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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 탑비와 승탑.


전남 장흥군의 가지산 보림사에는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승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는 보물 제158호이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승탑’은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탑비와 승탑에 대해 알기 전에 보조선사 체징에 대해 궁금합니다.



 

 

체징은 신라 후기의 선승으로 804년에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에서 출생하엿습니다. 성은 김씨에 시호는 보조선사 그리고 탑의 호는 창성으로 880년 그가 입적한 후 3년 뒤에 헌강왕9년에 왕이 내려주었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 탑비


보조선사는 선문구산중 가지산파의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의 법통을 잇는 3대 조사로 숭상받고 있습니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는 용의 머리를 닮은 거북 받침돌의 머리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목은 꼿꼿이 세웠으며 거북등에는 6각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등의 중앙에 비신을 꽂아 두는 4각형의 받침대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놓았습니다. 비의 몸돌은 대리석으로 보조선사의 행적과 창건 연가설화등 그의 관한 기록을 새겨 놓았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합니다.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에다 새겼습니다. 머릿돌인 귀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하였는데 답신과 귀두와 이수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인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탑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비의 총 높이는 3.46m로 규모 또한 엄청 커 그 당시 석비의 대표작이다.




 

 

 


 

탑비의 앞면 중앙에는 ‘가지산보조선사비영’ 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통일신라인 884년(헌강왕 10년)에 세웠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승탑.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은 부도탑으로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을 의미합니다. 보조선사 창성탑은 4.1m의 높이로 기단인 바닥돌과 몸체 돌 그리고 지붕돌이 모두 8각으로 팔각원당형을 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몸체 돌을 받치는 기단의 아래 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 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볼록한 모습입니다. 8개의 큰 연꽃 조각위에 탑신의 몸돌을 올렸습니다.



 

 

몸돌의 앞과 뒷면에는 문짝 모양을 넣었고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겻습니다. 몸돌위에 올린 지붕돌은 두터워 보이며 밑면에는 서까래를 표현하였습니다.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올렸습니다. 복발(엎어 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과 보륜 바퀴모양 장식),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등을 차례로 올려 놓았지만 완전한 모양은 아니라 합니다.


 

 

 

보조선사가 880년 77세의 일기로 입적한 후 4년 뒤인 884년에  세운 승탑으로  안정감과 함께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장성군 홈페이지 참고)



 

 

 

 

 

 

 

 

 

 

 

 

 

 

 

 

 

 

 

 

 

 

 

 




2014/02/19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통일 신라 보림사 석탑과 석등


2014/02/08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 모델이 된다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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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이 된다는 보림사 사천왕상 장흥 가지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7할이 산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산을 두고 있습니다. 이름난 국립공원의 명산 도 있지만 그도 못하면 동네 뒷동산의 규모까지 천차만별입니다. 그 많은 산에는 어김없이 산만큼 많은 숫자의 절집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난 명산에 이름난 천년 고찰이 함께 한 곳도 있지만 그러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동양의 3보림 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최고, 보림사 사천왕상.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는 가지산이 있습니다. 가지산이란 이름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울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최고 봉우리가 가지산입니다. 그 아래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은 전국에서도 손을 꼽는 명산입니다. 장흥의 가지산은 그 가지산과 한자도 같습니다.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과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은 유명산면에서는 석남사의 가지산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두 산이 품고 있는 보림사와 석남사의 두 절집은 모두 천년고찰로 그와 함께 고승대덕이 이곳을 거쳐 간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산의 보림사가 사찰로서는 더 필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지산 보림사는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영주 부석사에 이어 국내사찰 중에서 네 번째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보 2점, 보물8점, 유형문화재 15점으로 총 25점의 문화재로 보물이 숲을 이룰 정도입니다. 그럼 보림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으로 불리는 장흥 가지산 보림사는 신라 선문구산중 하나인 가지산파의 중심이 되는 사찰입니다. 천년 고찰 장흥 가지산 보림사의 문화재중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에 대해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4호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제법 규모를 갖춘 사찰에는 천왕문을 두고 그 안에 사천왕을 모십니다. 안내판을 보면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천국을 다스리는 왕들로 불법의 수호신이라 합니다. 이곳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여러 개의 나무를 잇대어 사천왕상을 만들었습니다. 표면에 천도 붙이고 회도 칠하여 채색으로 마무리를 했다는군요.

