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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알록달록 단풍색이 좋았던 경주 서출지 이요당 가을여행. 경주 서출지와 이요


경주 묘사를 지내고는 친지분들과 가까운 경주 남산리의 

서출지 인근에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ㅎㅎ

저는 밥보다는 서출지의 가을 풍경이 어떨까하며 내심 궁금했습니다. 





경주 서출지 이요당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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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오면서 친지분들은 가고 동생과 사촌만 남아서 

서출지를 한바퀴 돌면서 가을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서출지에도 이제 나무마다 가을빛인 단풍물이 서서히 들었습니다.



서출지는 둘레가 200m인 아주 작은 저수지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된 신라시대 저수지입니다. 





서출지에는 까마귀에 관한 전설로 까마귀가 소지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설화입니다. 

488년 신라때 소지왕 10년 정월 대보름날에 

남산 기슭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행차하였습니다.



그때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쥐가 “까마귀 가는 곳을 따라가시오”하였습니다. 

소지왕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까마귀가 이 연못에 다다렀을 때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내주었습니다. 

소지왕은 종이에 “거문고 집을 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소지왕은 궁궐로 돌아와 활로 거문고 집을 쏘자 

거문고 집에 숨어 있던 왕비와 중이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못에서 글이 나왔다하여 ‘서출지’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날에 까마귀가 소지왕의 모숨을 구해주었다하여 

찰밥을 주는 ‘오기일’ 풍속이 생겼습니다. 


현재 연못가에는 이요당 정자가 있습니다. 

조선 현종 5년인 1664년에 임적이 지은 정자로 서출지와 함께 

아름다운 정자로 사계절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사적 138호




특히 서출지는 여름의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못둑 이요당의 배롱나무, 연못에 연꽃이 필때는 

최고의 절경으로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하게 합니다. 

 


가을의 서출지 또한 봄 풍경 못지 않게 아름답습니다. 

통일전의 큰 나무들도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끝자락의 서출지 여행....



서출지 둑길을 걸었습니다.

신라시대 때 생긴 못이라 그런지 큰나무도 많았습니다.  




서출지를  지켜주는 듯 마을 입구의 노거수였을 것으로 보이는 보호수도 있습니다. 



이요당입니다. 

출입문인 일각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볼수 없었습니다




서출지에 수풀이 웃자라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ㅎㅎ

 


그래도 서출지 언덕에 자리한 이요당의 풍경은 그림이라 해도 좋을 아름다웁니다.



서출지 유래 안내판도 있습니다.




이리보니까 이요당이 

꼭 논두렁에 있는 듯 ㅋㅋ




늦가을이라 연잎이 완전 쪼그라 들었고요



봄에 오면 수풀을 모두 제거한 깔끔한 

서출지로 바뀌니 그때 다시 한번 와야겠습니다.






소나무와 중년의 사내들 ㅋㅋ

어울리기도 합니다. 






낙락장송인 경주 서출지 

뒤틀린 소나무는 흘러온 세월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이요당 뒷산은 야외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입니다. 

남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서출지와 이요당

가을 여행에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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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6대 지마왕릉을 찾아서. 경주 남산 지마왕릉


신라 제6대 왕인 지마왕릉을 찾았습니다. 

지마왕릉은 포석정과 배동삼존석불 사이에 있습니다. 

그럼 지마이사금(재위 112~134)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마이사금은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지마, 지미입니다. 아버지는 신라 5대 파사이사금이며 태자였습니다.

 




경주 지마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30




2016/11/01 - (경주여행)황복사지 삼층석탑.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세웠다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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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허루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이며 비는 마제갈문왕의 딸인 애례부인 김씨였습니다. 

즉위한지 4년만인 115년 가야가 국경을 건너 노략질을 일삼자 지마이사금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의 양산시 물금의 낙동강을 건너 가야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가야의 역습에 걸려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으며 그 이듬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가야로 쳐들어갔습니다.

 




가야는 성문을 굳게 잠그며 별반 대응을 하지 않았고 지마의 군대는 우기와 겹쳐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야 정벌의 꿈을 접었습니다. 

121년에는 왜구가 쳐들어오고 다시 이듬해 재침한다는 흉흉한 소문에 민심이 들끓자 사태를 수습하고 왜구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제 한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번에는 난데없는 말갈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지마이사금은 백제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장수를 보내어 말갈족을 격퇴하면서 두 나라는 7대 일성이사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34년 지마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작은아버지인 일성이사금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하겠습니다. 

지마왕의 재위 시절에는 하늘과 땅에서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는 등 많은 변고가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마왕릉은 능의 밑 둘레가 38m이며 높이는 3.4m에 흙으로 봉분을 쌓은 단순한 형태입니다.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와 왜구.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공고히 했다고 안내판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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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신라 7대 경주 일성왕릉를 찾아서, 경주 일성왕릉


경주 서남산 아래에 있는 일성이사금(재위134~154)의 능인 일성왕릉을 보고 왔습니다. 

일성왕릉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능은  1730년경에 당시 경주김씨와 경주박씨 두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고 시조인 왕릉 찾기를 하면서 사료나 고증으로 일성왕릉이라 추정하면서 비정한 곳입니다.

이외에도 신라왕릉 대부분이 비정된 상태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신라일성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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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촌장이 박혁거세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2대 남해 차차웅의 뒤를 이어 3대 유리이사금은 유언을 하면서 박씨가 왕이 아닌 석씨인 석탈해가 4대 이사금에 오르게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일성왕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의 장자라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유리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지마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료가 정확하지 않는데 일성왕은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나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저도 일성왕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대해 소설을 한번 써 봤습니다.



3대 유리이사금에는 아도갈문왕과 파사이사금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석탈해왕의 뒤를 이어 유리이사금의 차남인 파사이사금이 5대 왕에 등극하고 6대는 파사왕의 아들인 지마가 이사금에 오르면서 다시 박씨로 정권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7대는 일성이사금입니다. 

일성이사금은 지마이사금의 아들이 아니고 아도갈문왕의 아들로 본다면 지마이사금과는 사촌지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 일성이사금에게 왕권이 돌아왔는지에 대해 알수 없으나 지마에게 후사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여튼 제가 추리한 이 대목을 뒷받침하는 게 148년 일성이사금 15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갈문왕이 무엇입니까? 사후에 왕의 자리를 추봉하는 왕을 말합니다. 

일성왕은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아버지를 아도갈문왕에 추봉하여 정통성이 있는 이사금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종종 아버지를 왕으로 추봉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일성왕의 아버지는 아도갈문왕이라 추증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거는 역사학자가 밝히는 거고 저는 그냥 제 생각을 유추해 해봤습니다. 

어머니는 이간생부인이며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 부인이라설 등이 있습니다. 

재위기간 동안 말갈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력의 소모가 많아 대응책 마련에 많은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으며 금은주옥 등 사치품 사용을 금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일성왕은 재위기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성왕이 승하하자 8대 태자 아달라이사금이 해목령 아래 의전동 묘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낸 경애왕릉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능은 조선 영조 6년인 1730년경에 알려졌습니다.

아마 그때  두문중에서 서로 나눠 먹기에서 일성왕릉으로 비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은 나정과 양산재, 남간사지가 있는 탑동의 서남산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은 능선의 경사면에 자리했습니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이 16m이며 높이는 5m 쯤됩니다. 

현재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으로 추정되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습니다. 

봉분 내부에는 석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2단의 축대는 능을 보호하려고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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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임진왜란 의병장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경주 김호장군고택


단일 시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곳이 경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주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입니다.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이번에는 절충장군 부산첨사 김호 장군 고택을 찾았습니다. 

김호장군 종택은 그의 호를 따서 월암종택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경주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33

경주 김호장군고택 경주 월암종택 전화:054-772-9455



2018/01/19 - (경북여행/경주교동여행)경주 교동 최씨고택. 경주 교동에 있는 경주 최씨고택 여행.

2017/12/1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월정교. 신라 최고의 다리였던 경주 월정교 복원 공사가 끝나갑니다. 월정교

2017/04/11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향교 대성전. 조선시대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2016/11/05 - (경주여행)경주 신문왕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31대 신문왕릉을 여행하다. 경주 신문왕릉




처음 김호장군 월암종택을 방문하면서 조선시대 한 장수의 집이구나 하면서 쉽게 생각했습이다. 

그러나 역사가 400여 년이 넘은 고택이며 가정집 건물로는 몇 안 되는 오래된 건물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감짝 놀랐습니다. 

안내판을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 공을 세운 부산첨사 김호장군의 생가”로만 표기해 놓았습니다.

