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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화림동계곡 동호정. 하늘의 선녀도 시샘할 풍경 동호정을 여행하다. 함양 선비길 동호정.



남강 상류 60리의 금천을 화림동 계곡이라 합니다. 그 화림동계곡의 가운데에 동호정의 정자가 있습니다. 선비들의 시와 담론장소로 이용하였던 자리에 정자라 하기에는 큰 동호정을 주춧돌도 없이 구불구불 다듬지 않은 나무를 너른 암반에다 그대로 세웠습니다.







2016/08/29 -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선비길 화림동계곡 거연정. 선비의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함양 화림동 계곡 거연정에서 가을 하늘을 만나다. 함양 거연정

2016/08/26 -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화림동계곡 군자정. 일두 정여창이 유영하였다는 영귀대 암반에 새운 군자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는 여름을 잡아보다. 함양 군자정




 

 


층층이 포개어진 단애는 깊은 소를 이루어 함양 화림동 계곡에서 최고의 누각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동호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크기의 중층 건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입니다.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과 군자정, 농월정 등 여러 정자보다 더 크고 웅장하며 주변의 진경산수와 함께 한 폭의 한국화 소재로 가장 잘 어울립니다.


 

 

 

 


누마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에서 동호정은 꾸밈이 없는 모습을 하였습니다. 통나무 두 개를 자연스럽게 붙여 도끼로 찍어내어 투박하게 계단을 만들었지만, 그 어떤 오성급 호텔의 이탈리아산 대리석 계단보다도 훨씬 좋으며 운치 있고 양복에 짚신이 아닌 삿갓과 짚신같이 한 몸을 이룰 정도로 동호정과 정말 잘 어울려 자연에 동화하는 선비정신을 닮았습니다.


 

 

 

차일암과 동호정 

 

 


군자정은 이마에 밭고랑이 움푹 팬 수더분한 시골 촌로와 닮았다면 거연정은 연지곤지 예쁘게 색칠하고 시골 오일장을 걷는 품새 있는 아낙네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동호정은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잘나가는 도시녀의 모습이지만 화려함에 비해 추하지 않으며 주변의 녹색에 스며들어 자연과 동화된 모습입니다.


 

 

 

 

 

 


그만큼 단청이 화려한 동호정을 마주하면 이때까지 답답했던 가슴에 생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삐꺽 삐꺽 소리를 내는 투박한 계단을 밟고 누마루를 올라 단청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동호정을 지탱하는 대들보에는 용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두개의 나무를 가지런하게 붙여 도끼로 찍어 만든 투박한 나무 계단

 

 


여의주를 문 황룡과 청룡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용이 물을 다스리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궁궐이나 서원, 누각, 사찰 등 주로 목재건물에 청룡과 황룡을 많이 조각해놓았는데 이는 불에 취약하기 때문이며 호랑이 두 마리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악귀로부터 막는 비보 역할로 보입니다. 그리고 연꽃과 화려한 꽃무늬를 돌려놓았고 공자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태어난 공자부터 74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모습을 보면서 동호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동호정은 조선시대 학자였던 동호 장만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인 가선대부 오위장 장재헌과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1890년에 건립한 정자로 공의 호를 따 동호정이라 하였습니다. 동호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등에 업고 피난하셨던 분입니다.


 

 

 

 

 

 


당시 충신이라 떠들던 신하들은 전란 통에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지만 장만리는 끝까지 선조 곁에 남아 주군을 보필하니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선조는 호국공신의 원조공신에 책록하셨습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선생은 그의 고향인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에 낙향하여 화림동계곡의 차일암에서 마음을 닦으며 가끔 낚시를 즐겼셨는데 그의 후손이 모여 선조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다 동호정을 건립했습니다.


 

 

 

 

 

 

 

 


1892년 조선 말기에 고종황제는 공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정려를 다시금 내려 그의 충절을 기렸습니다. 공이 유영하던 백옥같이 하얀 암반인 차일암에서 보니 파란 하늘과 울울창창한 녹색의 숲, 물감을 푼 듯 파란 옥수와 동호정의 붉은 단청이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이만한 모습이면 화림동 계곡의 동호정은 선녀도 시샘할 것 같습니다.


