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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지. 가을 단풍이 아름다웠던 밀양 위양지 여행.


지난 주말 밀양시청도면 가는 길에 위양지를 보러 갔습니다. 아침 일찍 부산에서 출발해서 위양지에 조금은 이른 오전 9시경에 도착했는데 많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왔다갔다하면서 위양지 담기에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잠시 위양지를 둘러보기로 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습니다.





밀양 위양지 주소: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297





겨울의 삭풍은 아니지만 그래도 늦가을의 매서운 추위가 차를 나서는 나의 몸을 휘감았습니다. 손이 시럽다고 느끼면서도 혹시 물안개가 피어오르나 싶어 물가로 달려갔지만 위양지를 휘감은 물안개는 볼 수 없었고 그냥 휑한 상태였습니다.






위양지는 사계절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특히 5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꽃망울을 터트리는 이팝나무는 더욱 유명합니다. 위양지를 휘감은 이팝나무는 팝콘이 터지듯 일제히 만개하면 하늘도 하얗고 세상도 하얗고 위양지 물속도 하얗게 비쳐 그야말로 순백의 하얀색으로 치장합니다.






이때의 위양지는 전국의 사진작가를 불러모아 자신의 가치를 확 끌어 올리면서 위양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냅니다. 그러나 여름의 위양지 또한 이팝나무를 비롯한 노거수들이 일제히 녹색으로 갈아입어 시원한 정자나무로서 휴식을 제공해 줍니다.


 






가을에는 그 푸르렀던 나무가 서서히 붉은색으로 치장하는 모습은 위양지의 최고 볼거리입니다. 위양지의 가을 색이 궁금해서 5월 이팝나무의 위양지를 마다하고 찾았습니다. 시간은 오전 9시경, 오래된 고물 디카를 들고 위양지 둘레길을 나섰습니다.






카메라를 든 동호인이 여러 명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위양지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건졌는지 모두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좋은 게 있나 싶어 나섰지만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붉게 변한 나뭇잎과 주위의 산만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았는지 반영도 저에게는 보이지 않고 해서 그냥 이것저것 담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쿡쿡 눌렀습니다. 그리고 한 바퀴를 다 돌았더니 대략 1km쯤 되었습니다. 위양지는 신라 시대에 세워진 저수지입니다. 그만큼 역사성을 가진 오래된 저수지라 놀라웠습니다.

 




하기야 제방에 심어진 굵은 나무를 보면 족히 수백 년은 된 것으로 보여 위양지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위양지(位良池)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양민을 위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백성을 위해 쌓은 저수지입니다.





이런 걸 보면 조선 시대에는 위양지가 이 근방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정말 유용한 저수지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아래쪽인 퇴로마을 앞에 규모가 엄청나게 큰 가산저수지가 있습니다. 위양지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오다 1634년에 밀주 부사인 이유달이 다시 쌓았다 합니다.

 










현재 위양지 안에는 작은 섬이 여러 개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섬에 안동권씨가 세운 완재정이 분위기 있게 서 있고 위양지 또한 안동권씨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다 합니다. 현재 위양지는 농사용수인 저수지 기능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아름다운 경승지로서 더 큰 기능을 한다 하겠습니다.





이제 내년 이팝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5월이 손꼽아 기다려 집니다. 오늘 가을 단풍의 위양지를 만났다면 이팝나무가 화려한 5월의 위양지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고 사진을 담고 싶습니다. 위양못 이팝나무숲은 ‘2016년 제1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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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아리랑길 추화산 둘레길. 밀양의 옛이름 추화군의 추화산 둘레길을 걸어보니


밀양의 진산은 북으로 감싸고 청도와 경계를 잇는 화악산이요, 안산은 남산으로 불리는 종남산을 말한다. 이 외에도 밀양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여럿 있다.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재약산등 1000m를 넘는 이른바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영남의 지붕하며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만어산, 정각산, 구만산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밀양을 이야기할 때 대표라 하며 언급된다. 그러나 밀양을 대표하는 산은 정녕 어디 일까?.