 


김호장군 월암종택 포스팅을 하면서 김호장군님의 연역을 알아보았습니다. 

김호장군은 1534년 경주부의 월남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70년(선조 3년) 식년 무과에 을과로 급제해 일찍부터 무인으로 20여 년 근무하다가 훈련원봉사를 끝으로 고향인 경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노비와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경주부윤은 그에게 경주 오봉산에 있는 부산성을 방비토록 했으며 경상초유사로 있던 학봉 김성일도 경상좌도 의병도대장에 김호를 임명했을 정도로 충·절·의가 남달랐던 분 같습니다. 

경주사람은 김호장군을 남면대장이라 따로 불렀습니다. 

이는 백운산(열박산)의 남쪽에서 오는 왜적을 모두 막아냈다 하여 붙은 별칭이라 합니다.

 




영천성 탈환에 여러 경주의 의병장과 나서기도 했으며 휘하에 1,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 부산첨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지 않고 경주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읍성 탈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경주부에 들어온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올라오는 적의 기병 500기와 노곡에서 맞붙어 왜적을 궤멸시키고는 자신 또한 전사했습니다.



이전투가 당시 경주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였다 합니다. 

김호장군을 경주사람은 동도오절중 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는 조선시대 때 경주를 동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김호장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숨지자 첫째와 둘째 아들 또한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다 전사한 호국집안입니다.

 

경주월암종택 우물


경주 남간사지 석정, 비슷하지 않나요



김호장군은 사후 당상관에 추증과 전란이 평정되고는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영조 34년에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으며 김호장군 경주월암종택은 중요민속자료 34호입니다.

 


김호장군 종택인 월암종택은 17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심건물인 안채가 대략 4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호종택에서 경주향교와 남간사지에서 본 똑같은 형태의 돌우물인 석정이 사랑채 터 앞에 있었습니다.



경주향교의 돌우물에 비교해서는 그 규모가 아주 작았고 남간사지 우물과는 그 크기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의 우물이 모두 앉은뱅이 식인 신라시대 우물인데 김호장군 종택의 우물 또한 똑같은 양식이며 주변에 신라 절터 유구가 남아 있는 게 오래전에는 절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있고 왼쪽에 초가집으로 엮은 아래채가 있습니다. 

주인장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계십니까?” 하고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채에 붙은 작은 방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현재 김호장군종택은 전통한옥체험을 하는 민박집으로 운영 중인데 민박손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쥔장이 나왔습니다. 정중히 집을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양해를 구했고 “흔쾌히 구경하세요” 하기에 종택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 힘든 초가집이 있습니다.” 하니까 “원래는 초가집이 아니었고 모두 기와집이었습니다” 하시면서 처음에는 대문도 현재의 자리가 아니고 방향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쥔장은 대문은 집 앞 공터 바깥인 마을 길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채도 안 보이고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는 게 건물 배치가 조금 이상합니다" 하니까 "대문 오른쪽에 현재 정원으로 꾸며진 곳이 사랑채가 있던 곳입니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때 화재로 전소하여 급하게 짓다 보니 아래채를 초가집으로 짓게 되었고 사랑채는 아직도 복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채가 있던 자리를 자세히 보았는데 연못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꽤 풍치 있는 누마루가 있는 정자식 사랑채였을 것이라 짐작되었습니다. 

안채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 규모로 왼쪽부터 부엌·방·대청·방인 아주 단순한 구조이며 대청에는 문짝을 달았습니다. 

아래채는 앞면 3칸에 옆면 1칸인 초가지붕입니다.

 왼쪽부터 방·방·부엌 순이며 굴뚝은 부뚜막 한쪽에 설치한 특이성을 보여줍니다.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공간구성입니다. 

종택 내에 김호장군 사당도 모셔져 있습니다. 

경주 남산 아래에 포석정, 배리삼존불, 삼릉, 남간사지와 청림사지 그리고 양산재, 나정, 신라왕릉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에 있어 민박체험 하기에 정말 좋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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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남산 감실부처 할매부처로 불리는 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경주 남산을 지탱하는 바위는 모두 소홀히 취급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남산의 수많은 바위에 신라인의 숨결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경주 남산을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지붕 없는 박물관 또는 야외박물관이라 말합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1점에다 수많은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었고 단일장소로서 남산은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주남산 불곡석불좌상(불곡마애여래좌상)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 56

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보물 제198호



2016/07/09 - (경주 남산 여행/경주 남산 가볼만한 곳)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의 많은 불상과 석탑 문화재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

2016/06/20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남산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3/03/08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보일듯 말듯한 섬세한 조각기법이 예술.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지금도 확인되지 않은 많은 문화재가 바위 속에서 세상에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는 말인데 경주 남산에서 유행하는 웃스게 소리가 있습니다. 발에 채는 돌멩이도 문화재 일줄 모르니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나 싶어 ㅎㅎ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경주 남산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번 경주 남산여행에서는 아직 가보지 못했던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입니다.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주변의 보리사 석조여래좌상과 탑곡 여래불상군이 골짜기를 달리하며 몰려 있습니다. 항상 보리사와 옥룡암의 불상은 여러 번 찾았으나 조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좀체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터에 이번에 답사하게 되어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감실에 모신 부처님은 여럿 있지만 바위를 조각한 석조불상과 바위면을 새긴 마애불에서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하물며 경주 남산의 많은 부처님에서는 더 귀한 존재입니다. 경주 남산에서 만나는 감실 부처라는 신선암 마애불도 있지만, 이는 감실 흉내만 조금 낸 수준이라 한다면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온전하게 자연석을 1m 쯤 깊숙하게 파내고 그 안에다 돋을새김으로 1.42m 부처님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경주 남산의 감실부처는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모습입니다. 처음 불곡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어! 우리 엄마내”하며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진짜 엄마를 닮았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단아한 여인상인데 그 모습 때문인지 경주 남산 할매부처라는 애칭이 붙었습니다.











불곡 마애여래좌상의 제작 시기는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선덕여왕 재위 때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으며 감실부처의 모델은 신라 여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선덕여왕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당시 여왕의 이미지와 함께 황룡사 구층목탑, 첨성대, 배동석불, 경주 남산 삼화령 애기부처 등 융성했던 신라불교 시기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불곡 마애여래좌상을 보면 마음씨 좋으며 후덕한 엄마의 모습에 왜! 이제야 찾아왔는지 많이 후회되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뵙고 싶어 바위를 올랐습니다. 누구의 정성인지 모르겠지만 굵은 양초가 여러 개 불을 밝히며 꺼지지 않고 제 몸을 태우고 세상을 밝히는 게 꼭 할매 부처의 마음을 보는 듯했습니다.



할매부처의 머리부분은 두건이 귀부분을 덮은 듯 보였으며 둥근 얼굴에 눈은 돌하르방의 왕방울 같이 큼지막하게 표현했습니다. 어깨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옷은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입니다. 양손은 축 늘어진 소매 속에 서로 포개어 감춘 듯 보이며 부자연스러운 자세에서 발은 오른쪽만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할매부처는 고개를 살짝 숙인게 성당의 마리아상과도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두 종교의 관점이 같아서인가봅니다. 감실부처는 감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연채광을 한 온화한 부처의 얼굴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하루해가 가장 낮게 비칠 때인 동지를 전후해서 불그레한 빛이 바위를 비추면 꼭 살아 움직이는 듯 따뜻한 피가 흘러 바위가 화색이 돌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온전한 부처님이 드러납니다.

 



이 감실 부처님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계시는 골짜기를 뜻하는 불곡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많은 부처님이 있습니다.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지만 그 이전의 고신라 부처는 몇분 남아 있지 않는데 그중에 감실할매부처는 고신라 부처로서 현재 남아 있는 초고령 부처님 중 한 분입니다. 경주 남산 여행에서 꼭 보고와야 할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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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월정교. 신라 최고의 다리였던 경주 월정교 복원 공사가 끝나갑니다.  


신라의 고도는 서라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주가 옛날 신라의 수도입니다. 그런 경주에 현재 신라의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대역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 대역사가 월정교 복원공사입니다. 월정교는 경주를 관통하는 하천인 남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천에는 신라 천 년을 상징했던 다리가 하나가 아니고 두 곳이 있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주 월정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2016/11/08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52대 효공왕릉. 신라 52대 효공왕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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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 (경주여행)황복사지 삼층석탑.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세웠다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다.