 

 

 

 

 


함양 동호정 주소: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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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화림동계곡 군자정. 일두 정여창이 유영하였다는 영귀대 암반에 새운 군자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는 여름을 잡아보다. 함양 군자정



경상남도 함양군의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굽이굽이 에돌아 빚은 심산유곡으로 지금이야 너도나도 찾고 있지만, 오래전에는 절간이라 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좌우로 1,000m 높이의 대봉산과 거망산, 황석산 등이 치솟아 빚어놓은 절경에 취하다 보면 화림동계곡에 세운 많은 누각처럼 나도 저절로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많은 누각과 정자가 지어져 있습니다. 골골마다 암반마다 터 잡은 정자는 거연정과 군자정, 영귀정, 동호정, 농월정 등 특색있는 정자에 화림동은 새로운 정자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군자정은 거연정의 유명세에 찾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화림동 정자 여행에서 거연정과 불과 150m 거리에 있는 군자정을 먼저 만났습니다. 이곳 군자정은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불렀는데 1802년에 영귀대의 암반에 세워졌습니다. 군자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군자정이 있는 서하면 봉전리 봉전마을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처가 동네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남자가 결혼하면 처가 입향을 하였는데 정여창선생도 이곳 처가에 내려와 있을 때는 영귀대 암반에 앉아 화림동계곡의 절경에 심취해 넋을 놓고 바라보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풍경도 이러한데 당시의 이곳 화림동 전경은 어떠했을지 짐작만으로도 흥분이 됩니다.









그럼 일두 정여창선생에 대해 조금은 알고가야겠습니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일두 정여창은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가 됩니다. 무오사화 아시죠. 1498년 연산군 4년에 연산군이 훈구파인 유자광 등과 합세하여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그 발단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기인합니다.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조 실록 사초에 넣었는데 내용의 속뜻을 보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에 관한 문서입니다. 이 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또한,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다른 사림파들과 함께 귀양을 가 함경도 종성에서 병으로 사망합니다.







무오사화 뒤 유자광의 권세는 날로 커졌고 폐출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문제로 일어났던 갑자사화로 정여창은 다시 목이 베이는 부관참시에 처했습니다. 1506년(연산군 11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함께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군자정은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후손 전세설, 세택 형제가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입니다. 군자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규모로 앞면의 주칸은 5자, 옆면의 주칸은 4자로 규모는 화림동계곡의 여러 정자에 비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영귀대의 천연 암반에 세운 누각 건물로 사면을 개방하였고 앞쪽에다 판재로 출입하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군자정은 네면의 기둥 바깥으로 15~18cm 정도를 달아내어 계자난간을 돌렸으며 현재 장마루가 깔렸는데 처음에는 우물마루였다 합니다. 건물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자정은 천연 암반 위라 초석을 쓰지 않았으며 둥근 기둥에다 누하주는 큰 나무를 원형 그대로 대충 다듬어 사용하여 계곡과 함께 너무 잘 어울려 더욱 운치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건물의 추녀 끝에는 활주를 각각 세워 건물의 무게감과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가구는 5량 구조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에 단청을 입히지 않은 수더분한 촌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두 정여창이 즐겨 찾았다는 영귀대 암반에 올라 군자정에서 지나가는 여름을 붙들어보세요. 계곡 물소리가 아직은 그리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함양 화림동 계곡 선비길 군자정 정보◆

★군자정 주소: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번지

★문화재자료 3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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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빼어난 가야산 홍류동계곡 하면 얼른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857~?)으로 시대의 풍운아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분입니다. 필자는 고운 선생을 여행가라 말하고 싶습니다. 부산, 지리산, 가야산 등 영남에서 고운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0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전국의 명산 대천에는 해운이니 고운이니 임경이니 하면서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고운 선생은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냈습니다. 가야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은 섬섬옥수가 되어 바위를 돌고 넘고 뚫고 휘몰아쳐 빼어난 절경을 연출합니다.


 



선생은 가을 단풍이 붉게 온산을 뒤덮어 흐르는 계곡 물까지 붉게 물들인다 하여 홍류동천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은둔하며 수도하고 유유자적한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이 오늘날의 농산정입니다.


 



농산정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 ‘제가야산독서당(濟伽倻山讀書堂)“에서 따왔는데 그 한시를 보면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온산을 둘러버렸네“





지금의 농산정 건너편에 치원대 또는 제시석으로 불리는 암벽에 새겨져있습니다. 그 한시의 맨 끝부분 ‘농산(籠山)’의 한 구절을 따와 농산정이라 하였는데 맨 끝에 ‘우암’이란 각자가 남아있어 우암 송시열의 한시가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정자는 앞면 2칸에 옆면 2칸 크기의 정방형 목조기와 건물입니다. 농산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1936년경 후손과 이 지역 유림에 의해 중건되었고, 여러 번 수리를 거치면서 1990년에 전체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서까래 등을 보면서 최근에 다시 한 번 부분적인 수리를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산정 현판에는 김영한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새겨져 있으며 고운 선생의 둔세시를 차운한 시 8수도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12세에 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후 산동에서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선생은 ‘토황소격문’를 지어 최치원이란 이름을 널리 각인시켰습니다.