1000m 넘는 산도 아니요. 영남알프스에 언급되는 산도 아닌 아주 작은 밀양시내의 한 봉우리에 불과한 추화산이지 않나 싶다.
밀양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변진24개국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을 하였다.
변한으로 가락국에 속해 있던 것을 505년 지증왕 6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으로 되었다한다.
그 추화군의 시초가 이곳 추화산에서 나왔다하니 밀양을 대표하는 종산이 아닐까.
200m를 조금 넘는 높이는 사실 등산이란 이름은 무색하고 요즘 열풍을 일으키는 둘레길로 이야기를 하면 간단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추화산을 걷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만 밀양 화장장 뒤에서 둘레길을 시작하였다.
넓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떼면 좌측으로 자두와 대추나무 과수원이 있고 사거리 고개에 올라선다. 이 고개마루에는 큰 모과나무가 당당히 서 있는데 그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여러개의 줄기가 서로 붙어 하나의 줄기로 자라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독립투사 전홍표의 묘가 왼쪽으로 갈라지고 봉수대 가는 길은 직진한다.
잘 자란 소나무와 넓은 산길은 마치 우리를 수목원의 한 길을 걷는 기분 까지 들게하며 슬렁슬렁 한굽이를 오르면 사거리 갈림길과 만난다. 추화산 산허리를 도는 길이 좌우로 열려 있다.
봉수대는 직진을 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둘레길은 곧추선듯 갈지자로 이어진다.
추화산을 대표하는 짧은 순간이지만 구절양장길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둔덕을 올라서면 정면에 돌을 쌓아 올린 추화산 봉수대와 만난다.












옛날에는 통신방법의 하나로 사용을 하였던 것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봉화를 올려 신호를 전했는데 여기서 추화산이란 이름이 나왔다. 추화산 성은 봉수대를 감싸며 정상일대에 쌓아 올린 가야시대의 산성이다.

한때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로 신라와 가야가 접경을 이루고 그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 후백제와 고려가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돌과 흙을 혼합하였고 이 성벽의 둘레는 약1.4km이며 동,서,남쪽 세군대에 성문을 설치하고 북쪽내려가는 계곡에는 우물과 연못 및 부속건물을 두었는데 현재 우물한개가 복원이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는 추화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부속건물로서 두분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박욱은 나말여초에 군도를 토벌하여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삼한벽공장군이 되었다.
또한 손긍훈도 고려태조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사도를 추증하고 광리군으로 봉하였다 하여 이 두분를 사당의 신으로 모섰다 한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밀양시가지는 산성산에서 내려오는 용의 모습과 삼문동을 섬으로 만들며 흘러가는 밀양강의 운치하며 크고 작은 산들이 좍~ 펼쳐진다.
1.4km의 산성 둘레길도 함 걸어보자. 발아래 성벽을 밟으며 걷는 이 길은 어느 둘레길 보다도 편안하며 우거진 숲속에 불어오는 강바람에 더운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둘레길은 영천암으로 내려서는 포장길을 따라 영천암의 물맛을 보고 중국에서 들어온 범종을 둘러보며 재사고개를 거쳐 충혼탑으로 내려서면 간단하지만 여운이 남는 걷기를 할 수 있다.



























재사고개는 교동의 충혼탑에서 범북으로 넘던 옛길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주막껄등 그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의 흔적을 찾았다한다. 이곳 재사고개는 장삿꾼이나 과객등 많은 사람들이 다닌길로 내려오는 이야기 한토막이 있다.

한겨울 자정이 지나 소금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 고개로 올라오더니 지게을 내리고 쉬는게 아닌가. 땀을 딱으며 한숨을 돌린후 다시 청도장으로 가기 위해 지게를 지는데 소금장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지게에 기댄체 선잠에 들고 마는게 아닌가.

그런데 반대편에서 백발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이곳에 올라오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그때 꼬끼요~~~하면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노인은 한숨만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며 탄식을 하는데 소금장수가 그 연유를 물어니 노인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오늘이 자기 재삿날인데 만주에서 이곳까지만 오면 닭이 울어 재삿날에 음복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하며 자신이 이곳 밀양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만주로 가면 조금 나을까 싶어 식솔을 대리고 만주로 이주를 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식솔들은 자신을 만주에다 묻어두고 다시 밀양땅으로 내려간이야기등을 들려 주었다.

자식들이 이곳 고개에서 라도 재사를 지내주면 음복이라도 하고 돌아 갈 수 있는데 하며 한탄을 하는게 아닌가. 소금장수는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여 찾아가니 지난밤에 부친의 재삿날이라하며 만주에서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지난밤의 이야기를 자식에게 들여주니 그 다음부터 음식을 만들어 이곳 고개에서 재사를 지냈다하여 재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이일대가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그 이야기와 맞아 들어가는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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