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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백민 황상규등 밀양 독립운동가 거리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안동을 양반의 고장이라면 밀양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선비가 곧 양반이라 할 분도 있겠지만, 그 뜻은 엄연히 다르며 선비는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태가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항상 곁에 둡니다. 그만큼 국가가 어려울 적마다 선비들은 들고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렸습니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주소:
경남 밀양시 내일동 516-23



임진왜란·정유재란 등 많은 병란에도 민초와 선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도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때에도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국난을 극복하는 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밀양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그 밑바탕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밀양에서 일제 강점기 때에 저항 운동을 벌였던 항일 독립투사가 70여 분이나 나왔다는 게 이게 밀양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선비정신인 밀양의 기개가 흐르는 곳이 내이동과 내일동를 가로지르는 해천입니다. 해천은 밀양 읍성의 방어를 위해 성벽 아래에다 파낸 인공하천입니다.





이는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일반 하천이던 것을 읍성 방어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해자라 하여 해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해천 주위로는 밀양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할 정도로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분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천 옆 밀양 관아 앞에서 1919년 3월 13일 밀양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이라 합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3·13 밀양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등 경남 밀양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항쟁을 실감 나게 그린 벽화와 조형물 그리고 웹툰을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조성해 놓았습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13개의 주제로 그려졌으며 3·13 밀양 만세운동과 김원봉, 윤세주의 새로운 조명과 생가터 발굴, 태극기 나무, 밀양 출신 독립군 69기 명패, 희망우체통, 시민 1,000여명의 메시지를 담은 타일 부착, 태극기 변천사, 천만 영화 ‘암살’의 그림벽화와 독립군의 활동상황, 조선의용대의 모습 등 말로만 듣던 독립운동의 수많은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민의 휴식공간인 쉼터를 함께 조성하여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 등장하는 약산 김원봉은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잊힌 분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만 겨우 알려졌던 약산 김원봉. 그분의 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약산의 어린 시절 밀양 상동면 모정리에 있었던 고명학교에 백민 황상규와 윤세주 등이 함께 다녔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김원봉과 친구들은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통에다 처박아 넣고 일왕 생일 경축을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일장기 훼손 사건은 발각되었고 고명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김원봉은 1916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19년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무장단체 의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의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요인과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 단장을 맡은 김원봉은 23차례나 국내·외에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를 단행하여 일본경찰를 경악에 떨게 하였습니다.



김원봉은 당시 김구 선생 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목에 항상 붙어 다녔던 것을 보면 일제의 최고 경계 인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광복 두 달 후 임정 요인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그에게 기다린 것은 친일 경찰 출신에게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난과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자괴감을 빠졌으며 1948년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속회담에 참가했다가 혼자 북에 남았습니다. 그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북한에서 서열 3위로 오르는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습니다. 김일성에게는 한국동란의 공헌을 인정 받아 북한 최고훈장인 노력훈장을 받았던 인물로 한국동란과 대한민국을 교란하는 남파 간첩을 지휘하여 대한민국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북한 김일성을 위해 많은 애를 섰으나  김일성은 권력 강화를 위해 미제스파이란 죄목으로 박헌영을 처형하고 1958년 소련파와 연안파 숙청을 하면서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에 일조한 약산 김원봉도 숙청당했다는 소문입니다.





 한동안 김원봉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석정 윤세주는 약산 김원봉과 꼬치 친구로서 김원봉보다 두 살 아래였습니다. 생가 또한 해천변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다녔던 동화 중학이 폐교하자 서울로 상경하여 오성 중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으로 내려와 고향의 여러 동지와 규합하여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랴오닝 성 유하현으로 망명 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헤어졌던 친구 김원봉과 상봉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13인이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석정 윤세주는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하지만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하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윤세주와 많은 동지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장을 맡고 창군된 조선의용군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0년 겨울에 조선의용대 제3 지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나간 후 1942년 5월에 중국 태항산의 마전 전투에서 총탄으로 중상을 입고 흑룡동 동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독립장을 추서. 밀양 삼남면 마산리의 최수봉 또한 김원봉과 함께 동문수학했으며 그는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를 보고 고무되어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에 밀양경찰서는 반파하였으며 거사 후 붙잡혀 사형 선고 받았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당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제는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거로 위축되었던 항일무장태러가 다시금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합니다.












