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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오지는 청송과 맞물려 있는 죽장을 이야기하는데는 이견이 없다. 그 만큼 산으로 둘러 쌓여 하늘만 열려 있는 이곳에도 우리의 질긴 삶들이 살고 있었다.

 

산 좋고 물이 좋아서 일까.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많은 싯구절을 남길 때 이곳도 그러한 것 같다.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서 있어 선바위로 불리는 입암은 그 이름으로 인해 마을도 입암리가 되었고 조선시대 때부터 있던 서원도 입암 서원이 되었다.

 

조선 효종 8(1657)에 건립 되어진 입암 서원은 여헌 장 현광, 권 극립, 정 사상, 손 우남, 정 사진등을 배양하였는데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역시 입암 서원도 훼철되었다. 서원은 다시 1913년에 복원되지만 1907년 순종때 묘우가 소실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972년에 와 묘우도 다시 복원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주변으로는 큰 은행나무와 향나무등 계곡과 어울려 한폭의 산수와를 연출하는데 1629년 노계 박인로가 이곳에 와 일제당에서 입암가’29수와 입암별곡을 남겼다 한다. 그에 관한 글이 가사천 계곡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일제당은 1600년인 선조33년에 건립되어 졌는데 계곡에서부터 돌을 쌓아 올려 정면3칸과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여기서 장현광, 손우남 정사진등이 강론을 펼쳤다 하는데 입암서원과 이웃하고 있다. 그 왼쪽 끝으로는 우뚝 솟아오른 암봉인 선바위와 오른쪽의 만활당 모습이 너무나 그림 같이 잘 어울린다.

 

 만활당은 일제당과 입암서원의 중간에 위치를 하는데 막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려 그 위에다 세운 정자는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둥근 기둥을 세은 3량의 홑처마 굴도리 집이다. 이곳에서 보면 일제당과 입암 서원 등이 반경 안에 잡히고 가사천를 둘러보면 주변의 산세와 함께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 아쉬운 점은 이곳 모두 문이 잠겨 있어 둘러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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