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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04호 밀양상동터널. 1905년 경부선  개통때 뚫은 밀양 상동터널 벛꽃이 한창.


밀양시 상동면 경부선의 상동역 건너편에는 지금도 밀양상동터널이란 이름으로 터널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철도 시설 문화재입니다.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887번지로 옥산리와 안인리의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은 옥교봉의 산세가 단애를 이루는 곳으로 사람도 겨우 다닐 정도로 층암절벽이었습니다.



 

 

 


 1905년 1월1일 왜인들은 한반도를 수탈할 목적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철도를 깔았습니다. 그해 5월28일에 개통식을 열었는데 밀양 상동 터널은 그 당시에 빈지소를 감싸고 있는 바위를 뚫고 건설된 그야말로 획기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기술이었다 합니다. 두 개의 터널로 이루어진 상동터널은 40m와 60m로 아래편에는 사각의 견치돌을 붙이고 위쪽인 천장은 붉은 벽돌을 쌓는 건축기술로서 당시에서는 아주 수준 높은 건축방식이었습니다.



 

 

1960년 초에와 경부선 철도의 노선이 변경되어 밀양강 건너편의 금산리로 옮겨 가고 기존 철로는 레일을 걷어내고 콘크리트 포장을 하여 차량과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유천 강변이라 하여 80~90년대 여름철에는 많은 휴가객이 몰려들었던 곳입니다.



 

 

 

 

그 당시는 유천역이었는데 현재에는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찾았던 밀양 상동터널은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벚꽃이 절정이었습니다. 숫제 꽃비가 내릴 정도로 벚꽃이 날렸는데 비오는 중에도 차량을 몰고 온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한 데이트 장소입니다.



빈지소

 

 

청도천과 동천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서로 만나 이때부터 밀양강이 됩니다. 밀양강은 상동역 앞을 흘러 밀양의 영남루 앞을 지나 자연스럽게 낙동강에 흡수되는데 상동역 앞의 휘어진 곳을 빈지소라 부릅니다. 밀양강(응천강) 상류 북천수는 잔잔하게 흐르던 물의 흐름이 이곳에 와 급해지면서 암반에 부딪혀 꺾여 돌아가게 됩니다.





 

 

물이 부딪힌 부분은 자연스럽게 패여져 깊은 수심을 이루지만 그 반대편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넓은 공터로 바뀌어 밤벌로 현재 부릅니다. 이곳 물가에 개구리 먹이인 밥풀 즉 부평초, 빈초가 많이 자생하여 빈주가 되었다가 빈지로 변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빈지소

 


 이곳 빈지소에는 자라전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하씨 성을 가진 분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고기장수로부터 등에 왕(王)자가 선명한 큰 자라를 한 마리 사 이곳 빈지소에다 살려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어느 해 대홍수가 발생하여 마을이 물바다가 되어 꼼짝 없이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다합니다.



 

 

 

 

그 때 큰 자라가 나타나 마을 앞 건너편의 제방을 무너뜨렸는데 물이 그 무너진 제방으로 흘러가면서 마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합니다. 하씨로부터 목숨을 구한 자라가 은혜를 갚았다며 미물도 이리 은혜를 갚는다며 이 마을의 하씨들은 그 이후부터 자라를 잡거나 먹지 않는다 합니다.



 

 

근대문화유산인 밀양상동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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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구서울역사)인사성 바른 청년이 수문장인 구 서울역사 구경하고 왔습니다.


