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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해인사.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불법종찰인 가야산 해인사를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합천의 명산인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산이 해인사고 해인사가 가야산으로 통할 정도로 서로 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성지로서 가장 신령스런 산중 한곳입니다. 가야산의 산 이름에서도 불교색채가 아주 강한데 '가야(Gaye)'의 뜻은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드신 ‘붓다 가야’에서 가야산을 따왔다고 하며 또한, 옛날 가야국이 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가야산은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졌으며 이런 곳에 해인사가 창건한 것은 어쩜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2016/08/24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홍제암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해인사가 가야산에 창건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공(418~514)스님이 예언하기를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셨다는데 약 300년쯤 후인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창건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법등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해인사의 이름을 보면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나왔다 합니다. 해인삼매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말할 때 들어간 선정의 이름으로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 즉 ‘마음의 고요함’을 뜻합니다. 사부대중인 필자는 해인사 이름에서 벌써 복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해인사는 창건과 함께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선원, 강원, 율원을 포함한 최초의 총림으로 지정했으며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고려팔만대장경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 유산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에는 고려팔만대장경경판과 해인사의 모든 경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재의 보고인 해인사를 늦었지만 여행하고 왔습니다.





먼저 부도전을 지나면 독특한 유래를 가진 ‘길상탑’이 있습니다. 길상탑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 9년인 895년을 전후하여 7년간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을 위해 해인사 훈혁스님이 탁발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그 나머지로 길상탑을 세워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빌고자 무명으로 전쟁터에 나가 죽은 승병 56위의 넋을 기린 위렵탑입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1965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운양대묘길상탑지’와 157개의 소탑 등 유물이 나와 당시 사회 상황과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탑의 건립 내력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그리고 특이하게도 길상탑앞 도로에는 지금은 없지만 해방 이후까지 홍살문이 존재했으며 당간 석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해인사 일주문은 1940년대 주지였던 변설호스님 때 대목장 이화백에 의해 중건하였습니다. 정면 현판의 ‘가야산 해인사’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섰으며 판각은 임환경 스님이 새겼고 뒷면의 ‘해동제일도량’ 현판은 박해근이 걸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해인사를 찬미하였는데 “해인사의 사기는 가야산의 전국적 중심지로 그 자세가 당당하고 그 환경이 수려 명미 하여 아려한 위인이 칼을 잡고 설교하는 것 같다. 완연히 움직이는 활화일폭이다. 해인사는 명구라고 하느니보다 승지이며 승지라고 하느니보다 성경이다. 나는 국내외 사찰들을 많이 보았으니 해인사에 필적할만한 사기를 보지 못하였다. 거룩하다는 한 말 이외에 무슨 형용사를 붙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소원나무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을 가기 위해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전에 먼저 석등을 만납니다.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며 사찰 경내를 어둠에서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해인사의 석등은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수법을 보면서 그 뒤쪽의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여덟 잎 연꽃무늬가 엎어진 복련과 팔각의 화사석 아래에 연꽃무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련 사이에 세운 팔각석간이 짧은 것은 1926년 석탑을 개축하면서 함께 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석등 북쪽에는 정중삼층석탑이 있습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 등을 봉안하는 곳입니다만 정중삼층석탑은 불상을 봉안한 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마 해인사가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적광전 앞마당 한 쪽에 석등과 함께 약간 비켜 서 있습니다.


 

 

 

 


비로탑은 높이 6m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원래 통일신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2층 기단이었지만 1926년 중수하면서 3층 기단으로 탑을 높이고 확장하였습니다. 석등과 석탑 사이에 바닥 돌이 놓여있는데 정례석으로 이는 멀리 부처님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는 곳입니다.


 

 

 



비로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 좌우에는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으며 궁현당 뒤에는 적묵당, 진영전, 정수당 등 전각 대부분이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사용합니다. 이제 대적광전이 있는 높은 축대를 오릅니다. 가운데 대적광전이 있으며 왼쪽으로 대비로전과 독성각, 오른쪽은 명부전과 응진전 등 예불공간입니다.


