화군의 추화산 둘레길을 걸어보니


밀양의 진산은 북으로 감싸고 청도와 경계를 잇는 화악산이요, 안산은 남산으로 불리는 종남산을 말한다. 이 외에도 밀양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여럿 있다.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재약산등 1000m를 넘는 이른바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영남의 지붕하며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만어산, 정각산, 구만산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밀양을 이야기할 때 대표라 하며 언급된다. 그러나 밀양을 대표하는 산은 정녕 어디 일까?.





1000m 넘는 산도 아니요. 영남알프스에 언급되는 산도 아닌 아주 작은 밀양시내의 한 봉우리에 불과한 추화산이지 않나 싶다.
밀양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변진24개국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을 하였다.
변한으로 가락국에 속해 있던 것을 505년 지증왕 6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으로 되었다한다.
그 추화군의 시초가 이곳 추화산에서 나왔다하니 밀양을 대표하는 종산이 아닐까.
200m를 조금 넘는 높이는 사실 등산이란 이름은 무색하고 요즘 열풍을 일으키는 둘레길로 이야기를 하면 간단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추화산을 걷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만 밀양 화장장 뒤에서 둘레길을 시작하였다.
넓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떼면 좌측으로 자두와 대추나무 과수원이 있고 사거리 고개에 올라선다. 이 고개마루에는 큰 모과나무가 당당히 서 있는데 그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여러개의 줄기가 서로 붙어 하나의 줄기로 자라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독립투사 전홍표의 묘가 왼쪽으로 갈라지고 봉수대 가는 길은 직진한다.
잘 자란 소나무와 넓은 산길은 마치 우리를 수목원의 한 길을 걷는 기분 까지 들게하며 슬렁슬렁 한굽이를 오르면 사거리 갈림길과 만난다. 추화산 산허리를 도는 길이 좌우로 열려 있다.
봉수대는 직진을 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둘레길은 곧추선듯 갈지자로 이어진다.
추화산을 대표하는 짧은 순간이지만 구절양장길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둔덕을 올라서면 정면에 돌을 쌓아 올린 추화산 봉수대와 만난다.












옛날에는 통신방법의 하나로 사용을 하였던 것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봉화를 올려 신호를 전했는데 여기서 추화산이란 이름이 나왔다. 추화산 성은 봉수대를 감싸며 정상일대에 쌓아 올린 가야시대의 산성이다.

한때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로 신라와 가야가 접경을 이루고 그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 후백제와 고려가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돌과 흙을 혼합하였고 이 성벽의 둘레는 약1.4km이며 동,서,남쪽 세군대에 성문을 설치하고 북쪽내려가는 계곡에는 우물과 연못 및 부속건물을 두었는데 현재 우물한개가 복원이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는 추화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부속건물로서 두분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박욱은 나말여초에 군도를 토벌하여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삼한벽공장군이 되었다.
또한 손긍훈도 고려태조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사도를 추증하고 광리군으로 봉하였다 하여 이 두분를 사당의 신으로 모섰다 한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밀양시가지는 산성산에서 내려오는 용의 모습과 삼문동을 섬으로 만들며 흘러가는 밀양강의 운치하며 크고 작은 산들이 좍~ 펼쳐진다.
1.4km의 산성 둘레길도 함 걸어보자. 발아래 성벽을 밟으며 걷는 이 길은 어느 둘레길 보다도 편안하며 우거진 숲속에 불어오는 강바람에 더운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둘레길은 영천암으로 내려서는 포장길을 따라 영천암의 물맛을 보고 중국에서 들어온 범종을 둘러보며 재사고개를 거쳐 충혼탑으로 내려서면 간단하지만 여운이 남는 걷기를 할 수 있다.



























재사고개는 교동의 충혼탑에서 범북으로 넘던 옛길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주막껄등 그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의 흔적을 찾았다한다. 이곳 재사고개는 장삿꾼이나 과객등 많은 사람들이 다닌길로 내려오는 이야기 한토막이 있다.

한겨울 자정이 지나 소금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 고개로 올라오더니 지게을 내리고 쉬는게 아닌가. 땀을 딱으며 한숨을 돌린후 다시 청도장으로 가기 위해 지게를 지는데 소금장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지게에 기댄체 선잠에 들고 마는게 아닌가.

그런데 반대편에서 백발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이곳에 올라오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그때 꼬끼요~~~하면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노인은 한숨만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며 탄식을 하는데 소금장수가 그 연유를 물어니 노인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오늘이 자기 재삿날인데 만주에서 이곳까지만 오면 닭이 울어 재삿날에 음복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하며 자신이 이곳 밀양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만주로 가면 조금 나을까 싶어 식솔을 대리고 만주로 이주를 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식솔들은 자신을 만주에다 묻어두고 다시 밀양땅으로 내려간이야기등을 들려 주었다.