 

 

 

 

동방 지국천왕상은 호화로운 장식이 달린 보관을 쓰고 갑옷과 천의를 입고 분노한 얼굴 표정으로 칼의 손잡이와 칼끝을 받쳐들고 있습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듯 위엄 있는 모습에 오른손은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손에 올렸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절의 사천왕상에서 보았듯이 보탑이라 생각됩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높다란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을 하고 짙은 눈썹과 긴 턱수염이 선비형의 모습과 가깝습니다. 비파를 들고 발아래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악귀가 무거운 발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굳게 다문 입에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쥐고 있는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의 조성 시기를 보면은 천왕문의 목판과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중종 10년(1515년)에 만들어졌고 2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상으로 유일하고 현재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조각이 우수할 분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으로서는 기본이 될 만큼 귀중한 유물입니다.(참고 문화재청 홈피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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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수라도 무대였던 소설속의 미륵당이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보다.

 

양산시 물금읍의 물금역을 나오면 물금취수장을 따라가는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올라가는 3곳의 영남대로 중 한곳으로 부산을 거쳐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는 중도의 영남대로입니다. 이 초입에 용화사의 작은 절집이 있습니다. 또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에는 위험한 길로 알려진 곳이 세 곳입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그리고 토끼벼루로 세 곳 중 두 곳이 이곳 물금과 원동 그리고 삼랑진을 잇는 낙동강 길에 있습니다.

 


 

 

 

낙동강을 예전에는 황산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따온 황산잔도는 험하기로 익히 알려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황산잔도의 초입에 있는 용화사는 절의 사세에 비해 보물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보면 부산의 문인이었던 요한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라도의 배경은 이곳 화제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수라도의 내용 속에는 미륵당이 등장합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가야부인이 창건한 미륵당이 용화사, 수라도 무대였던  미륵당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합니다. 가야 부인은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교 관습에 의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가야부인의 뜻을 알고 절을 짓는데 그곳이 지금의 용화사로 소설속의 미륵당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 미륵당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감로사지에 있던 불상이라 합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옮겨 오다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낙동강변에 버렸다는 전설입니다. 소설속에는 가야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어 미륵당을 짓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용왕대재의 행사를 봄이면 한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하여 용왕대재를 지낸고 있습니다.

 


 


 

 

 

용화사는 사실 미륵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너무 초라한 절집입니다. 그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문화재 안내문을 보면 보물 제491호이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입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양산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광배는 파손된 상태였고 불상은 낙동강의 뻘밭에서 건져 올렸는지 백색의 호분이 범벅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용화사의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완벽한 모습으로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이는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완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좌도 대좌지만 대좌 뒤의 광배가 화려하며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하다합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상과 구름을 세겨 본존상이 구름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도 나타난다합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공양천인상이 세겨진 것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뿐이라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뚝뚝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용화사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 옆이면서도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가보면 용화사 앞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 선로가 놓여져 있어 항상 덜커덕 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낙동강을 볼 수 있는 굴다리가 뚫여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수탈의 목적으로 놓여진 경부선은 처음에는 단선으로 놓였습니다. 단선일때 붉은 벽돌을 돌려 놓은 동굴의 내부에 사각의 돌을 깍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굴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선이 되어 확장을 했던 굴다리의 모습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어 시원하게 황산잔도를 볼 수 있어 여행삼아 가면 너무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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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통일 신라 용장사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용장골은 용장사지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무디어진 만큼 용장사의 영화스러움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진 상태다. 약간의 석축만 남아 이곳이 절터임을 보여 준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조선 세조때 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기단석.


용장사지 오른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용장사의 옛 전성기를 보여 주는 걸작인보물이 3점 반긴다. 하나는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으로 자연석의 암벽에 보일듯 말듯 조각한 솜씨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다. 그와 함께 용장사지에서 더욱 돋보이는 문화재로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아마 국내에서는 가장 크고 높은 석탑이 아닐까 싶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을 기단석으로 사용한 삼층석탑.


