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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합천여행)신라 폐사지를 찾아서 합천 백암리석등과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 여행


합천군과 의령군의 경계에 솟은 국사봉을 산행하고 항상 찾아가려고 마음만 먹었던 무월봉 아래 골짜기에 있던 폐사지에 합천 백암리 석등과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찾았습니다. 

도로에서 대략 2km 가량 떨어져 있어 대형버스는 갈수 없고 승용차나 걷는 수 밖에 없지만 걷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였습니다.



합천백암리석등과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 주소: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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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자가운전을 해 온 덕분에 편안하게 합천 백암리 석등이 있는 폐사지 인근까지 갔고 주차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대충 주위에 주차를 했습니다. 

저 멀리 석불좌상 노거수인 느티나무가 보였습니다. 

논밭 한가운데 자리해서 논둑을 따라가려니 찾아가는 것도 상그러워 보였습니다.



당시 모내기철이 아니라 급한 마음에 무논을 가로질러 바로 합천 백암리 석등을 찾아갔습니다.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작은 철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는 그야말로 황량한 분위기였습니다. 

합천 백암리석등과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줄로 나란히 서서 손님을 맞았습니다.



안내판에는 백암사 또는 대동사가 있었다는데 확실하게 드러난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검색에서 백엄사로 추정하며 합천 해인사보다 더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게 아닌가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이곳저곳을 찾아 공부를 좀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이리 열심히 찾고 했다면 벌써 문화재 박사라도 했을 낀데 말입니다.

 


그런데 찾아본 결과는 국사봉 산행의 출발지인 서암마을에는 한지전시관이 있었습니다. 

한지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말하며 그 시초가 대동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암리 석탑과 함께 있는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의 그 대동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종이 이전에는 죽간이나 목간에다 글을 써서 기록했습니다.



종이의 발명이 우리 문명에 끼친 영향은 정말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종이는 절에서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큰 사찰에서는 모두 한지를 자급자족하여 만들어 사용 했으며 절 주위에다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를 많이 심고 관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지를 처음 만들었던 곳이 대동사이며 이절에 설씨 성을 가진 스님이 닥나무를 짓이겼더니 서로 엉켜붙는 것을 보고 연구 끝에 한지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에 봉수면과 백엄사(대동사) 아래 백암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집이 한지를 생산하였고 우수한 품질로 궁궐의 진상품에 올랐으며 중국에 수출까지 했다고 합니다.



백엄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합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 석탑사리’편에 나온다고 합니다. 

백엄사의 창건은 신라시대이며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문화재를 보면 신라시대에부터 있던 사찰로 보여집니다.

 


그리고나서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고려시대인 906년(효공왕10년)에 양부화상이 중창하였으며 925년(태조8년)에 희양산파의 긍양화상이 10여년간 머물다 희양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긍양의 뒤를 이어 신탁화상이 주지가 되었으며 1065년 11월에 당시 주지였던 득오미정대사 석수립이 ‘백엄사에서 지켜야 할 규칙 10조’를 정하면서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부처님 진신사리 42과를 봉안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엄사 규칙 10조를 보면 사재로서 보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 백엄사에서 불법을 수행하던 엄흔과 백흔, 근악 세분의 보를 세워 공양할 것, 금당의 약사여래불 바리때에 매월 초하루에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입니다. 

엄흔과 백흔 두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절을 창건했고 두사람의 이름인 백자와 엄자를 따서 백엄사로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또한, 신라 때에 북택청 터를 희사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합천 백암리 석등은 주위에 널부러져 있던 부재를 모아 원래 모습그대로 인 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복원한 상태입니다. 

석등을 보면 그저 밋밋한 형태가 아니고 석등을 받치는 받침돌과 화사석의 사면에 새긴 조각을 보고는 매우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석등의 받침돌을 보면 아래로 향한 8장의 연꽃 잎인 복련을 새긴 둥근 받침돌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깨끗한 형태의 팔각기둥을 세웠습니다. 

그위에 화사석을 받치는 윗받침돌에 하늘로 향한 여덟장의 연꽃인 앙련을 새겼습니다.

 

대동사지 여래좌상

그 안쪽에는 홈을 파서 불을 밝히는 팔각의 화사석을 고정시켰습니다. 

화사석의 네면은 창을 내고 나머지 네면에는 악귀의 근접을 막는 사천왕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습니다. 

화사석 위에 지붕돌 밑면은 1단의 받침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홈을 내어 화사석을 고정시켰습니다.






지붕돌의 여덟 귀퉁이에는 꽃조각이 붙어 있었다하나 지금은 모두 깨어져 흔적뿐이며 지붕돌의 경사면은 얇지만 뚜렷하게 각을 지은 모습입니다. 

합천 백암리 석등의 여러 전형을 종합해보면 군드더기 없이 깔끔하고 늘씬한 게 8세기 후반의 통일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경쾌한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물 제381호




합천백암리석등과 함께 있는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았습니다. 

연꽃 좌대위에 석조불상이 사바세계을 내려 보는 듯 따뜻한 부처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얼굴부분은 알아 볼수 없게끔 마모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정교한 석조여래불입니다.



머리 가운데에 상투모양의 육계가 높이 솟았고 법의는 통견으로 양어깨를 감싼 형태이며 상체에서부터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을 감싸고 있습니다. 

오른쪽 무릎에 올린 오른손은 아래를 보고 왼손은 왼쪽무릎에 올렸으며, 손끝은 아래를 향하여 땅속의 악귀를 물린친다는 뜻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추었으며 연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이며 팔각의 중대에는 각면에다 악귀의 근접을 막으려고 갑옷과 투구를 쓴 여덟명의 신장상을 새겨놓아 석조여래좌상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대 또한 상대와 반대방향인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함께한 합천백암리 석등에서 보듯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석조여래좌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합천 백암리 석등



현재 이곳은 두 번의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주위에 흩어져있던 부재와 부도골 등을 종합하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엄사 또는 대동사는 모두 국사봉이 보이는 곳에 있었던 사찰 같습니다. 

발굴된 기와조각과 건물 터 등을 보면 고려와 조선초까지 연결되며 또한 삼국유사에 백엄사는 초팔현(지금의 초계면)에 속했으며 현재 대양면 백암리가 당시 초팔현에 속했다합니다.

 이와 함께 2008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서 여러 정황을 비교해 백엄사지로 볼수 있다는 추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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