올해 12월은 국가 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수봉 의사를 선정했으며 정부에서는 1963년에 그의 높은 항일정신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외에도 백민 황상규 등 밀양의 많은 독립투사의 행적을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태극기로 둘러싸인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하는 소리가 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듯 했습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석정 윤세주






조선의용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처 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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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고정리 박연졀~남기리정려각. 초록  융단 깔린 밀양 옛길 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

근교산&그너머 <726> 제12코스 : 밀양 고정리 박연정~남기리 정려각

밀양 옛길에 초록 융단 깔렸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길을 연결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은 길' 취급당하는 옛길을 찾아내고 그 길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도 살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도 활력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은 곧 '죽은 길'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이 그 길을 다시 이용하게 되면 길은 길로서의 생명력을 회복한다. 복잡하고 메마른 길에 지친 현대인들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숲의 향기와 옛사람들의 발자취가 가득한 옛길을 걸어 봄으로써 심신의 휴식을 취하고 또 다른 생명의 기운을 얻게 된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개척단이 울산 경주 청도 지역을 두루 거쳐 어느새 경남 밀양 땅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되도록 걷기 좋고 한적한 옛길을 찾아내서 이 길들을 연결함으로써 도보꾼들에게 걷기 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 답사한 제12코스 역시 밀양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옛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지역 부녀자들의 애틋함과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저항정신이 녹아 있다. 그리고 옛길을 따라가면서 간간이 초현대식 길의 대명사인 고속도로(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만나고 최신형 길의 위 아래를 통과하거나 나란히 걸으면서 옛길과 오늘의 길을 비교하며 걸을 수 있기도 하다.


◇ 매화 고정리 등 산골 주민 밀양장 가던 길 14㎞ 코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경남 밀양시 상동면 가곡리에서 산외면 엄광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호젓함을 만끽하고 있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수많은 인마의 주통로였던 이 고갯길도 머잖아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제12코스는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모정마을의 박연정(博淵亭)에서 출발해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의 창녕 장씨 정려각(旌閭閣)까지 가는 총거리 14㎞ 구간이다.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4시간20분, 휴식 포함 5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줄곧 영남알프스 산줄기인 운문지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낙화산 보담산 비학산 등을 보면서 걷다가 기어코 이 산줄기를 넘게 된다.

바위 절벽인 수어대(數漁臺) 아래 있는 박연정에서 큰길을 버리고 모정마을 쪽으로 길을 잡는다. 곧이어 4분 후 양무공 김태허의 가묘터를 지난다. 모정마을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정면 고답마을 뒤에 낙화산(626m)이 우뚝 솟았고 모정마을 뒤에는 일명 '뒷말리성', '작은 하늘 방우산' 등으로도 불리는 소천봉(632m)도 눈에 들어온다. 모정마을은 노진촌(盧津村)으로도 불리는데, 동창천을 일명 '노진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마을의 옛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한때는 일대에서 중심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아니, 고정리 전체가 경부선 철도와 신작로가 뚫리기 이전까지 밀양 상동면의 면소재지이자 중심 마을이었다.

모정마을 복지회관에서 우측으로 꺾어 100m쯤 가면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 앞 버스정류소를 우측에 두고 계속 직진, 들판길을 걷는다. 300m쯤 가면 들판 한가운데 사거리. 왼쪽 고답마을로 향한다. 작은 연못을 지나 마을 앞 아스팔트 도로에 닿을 무렵 우측 20m 지점에 승용차 한 대 크기의 바위가 있다. 고답마을 칠성바위 중 하나다. 마을에 산재해 있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칠성바위는 그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특히 부녀자가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한다.