그 두 곳의 다리가 월정교와 춘양교입니다. 두 곳 모두 지금까지 무너진 교각 잔해만 하천바닥에 널부러저 있었습니다. 그 두 교각 중 한 곳인 월정교가 현재 새로운 대역사를 쓰고 복원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여행이라 했지만,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멀찍이서 주변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궁금해서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언제쯤이면 공사가 끝나는냐고예 ㅎ ㅎ 그 관계자의 말로는 월정교 공사는 거의 끝났으며 주변 조경공사만 마무리하면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년 봄에는 모든 공사가 끝나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내년 봄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처음 월정교 복원공사를 본 게 아마 2년 전 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도 월정교 외관은 마무리된 것 같았는데 그러다 잊고 지내다, 최근에 블로그에서 월정교 야경 사진을 보고 당장 달려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 야경사진은 남천에 흐르는 불이 반영되어 정말 내 마음을 홀딱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포스팅 날짜를 보니까 그때가 11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남산 둘레길을 겸하면 되겠다 싶어 경주를 찾았습니다. 이른 아침인지라 상쾌한 기분을 즐기고 싶어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월정교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3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면서 경주의 다른 문화재를 곁눈질로 보는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계획은 도착해서 낮의 월정교를 찍고 둘레길을 걸은 다음 야경을 담으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는 생각으로 월정교에 도착했지만, 월정교와 맞닥뜨린 나의 두 눈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실망보다 더한 낙담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의 반영 야경은 어떻게 찍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월정교는 아직 겉모습만 마무리되었고 주변은 황량함 그대로였으며 특히 반영이 아름다웠던 월정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이 담겨 있을 만한 웅덩이도 없을 뿐 아니라 남천의 물도 말라 조금의 반영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웅장한 월정교의 누정과 교각의 모습에 그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신라 시대의 월정교가 과연 이런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섬세한 누각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천년 고도 경주를 상징하는 건물로서는 손색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서라벌의 왕궁을 들어서는 다리였습니다. 두다리는 신라 경덕왕 19년인 760년에 궁궐 남쪽을 흐르는 문천에다 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1280년인 고려 시대 충렬왕 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500년 이상을 신라와 고려 시대를 넘나들면서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나 봅니다.

 





월정교를 들어서면 곧바로 반월성의 끝과 연결되고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요석궁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자료로만 요석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시대에 세워진 경주향교와 최 부자 고택이 있고 경주 교동마을의 고택체험과 상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의 19m 아래에는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간의 연결 고리가 된 ‘유교’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며 노래하고 다녔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원효의 노랫말을 알아듣고는 원효대사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원효는 태종무열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는 바로 그 길로 궁궐로 향했습니다. 원효는 문천(지금의 남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풍덩 하고 빠져 걸쳤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그 전갈을 태종무열왕이 받고는 당장 급한 거 없다며 먼저 젖은 옷과 몸을 말리라며 요석궁에 머물게 했습니다.

 


요석궁에는 무열왕의 공주인 요석공주가 머물던 궁이며 그날 밤 당장 사달이 났습니다. 그 사이에서 신라의 성현 중 한 분인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원효는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하면서 대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를 했습니다.. 원효가 발을 헛디뎌 빠졌던 다리의 흔적이 월정교 바로 아래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가 문천의 다리를 건널 때는 복원된 월정교처럼 누각을 올린 다리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난간 없는 다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에서 배 모양의 교각을 확인했는데 이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센 물살을 고려한 듯 보입니다. 다리 길이는 60.57m이며 교각의 폭이 13m 인 것을 보면 오늘날 건설해도 거대한 다리라 생각됩니다. 교각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 조각이 나왔던 것을 추정하면 교각 위에다 누각이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런 거대한 다리가 완공되었던 것도 놀랐지만 그 위에다 누각을 올린 다리라니 이를 보면 신라의 건축기술도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정교의 복원은 2008년~2013까지 66.15m의 교각과 누교 복원을 마쳤으며 그리고 총 110억 원을 들여 2017년까지 교량의 양쪽 끝에다 앞면 5칸, 옆면 3칸, 최고 높이 15.67m의 중층 건물인 문루를 각각 완공했습니다. 문루는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형태인 팔작기와지붕에 주심포양식입니다. 월정교는 2016년 형산강 8경에 선정되었고 국가지정문화재에 춘양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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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향교 대성전. 조선시대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 최부자 최 씨 고택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경주향교에 갔습니다. 경주향교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입니다. 사립교육기관인 서원과 함께 조선 시대의 양대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경주향교의 전신은 신라 시대로 올라갑니다. 682년 신문왕 2년에 처음 세워졌던 국학이 있었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로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지방교육기관이 들어섰습니다.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2008/10/18 - (경북여행/경주여행)무장사지 삼층석탑과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 여행. 태종무열왕이 전쟁후 병기와 투구를 감춘 곳, 경주무장사지 입니다.

2010/07/20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진덕여왕 여행.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진덕여왕릉 찾아가기

2013/03/10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 이것.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2013/03/08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보일듯 말듯한 섬세한 조각기법이 예술.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2013/03/05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야외 박물관 경주 남산 남북 종주 산행.




그리고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 공주였던 요석공주가 과부가 되어 머물렀던 요석궁이 있었으며 훗날 이곳에서 원효와의 로맨스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주 향교 포스팅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492년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 최응현에 의해서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성전 등 경주향교의 주요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대성전에 봉안했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두덕암(현재 도덕암)으로 옮겼으며 1600년 선조 33년에 경주부윤인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먼저 중건하면서 위패를 다시 모셔왔습니다.



4년 뒤에는 윤성이 대성전 앞의 동·서무를 중건하고 1614년 광해군 6년에는 부윤 이안눌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함으로써 소실되었던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 후 1668년과 1979년에 보수를 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경주향교는 약 5천 평으로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라 합니다.

 







명륜당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여러 향교는 모두 전학후묘였다면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라도 나주향교·부여향교·전주향교와 강원도 강릉향교 등과 같은 전묘후학인 문묘 영역이 강학영역의 앞쪽에 배치하는 형식을 따랐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 향교의 대표적 형식이라 하는데 저도 여러 향교를 찾았지만, 문묘인 대성전이 앞쪽으로 나오는 형식은 경주향교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경주향교의 대성전과 동·서무는 공자 이외에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며 전묘후학의 형식을 따른 향교의 공통점은 대부분 옛 도읍지에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왕들이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먼저 문묘하는 것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합니다. 경주향교도 조선 시대에는 전답과 노비. 전적 등을 국가로부터 받아 교생을 가르친 국가교육기관입니다.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따왔으며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추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에서 태어난 홍유후 설총, 문장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문묘에 배향한 퇴계 이황, 율곡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봉안해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존영각


존영각





문묘인 대성전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 양식) 건물로 내력 또한 분명합니다. 건물의 공포와 창호, 가구는 옛방식의기법이 잘 남아 있고 대성전의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묵서명이발견되었습니다.


대성전



대성전은 경주향교의 중요건축물이며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국가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경주향교는 입구의 큰문인 외삼문은 출입할 수 없게 잠겨있습니다. 이곳을 통하면 내삼문을 거처 대성전으로 바로 통하지만 문묘 공간이라 출입할 수 없습니다.





경주향교를 보기 위해서는 관리실과 통하는 쪽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만나는 게우물입니다. 신라 시대 국학이 건립될 때부터 남아 있던 유물로 현재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것 같습니다. 널다란 돌 2개를 짜맞추어바닥을 깔고 낮게 테두리를 다듬었으며 요즘 우리가 보는 우물의 모습과는 약간 달라 보입니다.













뚜껑이 덮여있어 알 수 없지만 얕은 우물이라 두레박이 아닌 바가지로 물을 퍼 담을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의 강학장소였던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로 사용했던 동·서재를 만나고 대성전은 동재나 서재 앞쪽 긴 담장 사이를 따라가면 대성전 출입문인 내삼문이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어 바깥에서 까치발로 내부 전경을 보고 돌아 나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이며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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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구황동 모전석탑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설의 사찰인 도림사가 구황동 모전석탑지.  


이번 경주 여행은 폐사지입니다.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등 폐사지라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를 뜻하는 감투(?)를 하나쯤 모두 쓰고 있는데 구황동 폐사지는 많은 부재가 남아 있음에도 문화재 지정 타이틀이 없이 그저 울타리만 둘려 잡초더미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도로 하나를 두고 있는 폐사지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동네 이름을 따와 구황동 모전 석탑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석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아니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찰 이름을 비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면 현재 구황동 모전 석탑 지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 일본인이 ‘도림(道林)이란 기왓조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추정해보면 도림사가 맞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도림사는 입도림 곁에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수도 즉 서라벌 입구에 자리했던 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가 도림사 폐사지가 맞다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옵니다. 무엇이 재미있냐고요? 모두 아시는 이야기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48대 왕은 경문왕입니다. 경문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경문왕은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큰일 났다며 좌불안석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나귀 귀같이 귀가 길다는 비밀은 왕후와 신하들 모두에게도 비밀로 하였지만, 자신의 왕관을 만드는 사람인 복두장에게 만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만약에 비밀을 발설하면 죽음뿐이라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하하 그리고 보면 사람이란 남이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 했겠습니까.