이 석탑이 기존의 석탑과 다른점이 있다. 일반 석탑은 탑을 올리기 위해서 탑 밑에 기단석을 세우고 위에 탑을 올리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기단석은 생략하고 자연석 위에다 윗기단만 설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삼층석탑을 올렸다. 남산의 자연석 암반으로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만든 것이다. 옛사람들의 생각에 다시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남산의 상징 용장사곡 삼층석탑


그러니 전세계적으로 이리 높은 석탑은 아마 찾아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면서도 날렵한 이미지를 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많이 훼손이되어 있다는  점이다. 귀퉁이는 날아가고 없는 모습이지만 앞으로도 그자리를 굳건히 지켜 남산의 상징처럼 지켜나가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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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남산의 문화재 보고 용장골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로 알려진 것은 다 아는 사실. 그런 이유에선지 남산 골짜기에는 많은 절터를 숨기고 있다. 그 곳 절터마다  천년전의 숨결을 오롯히 느낄 수 있는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남산을 대표했던 절터는 단연코 용장사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김시습의 금오신화 집필 용장사지

 

용장사지는 조선 세조때 김시습이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신라와 고려를 지나면서도 존재하였던 사찰로 보여지는데 왜 이리 남산의 사찰들이 깡그리 폐찰의 아픔을 겪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보물3기가 남아 있는 용장사지

 

내남면 용장리 용장골을 들어서면 김시습의 호를 딴 설잠교가 있다. 이곳을 지나 금오산 방향으로 산길을 거슬러 오르면 옛 용장사지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산죽으로 뒤 덮혀 절터의 흔적만이 존재를 한다.이곳에서 오른쪽 바위길에 3기의 보물이 기다린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특이한 모습을 한 삼륜대좌불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통일 신라시대 8세기 작품

 

먼저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에 대해서 알아보자. 보물 제 913호다. 남산의 불상이 다 그런 것 처럼 이불상도 자연석의 바위면에 조각을 하였다. 머리에 두광을 돌리고 몸에도 두줄의 신광을 돌린 것을 볼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섬세한 조각기법으로 표현...

 

얼굴은 풍만하게 표현하였고 머리는 나선 같은 곱슬형의 머리카락을 나타내었다. 불상의 모습이 다그러한데 이곳 마애 여래좌상도 눈에서 목까지 내려 오는 긴 귀를 가졌다. 목에는 세개의 선을 가졌는데 삼도라 한다.

 

 

 

 

입고 잇는 옷은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었고 왼쪽 어께 부근에 '태평2년 8월'에 무엇인가 기록한 내용이 있지만 자연적인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곳 마애불을 보면 보일 듯 말듯 부드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온화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찾는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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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산&그너머 <718> 제7코스 : 청도 삼계리 나선폭포 ~ 운문사

개울 건너 솔밭길 지나 아, 벌써! 운문사


 
'명산(名山)에 대찰(大刹)'이라고 했던가. 영남알프스에는 그 넓고 깊은 자락에 어울릴 만큼이나 이름난 천년고찰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특히 양산 통도사, 밀양 표충사, 청도 운문사는 영남알프스를 대표하는 3대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이번 주에 걷게 되는 제7코스는 이 가운데 하나인 청도 운문사(雲門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원들이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양바위 앞 운문천을 건너고 있다. 왼쪽의 암봉은 복호산이다. 운문사 가는 길은 높낮이 없는 쉬운 길 . 그래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갈 수 있다.
'운문사'라는 이름이 전해주는 '울림'은 결코 간단치 않다. 한 신승이 진흥왕 21년(560년) 대작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절은 원광법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일연 스님 등 우리 역사에 커다란 자취을 남긴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또 현재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200여 명의 비구니 학인스님들이 부처님의 법과 진리를 터득하고, 나아가 계도중생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일과 공부를 구분짓지 않고 조용히 용맹정진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운문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비구니 학인스님들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운문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손꼽히는 것도 바로 이 학인스님들의 새벽 예불 광경이다. 수백 명 스님들이 함께 새벽을 여는 낭랑한 염불소리와 절제된 행동은 '더할 것 없는 경건함' '모자랄 것 없는 장엄함'의 극치다. 그 외에도 운문사가 주는 '울림'은 수없이 많다. 그래서 가슴 떨리는 길이다.