아스팔트 도로 작은 사거리에서 용황사 표지판을 보며 좌회전, 100m쯤 가면 오른쪽 밭 안에 약산 김원봉 백민 황상규 등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밴 옛 고명학교 터 있다. 아무 표식이 없으니 개척단이 부착해 놓은 노란색 안내리본을 보고 접근해야 한다.


◇ 옛 고명학교터 칠성바위 당산나무… 고정리 볼거리 가득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고명학교 터에서 사거리로 되돌아간 후 왼쪽 '오르풀' 방향으로 살짝 들어가면 나머지 칠성바위 들도 이곳저곳에 눈에 띈다. 주택 마당에도 있고 논바닥에도 있다.

오르풀의 칠성바위를 본 후 다시 마을 앞 사거리로 복귀, 왼쪽으로 꺾어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노란색 씀바귀꽃이 싱그럽다. 고답버스정류소 앞 갈림길에서 왼쪽 골목으로 오른다. 자두밭을 통과한 후 만나는 쌍무덤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포구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들이 고답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다. 그늘이 짙고 넓어서 더운 날 걷는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썩 훌륭한 쉼터가 되겠다. 무덤으로 되돌아간 후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특이한 구조의 이층 한옥을 지나 아스팔트 도로에 닿는다. 왼쪽으로 꺾어 가면 달성 서씨 재실인 경선재(景先齋)가 있고 곧바로 모정초등학교 교적비를 지난다. 4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의 파도를 넘지 못해 1995년 폐교된 사실을 기록한 이 교적비에 동문들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 가지산서 시작된 운문지맥 끝자락 넘는 숲길 호젓

 
  보담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엄광리를 감싼다.
50m쯤 가면 갈림길. 왼쪽 골안마을 쪽으로 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까지 매화리 신곡리 고정리 도곡리 등 상동면 4개리 사람들이 밀양장을 오가던 옛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15분 후 골안마을 표지석 앞 갈림길에서 우측 오르막으로 간다. 바람에 실려오는 아카시아꽃 향기가 참 달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지고 곧바로 굴다리를 통과한 후 왼쪽 오르막을 잡는다. 옛길과 새길이 평행선을 그리며 함께 달린다. 7분 후 은행나무 앞 갈림길에서 콘크리트길을 버리고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길바닥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10분 후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좀 더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꺾어 20m쯤 가면 움푹 파인 고개다. 일명 고답고개 또는 비암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왼쪽 내리막을 탄다. 무덤 언저리에 은방울 은대난초 금대난초 등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6~7분쯤 내려가면 왼쪽 개울의 물맛이 시원하고 달콤하다. 곧이어 작은 계곡을 건너면 다시 눈 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진다. 고정1터널이라는 도로표지판도 눈에 띈다. 왼쪽에는 보담산 오른쪽에는 고속도로를 끼고 가다가 굴다리를 통과하면 가곡리 비암골의 가곡저수지다. 이곳 주변에는 한국전쟁 때까지 비암마을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없어지고 지금은 마을 흔적만 남아 있다. 저수지는 주변에서 민물낚시터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동네 이름까지 숲촌이라 짓게 만든 밀양 엄광리 숲촌마을 회화나무숲.
저수지 왼쪽 길을 따라가다가 둑 못미쳐 중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살짝 언덕을 넘는데 오른쪽 산 정상부에 가파른 절벽이 보인다. 그 바위가 일명 '낙화암(落花岩)'이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 박씨의 부인 여흥 민씨가 왜군들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투신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건물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10분 후 공동묘지를 통과하고 곧이어 운문지맥 마루금에 닿는다. 일명 공동산고개다. 왼쪽으로 능선만 타고 가면 보두산 낙화산 중산을 거쳐 운문산 가지산까지 갈 수 있다. 일단 살짝 올라섰다가 곧바로 우측 비학산 쪽으로 능선을 탄다. 150m쯤 가면 다시 한번 고개에 닿는다. 부산의 원로 산꾼이자 국제신문 '가고싶은 근교산' 2대 산행대장인 최남준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준·희' 푯말이 보인다.