 


그것도 임금님 귀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요즘 같으면 ’특종‘감인데 말입니다. 아마 복두장이는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제 명에 못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복두장이는 시름시름 몸을 앓았고 죽기 전에 비밀을 다 털고 갈 욕심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하며 큰소리로 외쳤고 복두장이는 죽었습니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복두장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문왕은 큰일 났다며 사람을 시켜 도림사의 대나무숲을 모두 베게 하고 산수유를 심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하며 소리가 났다 합니다. 이게 실제 사실이라면 경문왕은 황당해 했겠습니다.

 


모두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의 실제 도림사라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 지가 도림사였다 생각하니 어디선가 갑자기 복두장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 모전 석탑 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의 벽돌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모전 석탑 또는 전탑이라 하며 남은 부재로 짐작해보면 분황사 모전 석탑과 같은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남·북 감실의 돌기둥 2쌍만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돌기둥이 배치된 모양으로 짐작해보면 탑은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4.5m쯤 되는 크기입니다.



이는 한 변이 13m인 분황사보다는 크기 면에서 아주 작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층 탑신의 사면에다 감실을 넣고 사방불을 모신 형식이며 돌기둥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그 섬세함이 통일신라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한 쌍의 인왕상 돌기둥은 금강역사상으로 국립경주박물관 고분관 입구에다 배치해 놓았다 합니다. 그러나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부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화강암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탑신을 바쳤던 지대석입니다. 이를 보면 모전 석탑에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사학자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에 남아 있는 부재인 인왕상 돌기둥 등을 보면 모전 석탑임이 틀림없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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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사천왕사지. 황량한 폐사지에 잡초만 무성, 초석만 천년 흔적을 말해주는 경주 사천왕사지 여행. 


경주는 신라와 통일신라를 거쳐오면서 오늘날 수많은 불교 문화재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이 나뒹굴어 혹시 돌멩이도 문화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경주를 문화재의 보고라 합니다. 그러나 경주여행을 하면서 황당한 경우를 당하는 게 더러 있는데 폐사지에서 그 많은 불교 문화재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때 입니다. 이번과 같은 사천왕사지 방문이 꼭 그런 경우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



사천왕 사지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 등장하는 사찰입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죽을날을 미리 알려주며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이해 못 한 신하들은 선덕여왕에게 도리천이 어딥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낭산 남쪽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날에 진짜로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신하들은 모여 선덕여왕의 유언대로 낭산에다 장사지내며 왜 여기가 도리천이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리고 30년쯤 후에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란 절이 세워졌습니다. 


왜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며 도리천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로 나오는 전각이 대부분 천왕문입니다. 이곳에 네 분의 사천왕을 모셨는데 모두 험상궂게 생겼으며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 등 부처님의 나라인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사천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28개의 하늘나라가 있으며 그중에서 첫 번째 나라가 사천왕이 지켜주는 시왕천이며 두 번째 나라가 부처님의 나라로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입니다. 그러니까 사천왕사 위인 즉, 선덕여왕릉이 부처님의 나라인 도리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덕여왕의 도리천 예언은 맞아떨어졌으며 이 모든 게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사천왕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천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기술하고 있습니다. 679년 신라 문무왕 19년에 명랑법사가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낭산 남쪽의 신유림에 창건했다 합니다. 당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임시 건물을 짓고 명랑법사는 중국에서 배운 밀교인 문두루비법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파도를 일으켜 당나라 배를 모두 침몰시켰습니다. 이는 범어로 문두루는 무드라(mudry)의 음사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됩니다. 명랑법사는 1.2차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나서 건물을 다시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했다 합니다. 현재 사천왕사지의 구조를 보면 통일신라 양식인 금당이 1개에 동·서탑 두 개의 목탑 형식으로 가람배치를 했는데 이는 통일신라 양식으로 사천왕사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사천왕사는 주춧돌과 목이 달아난 귀부 2개,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어 당시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사천왕사는 대사찰의 사격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폐허로 남아있던 사천왕사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처음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1922년, 1928년에도 사천왕사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2006년에 들어 와 서탑지의 정밀조사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사천왕사의 체계적 인 발굴조사로 탑의 기단부와 하부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반파된 채로 남아 있던 녹유사천왕상전이 기단석에서 발견되어 사천왕상의 배치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당시 신라 최고의 조각승인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눈을 부릅뜨고 귀는 축 늘어 졌으며 익살스러운 치아와 생동감 넘치는 인체표현 등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갑옷과 테두리의 장식된 꽃무늬 등 모든 거 하나까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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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당간지주


현재 사천왕사지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은 사천왕사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사 당간지주입니다. 보통 사찰의 입구에 절을 알리는 당을 거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그 당간을 잡아주는 두 기둥을 말합니다. 지면에서 높이가 230cm에 당간의 폭은 50cm이며 현재 당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이한 점은 3개의 구멍이 있는데 가운데가 원형이고 나머지 상·하는 네모 구멍입니다. 또한, 당간을 받쳤던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목이 달아난 미석 받침돌 귀부


사천왕사지를 알리는 표지석


경주 사천왕사지 목탑지


사천왕사의 목탑지는 1금당 2 목탑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동·서 2개의 목탑으로 금당지 앞에 좌우에 세워졌습니다. 동탑은 1.3m 높이로 흙을 쌓은 기단 위에 3칸 정사각형을 하고 있습니다. 목탑의 받침돌인 초석은 각각 정사각형이며 크기는 약 50cm입니다. 초석의 가운데 심초석은 약 118cm 크기의 네모 반듯한 모양이며 그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30cm에 7cm 깊이로 패인 사리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탑지 또한 초석과 심초석이 동탑지와 같은 형태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금당터


금당지는 사찰의 가운데 위치하며 대웅전을 말합니다. 이곳 사천왕사의 중심부에도 금당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 있어 금당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가운데 현재 없어진 3개의 초석은 무덤을 조성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남아 있는 초석으로 금당지의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입니다. 그 가운데에 불상을 안치했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가로 약 200cm, 세로 약 100cm인 정사각형 받침돌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좌·우경루터


금당지에서 북쪽으로는 사천왕사 좌·우경루터입니다. 사천왕사의 좌·우경루는 금당지 앞의 동·서 목탑지와 배치되도록 세워졌습니다. 초석의 배치를 보면 경루는 3칸 4방의 건물이며 초석의 중심에 지름이 20cm 크기인 둥근 구멍이 패여 있어 아마 이곳에 어떤 시설물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2006년 경주 사천왕사지 발굴 현장의 사진입니다. 가운데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그리고 좌·우경루터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있습니다.(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벽전이란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을 뜻하며 동목탑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동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서탑목지에서 발견된 녹유벽전으로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폐사지인 사천왕사를 방문하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황량하게 변해버린 터에 잡초만 무성하고 그사이에 초석만 드문드문 보여 발굴 당시의 모습과 발굴과 함께 나왔던 유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녹유벽전’ 이외에도 ‘녹유사천왕상’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의 유물은 현재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참 궁금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경주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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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분황사모전석탑 여행을 하면서 이번에는 분황사 모전 석탑을 제외한 분황사 내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원효대사의 비석을 받쳤던 화쟁국사비부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신라 호국용의 전설이 있는 석정, 그리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분황사 전화: 054-742-9922




그러나 먼저 분황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가야겠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하였습니다. 창건과 함께 모전 석탑이 완성되었는데 당대의 유명한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하면서 분황사의 사격을 더 높였습니다


분황사 석정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 하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에 강고내말이 구리 306,700근으로 약사여래상등을 주조하여 봉안했던 약사여래좌상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또한,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인 1238년 고종 25년에 몽골군과 조선 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분황사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습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분황사는 두 전란이 끝나고 1609년인 광해군 1년에 중창하였으며 보광전에는 약사여래입상이 현재 분황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먼저 분황사의 석정을 보겠습니다.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전해오는데 돌우물로 겉면은 8각이며 내부는 둥근 원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우물을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합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아래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로 각각 불리는 우물에는 통일신라를 지킨다는 호국용이 살고 있었습니다. 때는 원성왕 11년인 795년입니다. 중국 당나라 사신이 와서 각각의 우물에 있는 호국용을 물고기로 만들어 잡아갔습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은 이 사실을 알고 원성왕을 찾아와 남편을 찾아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원성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이 잡아간 물고기로 변한용을 다시 돌려받아 자신들의 우물에 각각 풀어주었습니다.