 


40m 직벽 나선폭포 거쳐 천년고찰까지 14㎞ 구간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운문사로 가는 제7코스는 평지에 자리 잡은 대가람을 찾아가는 길답게 줄곧 평편하고 쉬운 길이다. 그래도 어쩐지 중간에 실컷 딴청도 부려 보면서 최대한 느리게 걸어보고 싶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급하게 운문사로 가면 정갈하고 평온한 절집의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일까.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많이 느리지만 그만큼 꼼꼼하게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걷는 길은 그 길이 내뿜는 숨소리를 들으며 가는 '호흡의 길'이요 비로소 '길과 하나 되는 길'이다.

출발지는 제6코스 종착지였던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삼계리마을 칠성가든 앞이다. 배너미계곡 중간에 숨어 있는 나선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출발지로 되돌아온 후 운문사로 향하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코스를 살펴보면 칠성가든~천문사 입구~나선폭포~천문사 입구~성황당~수리덤계곡 입구~통점마을 당산나무~신원 삼거리~방지초등 문명분교 3·18독립운동기념관~양(용)바위~신원 삼거리~운문사 버스터미널~솔바람길~운문사 순이다. 총 길이 14㎞에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 휴식 등을 포함하면 5시간 정도 걸린다.

 
  배너미계곡 기슭에 자리 잡은 나선폭포의 위용.
칠성가든 앞에서 북쪽에 보이는 천문사(天門寺) 입석을 보고 천문사로 향한다. 천문사 방향으로 가면 눈앞에 우뚝 솟은 2개의 뾰족한 암봉이 보이는데 바로 쌍두봉이다. 천문사 일주문 못 미쳐서 '등산로' 표시를 따른다. 잠시 후 하천을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진행하면 천문사 후문이다. 중수 공사가 한창인 천문사를 일별한 후 다시 나와서 왼쪽을 보면 담장 옆으로 길이 보인다. 곧바로 쌍두봉 등산로 갈림길이다. 오른쪽 길을 택해 배너미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임도처럼 넓은 계곡길이 호젓하다. 15분쯤 가면 작은 돌무더기가 서너 개 있는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배너미재를 넘어 학소대계곡 학심이골 등으로 갈 수 있지만 나선폭포는 오른쪽 길로 5분가량 올라야 있다.

단일 폭포의 높이로만 따지면 영남알프스의 수많은 폭포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나선폭포는 높이 40m가 넘는 직벽 폭포다. 아직까지 고드름이 폭포에 매달려 있어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2002년 이후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자연 빙벽훈련장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원천 끼고 도는 낮고 평편한 길에서 여유 만끽 

 
  운문사 들머리 마을인 신원리 본동의 흙벽돌 골목길.
다시 천문사 입구 69번 지방도로까지 돌아오는 데는 20분 정도 걸린다. 사실 제7코스는 나선폭포 왕복 구간을 제외하면 운문사 입구까지 대부분의 구간이 아스팔트 도로를 따르게 된다.

69번 지방도를 타고 청도 운문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수리덤계곡 입구를 지나 10분쯤 가면 왼쪽 산자락에 이름 없는 바위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3분 후 왼쪽에 알프스펜션이 보이는데 그 앞 신원천 풍경이 빼어나다. 너럭바위와 이름 없는 소(沼)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물은 걷는 이의 가슴 속까지 청량감을 전해준다. 차를 타고 가면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다. 운문면 사무소와 삼계리마을 주민이 봄철 환경정화운동을 펼치며 상춘객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삼계리마을에서 통점마을로 가다가 만난 신원천의 맑은 무명소.
통점마을 회관 앞까지는 15분 정도 걸리는데, 마을 회관 맞은편 목향공방 뒤편에 수백 년 된 키 큰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보인다. 18세 때 시집 와서 평생을 살았다는 한 70대 할머니는 "우리 동네 최고 어른"이라며 당산나무를 가리킨다. 그는 또 "이 동네는 아무리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그래서 신원천 물로 생활을 했지. 우물이 없는 마을인 셈이지"라며 마을의 특징을 설명해 준다.

당산나무를 가까이서 본 후 다시 주 도로를 따라가면 왼쪽에 웅장한 암봉이 보인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복호산(伏虎山)이다. 차도 우측에 잔디가 곱다. 느릿하게 걷기에는 딱이다. 운문사와 청도읍 방향으로 갈리는 신원삼거리까지는 통점마을에서 25분 걸린다. 운문사는 왼쪽으로 2㎞ 정도 가야 하지만 일단 오른쪽으로 간다. 방지초등 문명분교에 있는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에 들르기 위해서다. 1919년3월18일 청도 최초의 현대식 사립학교인 문명학교(현 문명분교) 교직원과 학생, 졸업생들이 주도해서 펼친 청도 운문면 일대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세운 시설이다. 평소 문은 잠겨 있지만 학교 측에 요청하면 기꺼이 문을 열어준다.

