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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안동 봉정사를 오르는 왼쪽 계곡 건너에 날듯이 날개를 활짝 펼친 누마루 정자가 있습니다. 이는 안동지역의 대학자이자 퇴계학파의 영수인 이황(1501~1570) 선생이 봉정사에 머물면서 '계곡의 물소리가 마치 옥이 구르는 듯 아름답다' 하여 명옥대(鳴玉臺)라 부르고 후학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입니다.





◆안동 명옥대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와 맛집 ◆

2014/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와룡산, 천하를 호령하던 용이 몸을 뉘며 쉬었다는 와룡산에서 안동호의 한반도 지형을 만나다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2014/02/0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맛집 남안동 휴게소. 안동에서는 꼭 먹어야 할 음식 1호 안동 간고등어 맛집 남안동휴게소




처음 명옥대를 낙수대(落水臺)라 불렀습니다. 중국 진나라 육사형의 초은시인 “솟구쳐 오르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비천수명옥(飛泉漱鳴玉)의 시구에서 빌려 1565년 명종 20년에 이황이 직접 명옥대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최근 잦은 비에도 명옥대 옆 계곡 수량은 보잘것없었습니다. 저로서는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옥구슬이 구르는 그런 소리는 느끼지 못하고 그저 쫄쫄 소리 내며 바위를 타고 흘렀습니다.

 


일개 범부(凡夫)라서 그런지 퇴계 선생의 높은 덕을 따를 수야 없을 것 같습니다. 명옥대 옆 바위에는 퇴계 선생이 새겼다는 ‘명옥대’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명옥대에 세워진 정자는 퇴계 선생이 이곳에서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조선 현종 6년(1665)에 지역의 사림들이 퇴계 선생의 강학장소를 기념하는 뜻에서 정자를 세웠습니다. 명옥대 정자는 앞면 2칸에 옆면 2칸의 사각 정자로 자연석 초석에다 둥근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깔았습니다.

 

 

 

 

 

 


사방이 모두 개방된 상태이며 마루 끝을 빙 돌려 계자난간을 달아 녹음방초(綠陰芳草)와 옥구슬 같이 구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즐기게끔 했습니다. 정자 내 기둥에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건립 초기에는 2칸은 방을 넣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1920년경에 명옥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는데 그때 방을 헐어내고 현재 누마루형식으로 변형한 것은 아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1986년 12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되었으며 원형이 훼손되어 건축적 가치가 떨어져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안동 명옥대 주소:경북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산7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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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청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에는 일원정 누각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뒤로는 거창의 진산인 감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 배산임수의 자리에 자리한 일원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선산 김씨 강호 김숙자()1389~1456)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들이 건립을 하였던 정자입니다.



이곳은 김숙자와 함께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등 칠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이분들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승을 받들며 이어왔던 분들입니다.

 




그럼 김숙자선생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 선생은 모두 다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부친으로 스승이었던 야은 길재로 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많은 제자와 그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실천 중시 학풍을 물려주게 되고 김종직은 평생을 두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랐다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선산 출신인 김숙자를 배향하는 일원정이 왜 있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밀양에서 출생을 하였고 그의 무덤도 현재 밀양에 남아 있는데 그의 부친 김숙자에 관한 유물이 이곳 거창에 남아 있다하니 말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는 것은 김숙자의 처갓집이 밀양이며 김숙자 또한 관직을 사직한 후 밀양으로 내려와 그해 사망하는데 조선시대 처가에 들어가 사는 풍속을 보면 김종직선생의 밀양이 고향인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현재 거창 남상에는 김숙자 유물이 두 점 있습니다. 1706년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남상 대산리의 김숙자 사당이며 1905년 선산김씨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남상 전척리 일원정입니다.



본채와 객사로 이루어진 두 채의 건물 일원정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내려와 지어졌는지 관리하는 후손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시원한 답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문화재 청을 인용하여 보면 본채인 일원정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지붕이며 2칸은 넓은 마루를 깔았고 온돌을 깔아 넣은 2칸의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오른쪽의 객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방과 마루를 넣었습니다. 일원정은 서원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이며 일원정을 마주하고 김숙자 신도비가 황강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일정에 쫒기다 보니 사진으로 담아오지를 못했네요.



거창의 일원정은 경상남도 남상면 전척리 530번지에 선산김씨 문중의 소유로 1983년 8월에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교통편은 내비에 일원정을 입력하면 위치가 바로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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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전주여행)전주 풍남문. 전주를 대표하는 풍남문 구경하고 왔습니다.


서울을 상장하는 것은 국보1호인 숭례문입니다. 그럼 전북 전주를 상징하며 대표하는 것은 풍남문이라 전주시민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전주시민에게는 풍남문이 전주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중 남문을 말하며 고려 공양왕때인 1389년 전라 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3층 누각으로 전주부성과 함께 세워졋습니다. 풍남문은 조선 후기의 문루 형태를 잘 보여 주는데 그 이유는 원래 고려때 건립된 것으로 조선 영조때인 1767년 정유재란의 대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768년 전라관찰사 홍낙인에 의해 2층의 누각으로 중건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후 풍남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5년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이 침탈 당하면서 조선통감부는 전주성의 4대문중 풍남문을 남겨두고 3문이 철거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특히 풍남문은 고창에서 발생한 농민 항쟁인 동학혁명군이 전주로 진격해 오면서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장소이며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교인들이 풍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그의 목을 효수하였던 곳입니다.

 


1908년 전동성당을 건립하면서 풍남문의 헐어버린 성벽의 돌들은 전동성당의 주춧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전동성당은 그래서 더욱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1978년 풍남문 보수 공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현재 있는 홍예식 문루에서 옹성의 기단이 12m 지점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발견된 기단대로 복원 과정을 거치는데 여담쌓기와 치석 6856개로 옹성을 축조 하여 오늘날의 풍남문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전주를 대표하는 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풍남이란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태어난 곳이 풍패인데 '풍패의 남쪽'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의 기원인 전주를 그런 의미로 비유를 하여 풍남문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도 당당히 전주성을 지키는 풍남문을 보기 위해 필자는 전주여행에서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 왔습니다. 풍남문과 함께 순교의 현장인 전동성당,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한옥마을등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 전주 풍남문 여행이었습니다. 보물제308호이며 명견루라는 별칭이 있다..



◆풍남문 사진으로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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