이 우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설치한 우물로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 탄압으로 고려까지 국교로 이어온 불교가 유교에 억압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날라갔으며 이 석정에다 처박아 넣었던 아픔이 있습니다. 현재 통일신라의 돌우물 중에서 가장 크며 오늘날까지 우물로 사용될 만큼 상태가 깨끗하다 합니다.

 


이번에는 인근의 원효대사 받침돌로 사용된 분황사 화쟁국사비부입니다. 화쟁국사비는 1101년인 고려 숙종 6년 8월에 내린 조서에 분황사에 세워졌습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를 칭송하는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대상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유사가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현재 비신은 사라지고 없으며 비 조각만 한두 개씩 발견되어 화쟁국사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합니다. 비를 꼽았던 비대석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인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 음각되어 있으며 직육면체인 비대에 비신을 꽂는 직사각형의 홈이 패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입니다.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불


보광전은 1998년 3월에 수리하면서 건물을 해체하였습니다. 그때 벽화를 볼 수 있었으며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는 기록과 1680년 5월에 중건하였으며 약사여래상은 만력 기유년인 1609년에 구리 5,360근으로 주조하여 봉안했다고 상량문에 나와 있다 합니다.

 


약사여래입상의 높이는 3.45m로 1800년대에 만들어진 청동제 불상입니다.  왼손에 들은 건칠제 약함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 25일 조성야 “란 붉은 글씨가 남아 있으며 이는 1774년인 영조 5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입상은 처음에는 755년 강고내미가 만들었다고 알려졌지만 원형은 거의 파괴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보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넓으며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습니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껍게 처리했는데 이는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대의 사이에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 '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습니다.



대좌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 시대의 탑몸돌의 받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불상의 양식을 보면 조선 후기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화재 안내판 참고)


 

분황사 관람안내

분황사 입장료: 어른 1,300원, 청소년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분황사 입장시간:08:00~17: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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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은 무조건 경주였습니다. 국사 시간에 많이 접했던 신라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본다는 즐거움으로 가슴 설레었던 경주 여행은 그중에서도 필수 코스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쌩쌩 달려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고사리 같은 손을 맞잡고 걸어서 석굴암을 올랐습니다.





분황사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분황사



또한, 불국사도 여행하였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분황사였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경주 3대 여행지라 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고 본다는 분황사 9층 석탑은 불국사와 석굴암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어린 시절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에 아무리 봐도 3층뿐인데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과 같은 석탑이라 하는데도 전혀 모양이 달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저 아주 특별하구나 하며 뇌리에 강하게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40년도 훨씬 전 일입니다.



경주는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 때문에 매년 한두 번씩 여행 삼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분황사는 강한 뇌리감 때문인지 가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항상 빼놓고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우리 문화재 찾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곳의 탑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탑의 특성도 알게 되었고 덩달아 분황사 9층 석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질과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경주 분황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가보지 않아도 가본 곳 같은 분황사라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 가봤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분황사는 그대로 똑같았습니다. 그만큼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창건하였고 분황사 9층 석탑도 세워졌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보드라도 이웃한 황룡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큰 규모로 보이지만 지금 분황사는 9층 석탑을 빼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분황사는 분황사 9층 석탑인 모전석탑이 분황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덕여왕 시절인 창건 당시의 분황사는 당대의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643년 당나라 유학 중 왕명을 받고 자장율사는 대장경 일부와 불전에 필요한 번당, 화개 등을 들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면서 대국통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원효는 분황사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의 뼈로 소상을 만들어 이곳 분황사에 모셨으며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합니다.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조용한날이 없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함 속에 선덕여왕은 국교인 불교에 의지하며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9층 석탑의 거대한 탑을 세웠으며 이로써 신라왕실의 권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국력을 과시하는 포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황사 9층 석탑은 3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게 9층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정말 웅장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고려 말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분황사 9층 석탑은 파괴되었고 남아있던 전각 대부분도 소실하였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있습니다. 이번 분황사 포스트는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그 외 분황사에 남아 있는 원효대사 비석 받침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화쟁국사비부와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석정, 그리고 보광전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약사여래입상은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9층 석탑은 화강암 재질인 기존 석탑과는 형태가 다르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 만들었다 하여 이를 모전 석탑이라 합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신라의 석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인 화강암의 석탑으로 바뀌었습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을 보면 자연석을 다듬은 막돌을 1.06m의 높이로 쌓아 그 기단 위에 넓은 화강암을 바닥 돌로 삼았습니다. 바닥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3m이며 그 위에 벽돌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입니다. 1915년 일제는 허물어진 분황사 9층 석탑을 수리한다고 해체하여 지금의 상태로 만들어 현재 3층 석탑이 된 연유입니다.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는 돌로 만든 함속에 사리장엄구가 들은 은제 사리함 등이 나왔다 합니다. 1층 탑신의 네 곳에는 불상이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을 두었으며 출입구가 있습니다. 출입구 좌·우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두었는데 근육의 볼륨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왕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출입구에는 여닫는 석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동물상을 배치했으며 왼쪽은 사자와 흡사하고 오른쪽은 암사자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 눈에는 물개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이는 불국사의 다보탑에 배치한 사자 석상과 같은 이치로 불교에서 불탑을 수호하는 동물은 사자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상도 그와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자 신라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30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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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52대 효공왕릉. 신라 52대 효공왕릉 여행.  


경주여행에서 이번에는 신라 제52대 효공왕릉을 찾았습니다. 897년에 왕위에 올라 912년 승하했으며 대략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릉 포스팅을 하면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효공왕은 성은 김 씨, 이름은 요로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경주 효공왕릉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



어머니는 의명황태후 김 씨며 왕비는 이찬 예겸의 딸입니다. 효공왕의 출생은 드라마틱합니다. 부왕인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51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89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권력을 강화하여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의 30개 성을 공략하여 빼앗았고 옛 백제땅 일부를 후백제의 견훤에게도 빼앗겨 그야말로 신라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다시 903년에는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부하 왕건이 쳐들어와 금성과 주위 10여 개의 성을 빼앗아 갔으며, 907년에는 견훤에게 또다시 일선군 주위의 10개 성을 내주었습니다. 나라가 환란에 빠졌을 때 군주는 모름지기 정신을 차려 국난극복에 힘써야 하지만 거느린 애첩과 향락에 빠져 정사는 내팽개쳤습니다.



기우는 국세에 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대신이 911년 효공왕의 애첩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다음 해에 승하했으며 시호를 효공이라하고 사자사 북쪽에다 장사 지냈다 합니다.





현재 효공왕의 능은 경주시 배반동 산 14에 사적 제18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성덕왕을 빼고 신라왕릉 모두 다 그러하듯이 효공왕릉 또한 삼국사기의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효공왕릉도 비정한 상태입니다.







효공왕릉을 보면 둥글고 흙으로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지름은 약 22m이며 봉분의 높이는 약 5m로 봉분의 아래쪽에다 호석인 둘레돌을 돌렸다는 것을 드러난 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서 당시 효공왕의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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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들의 천년 흔적 보문사지 여행.


신라 시대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령스러운 영산의 대상이었던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보문들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런 황금 들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문단지를 간다고 북천 옆 도로를 따라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 골짜기 안쪽이 이리 넓은 줄 이번 경주여행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경주 보문리 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보문들을 가로질러 닿았던 보문사지는 보문들의 가운데 황금 들판을 울타리 삼아 무심한 듯 오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보문동의 유래도 아마 이곳 보문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마을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 보문사지 주위로는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황복사지가 그러하고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이 현실이 되었던 사천왕사지가 보문사지와 함께 서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지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보문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만 될 뿐입니다.

 

 

 

 

현재 보문사 터는 주위가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당지와 동·서탑지 등 모두가 1~2m 정도로 흙이 쌓여 높은 상태 있습니다. 금당지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깔려 있으며 금당 지 앞 좌우 높은 단에는 동·서의 목탑지가 남아있습니다.

 

금당지의 모습입니다. 

 

 

 

 

 

 

 

 금당지 아래 옛날 논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등 부재들...