◇ 포근한 신원리 흙담 골목 지나 옛 양반 놀이터도 구경

 
  운문사 매표소를 지나면 이 절의 명물인 '솔바람길' 속으로 빨려든다.
기념관을 둘러본 후, 잠시 학생 수 8명뿐인 시골학교 교정에서 우뚝한 복호산을 바라본다. 신선봉으로 불리기도 했던 복호산의 모습이 참으로 웅장하다. 1908년 문명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이 유서 깊은 학교에 다닌 모든 학생들도 저 웅장한 암봉을 보면서 큰 뜻을 품었으리라.

교문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회관 왼쪽 골목길로 들어선 후 '용바우 민박'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따라가 본다. 흙을 구워 만든 붉은색 흙벽돌과 황토를 적절히 섞어 쌓은 흙돌담길이 전통있는 향촌의 풍모를 자아낸다. 골목 끝 운문천 변에서 건너편 물가 왼쪽 바위가 양반들이 소풍놀이를 즐겼다고 해서 양바위, 또는 용을 닮았다고 해서 용바위로 불리는 바위다. 주변 또 다른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유난히 눈에 띈다. 차를 타고 운문사를 찾을 때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절경이다.

다시 골목길을 돌아 나와 신원삼거리에서 복호산 등산로 입구 무덤 아래 불망비(不忘碑)를 보고 운문사로 향한다. 두 그루의 낙락장송을 지나는 데 멀리 정면에는 억산 깨진바위가 눈에 확 들어온다. 주변에 미나리 재배 하우스가 많다. 운문사 버스터미널에서 좀 더 가면 매표소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매표소를 통과하면 그 유명한 운문사 송림이 반겨준다. 차도 오른쪽으로 '솔바람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솔길이 나 있다. 300~400년 된 소나무 수천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오른쪽 호거대를 타고 넘어온 봄바람이 싱그럽다. 잠시 휴대전화를 꺼 놓아야 할 것 같은 길이다.

◇ 전국적 명성의 운문사 '솔바람길'에도 봄기운 성큼

 
  운문사 극락교와 이목소(離目沼).
솔바람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새 운문사 절 직전 주차장에 닿는다. '호거산 운문사(虎距山 雲門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범종루까지 가는 길 오른쪽은 높지도 낮지도 않아 더욱 정갈한 느낌이 드는 돌담, 왼쪽에는 비구니 학인스님들이 농사짓는 텃밭이다. 길 양옆으로 벚나무가 도열해 있다. 4월 중순이면 소리 없이 핀 벚꽃이 꽃비를 휘뿌릴 것이다. 그런데 이 돌담은 1980년대 초반 비구니학인스님들이 계곡에서 주워 온 돌을 골라서 쌓은 담장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어서도 안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운문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쏟은 땀과 정성이 깃든 담장이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다는 이 절 범종루를 통과하면 500년 넘은 반송(盤松·천연기념물 제180호)이 우선 반겨준다. 매년 봄 가을로 막걸리 25말을 마신다는 유명한 처진소나무다. 삼월삼짇날(음력 3월3일)에 막걸리 드리는 행사를 볼 수 있다. 7개의 국가지정 보물을 간직하고 있기도 한 절인 탓에 순례객들이 간과한 채 잘 못 보고 지나가는 곳이 있다. 비로전 (오래 된 대웅보전) 서쪽 계곡을 가로지르는 극락교와 그 아래 웅덩이인 이목소다. 사실 운문사에서 무언가를 보겠다는 마음은 욕심이다. 그저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본다는 느낌이면 그만이다. 일반인은 건널 수 없는 극락교와 그 아래 이목소는 운문사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그만인 장소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양국사와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에 얽힌 전설을 떠올리면서 남쪽 멀리 우뚝한 운문산을 바라본다. 산과 산 사이로 구름문이 열렸다.