 

 


이제 해인사의 중심법당이자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보겠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습니다. 원래는 해인사를 창건하면서 비로전이 중심법당이었고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6번이나 화재로 중창하면서 1488년에 대적광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단층이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남긴 해인사 그림에 2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817년 화재로 중창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전각으로 추정됩니다.


 

 


대적광전의 의미는 비로자나불이 항상 계시면서 시공을 통하여 화엄경을 늘 두루 설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적광전의 수미단에는 모두 일곱분의 불보살을 봉안한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시고 그 왼쪽으로 지장보살, 보현보살, 법기보살을, 오른쪽에는 이전의 본존불이었던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중 관세음보살과 법기보살은 쇠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그 외 불상은 모두 목조로 만들었습니다.


 

 

 

 


대적광전 수미단에 모셔진 본존 비로자나 부처님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불상의 높이는 233.3cm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함께 처음에는 경북 성주군의 금당사에 봉안된 부처님이었는데 절이 폐사하면서 가야산의 용기사로 옮겨갔고 용기사 마저 폐사하면서 1897년 법운스님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 해인사 대적광전은 팔작지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며 큰 규모입니다. 네 면의 대적광전에는 모두 각각의 현판을 달고 있는데 이는 앞면의 대적광전 현판 글쓴이는 현재 알 수 없으며 뒷면 대방광전, 동쪽 면의 금강계단, 서쪽 면의 법보전은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글씨입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7년 (순조17년) 제월당 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노경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직접 썼다 합니다 해인사의 주련은 당시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니 해인사의 대적광전은 당대 명필들의 글씨로 더욱 유명합니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주련을 옮겨보겠습니다.

“불신보방대광명(佛身普放大光明) 부처님이 큰 광명을 두루 놓으시니

색상무변극청정(色相無邊極淸淨) 색과 모양이 가없이 청정하네

여운충만일체토(如雲充滿一切土) 구름이 온 국토에 충만하듯이

처처칭양불공덕(處處稱揚佛功德)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네

광명소조함환희(光明所照咸歡喜) 광명이 비치는 곳마다 넘치는 환희여

중생유고실제멸(衆生有苦悉除滅) 중생들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네“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



2016/08/25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가야산이 있는 해인사의 지세는 거대한 방주형으로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고 중봉의 마애석불이 키를 잡는 선장이며 장경각 가운데에 큰 바위가 돛대바위였다 합니다. 그러나 1926년 대적광전 석축 보수를 하면서 이곳 바위를 깨어 사용하였습니다. 배의 돛대를 없애버렸는데 60년만인 1986년에 돛대바위 자리에 돛대를 대신하여 수미정상사리탑을 세워 이제 해인사는 앞으로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는 학사대입니다. 신라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와 글씨를 쓰면서 보냈던 곳입니다. 그는 특히 가야금에도 능했는데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전나무에 수많은 학이 날아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고 전합니다. 학사대의 전나무는 최치원이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그게 살아남아 지금도 가지가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라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보신 법당입니다.  법당에는 중화 3년인 883년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끝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해인사를 찬미한 한시를 해석해 놓은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옛 가야에 묻혀 있는 울창한 가람

천리 구름이 떠 있는 산을 대하며 참선을 한다

새가 내려 않은 정원에서 스님은 선정에 들고

담비가 나무를 타고 개염의 달콤함을 맛본다

글 바위 바둑 누각 어느 뉘 살고 있나?

잣나무 오동나무 소곤소곤 이야기 주고 받는다

객은 떠날 날 꼽으며 잠 못 이루고

깊은 밤 달빛은 소나무 탑 사이를 비춘다“


(참고: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발행)

 



성철스님의 사리탑


2016/05/12 - (경남여행/산청여행)산청군 단성면 겁외사,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산은 산이요 물은물이로다" 성철스님 생가 율은고거와 겁외사 여행. 산청 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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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합천에 가야산이 있다면 가야산에는 법보사찰 해인사가 있습니다. 그 해인사를 대표하는 게 법보사찰의 상징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입니다. 그 큰 해인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관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광보전 뒤쪽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전각 밑 계단에 올라서면 벌써 샤~ 하고 느끼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대장경의 엄숙한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대장경의 보안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고 많은 경비원이 물샐틈없는 관리를 하고 있는게 역시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보배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 때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국가적인 사업으로 두 차례 간행되었습니다.