능선길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을 택한다. 산외면 엄광리로 내려서는 이 길은 그윽한 숲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10분 후 눈앞이 탁 트이며 엄광리 일대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보담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과 동쪽 서쪽이 모두 산줄기에 싸였고 남쪽만 뚫려 있는 지세의 엄광리는 박연구 삼호산업 대표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형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 회화나무 빼곡한 엄광리 숲촌숲 훌륭한 쉼터 역할


엄광리 숲촌 마을은 마을 앞 숲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골목에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 세 분이 개척단을 반갑게 맞아준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집 냉장고의 물을 꺼내 와서 건네주는 할머니의 인정스러움이 고맙기만 하다. 골목길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고속도로 교각 못 미친 곳에 멋진 소나무 7그루가 있는데, 그 앞에서 왼쪽으로 엄남천 잠수교를 건너 숲촌숲으로 간다. 100년을 넘게 산 회나무와 단풍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체육공원 겸 쉼터다. 점점 더워지는 계절에 도보꾼들이 쉬었다가 가기에 참 좋은 장소다.

숲 쉼터에서 조금 전 건넌 잠수교 왼쪽으로 하천을 따른다. 교각 아래를 통과하고 10분 후 만나는 작은 다리 앞 사거리에서도 직진한다. 엄남천을 우측에 끼고 걷는 둑길이다. 왼쪽의 보리밭 너머 저편에 꾀꼬리봉이 보인다. 엄남교를 건너 계속 직진해서 내려가면 남기리 남가동 마을회관을 지나 옛 국도에 닿는다. T자 갈림길인 이곳에서 우측으로 틀어 100여m만 가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열부(烈夫) 창녕 장씨 정려각 앞에 닿는다. 12코스의 종착점이다. 운문지맥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 떠나기 전에

- 임진왜란때 정절 지킨 두 부인 애틋한 뜻 기려

 
  남기리 창녕 장씨 정려각(왼쪽). 가곡리 여흥 민씨 정려각.
둘레길 제12코스 구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정절을 지킨 부인 2명의 흔적을 만난다. 그 중 하나는 코스 종착점인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의 창녕 장씨 정려각(旌閭閣)이다. 밀성 손씨인 손기후의 처인 장씨는 왜란 당시 친정인 창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왜군에게 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창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부도를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문(旌門)'이라는 동네 이름도 바로 이 정려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열부인 여흥 민씨 정려각은 제12코스 구간에서 살짝 비켜 있다. 밀양IC인근 긴늪사거리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차량으로 출발지인 박연정 방향으로 가다보면 상동역 못 미친 곳에 가곡리가 있는데 국도 변에 그를 기리는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밀양 박씨인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민구서의 딸인 민 씨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마을을 침범해 오자 마을 뒷산 동굴로 몸을 피했지만 결국 벼랑을 타고 추격해 온 왜군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 그녀가 뛰어내린 정려각 뒷산을 낙화봉 또는 낙화듬이라하고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한다. 걷기를 시작하기 전이나 후에 여흥 민씨 정려각도 한번쯤 찾아가 볼만하다.


# 교통편

- 부산역 오전 7시45분 출발 무궁화호 타면 딱 좋아

부산역에서 밀양 상동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요금 4100원. 오전 8시40분 상동역에 내리면 신곡리행 새마을버스가 오전 9시05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이 버스를 이용해 고정리 박연정 앞까지 간다. 이 버스는 밀양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50분 출발한다. 상동역 인근에서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요금은 5000원 안팎이다. 둘레길 순례를 마친 후에는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에서 밀양역 또는 밀양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탔다가 곧바로 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을 지난 후 상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직진, 고정 매화 방향으로 10분만 가면 박연정 앞에 도착한다. 답사를 마친 후 차량 회수를 하려면 종점인 정문마을에서 콜택시(055-356-6000, 355-5000)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요금 1만2000원 안팎.