# 떠나기 전에- 이목소 전설

- 서해 용왕 아들과 보양국사의 우정과 의리 전해져

운문사 경내 극락교 아래 이목소(離目沼)가 있다. 옛날에는 사방 100m가 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연못이었다고 알려진 이 야트막한 웅덩이에는 10세기 중반 운문사를 중창한 보양국사와 서해 용왕의 아들 이목(離目)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일연 스님이 이 절에서 집필을 시작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다.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 용왕의 초청으로 용궁을 방문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지면서 용왕이 자신의 아들 이목을 데리고 가 달라는 부탁을 하자 보양국사는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이 연못에서 지내며 스님의 사찰 중창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인근 주민들의 기근이 극에 달하자 스님이 이목에게 부탁해 비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정작 하늘의 천제가 격노한 것이 문제였다. 비를 뿌리는 것은 하늘의 조화인데 감히 바다 용왕의 아들이 이를 거슬렀다는 것이다. 천제는 보양국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이목을 벌하려 했다. 보양 스님은 진짜 이목을 툇마루 밑에 숨게 하고 법당 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켰다. 이에 천제의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로 돌아갔다. 골짜기 연못에 사는 큰 뱀을 일컫는 '이무기'라는 말도 바로 이목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으로 전설같은 이야기다.


# 교통편 & 먹을 곳

- 언양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버스 오전 9시에 출발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령 너머 삼계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칠성가든까지 금방이다.

음식점 겸 찻집도 한 곳 소개한다. 운문사 매표소와 버스정류소 사이에 있는 '어화벗님(054-372-6638)'이다. 사진 작가인 배춘옥 씨가 6년째 운영중인 이 집은 손칼국수와 녹두감자전 등이 맛있다. 다양한 야생화 차와 동동주도 맛볼 수 있다. 2층 모서리 창가 자리는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인기 있는 테이블. 배씨가 직접 키운 봄꽃도 예쁘다. 운문사 스님들도 자주 들른다.


# 운문사 터 잡은 호거산은 어디?

- 청도 사학계 "호거대가 바로 호거산"

 
  운문사 매표소 부근에서 바라본 호거대.
둘레길 제7코스의 핵심은 역시 종착지인 천년고찰 운문사(雲門寺)다. 그런데 범종루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운문산 운문사'가 아니라 '호거산(虎距山) 운문사'라고 돼 있어 호기심 많은 순례객이 머리를 갸웃거리곤 한다. 공식 지형도 그 어디에도 없는 이름인 호거산. 한자의 뜻 대로만 보면 '호랑이가 걸터앉은 모양의 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문제를 놓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이 문제를 풀기위해 고심하고 공부하다 보면 운문사는 물론 영남알프스 일대를 좀 더 깊이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청도 지역 향토사학계의 의견과 고지도 등에 나타난 호거산의 위치 등을 종합해 간략하게나마 고찰해 본다.

우선 호거산 위치에 대한 여러 주장들부터 살펴보자. 절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 현재의 운문산(1195m)을 원래의 호거산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고, 억산과 범봉 일대를 통틀어 일컫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내원암 사리암 청신암 등과 함께 운문사의 4대 부속 암자이면서 운문사 창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모암(母庵)으로 알려진 북대암이 자리잡은 북동쪽의 복호산(伏虎山·678m)과 지룡산(池龍山 또는 地龍山·659m)을 합쳐서 호거산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문사 매표소 오른쪽(서쪽) 산등성이 위에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는 모습이 보이는 '호거대(일명 장군바위 등선바위 등심바위·516m)' 주변 일대 산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각 주장마다 나름대로의 근거도 있다.