동탑지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현재 연꽃무늬가 조각된 목탑의 받침돌인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목탑건물이나 황룡사 9층목탑과 유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이 고려 시대 몽골침입 때 소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탑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금당지 앞에는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 등이 뒹굴고 있는 게 신라 천 년의 뒷모습인 양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현재 보문사지 서쪽으로는 보물 제123호인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62m 떨어진 북쪽으로는 보문사지 당간지주인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가 남아 당시 보문사의 현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m이며 보문사지의 여러 부재와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 때에 조성되었습니다. 절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고정했던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돌로 된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당간은 철당간과 목당간 석당간이 있는데 당간지주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가 손꼽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안쪽 면이 평면이라면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가늘어집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렸고, 북쪽의 돌기둥은 구멍이 반만 패여 있어 특이한 경우입니다. 두 기둥 중 북쪽 기둥은 윗부분이 부러진 상태이며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크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 또한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로 형태의 직육면체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같이 그저 밋밋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석조의 북쪽만 아랫부분에 배출구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들에서 만나는 천년전의 보문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물로서 당시 보문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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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황복사지 삼층석탑.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세웠다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653년에 19세에 출가했던 곳으로 통일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모후인 신목태후와 함께 692년 7월 2일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쌓은 삼층의 석탑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통일신라 석탑이며 국보 제3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황복사지 3층석탑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03


2016/10/31 - (경주여행)신라 27대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낭산 도리천의 선덕여왕릉 여행과 세가지 예지력.

2016/10/29 - (경주여행)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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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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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의 높이는 7.3m로 당시 성행했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약 2m 정도 규모 면에서 작게 바뀌었습니다. 또한, 기단부의 하단 버팀 기둥인 탱주는 3개였던 개 가운데 기둥이 없이 2개이며 면석과 갑석은 각각 8매의 갑석으로 짜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상단의 면석은 8매에 갑석은 4매로 이것 또한, 차츰 간소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1층의 몸돌은 이때까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었다면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하나의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개 그대로이며 위층의 몸돌을 받치는 지붕돌의 상단은 2단의 각형 굄대로 아직은 신라 석탑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이는 신라 시대 석탑양식에서 통일신라의 변화된 석탑양식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석탑으로 보입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복장유물로는 금동사리함과 높이 12.2cm 금동여래좌상, 높이 14cm 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는 효소왕의 아들인 성덕왕이 신문왕과 효소왕의 두 선대 왕의 명복을 빌며 삼층석탑에 안치했는데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두 불상은 국보 제79호와 국보 제80호에 각각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순금의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탑을 세운 목적과 건립연대가 뚜렷하게 나온 석탑입니다. 필자는 경주여행에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보고 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바쁘게 설치다 보니 석탑 주변에 절반가량이 땅에 묻힌 목이 잘린 귀부 2개를 보지 못하고 왔는데 그 귀부의 등에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다 합니다. 또한, 북쪽 밭에는 이곳에서 나왔던 12지신상을 한곳에다 파묻었다 하는데 어떤 모습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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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에게도 농락당하는 아주 유약한 왕으로 묘사되었던 진평왕. 이번 경주여행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을 찾았습니다. 진평왕릉은 낭산과 명활산 가운데 있는 보문들에 고목을 울타리 삼아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낭산 도리천에 잠들어 있는 선덕여왕과는 가까운 거리로 아마 지금도 따뜻한 부녀의 정을 나눌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딸이니까요???





경주 진평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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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은 신라 왕 중에서 박혁거세에 이어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79년에 왕위에 올라 632년까지 53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니 당시 정치 상황을 보면 그의 인생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진평왕의 가족사를 보면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래 온 가족을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모니 왕실 가족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진평왕의 가계도를 보면 아버지는 24대 진흥왕의 장자로 태자로 책봉되었던 동륜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 김씨입니다. 26대 진평왕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伯淨)으로, 그의 부인인 왕비는 복승갈문왕의 딸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 이름 따와 마야부인 김씨로, 그리고 아우도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신체가 건장했으며 성장하면서 의지가 굳고 식견 또한 명철했다는 것을 통치과정을 보면 나타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그려졌던 진평왕처럼 유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이지만 먼저 관제의 정비를 서두르는데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각각 국정과 군권을 장악케 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581년에는 위화부를 설치하여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여러 관제를 정비·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와 잦은 다툼으로 국경은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도 하는 등 삼국 간의 숱한 전쟁에 정세는 더욱 격화하였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합니다.

 

 

 

 

608년에는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유도하였으며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와 더욱 돈독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숱한 위기로부터 신라를 지켜내었습니다. 남산신성을 축성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서라벌의 방위에 진력하였으며 632년 진평왕이 죽자 한지에 장사지내고 당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습니다.

 

 

 

 

진평왕릉의 봉분은 높이가 약 8m이며 지름은 약 40m로 둥글게 흙을 쌓아 만든 원형봉토분입니다.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자연석을 호석으로 돌렸고 지금은 바깥으로 몇 개 들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은 후대에 설치했으며 세월의 흐름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굵고 늙은 노거수들이 수림을 이루어 아이들의 소풍장소로 정말 좋아 보였습니다.

 

 

 

 

 

 

때마침 청명한 가을 하늘에 벌써 유치원생들이 가을 소풍을 나와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진평왕도 꽤 흐뭇해하실 것 같습니다. 세월의 더께 속에 진평왕은 옛 역사는 그저 잊혔다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오늘 진평왕릉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해맑은 가을 하늘은 더욱 높은 거 같습니다. 사적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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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12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당간이라 하면 사찰에서 의식이 있으면 절 입구에 내다 거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말합니다. 이 당간을 지탱해주는 받침대를 당간지주라 하는데 두 돌기둥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란히 솟아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0cm이며 통일신라 시대 사찰로 옛 절터의 기왓장에서 ‘보문’이란 명문이 발견되어 보문사 절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보문사 금당과는 제법 많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문사 옛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금당터에서 서남쪽으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두 기둥이 64cm 거리를 두고 남북방향으로 서로마주모고 있습니다. 마주 보는 안쪽과 바깥면 그리고 좌측과 우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밋밋한 형태인데 단 바깥 측면은 양쪽 모서리를 깎아내어 각을 죽였습니다.

 

 

두 돌기둥에서 북쪽 돌기둥의 기둥 상부는 절단되었으며 마주한 남쪽 돌기둥은 원래 모습 그대로 온전한 상태입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의 특징은 안쪽은 평면인데 반해 그 외 삼면은 아래쪽은 잘록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새입니다.

 

 

또한, 두 돌기둥에는 상·중·하로 각각 3개의 네모난 구멍이 뚫렸는데 상부가 절단된 북쪽 돌기둥은 구멍이 반쯤 뚫려 있으며 그와 반대로 남쪽 돌기둥의 구멍은 관통해 있어 당간을 고정했던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여러 모양의 당간지주를 봤습니다.

 

 

두 돌기둥에 관통된 구멍은 많이 봤지만, 한쪽 기둥에만 구멍이 관통된 것은 매우 드문 형태이며 두 기둥 사이에 설치된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폐사지인 보문사의 규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에 비해 당간지주는 장대하면서도 소박합니다. 또한, 수려하지 않지만 잘빠진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예술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문화재 지정:보물 제123호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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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황사와 절터인 황룡사지 중간에 하늘을 받치듯 우뚝하니 두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름하여 당간지주인데 경주 구황동에 있어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라 부릅니다. 보통 옛날 절터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 동네 이름을 따오는 게 관례인데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도 그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주소: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



옛날 절에서 사찰의 소속이라든지 절을 알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가지 일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습니다. 깃발을 달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고정했던 장치를 당간지주라 합니다. 똑같은 형태를 한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 보게 세워졌으며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남쪽인 입구에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당간지주의 형식을 따랐으며 높이는 360cm에다 두 기둥 사이에 특이하게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를 당간 받침돌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른 당간지주를 보면 돌거북이를 받침돌로 사용했다는 점은 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당간을 고정하는 기둥에는 3개의 구멍을 설치했는데 이는 당간지주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양 기둥을 서로 관통하도록 했습니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담장 밖에 나와 있어 황룡사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추측하건대 정황상 분황사 당간지주였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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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에 설총묘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설총하면 신라 중대 문장가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원효대사이며 어머니가 요석공주로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뼈대 있는 신라 왕족 집안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며 친할아버지는 나마담날로 설총은 경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설씨와 순창설씨의 중시조이며 신라 10현이자 고운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로 꼽고 있습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일화를 보면 출가한 요석공주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요석궁에 머물렀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긴 행로로 몸도 피곤하고 하여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자다 원효는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마침 손에 잡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 물 참 꿀맛이다”며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는 뒤로 까무러칠뻔했습니다. 목이 말아먹었던 그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으며 지난밤 단꿈에 쩔어 잤던 곳은 무덤 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총묘는 지금 이발중 ㅋㅋ