자식들이 이곳 고개에서 라도 재사를 지내주면 음복이라도 하고 돌아 갈 수 있는데 하며 한탄을 하는게 아닌가. 소금장수는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여 찾아가니 지난밤에 부친의 재삿날이라하며 만주에서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지난밤의 이야기를 자식에게 들여주니 그 다음부터 음식을 만들어 이곳 고개에서 재사를 지냈다하여 재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이일대가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그 이야기와 맞아 들어가는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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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찾는 근교산 경주 남산(금오산~마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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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 그뒤로 형산강 상류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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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금오산과 고위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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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두가 달아난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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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육존불로 바위면을 끍어 육존불을 모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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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계곡 마애입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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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석

산에 불이 났다. 산비탈 하나가 통째로 화마에 휩싸였다. 수십년된 소나무들은 시커멓게 그을렸다. 한창 물이 올라야 할 이때 밑둥이 잘려 흉물스럽게 썩고 있다. 그루터기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섰다. 가지, 줄기는 물론 아슬아슬하게 달린 솔방울까지 검게 탔지만 그 속에서 돋아난 시퍼런 솔잎. 한때 울창했을 가지마저 다 부러지고 이제 한 뼘이나 될까말까한 작달막한 새 가지에 새 솔잎이 푸르름을 더한다.

경주 남산을 흔히 노천 박물관이라 일컫는다. 신라 천년의 숨결을 아직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남산 골짜기마다 서린 신라의 정신은 화상을 입은 몸으로 싱싱한 솔잎을 피워 낸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남산의 자락 금오산 비탈에 서서 시커먼 소나무가 피워 낸 푸른 잎사귀를 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산행코스는 삼릉~석조여래좌상~상선암~전망대~금오산~476m봉~바람재~작은마석산~금천사~노곡리. 약 6시간 소요.

삼릉 정류장에 내려 길을 건넌다. 고개를 직각으로 젖혀야 가지가 보일 만한 미끈한 소나무 숲이다. 상선암 이정표를 따라 간다. 100m쯤 가면 삼릉. 능을 향해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가 왕에 대한 무한한 경배를 표하는 듯하다.

곧은 소나무, 굽은 소나무, 누운 소나무. 인간사의 고난과 절개와 기쁨을 표현하는 것 같다. 숲을 지나다 보면 너무나 예쁘게 자란 소나무들과 사랑에 빠진다.

15분쯤 가면 상선암과 금오산 갈래길. 상선암으로 오른다. 석조여래좌상과 마애관음보살상이 나온다. 다시 5분이면 선각육존불. 이때부터는 발걸음이 더뎌진다. 온갖 바위가 다 예술품으로 보이고 혹시 그 동안 발견되지 않은 신라 문화 유산을 내가 찾아 내지 않을까 두리번 두리번.

5분쯤 가면 검은 표지석이 있다. 왼쪽으로 올라 보물 제666호 석불좌상. 손상된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 석불은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석불좌상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내려서 계곡을 건넌다. 무안박씨 묘를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여기서 상선암까지는 약 10분. 약수를 한사발 마시고 다시 출발. 5분 뒤 마애석가여래좌상 앞에 이른다. 은은한 미소로 냉골과 상선암을 굽어보고 있다.

올라서면 네 갈래길이다. 오른쪽 금오산으로.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멀리 경부고속도로와 남산 삼릉계곡 입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키 3m쯤 될까한 소나무가 섰다.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곱게 자랐다.

절벽을 타고 걷다 보면 지나온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100m 정도 가면 왼쪽 바위틈에 산신당이 있다. 갈래길에서 직진한다. 땀을 식힐 만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잠시후 금오산 정상(468m).

11시 방향으로 치술령, 10시 방향으로 마석산이다. 토함산에 안긴 경주 시내가 아득히 보인다. 고즈넉한 산에 뻐꾹새만 뻐꾹뻐꾹 운다.

임도를 보고 내려선다. 산불 피해지역에 남산 자생 소나무를 심었다. 1m쯤 될까말까한 엇비슷한 키에 하늘로 팔을 벌린 새로난 순 모양이 사막의 선인장 같다. 100m 가다 임도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왼쪽 능선으로.

능선 하나를 넘어 임도와 다시 만날 때쯤 오른쪽으로 용장골이다. 김시습이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는 용장사지가 있다. 임도에 내려서기 직전 연꽃 무늬가 선명한 삼화령 대연화 좌대. 좌대에 앉으면 용장골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임도에서 왼쪽으로. 15분쯤 가면 ‘전망대 2.5㎞ 칠불암 2㎞’ 이정표. 임도에서 나와 오른쪽 능선을 탄다. 10분에 걸쳐 두번 가파른 오르막이 있다. 정상에선 오른쪽으로 직진. 20분쯤 가다 갈래길이 나오면 왼쪽.