선생은 17년만인 29세에 고국 신라에 돌아왔으나 나라의 국운이 쇠퇴함을 알고 자천으로 변방을 전전하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을 상소하였습니다. 신라의 국운은 난세로 세상이 혼탁해지자 894년 가솔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은거했습니다. 그때 입산하면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호여하복출산(山好如何腹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 농산정 옆 계곡에 홍류동 각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느 해 엄청난 물난리로 ‘홍류’ 두 글자는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동’ 자만 남아 계곡에 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다시는 시류에 얽매이어 속세로 나가지 않겠다”는 시처럼 그의 결연한 의지를 들어내었습니다. 고운은 가야산 홍류동계곡과 해인사. 매화산의 청량사 등에서 신선 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갓과 짚신만 지금의 농산정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이를 보고 농산정 뒤 골짜기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며 최취밭골로 부릅니다.





농산정은 많은 선비가 이곳을 찾아들었으며 고운 최치원을 흠모하며 많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시 몇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농산정 차운시입니다.

“청시광염사창만(淸詩光焰射蒼巒)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묵지여흔궐륵간(墨漬餘痕闕?間)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세상단운시해거(世上但云尸解去)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고 말을 할 뿐

나지마렵재공산(那知馬?在空山)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그리고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에는 예은 최동식 거사의 칠언절구가 있습니다.

“何日文昌入此巒(하일문창입차만) : 최치원께서 언제 이 산에 들어왔던가?

白雲黃鶴渺然間(백운황학묘연간) : 흰 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였도다.

已將流水紅塵洗(이장유수홍진세) : 이미 흐르는 물로서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不必中聾萬疊山(불필중농만첩산) : 만 겹산으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고운최선생둔세지’





선생은 1918년 해인사 이회광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홍류동 계곡에서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에 이르기까지 19 명소를 설정하고 칠언절구의 시를 남겼는데 ‘가야십구명소제영’에서 유래한다 합니다 허목선생의 ‘가야산기’에서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뢰, 제월담, 분옥폭, 완재암, 낙화담, 첩석대, 무릉교, 칠성대, 채필암 등 무흘 12곡 모두 고운 선생이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갓과 짚신을 벗어 놓고 최취밭골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농산정.





농산정에는 사방으로 농산정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그 중 한 곳에 걸린 최영하의 ‘농산정’ 칠언절구입니다.

“流水聲中聳翠巒(류수성중용취만) 흐르는 물소리에 푸른 산 우뚝하니

淸風百世在斯間(청풍백세재사간) 맑은 바람 백 세 동안 여기에 있네

詩登雅譜亭名擅(시등아보정명천) 시의 족보에 등재되어 이름을 떨치니

長使人○仰若山(장사인○앙약산) 오래도록 사람이 산을 우러르게 하네“





이외에도 고운 최치원의 농산정 차운시는 여러 사람이 남겼습니다. 그중 영재 이건창(1852~1898)과 매천 황현(1855~1910)선생의 한시를 옮겨보겠습니다.

영재 이건창 선생은 당시 부친인 이강학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에 이곳 농산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百丈紅流萬疊巒(맥장홍류만첩만) 백 발의 홍류동 만 겹 봉우리인데

神仙詩句墮人間(신선시귀타인간) 신선 시구가 인간 세상에 떨어졌네

白雲一片孤飛去(백운일편고비거) 흰구름 한 조각 외로이 날아가니

疑是先生尙在山(의시선생상재산) 선생이 아직 이 산에 계시는가“





그리고 매천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구한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통분하여 구례의 매천 정사가 있는 서재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입니다. 매천 황현 선생은 1887년 이곳 농산정을 올라 차운시를 남겼는데

“雷?百折鎖重巒(뇌랑백절쇄중만) 구불구불 겹겹 산 잠긴 속을 울리며

玉洞春流紫翠間(옥동춘류자취간) 옥동의 봄물이 붉고 푸른 사이로 흐르네

山自孤雲詩益著(산자고운시익저) 산은 고운의 시로 더욱 드러났지만

(籠山未必善藏山(농산미필선장산) 산을 에워쌌으나 반드시 산을 잘 감춘 건 아니구나“.





옛 선인들은 홍류동 계곡의 정취와 농산정의 빼어난 절경을 흠모하며 많은 시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실제 농산정을 여행하면 올곧은 소나무의 자태와 함께 비류낙화하는 계곡에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선인은 명경산수를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입추도 지났고 다시 처서를 지나면 곧 홍류동천은 하늘과 나무와 바위와 흐르는 계곡 물이 온통 이름처럼 붉은 단풍이 드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농산정 주소: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1

농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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