원효는 그곳에서 일체유심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와 노래를 불으며 민중 속을 파고드는 불법을 전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 원효는 색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하며 불렀지만 아무도 그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무열왕만은 노랫말을 듣고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는 뜻으로 단박에 이해하고는 과부로 있는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줄 묘책을 짜냅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향하다가 그만 문천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다 젖게 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과 원효는 서로 이심전심이듯이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원효와는 별 바쁜 일이 없던 관계로 태종무열왕은 온몸이 젖었는데라며 옷을 말린 후 내일 보자며 바로 원효를 요석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라 했는데 그날 밤에 바로 사달이 났고 10개월 후에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원효는 이 일로 파계승을 자처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설하고 설총은 중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두를 만들었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닮은 설총묘 석상다리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인 소리와 뜻을 새겨 우리말로 적은 것을 말합니다. 유교 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하여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으며 이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설총이 저술한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도 있습니다. 제목도 없이 삼국사기에 실렸다가 풍왕서란 이름으로 동문선에도 실렸으며 후대에서 화왕계로 불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이 설총에게 마음이 울적한데 이를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설총은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할 것을 우화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신문왕은 현명한 임금답게 글로 남겨 후세 임금은 모두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1022년인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1623년 조선 인조원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크기는 지름이 15m, 높이 7m이며 흙을 쌓아 올린 반구형으로 아랫부분에는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봉분은 작지만 꼭 신라왕의 무덤 같으며 앞에는 큰 상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위패를 모시는 자리는 흡사 돌의자 같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이며 전 홍유후 설총묘(傳 弘儒侯 薛聰墓)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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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여행은 참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볼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무궁한 역사를 가진 천년의 문화재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주 여행하면 유명 순으로 여행하는 게 하나의 공식 아닌 공식이 되었습니다.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첨성대니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최씨 고택 등 하면서 익히 알려지고 한 번씩 모두 들렀던 곳을 다시 여행할 때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 경주여행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곳 보다는 덜 알려진 곳을 걸으면서 둘러보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황금 들판으로 채워진 보문들 가운데에 보문사지가 있고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와 가까이 있기 때문으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보문동 또는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는 보문사 옛터와 실제적으로 보면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당시 보문사 터의 규모를 대강 짐작해 볼 수도 있지만 또는 다른 절터가 있었던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보통 절 입구에 세웁니다. 절에서 불교 의식을 행할 때 부처님이나 보살의 공덕을 기린다든지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를 말하는데 이를 당간이라 합니다.




연화문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울 때 고정을 했던 돌기둥을 말합니다.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도 이런 맥락으로 세웠으며 보통 똑같은 크기로 밋밋한 형태의 두 기둥이 대부분인데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지주 끝에다 화려한 연화문을 장식한 게 특이하고 이채롭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cm이며 이는 아랫부분이 매몰되어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작아 보이고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두 지주의 간격은 62cm이며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사찰 창건과 함께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간지주 안쪽 면의 윗부분에는 너비 13cm의 크기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당간을 고정했던 장식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간지주의 양쪽 바깥 면의 윗부분에는 동그란 원안에다 지름 47cm의 팔엽연화문을 화려한 조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하며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여러 개의 당간지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 이 보문동(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은 인근의 보문사에서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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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종을 치면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하며 꼭 어린이가 엄마를 부르는 듯해 그 종을 사람들은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이종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며 처음에는 봉덕사에 있어 봉덕사 종이라고도하고 성덕대왕 신종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2016/10/14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최치원의 사산비명 비석 귀부였던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을 보다

2016/10/13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하라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2016/10/12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대왕의 생전 공덕을 기리고자 봉덕사에다 종을 만들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봉덕사신종은 그의 아들인 771년 혜공왕 때에 완성하는데 그게 성덕대왕신종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은 종을 주조할 때 시주해온 어린아이를 종과 함께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


그 전설을 보면 경덕왕은 봉은사에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봉은사로 달려갔지만, 그때마다 종소리는 맑지 못하고 둔탁하며 깨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경덕왕은 실망하였고 주지 스님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렇다며 열성을 다하여 시주해올 것을 스님들에게 당부합니다. 경덕왕은 봉덕사 스님에게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신라 백성들은 삶은 궁핍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입에 풀칠할 건더기도 없는 생활이었는데 하루는 주지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한 농가에 찾아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지 스님이 직접 시주를 받으러 왔는데 시주할게 없는 게 미안하여 “우리 집에서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저 아이밖에 없습니다. 저 애라도 필요하시다면…….” 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비천상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아이를 어찌 시주로 받습니까?” 하면서 돌아 나왔습니다. 그날 밤 주지 스님의 꿈에 “봉덕사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생한 울림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고심 끝에 스님은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 아이를 시주로 받아 갈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시주로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다 부처님 뜻”이라며 합장을 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 나왔습니다. 그 뒤 봉덕사에는 새로운 종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혜공왕은 물론이며 경주의 모든 백성이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종소리를 들으려고 봉은사로 달려왔습니다. 왕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스님은 종을 힘차게 쳤습니다.


 




그런데 청아한 어린이의 목소리가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듯 “에밀레, 에밀레” 하며 종은 슬픈 소리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며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는 게 교리입니다. 그래서 에밀레종을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종의 성분을 조사하였는데 뜻밖에도 사람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혀졌습니다. 아마 성덕대왕신종의 신비로움을 강조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용뉴와 음통





에밀레종의 크기를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높이가 333cm, 종구 너비는 227cm, 무게가 18.9톤의 초대형 종으로 국보제29호 지정 되었습니다. 또한, 종의 표면을 조각한 무늬를 보면 위쪽에는 보상화무늬와 모란당초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렀고 종신에는 4개의 유곽이 있으며 그 유곽안에는 각각 9개로 다 합쳐 36개의 유두가 있습니다. 흔히 유두는 연꽃봉우리와 비슷하여 연뢰라고도 합니다. 종을 치는 부분에는 두 개의 연화 당좌를, 또한 종신 가운데에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받쳐 들은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위에 무릎을 꿇어 앉고 공양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비천상의 대표라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나타내는 듯한 비천상은 더욱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하여 성덕대왕신종의 의미를 말하는듯합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자와 합해 범종이라 합니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하며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던 중생까지도 모두 구제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하면 한자로 쇠 금(金) 자와 아이 동(童)자를 합해 일반적으로 종(鐘)자를 쓰며 이는 중국과 일본의 종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은 쇠 금에 무거울 중(重 )짜가 합해진 새벽종·쇠북종(鍾)자입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종은 우리 종과는 많이 다른데 종을 매다는 용뉴는 중국은 머리 둘 달린 용이라면 우리 종은 한 마리의 용이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또한, 우리 종의 특징은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음통이 용뉴 옆에 붙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상원사동종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범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성덕대왕신종을 경주여행에서 만나보고 에밀레종의 의미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밀레, 에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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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최치원의 사산비명 비석 귀부였던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을 보다


경주여행에서 야외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과 국립경주박물관을 보지 않고는 경주를 보고 왔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만큼 경주 남산과 경주박물관에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습니다.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은 경주 시내에 흩어져 있던 많은 문화재가 관리 소홀로 도굴될까 싶어 옮겨 놓았는데 그 많은 석물 하나하나가 사연과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6/10/13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하라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2016/10/12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2016/06/10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중생사에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다.




경주 철와골 불두(부처머리), 경주 장항리 석조불입상, 경주 중생사 관음보살 입상 등 보면 볼수록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문화재입니다. 이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 인근에 안치된 경주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귀부인 거북받침은 많이 봤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쌍거북를 비석 받침으로 사용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창림사지와 무장사지, 법광사지 등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온전한 형태가 이곳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이라 합니다. 먼저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이 발견된 숭복사지가 궁금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동 곡사(숭복사)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산비명의 탑비가 있었던 곳으로 그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비석이 숭복사 쌍거북을 귀부로 사용했다 합니다.



왜! 귀부로 쌍거북을 받침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창림사와 무장사, 숭림사는 모두 신라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사찰입니다. 창림사는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 궁궐터로 삼았던 곳이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모든 병기를 숨겼던 곳입니다. 896년 신라 진성왕 10년에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을 썼다는 사산비명은 국보 제47호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제 315호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이곳 ‘신라초월산대숭복사비’입니다. 사산비명중 유일하게 파손되어 비석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거북받침인 귀부와 반 토막 난 이수만 일제 강점기인 1930년경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왔다고 하며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신라초월산대숭복사비'도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면 다른 사산비명과 함께 국보가 되는 것은 떼 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깝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에 최치원의 유일했던 사산비명을 숭복사지에다 새로 세웠습니다. 쌍거북인 귀부와 비문과 비신, 이수를 복원하여 세웠는데 비문의 글자체는 쌍계사의 진감국사 비문을 집자하였고 이수 또한 진감국사 탑비의 이수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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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라호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강한 태풍이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지만 또한 더러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도 하고 갑니다.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가 가장 끔찍했다 생각하는 태풍은 1959년 9월 17일 미명의 새벽에 한반도를 상륙한 사라호 태풍입니다. 최대풍속이 85m/s로 당시 사망과 실종자만 무려 849명과 이재민이 37만 명을 웃도는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난리 아닌 난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라호도 큰 피해를 주고 가는 게 미안했던지 야외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의 철와골에 대형 불두(부처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가버렸습니다.