# 비운의 항일 영웅 김원봉 장군을 아십니까

- 의열단 결성 단장 맡았던 항일투사
- 남한 단독정부 반대해 월북 후 숙청

 
  김원봉 장군이 다닌 밀양 고명학교의 터. 지금은 과수원 밭으로 변해 흔적도 없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낙화산이다.
"김원봉 장군이 돌아왔다. 만세 만세. 김원봉 장군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46년의 어느 날. 당시 밀양 읍내 시가지가 밀양은 물론이고 주변 경남 지역에서 운집한 20만여 명의 함성과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밀양이 낳은 불세출의 항일독립운동가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수십 년만의 귀향 환영식 참석을 위해서였다. 당시 밀양국민학교 행사장 주변에는 그가 밟을 수 있도록 광목 카펫이 깔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광복군 부사령관,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역임한 그였으니 '장군'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았다. 망명 항일독립운동가 가운데 백범 김구와 유일하게 쌍벽을 이룬 대표적인 독립투사였던 그였다. 그러나 요즘 중고생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백범 김구는 알아도 약산 김원봉을 아는 학생은 거의 없다.

약산 김원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왜 잊혀야만 했을까.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의열단은 23차례가 넘는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 등의 의거를 감행한 극강의 항일투쟁단체로서 나라 잃을 설움에 빠져있던 국민의 타들어가는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와 같은 조직이었다. 그랬으니 김원봉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성원과 기대감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고명학교터로 답사당시 나를 가이드 해준 할머니)
해방 후 3개월 만에 그는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의 부인이자 부산 동래여고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차정 여사가 1944년 이국땅에서 숨진 지 갓 1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부인 박 여사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밀양에 묻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돌아온 고국에서 오히려 더 큰 시련과 수모를 겪게 된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이 주도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는 남북합작 자주독립국 건설을 주장하면서 우익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가 존경했던 몽양 여운형이 1947년 암살당하는가 하면 그 자신도 친일경찰 출신 경찰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등 수모를 당하고 암살의 위협까지 높아지자 결국 김일성의 초청으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혼자만 북에 남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진 월북한 사람으로 취급됐고 북한 정권 초기 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거쳤지만 1958년께 연안파 숙청 당시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남북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했던 비극적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일컬어 "일제강점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별'이자 '가장 비극적인 영웅'"이라고 묘사한다.

둘레길을 걸으며 방문한 옛 고명학교터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다. 1907년 개교한 이 학교에 다닐 무렵 의협심 강하고 용맹했던 김원봉은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넣는 등의 기개를 떨쳤다고 전해지지만 이제는 학교 터마저 희미하다. 그냥 평범한 과수원 밭의 일부로 쓸쓸히 방치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이 학교를 문제학교로 낙인 찍었고 결국 개교 14년 만인 1919년 폐교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같은 해 이미 중국 망명길에 올랐던 김원봉은 의열단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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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모정마을을 통과하는 둘레길 취재팀 

고답마을의 당산나무로 마을에서는 이곳을 당등이라 부른다.

오르풀마을의 칠성바위로 마을 부녀자들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바위

고정분교터이며 맞은편 삼거리 길안마을 큰 표지석 뒤가 마전평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밀양에서 말을 타고 고답고개를 넘어와 이곳에서 말을 쉬게하였다하여 마전평이라 부르며 나루터에서 청도읍방향이나 산동방향으로 이동을 하였다 한다.

골안마을 작은 표지석 앞으로 둘레길이 열린다.

골안마을


은방울꽃

보담산아래의 볼수바위로 가곡마을에서부르는 지명이며 평능에서는 상여를 닮았다하려 생이바위라 부른다. 

당고개(비암고개)로 지금도 고개마루에는 그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곡마을의 모습. 그 뒤로 밀양의 옥교산이 펼쳐진다.

낙화듬으로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민씨부인이 왼쪽봉우리 바로 아래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른다.

공동산고개로 엄광리 숲촌마을로 이어진다.

고개를 넘어서면 왼편으로 운문지맥의 마루금인 보두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 능선이 부채살 처럼 펼쳐진다.

호젖한 옛길을 걷고 있는 둘레길 취재팀

운문지맥의 끝부분인 비학산 아래 장씨 정려각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둘레길에서 볼 수 있는 돌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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