지방에서 서울을 오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치는 곳 중 한 곳이 서울역입니다. 지금이야 새로 신축한 서울역 건물이 승객을 맞고 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울역사는 중후한 멋을 지닌 건물이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철로가 깔린 것은 경인선이지만 부산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진 철길은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를 수탈할 목적으로 선로를 깔았습니다. 엄청 난 우리 농광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당시 세웠던 서울역사 건물로 우리 민족이 당한 수난을 고스란히 지켜본 건물입니다. 구 서울역사를 보존함으로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후세에도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말에 부산에서 밤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에 자주 올라 갈 일은 없지만 갈 때마다 그래도 비행기 보다는 꼭 기차를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기차는 마음속에서부터 무엇인가 추억을 느끼게 합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칙~폭 칙~폭 칙칙폭포 칙칙폭포” 하며 달려가는 기차의 모습이 아련한 나의 추억 같아 그런 가 봅니다. 예전에는 저녁에 출발하는 비둘기열차를 타고 올라가면 아침에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 3시간이면 고속철도(KTX)를 타고 서울에서 누구를 만나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궁화를 타고 올라갑니다. 새벽에 도착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아침에 부러 찾아가 구경을 한 구 서울역사, 근대물인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서울역사의 모습을 정말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철도의 역사는 대한제국때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재물포를 운행하는 경인철도가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입니다. 그 당시는 남대문역사로 출발을 하여 구 서울역사는 1925년 르네상스풍의 절충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서울역사를 보면 중앙돔과 소첨탑 좌우로 양날개의 모습이 특징인 건축물로 스위스의 루체른역사를 본떠 만들었다합니다. 역 내부를 보면 1층에는 중앙홀 좌우로 대합실이 있었다합니다. 





그 당시 분주함의 서울역사가 그려집니다. 2층에는 서양식 레스토랑이 있었다하니 요즘의 서울역과 별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무원의 사무실도 함께 있었다합니다.





지금 구 서울역사는 역동의 세월을 달려온 만큼 2004년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안식을 위해 1925년 건설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전시와 공연,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시민과 함께 달려온 서울역사의 기능을 충실하고자 소통의 공간 되고 있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사적제 28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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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수라도 무대였던 소설속의 미륵당이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보다.

 

양산시 물금읍의 물금역을 나오면 물금취수장을 따라가는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올라가는 3곳의 영남대로 중 한곳으로 부산을 거쳐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는 중도의 영남대로입니다. 이 초입에 용화사의 작은 절집이 있습니다. 또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에는 위험한 길로 알려진 곳이 세 곳입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그리고 토끼벼루로 세 곳 중 두 곳이 이곳 물금과 원동 그리고 삼랑진을 잇는 낙동강 길에 있습니다.

 


 

 

 

낙동강을 예전에는 황산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따온 황산잔도는 험하기로 익히 알려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황산잔도의 초입에 있는 용화사는 절의 사세에 비해 보물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보면 부산의 문인이었던 요한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라도의 배경은 이곳 화제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수라도의 내용 속에는 미륵당이 등장합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가야부인이 창건한 미륵당이 용화사, 수라도 무대였던  미륵당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합니다. 가야 부인은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교 관습에 의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가야부인의 뜻을 알고 절을 짓는데 그곳이 지금의 용화사로 소설속의 미륵당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 미륵당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감로사지에 있던 불상이라 합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옮겨 오다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낙동강변에 버렸다는 전설입니다. 소설속에는 가야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어 미륵당을 짓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용왕대재의 행사를 봄이면 한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하여 용왕대재를 지낸고 있습니다.

 


 


 

 

 

용화사는 사실 미륵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너무 초라한 절집입니다. 그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문화재 안내문을 보면 보물 제491호이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입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양산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광배는 파손된 상태였고 불상은 낙동강의 뻘밭에서 건져 올렸는지 백색의 호분이 범벅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용화사의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완벽한 모습으로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이는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완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좌도 대좌지만 대좌 뒤의 광배가 화려하며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하다합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상과 구름을 세겨 본존상이 구름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도 나타난다합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공양천인상이 세겨진 것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뿐이라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뚝뚝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용화사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 옆이면서도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가보면 용화사 앞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 선로가 놓여져 있어 항상 덜커덕 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낙동강을 볼 수 있는 굴다리가 뚫여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수탈의 목적으로 놓여진 경부선은 처음에는 단선으로 놓였습니다. 단선일때 붉은 벽돌을 돌려 놓은 동굴의 내부에 사각의 돌을 깍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굴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선이 되어 확장을 했던 굴다리의 모습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어 시원하게 황산잔도를 볼 수 있어 여행삼아 가면 너무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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