용장마을 3.4㎞를 가리키는 이정표 앞에선 직진한다. 5분쯤 가면 ‘칠불암 200m 금오산 2.9㎞’ 이정표.

여기서 왼쪽으로 몇 걸음 가자. 기막힌 전경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해발 500m도 되지 않는 남산의 산비탈 하나가 온통 바위로 이뤄진 장관을 펼쳤다. 지금까지 순탄하던 것과 달리 여기서부터는 다소 거칠고 갈래길이 많다.

‘새갓골석불좌상 750m’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면 능선을 빠져 왼쪽 아래로 내려선다. 내리막을 걷다 묘지 3기를 지나면 갈래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임도에 들어서 갈래길을 만나면 직진하고 10분쯤 걷다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10분 뒤 또 갈래길. 직진하고 다시 10분 뒤 임도 갈래길에선 왼쪽으로. 바로 등산로와 연결된다. 5분쯤 가다 갈래길에선 직진한다.

다소 지루하고 헷갈리는 등산로가 끝나고 임도를 만난다. 직진. 벌목지대와 무덤을 연속으로 지나다 능선에 오른다. 왼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임도를 벗어나 능선 등산로에 붙는다. 20분쯤 가면 다시 임도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

잠시 내려가다 왼쪽에 무덤이 있고 앞에 산죽 터널이 나오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금천사까지는 약 20분.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15분쯤 가면 노곡2리 백운대마을이 보인다.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면 산행이 끝난다.

/ 김용호기자

/ 문의=다시찾는 근교산 취재팀

051-500-5150, 245-7005

===============================================떠나기 전에

경주 남산은 신라 오악의 하나로, 옛 서라벌의 남쪽 땅에 웅크리듯이 솟아오른 작지만 큰 바위산이다. 500m도 안 되는 동네 뒷산 같은 야트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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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금오산(金鰲山· 471m)과 고위산(高位山·494m)을 가르켜 부르는 이름이다. 뻗어 내린 능선과 수많은 골짜기, 그리고 봉우리마다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신라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신라 불교의 성지이다. 110여개의 절터, 118체의 석불과 마애불, 석탑과 폐탑이 96기에 이른다.

볼거리가 많은 남산 산길은 여러 코스가 있지만 가족산행으로는 삼릉-석조여래좌상-선각육존불-보물 제666호 석불좌상-상선암-마애석가여래좌상-금오산 정상- 옥수골마애대불-삼릉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로 3시간이면 충분하다.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 문화재에 대한 자료를 갖추면 더욱 좋은 가족산행을 할 수 있다.

근교산 지면에 소개되었던 포석정-금오산-고위산-천룡-틈수골 코스는 남산종주의 대표적인 코스로 5시간이면 산행을 할 수가 있다.

/사진.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교통편

부산 노포동종합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를 탄다. 10분 간격 출발. 경주에선 삼릉행 시내버스를 탄다. 500 501 593 506 507번. 500번이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나머지는 하루에 서너 차례 있다. 25분 소요.

산행 끝지점인 노곡2리 옛날순대집 앞에서 경주행 버스를 탄다. 506번이 16시25분과 18시50분에 지나간다. 508번은 18시30분쯤에 있다. 경유지이므로 시간은 정확치 않다. 여유를 둬야 한다. 여기서 20분쯤 걸어 이조마을까지 내려가면 봉계에서 내려오는 경주행 버스가 30분마다 지나간다. 금아교통 054-742-2690.

교통편은 변경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kyh73@kookje.co.kr
입력: 2002.05.2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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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부근에서 본 전경으로 왼쪽사진은 갈길인 고위산과 마석산의 전경이며 오른쪽사진은 건너 토함산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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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에서 삼화령으로 내려가는 능선상에 대연화 좌대가 설치 되어 있다. 불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연꽃 무늬가 뚜렷한 좌대만이라도 앉아 있는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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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화 좌대에서 본 고위산과 과 우측은 삼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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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령에서 봉수대 방향으로 가다보면 칠불암 갈림길 이정표와 만나다, 칠불암 방향 중간에 바위벼랑을 끼고 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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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 갈림길의 이정표와 바위절벽 밑으로 칠불암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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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갈 능선인 마석산이 왼쪽으로, 건너편 산은 박제상의 전설이 서린 치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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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의 공룡능선인 이무기 능선 고위산을 지나 틈수골능선상에서 보았다. 그뒤로 남성미가 넘치는 금오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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