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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교동여행)경주 교동 최씨고택. 경주 교동에 있는 경주 최씨고택 여행.


경주 교동에 있는 경주최씨 고택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경주최씨 고택은 400여 년 동안 12대 9 진사를 배출한 만석꾼 집안으로 경주에 살았던 저는 경주 최부잣집이라 불렀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은 682년 신라 신문왕 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고려 때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는 경주향교가 자리해서 교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경주여행 교동최씨고택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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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 고택은 1700년경에 지금의 건물을 지을 때 경주향교의 유림이 반대하자 향교의 뜻을 적극 받아들여 향교건물 보다 두 단 낮게 터를 깎아내고 99칸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당시의 그런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경주최씨 최진립 장군의 성품에 기인한 후손의 뜻인지 모르겠지만, 건물의 규모에 비해서 경주최씨 고택은 화려하지 않고 그저 아담한 시골 아낙네를 닮은 듯 소박합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는 경주최씨 최진립장군 사당이 있으며 여기서 조선 중기에 교동으로 옮겨와 경주 교동 최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에 화재가 일어나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화마에 불타버렸으나 2006년 큰 사랑채를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에 보니까 작은 사랑채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복원을 하려는지 정비된 모습이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고방 등이 현재 남아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하면 ‘타인능해’의 철학이 숨 쉬는 구례의 운조루와 같이 흉년에 주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곳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사랑채에는 문객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문객이 많은 집안을 보면 매일 많은 손님이 찾아오고 자연스럽게 접대가 많다 보니 대부분 그 집만의 비법인 가양주가 내려옵니다. 경주최씨 가양주 하면 술 좋아하시는 분은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경주 교동법주는 경주최부자집에만 내려오는 전통주이며 중요유형문화재 제86-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경주 교동법주의 유래를 보면 조선 숙종 때에 궁중의 음식을 관장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빚었던 술로 궁중에서 유래된 비법으로 빚은 술이라 합니다. 교동법주는 9월에서 다음 해 4월까지가 술을 빚는 최적기라 합니다.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덧술로 찹쌀을 넣어 빚어서 100일 동안 숙성을 거쳐야만 미황색의 교동법주가 완성됩니다.

 


외관이 맑고 투명한 교동법주는 그윽한 향기와 맛을 가져 누구나 좋아하는 술이라는 평가입니다. 지금은 그의 10세손인 최경씨가 교동법주 기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경주최씨 고택을 둘러보겠습니다. 일자형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복원한 큰 사랑채가 보무도 당당합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복원을 기다리는 작은 사랑채의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단체 관광객이 있어 먼저 안채를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큰 목조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경주최씨 최부잣집의 부의 상징인 곳간입니다.



우리나라 목재 곳간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다 합니다. 앞면 5칸에 옆면 2칸이며 700~800석의 쌀가마를 보관했다 하니 어마하게 큰 건물로 아마 단독 건물로는 경주최씨 고택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 같았습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을 지나면 건물은 ‘ㅁ’자 형태입니다. 안채 건물은 건립 당시 8동이었다 하나 지금은 3동만 남아있습니다. 장독대와 붉은 벽돌로 만든 높은 굴뚝을 보면서 교동 최씨 고택의 위상을 새삼 느끼게되었고 사랑채로 돌아 나왔습니다.



현재 화재로 타서 복원된 큰 사랑채가 있지만 불타기 전의 큰 사랑채는 조선 말기와 근대 시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과 의병에 뛰어들었던 많은 분이 머물렀다 합니다. 대표적인 분은 구한말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영덕의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선생, 스웨덴의 구스타트 왕세자, 의친왕 이강 등입니다.






경주최씨 고택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게 된 것은 경주 교동 최씨만의 가훈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 기에는 땅을 널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집안의 부를 후대에까지 잇는다는 것이 힘이 드는데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최진립 장군의 뒤를 이어 12대를 잇는 만석꾼 집안이 계속 이어진 것을 보면 대단한 집안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언뜻 보면 아주 쉬워 보입니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자기 호주머니에 한 개가 있다면 한 개 더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자신을 잘 다스림으로써 오늘날 존경받는 경주 교동 최부잣집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12대 만석꾼이었던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은 만석이나 되는 모든 재산을 나라를 찾는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내어 놓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국권 회복단과 대한 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 광복회의 재무를 맡아 활동하다 옥고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또한, 백산 안희재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대표로 취임해서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께도 군자금을 보내는 등 대한 독립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전 재산을 교육에 투자하여 나라를 이끌어 나갈 동량을 키우려고 대구에다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했는데 이게 오늘날 영남 대학교의 전신입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을 돌아 나와 인근에 경주향교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경주 교동에서 마약 김밥으로 불리는 교동 김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반디인지 비단벌레인지 전동차가 요란하게 경주교동을 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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