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계서당.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여행


청정골 봉화여행을 하면서 소설과 판소리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생가가 있다 하여 아니 웬 봉화에 이몽룡생가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정보를 알고는 가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허구의 춘향전이 아니라 이몽룡은 실제 인물이라는 점에 더욱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찾아갔던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은 그야말로 한적한 산골 오지에 자리했습니다.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전화:054-679-6090




2017/11/04 - (경북여행/봉화여행)산타마을 분천역. 우리나라에도 산타마을이 있어요? 영동선 분천역 산타마을

2012/12/07 - (경북봉화여행)봉화 선달산산행. 신선이 놀던 곳 백두대간 선달산 산행

2012/12/16 - (경북여행/봉화여행)단맛없는 사이다 맛이 이런 맛.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 오전약수

2012/12/17 - (경북여행/봉화영월여행) 단군왕검을 뜻하는 박달나무, 우리나라에 박달령이 많은 이유가 있네. 백두대간 선달산 박달령

2013/11/13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청량산 축융봉.청량산 전망대 청량산 축융봉 산행.청량산



 


춘향전의 남자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분의 성함은 창녕성씨 16대손인 계서 성이성(1595~1664)이며 청백리에 이름을 올린 분으로 한마디로 불의를 보면 참고 넘기지 못하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이몽룡 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관아를 찾아 갑니다.



변사또는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이를 앉혀 놓고는 주지육림으로 흥청망청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이몽룡은 사또를 칠언절구로서 질타하는 인물로 성이성선생과 너무 닮았다 하겠습니다. 이를 보고 소설 속의 이몽룡은 봉화의 성이성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은 아닌지 싶었습니다.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의 교와문고(僑窩文藁)에는 춘향전의 어사 출도 장면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걸인 행색을 한 이몽룡이 지필묵을 요청해서 써내려간 한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사람의 피요)/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爻萬姓膏:소반위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이 기름이라)/촉루낙시민루낙(燭淚落時民淚落: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의 소리 높더라)”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춘향전 이몽룡 한시가 발견된 것이지요. 







또한, 성이성은 4번의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면서 호남에 두 번이나 어사로 활동한 것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몽룡과 성이성을 동일인이라 주장한 사람은 연세대학교 설성경교수로 1999년11월 그의 논문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에서 입니다.

 



성이성의 인물 탐구에 앞서서 춘향전의 대략 줄거리를 보면 남원부사의 아들인 이몽룡과 기생 월매의 딸인 춘향이 광한루에서 정분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이도령과 춘향이는 다음에 만날 것을 언약하며 이별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새로 남원부사로 부임한 신관 사또는 춘향의 미모에 홀라당 반하여 수청들 것을 강요하였고 춘향은 일부종사를 들어 수청들기를 거부하자 열받은 사또는 "니 한번 죽어볼래"하며 춘향이를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해서 암행어사가 되어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치며 들이닥쳐 탐관오리인 남원 사또에게 “니 죄를 니가 알렸다”하며 봉고파직하고 감옥에 가두는 서민인 우리로서는 아주 통쾌한 권선징악의 내용입니다.

 




아!! 요즈음에는 이런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이 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 성춘향은 성이성과 같은 성씨 성을 썼다는 점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습니다. 성이성의 아버지인 부용당 성안의(1561~1692)도 소설 속의 내용처럼 남원부사로 재직을 했으며 성이성 또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내려와 공부하고 뒤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어쩜 내용이 소설 속과 많이 닮았습니다.






성이성은 21세인 1616년에 생원시에 합격해서나 당시 나라 정세가 너무나 어지러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으로 인조를 호종하는 아버지를 따랐다가 난이 평정되자 성균관에 들어갔고 인조5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정언에 임용됩니다.



그러나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그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들이려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신하들의 반발로 논쟁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원종에 추증해 밀어붙였고 성이성은 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의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암행어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강계부사 재직 때에는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는 “관서활불(關西活佛)”로 칭송받는 훌륭한 목민관이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라는 ‘청백리’에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생가는 1613년인 광해군 5년에 지어졌으며 사랑채인 계서당은 후대에서 보수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성이성의 후손이 안채에서 생활하고 있어 집안에는 사람의 훈기가 가득했습니다. 6칸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사랑채를 보는 것을 잠시 미루고 사랑채와 붙은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갔습니다. 성이성 선생의 후손으로 보이는 분이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를 보고는 “어서오시라”며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오랫동안 안채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농촌의 살림살이가 마당과 축대에 그대로 나뒹굴고 너른 대청이 훤하게 뚫려 있는 것을 보면 살아오면서 가옥 구조에 변화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인 건물 형태는 ‘ㅁ'자형 배치입니다. 이런 구조는 추운 지방인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건물구조입니다. 밖으로 되돌아 나와 사랑채인 계서당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계서당은 높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워 웅장하며 듬직해 보였습니다. 떡하니 버틴 게 성이성의 강직한 성품을 마주하는 듯했습니다. 봉화여행에서 이몽룡의 실제 인물만이 아니라도 목민관의 본보기가 되는 성이성의 생가 계서당을 꼭 만나고 오세요.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