 

 

 

 


먼저 1011년 간행된 대장경판은 구판대장경이라 합니다. 거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부처님의 원력으로 1087년까지 77년간 작업을 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구판대장경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입하여 그만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 뒤 1236년 재차 대장경판 간행 작업을 추진하여 16년만인 1251년 완성하였습니다. 그때의 대장경판이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중인 고려대장경이며 팔만대장경으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왜 팔만대장경이라 할까요? 경전이 새겨진 장경판 수가 팔만 장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아주 많은 숫자를 가르칠 때 팔만 사천이라 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하는 데서 기인한다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하게 81,350판이며 목판에 양각으로 새겼습니다. 이는 한역 경전에서 가장 오래된 원판 본으로 수정할 곳이 없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총 1,514 경전에 52,382,960 글자, 6,79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경판으로 해인사를 모두 법보종찰이라 알고 있습니다.


 

 

 

 


대장경판에 사용된 나무는 산벚나무 등이며. 해충의 피해를 막고 조각을 쉽게 하기 위해 펄 밭에 담그거나 바닷물에 오랫동안 통째 쪘다 합니다. 대장경을 만들던 곳이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로 추정하는데 이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는 나무 운반이 쉽고 뻘밭과 소금물, 조각에 사용하는 칼과 쇠붙이를 만드는 대장간, 인쇄에 필요한 한지를 만드는 한지마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대패로 곱게 다듬은 판자에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한지에다 경문을 쓰고 경판에 다시 글을 쓴 한지를 풀칠하여 조각칼로 하나하나 깎아내었다니 그 작업의 정밀도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듯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요? 아차 하는 한 번의 실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이며 한글자 한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한번 했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하여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양순체로 붙여진 글자는 꼴이 한결같으며 아름다워 꼭 한 사람이 쓴 듯 일정하다 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재주가 정말 뛰어난가 봅니다. 손으로 하는 기술이나 양궁, 골프 등 운동은 세계 최고인 게 이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경판 면과 경판 양 끝에 각목으로 덧댄 마구로로 만들어졌는데 경판의 총 길이는 약 70cm, 폭은 약 24cm, 두께는 약 2.8cm이며 무게는 대략 3.25kg입니다. 글자는 경판 양면에 돋을새김하였으며 한 면에다 글자를 새긴 새로 줄 수는 23행이며 행마다 14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런데 이리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팔만대장경판은 보관이 가장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은 대적광전 뒤 가파른 계단 위에 네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습니다.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출입문을 지나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건물은 수다라장이고 그 뒤 같은 길이의 건물은 법보전입니다.


 

 

 

 


고려팔만대장경은 이 두 건물 안에 봉안되었으며 두 건물 사이의 동서 양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은 고려 각판을 안치한 사간판전입니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장경판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을 갖추지 않은 그저 평범한 건물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에 장경판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보면 장경판전이 자리한 위치부터 건물의 배치와 좌향 그리고 건물의 구조와 창호 처리 및 판가의 구조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따졌으며, 경판 배열은 원활한 통풍과 적당한 일조량 등 목판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도록 힘썼습니다. 목판 보관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항온, 항습의 상태 유지를 위해서 판전 외벽의 앞뒷면에 크기가 다른 살창이 칸마다 아래위로 나 있어서 건물 뒤쪽에서 들어오는 습기는 억제하고 판전으로 들어온 바람은 건물 안에서 골고루 퍼진 다음 바깥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오늘날까지도 팔만대장경판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장 한장입니다.   


요즘 전자동 전자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곳 장경판전이 모든 기후 환경에 가장 잘 조절되는 전자동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 같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선조의 혼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조각을 했던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해인사에 7차례나 불이 났어도 장경판전은 화마로부터 안전했다 합니다.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전 국보 제52호, 고려각판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팔만대장경판은 현재 아무나 관람할수 없습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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