 


이 부처 머리가 얼마나 큰지 높이는 153cm에 무게는 1.7톤으로 초대형 불두였습니다. 얼마나 크고 무거웠으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오는 것도 큰 문제였는데 군의 공병대까지 나서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불두를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민머리에 틀어 올린 머리인 육계는 큼지막한 게 머리 위에 우뚝하고 이마에는 백호를 돋을새김했습니다. 또한, 반원형의 눈썹 하며 도톰한 눈두덩을 보면 마음씨 좋은 우리 옆집 아저씨의 모습입니다. 아쉽게도 오뚝했을 코는 사라호 태풍 때문인지 깨어졌으며 두툼한 입술은 옅은 미소가 베어져 나옵니다. 불두의 크기만으로도 석불상의 전체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입상이라면 10m 이상의 석불 상일 것이며 좌상이라도 최소한 6m 이상의 크기라야만 비례가 맞습니다.


 


그러나 철와골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이 불두를 지탱할만한 몸체를 찾을 수 없었다 합니다. 태풍에 의해 이곳으로 공중부양해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그럼 과연 이 불두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추정을 하면 경주 남산의 열암골 마애불이 그 좋은 예입니다. 열암골 불상의 비례는 불두만 1/4인 4등신에 전체 높이는 460cm입니다. 즉 기도자의 시선을 고려하여 이목구비가 선명하며 뚜렷한 부처님의 머리를 크고 잘 보이도록 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인자한 얼굴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서 보인다면 더욱 숭배심이 생긴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뜻으로서 철와골의 부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 철와골에는 이 불두를 받칠만한 크기의 몸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경주남산의 미스터리 중 하나입니다. 사고 만 치고 가는 게 미안해서 아마 사라호 태풍이 선물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대형 불두 발견한 곳: 경주남산 철와골

경주 남산 철와골 불두 제작시기: 통일신라 8세기 말에서 ~9세기초


★국립경주박물관 주소: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전화: 054-740-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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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야외에 전시된 많은 불교 문화재가 있습니다.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석불과 석탑 석등 등 수많은 석물의 부재를 전시 중인데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상반신의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모습은 세월에 치여서 그런지 광배가 이리 깨어지고 저리 깨어지고 해 온전한 모습이 아닌데 실제로 조각 조각난 불상을 외과 수술로 봉합하여 지금은 흉물스러운 옛 모습은 사라지고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가득 담은 온전한 불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석상이며 일반 화강암과도 바위 색상이 틀려 보여 일반 석불이 황인종 부처님이라면 꼭 백인종 부처님일 정도로 전체적인 느낌이 특이한 모습입니다. 장항리 절터에서 옮겨온 석불은 이목구비가 너무나 뚜렷한 호남형의 불상으로 경주 양북면의 토함산 자락에 있었습니다.



 경주 장항리 사지는 사적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앞에서도 말했지만, 토함산에서 동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두 개의 계곡이 서로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두 계곡의 물은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지 앞과 이견대를 지나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흘러갑니다. 현재까지 절터의 이름은 확인된 바 없으며 그곳 동네 장항리의 이름을 따 장항리 사지로 부릅니다.



일제강점기 때 욕심 많은 도굴범이 무엇을 훔쳐가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다이너마이트로 처참하게 폭파해 버렸다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현재 장항리 동·서탑과 좌대 등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중 서탑인 경주장항리오층석탑은 1987년 3월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탑과 비교하면 동탑은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으며 파손상태가 심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두 탑의 몸돌에 조각된 인왕상 조각은 매우 우수한 조각가의 섬세한 솜씨가 돋보이는 석탑입니다. 그와 함께 규모가 아주 큰 좌대가 인상적인데. 아래·위 2단입니다. 복련과 앙련의 연화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진 상단과 그 아래 하단인 중대석은 8면에다 창문 모양의 안상을 만들었으며 4면에는 동물을, 또 다른 4면은 신장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대강 짐작해도 이정도의 대좌라면 불상의 규모가 아주 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파괴되어 뒹굴던 것을 수습하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습니다. 장항리 석조불 입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경주국립박물관. 장항리석조불 입상은 높이 2.5m이며 통일신라 8세기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왜 하반신이 없는 상반신만 된 석조불상을 입불상이라 부르는지는 대좌에 남아 있는 불상을 세울 때 사용하는 촉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석조불 입상의 전체적인 크기는 4.8m로 추정하는데 옛날의 척도를 보면 그 높이가 1장 6척입니다. 아주 큰 불상에 속하는데 이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 부처의 키가 1장 6척이라 하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빛을 발하는 듯 불꽃형상과 작은 부처님 등 하나의 섬세한 예술작품을 만나는 듯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깨어진 불상 조각을 하나하나를 시멘트나 접착제로 붙였으며 부족한 부분은 장항리 절터 주위에 있는 똑같은 바위를 찾아내어 복원하여 마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장항리석조불 입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본존불과 매우 유사합니다. 위엄 있는 표정에다 풍만하고 건강한 신체하며 사실적으로 나타낸 옷 주름 등의 조각수법에서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 중인 여러 불상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부처인 장항리 석조불입상은 처참할 정도로 파괴된 상태라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통일신라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고 볼 수 있는 불입상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주소: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전화:054-740-7500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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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남산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경주에서 그것도 남산 여행을 할 때는 꼭 챙겨 가는 곳이 있습니다. 아니 안가면 뭔가 서운한 게 꼭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곳이 어디냐고요??? 그곳은 바로 경주 남산의 바위 꼭대기에 조성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입니다. 이리 설명을 해서는 조금 생소하다고요. 그럼 경주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가 있는 칠불암이 있습니다.






◆경주남산 가볼만한 곳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3/09/11 - (경북맛집/경주맛집)경주남산맛집, 오리맛이 살아 있네 약천한방생오리전문점

2012/09/24 -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잔잔하며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보리사 마애석불

2012/09/28 - (경주남산여행)장인의 조각솜씨에 경탄, 화강암을 시루떡이라 생각했는지-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2013/02/11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 상서장.시대의 풍운아 최치원과 상서장

2013/03/08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보일듯 말듯한 섬세한 조각기법이 예술.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2009/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불두는 달아나고 없지만 경주남산에서 섬세하고 가장 큰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칠불암을 기댄 곧추선 바위 꼭대기에 얹어진 집채만 한 바위에 부조한 마애불이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입니다. 남산의 많은 문화재 중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보물 제19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경주 남산의 많은 마애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것 같습니다.





과하지 않은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보면서 신라인의 미소를 생각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인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경주 출신의 한사람인 저의 마음을 항상 찾을 때마다 포근하게 해줍니다.





누군가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정말 경주 남산에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하며 딱 어울리는 애칭 같습니다. 지금부터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나보겠습니다.















최근에 만났던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전에 없던 안전시설물이 설치되었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찾아가던 길이 조금은 위험해서 진입로를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안전시설물인 나무 울타리입니다.







원래 이곳은 토함산 넘어 동해 일출이 장관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햇볕을 받으면 마치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따뜻한 체온이 숨어 들어온양 갑자기 붉게 변하며 온화한 미소는 더욱 화사하게 변하고 근육은 살아 있는 듯 꿈틀 그리는 모습에 넋을 잃고 보았던 곳입니다. 그런 곳에 목책이 있어 이제 전체적인 감흥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 위로 보계가 솟아있어 보살상을 뜻합니다. 얼굴에 나타난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약간은 통통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남성의 근엄한 표정과 온화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천의는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대좌 아래로 흘러내리며 두 손은 가슴까지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꽃가지를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붙이고 가슴까지 들어 올려 설법하는 모양을 취했습니다. 또한, 오른발은 대좌 아래로 내려 연꽃 위에 올렸으며 왼 다리는 대좌 위로 올린 유희좌와 비슷한 반가좌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주 드문 예로서 평가받으며 대좌 아래에 뭉글뭉글한 구름을 조각하여 마치 천상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 남산의 신라 예술품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2005년 당시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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