하지만 향토사학계의 해석과 김정호 작 대동여지도 등에 나타난 호거산위치 등을 고려할 때 '호거대=호거산' 설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우선 대동여지도를 살펴보자.그런데 먼저 주목할 것이 바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운문산의 위치다. 고산자 선생은 지동에서 운문산의 위치를 현재의 운문산과 판이한 곳에 표시했다. 가지산과 고헌산 사이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큰 산줄기 상의 높은 산으로 표시한 것. 즉 현재 문복산의 위치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산에서 서쪽으로 흐른 지능선은 현재의 옹강산 줄기로 보이고 그 맥은 큰 하천 두 개가 합수되는 지점, 즉 현재의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운문면 신원리 신원교 인근까지 뻗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합수지점 서쪽의 능선상에서 작은 글씨로 호거산을 표시했다. 현재의 운문천 서쪽 자락 능선이다. 또 호거산 표기 지점의 동쪽을 흐르는 운문천 줄기에 '약야계(若耶溪)'가 표시돼 있다. 현재도 운문사 서쪽 하천을 약야계라고 부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국 고산자 김정호는 호거대 또는 그 주변을 호거산으로 봤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청도 향토사학회장 겸 경북 향토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호거산의 위치를 현재의 호거대라고 단언한다. 박 회장은 "운문사 절 서쪽에 호거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호거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 원광법사가 중국 유학을 다녀온 후 운문사에서 주석을 할 때 중국 소주의 호구산(虎丘山) 이름에서 음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가 걸터 앉은 모습의 산'을 뜻하는 '호거산'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원광법사는 중국 유학시절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수도였던 소주(蘇州)의 호구산에 들어가 그곳에서 수도하며 평생을 마칠 생각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청에 못 이겨 펼친 강론에 청중들이 감화되는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가 중생계도를 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높이 37m의 비록 아주 낮은 언덕 같은 산이지만 호구산은 원광법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 운문사 약야계도 소주 호구산과 연관돼 있다. 오왕 합려가 죽은 후 제위에 오른 부차가 아버지의 무덤을 만든 곳이 호구산이고, 부차는 월나라 출신 미녀 서시에게 빠져 결국 패망의 길을 걷는 인물이다. 서시는 호구산에서 오왕 부차와 자주 노닐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약야계'란 범려가 서시를 발견한 절강성 소흥의 아름다운 하천 이름이다. 그 약야계가 운문사 옆 하천의 이름이 됐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실 '호거대=호거산' 설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김정호 선생도 틀릴 수 있기에. 다만 이런 고찰을 통해 영남알프스 둘레길의 이야기가 더욱 풍요로워 질 수는 있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1-563-025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영남알프스 둘레길 7코스 출발점으로 천문사를 입석을 보며 나선 폭포를 보기위해 따라간다.

천문사 방향으로 들어가면 형제 용의 전설이 서려 있는 쌍두봉이 정면이다.

배너미게곡으로 따라간다. 멀리 학심이계곡으로 넘어가는 배너미고개가 보인다.


현재 불사가 진행중인 천문사 경내

나선폭포로 영남알프스에 속해 있는 폭포로 한겨울철에는 부산경남 클라이머에게는 빙벽의 기쁨을 맛보게하는 곳이다.

운문사로 향하는 도로상에서 보이는 기암

신원천에서 만나는 작은 폭포와 소로 물이 맑기로 거울같이 투명하다.

]

통점마을의 당산나무로 이마을 최고의 어른이라 이야기를 하며 여러기의 소나무가 자라 있다.

통점마을의 노거수

운문면 일원의 3.18독립만세운동으로 문명분교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청도군에서는 사학재단으로는 1호로 개교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산골의 학교이다. 8명의 전교생이 현재 수업을 하고 있다.

3'18운동의 자료를 모아 놓은 곳으로 문명분교 안에 있다.

운동장에서 본 복호암으로 신원에서는 복호암의 정기로 문명초교에서 이름난 분들이 많이 나왔다고 자랑을 하신다.

신원리 염창마을의 돌담길로 운치가 있다. 대부분 돌담은 솥을 구운 가마터의 흙으로 쌓아 놓았다.염창마을은 삼국시대때는 화랑들의 식료품창고이며 그 후 운문사가 번창을 하였을때 운문사의 해산물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한다.

양바위로 양반들이 물맑고 경치 좋은 이곳에서 놀았다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근래에 와 용바위로도 부른다 한다. 

양바위를 보고 운문천을 건너는 취재팀 뒤로 갈대가 무성하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다하여 복호암으로 부르고 있다.


호거대, 등선바위 장군봉 덧니바위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 일대가 "호거산"이라 하며 "호거산 운문사"란 사찰 이름이 생겼다 한다.

운문사 매표소로 소나무 숲길이 운치 있는 솔바람길이다.



운문사 를 들어서는 문으로 일주문은 따로 없다.

매년 막걸리를 마신다는 처진 소나무와 만세루

처진소나무로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수령은 500년으로 보고 있다.

이목소로 극락교 아래에 있다 현재는 둘레와 깊이가 형편없는 하천이지만 이목소가 메워지지 이전에는 넓고 검푸른 소 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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